〈 15화 〉삼장[三章], 암해고도[暗海孤島] 4
이궁은 저 멀리 빠져나가는 당소소와 진명을 바라봤다. 이것은, 자신이 바라는 미래가 아니었다.
이궁이 사천성의 그림자에서 살아오길 십 년. 자신의 주제를 알았다. 쌍괴파라는 삼류사파에 빌붙어 세상에게 아첨을 하지 않는다면, 자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늙고 강퍅한 이궁은, 내세울만한 것이 많지 않았다. 그의 몇 안 되는 장기는 속임수와 배신이었고, 그는 그것을 행하는데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다.
그는 전래가 유망해 보이는 사파무인들을 찾아 이리저리 다리를 놓았다. 그리고, 이득이 있다면 속이고 배신하는 것을 서슴지 않았다. 사천성 사파 중, 가장 전도가 유망하다는 쌍괴파에 들어가서도 마찬가지. 진명을 버리더라도 살아갈 자신이 있었기에, 그는 당소소를 납치한다는 과감한 결단을 내릴 수 있었다.
무엇보다, 새롭게 접촉한 자들이 그것을 원했다. 이궁은 자신에게 명령을 내리던 그를 떠올린다.
‘쌍괴파의 이궁이라고 했나?’
‘예.’
‘그 곳으로 아마 당가의 독화가 갈 것이다.’
‘예? 독화가 대체 왜 쌍괴파에…?’
‘그녀를 납치해. 감당은 우리가 해주지.’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자가 그렇게 말해왔다. 이궁은 그의 말을 듣고, 얼굴을 찡그렸다. 사천당가의 후환이 두려웠기에. 하지만, 복면사내의 정체가 진짜라면 이야기가 달랐다.
‘마교에서 그녀를 원한다. 성공한다면, 사천성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데려가주마.’
이궁은 그 말을 듣고 복면사내를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엔, 욕망이 어려 있었다. 그래서 그들이 원하는 대로 우유부단했던 태도를 바꾸어 진명을 충동질했다. 병력을 준비하고, 그들을 덮쳤다. 하지만, 단혼사가 등장해 모든 것들이 물거품이 되었다. 이궁은 하늘이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묶여서 바닥을 기어 다녀야 하는 것은, 자신이 아닌 당소소가 되어야 했으니까.
“제길, 이렇게 되어서야…!”
이궁은 단단하게 포박된 양팔을 움직이며 욕설을 토했다. 흑규는 그런 이궁을 보며 빙글거리며 웃었다.
“야, 이거 더럽게 안 풀리지?”
“그래, 어떤 새끼가 이런걸 알려준 거야?”
“진명 그 새끼, 내 말은 더럽게 안 듣더니 내가 알려준 기술 같은 건 쑥쑥 흡수한단 말이야?”
“…….”
이궁은 정색하며 흑규의 얼굴을 바라봤다. 흑규는 멋쩍었는지, 이궁의 시선을 피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도 자신의 잘못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궁은 몸을 움찔거리며 흑규에게 말했다.
“흑규, 이거 어떻게 풀지?”
“자르지 않는 이상 못 풀지. 내 야심작이거든.”
“진짜 인생에 도움이 안 되는 새끼야….”
의기양양하게 대답하는 흑규. 이궁은 고개를 저으며 밧줄을 푸는 것을 포기했다. 그리고, 연신 중얼대는 모량을 돌아봤다.
“어떻게 죽지…. 독의 실험체가 돼서? 독물의 먹이가 된다? 아니면 가죽이 벗겨져 암기의 과녁이 되는 건가?”
“진정하게, 모량.”
“다른 정파라면 나도 이렇게 까진 걱정하지 않소. 하지만, 사천당가 아니오?”
이궁은 모량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정파에서도, 꽤나 이질적인 가문이었다. 종교를 중심으로, 무[武]를 구도하는 구파일방과는 달리 성씨를 중심으로 뭉친 세가. 세가들에게 무는 목적이 아닌 수단이었다. 협의를 구현하기 위한 수단이며, 오랫동안 이 땅에서 누려왔던 가문의 세력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
그런 세가들 중에서도 사천당가는 독특한 것을 주력으로 삼았다. 암기와 독이라는, 정파들에겐 낯선 것들을. 그렇기에 배척받았었고, 그렇기에 당가 출신의 인물들은 그 모멸의 시선을 견딜 만큼, 지독한 인물들 밖에 없었다.
이궁이 사천당가에 대한 생각을 펼쳐갈 무렵, 단혼사는 낯선 기척을 느끼고 땅에 누운 쌍괴파의 조무래기들에게서, 앞에서 복면을 쓴 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당신이 사천제일권 단혼사군.”
“난 네가 누군지 모르는데.”
“음, 우선 여기 누워있는 이궁의 졸개라고 해둘까.”
복면의 사내는 그렇게 말을 하며 이궁의 엉덩이를 걷어찼다. 이궁은 몸을 움찔거리며 그를 올려다봤다. 처음에 조우했던 푸른 눈의 사나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마교의 주구로 예상되는 그가 보낸 인물이었다. 약할 리가 없을 것이다.
흑규는 그 복면의 사내를 멀뚱멀뚱 바라보더니, 이궁을 쿡 찌르며 물어왔다.
“너 저런 졸개도 있었냐?”
“어서 풀어주시오.”
“영감님, 기다려. 단혼사를 눕혀야 당신을 풀어줄 것 아니야.”
이궁이 흑규의 말을 무시하고 복면의 사내에게 요청했다. 복면의 사내는 다시금 이궁의 엉덩이를 걷어차며 조급한 이궁의 마음을 달랬다.
단혼사는 그 말에 반응하며 걸음을 옮겼다. 다시금 내공은 움직이고, 혈맥이 부풀어 오르며 확장된 감각을 선사했다. 그리고 익숙한 감각으로 그와의 거리를 측정했다.
“……!”
“어때? 나 좀 하지?”
복면의 사내는 자신이 탐색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는 듯, 단혼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단혼사는 미간을 좁혔다. 심상찮은 기색이 있다는 것은 느끼고 있었다. 내공을 펼쳐 그와의 거리를 가늠했을 때, 그 심상찮은 기색의 정체를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예측할 수 없는 폭풍 같았다.
“이야, 한번 겨뤄보고 싶었어. 사천성에 보폭으로 상대를 가늠하는 권사가 있다고 해서, 얼마나 기대했었는지.”
“…뭐하는 놈인지 모르겠다만, 꽤 독특한 무공을 가지고 있군.”
으레 무술을 단련하는 자라면, 자신의 무술에 맞는 일정한 규격의 보폭을 가지게 된다. 보폭의 법칙화. 무인들은 그것을 보법으로 부른다. 단혼사는 그 보법을 파악하고, 그 보법을 역이용하는 최적의 경로를 만들어 적에게 접근하는 것을 즐겨했다.
하지만, 그의 걸음걸이는 마치 무공을 익히지 않은 자처럼 불규칙했다. 마치, 천방지축 돌아다니는 어린아이처럼 크고, 작고, 넓고, 좁은 보폭. 그에게 접근할 경로가 보이지 않았다.
“안심해, 나도 이런 장난 같은 전장에서 당신과 진심으로 싸울 생각은 없으니까.”
“그렇다면 목적은?”
“이 덜 덜어진 영감을 풀어주고, 당신을 상대로 잠시 시간을 끄는 것.”
복면의 사내는 자신의 목적을 숨길 생각이 없어보였다. 태도 하나하나에서 묻어나오는 자신감. 단혼사는 그 사내의 정체와 의도에 대해 생각했다.
‘저런 이질적인 보법을 사용하는 곳이라곤, 정파 내에선 보법으로 일가를 이룬 구파일방의 곤륜파 밖에 없다. 하지만, 곤륜의 무인은 아니다. 정체는 파악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의도는….’
자신을 붙잡아 둔다는 그의 말에, 단혼사의 심장이 순간 차가워졌다. 잊고 있던 사실 하나를 떠올렸기 때문이었다.
‘당소소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단혼사의 눈길에 살의가 담긴다. 그 눈빛에 복면사내는 만족한 듯, 웃음을 터뜨렸다.
“푸핫, 아무래도 이제야 자신의 실책을 눈치 챈 것 같은걸. 어때, 한번 어울려 주겠어?”
“…소소에게 무슨 변고라도 생겼다면, 내 친히 너의 혼까지 찢어주지.”
단혼사의 손에, 내공이 어렸다.
*
진명은 당소소를 자신의 뒤로 숨겼다. 잿빛 머리칼의, 몸에 달라붙는 옷을 입고 있는 여인이 그의 앞에 서있었다.
“누구시오.”
“알 것 없다. 난 네 뒤에 있는 무례한 년만을 데려가면 될 뿐.”
“무례한 년은 당신 같은데.”
진명의 손이 뚜둑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내밀어졌다. 불안한 느낌이 그의 등골을 타고 엄습한다. 마치, 단혼사를 맞닥뜨렸을 때와 같은 아찔한 감각이었다. 당소소는 그런 진명의 옷깃을 잡아당기며 고개를 저었다.
“당신의 상대가 아니에요.”
“무슨 개소리야, 쟤 알아?”
“대충은.”
당소소는 진명에게 대꾸하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잿빛 머리칼의 여인은 그런 그녀를 비웃더니, 당소소를 마주보며 다가왔다. 당소소는 움찔거리는 진명에게 다시금 경고했다.
“진명,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당신 상대가 아니니까.”
“나를 아는 눈치인 모양인데.”
“…….”
쌍검무쌍의 작중에선 마도공자에게 충성을 바치던 한 여인이 있었다. 모든 여인을 건드렸었던 그는, 그녀 하나만큼은 건드리지 않았다. 마도육가[魔道六家]라 불리는 여섯 개의 가문 중, 요씨 성을 물려받은 잿빛 머리칼의 여인.
“요재.”
“…너, 뭐하는 년이야.”
당소소의 정체를 묻는 요재. 당소소는, 그런 그녀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는 아직 등장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었다. 쌍검무쌍 후반부의 악역인 그녀를 현 시점에서 확실히 이길 수 있는 것은, 천하십강이나 구주십이천 급의 고수뿐이었다. 진명 같은 자들이 덤벼들었다간 손을 빼들 순간도 없이 순식간에 죽임을 당할 것이다.
당소소는 슬쩍 뒤편에 시선을 던졌다. 작지만, 느껴지는 확실한 소란. 단혼사에게도 마도공자의 측근이 찾아간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그는 당장 이곳으로 올 수 없었다.
요재의 존재는 당소소에게 따를 수밖에 없는 두 개의 선택지가 내밀었다. 진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그녀에게 강제로 끌려가느냐, 진명을 살리고 자의로 그녀에게 끌려가느냐. 당소소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곱게 따라갈 테니, 말을 남길 시간 정도는 주세요.”
“기분 나쁠 정도로 침착하네. 역시, 불쾌한 년이야.”
요재는 그 말을 하며 팔짱을 끼고 당소소를 바라봤다. 당소소는 진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진명, 곧 돌아올게요. 너무 걱정은 하지 말고.”
“너, 미쳤어? 저런 정체를 알 수 없는 년을 대체 왜 따라간다는 거야? 내가 시간을 끌 테니, 단혼사를 기다리면서….”
“잔말 말고 들어, 새끼야.”
당소소는 진명의 멱살을 잡았다. 그리고, 아가씨의 말투를 내려놓았다.
“저 여자는 단혼사님만큼 강해. 너 정돈 저 팔짱도 풀지 않고 죽일 수 있어.”
“…….”
“살아. 아버지의 유언을 생각해. 살고 싶어서 사파에 몸을 의탁했었고, 살고 싶어서 내 거래를 받아들인 거잖아?”
“그러는 넌…!”
당소소가 멱살을 놓으며 던진 말에, 진명이 반발을 했다. 당소소는 울상인 진명을 바라보며 가볍게 웃었다. 불안해하는 그에게, 당소소가 알고 있는 간단한 미래 하나를 말해주었다.
“걱정마, 인마, 난 아직 안 죽어.”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요재에게로 걸어갔다. 요재는 다가온 당소소의 머리를 잡았다. 그러자, 그녀는 정신을 잃고 쓰러지며 요재의 품에 안겼다. 진명은 그런 요재의 모습을 분노어린 눈으로 쏘아보았다. 요재 또한 그 시선을 느꼈는지, 당소소를 들쳐 매며 한마디를 툭 던진다.
“약해빠진 버러지가. 이 불쾌한 아가씨가 목숨을 구해줬으면, 아낄 줄도 알아야지.”
“아가리를 찢어버리기 전에 그 입, 다무는 게 좋을 거야.”
“푸훗. 너, 웃긴 놈이구나.”
요재가 당소소를 업은 채로 진명에게 다가왔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옮길 때 마다, 진명의 어깨 위로 거대한 바위가 쌓여가는 듯 했다. 진명이 참지 못하고 신음을 흘리며 바닥에 엎어지자, 요재는 그런 진명의 머리 위로 발을 올렸다.
“난 너같이 주제를 모르는 놈이 제일 좋더라. 부술 때, 가장 손맛이 좋으니까. 아쉽게도 오늘은 피를 보지 말라는 명이 있어서 말이야….”
“미, 친 년…!”
“네가 아무리 짖어도 날 위협할 수도 없고, 구해줄 수 있는 이 하나 없잖아? 이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살아남으려면, 좀 더 네 주제를 아는 게 좋을 거야.”
요재는 발에 더욱 힘을 가해, 진명의 뺨을 짓눌렀다. 거친 숨을 들이쉬던 진명이 정신을 잃어가자, 요재는 발을 거두고 뒤돌아섰다. 그리고, 곤히 잠든 당소소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대체 날 놔두고 이런 못생긴 계집이 어디가 마음에 든다는 건지….”
그 말을 마치고, 요재는 사라졌다. 겨우 정신을 부여잡으며 그 뒷모습을 바라보던 진명은, 이내 그 손을 놓고 정신을 잃었다.
*
“으음…!”
“정신이 드나.”
“형님!”
진명은 단혼사와 왕오의 목소리에 눈을 뜨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쌍괴파의 강당이, 폭풍이 휩쓸고 간 듯이 무너져있었다. 진명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황급히 당소소를 찾는다.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고개를 숙이며 단혼사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된 겁니까?”
“소소가 납치되었다. 난 정체불명의 고수와 교전 중이었고, 넌…. 쓰러졌었더군.”
“…씨발.”
진명은 단혼사의 대답에, 자괴감이 들어 욕설을 뱉었다. 약한 자신이 증오스러웠다. 그가 마음에 든 자를 지키지 못한 분노, 요재라는 여자에게 제압된 수치심이 진명의 가슴을 쥐어뜯고 있었다. 진명은 바닥을 연신 내려치며 계속해서 욕설을 뱉었다.
“씨발, 씨발! 개좆같은! 빌어먹을! 개 같은 년이…!”
“형님….”
한바탕 쏟아낸 진명은, 이젠 차마 풀리지 않는 분노를 눈물로 토해냈다. 왕오는 그런 진명을 안타까운 눈으로 바라봤다. 단혼사는 진명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인가?”
“무슨, 무슨 말씀입니까?”
“말 그대로. 넌 지금 어떻게 할 건지 물었다. 쌍괴문에 계속 남을 것인지, 아니면…. 소소의 뜻대로 할 것인지.”
진명은 당소소의 이름을 듣고, 몸을 움찔거렸다. 그리고, 다시 질문을 던진다.
“그녀가, 뭐라고 했습니까?”
“너와 왕오를 당가의 무인으로 받고 싶다고 했었다. 난 기각하고 싶었다만.”
“저를, 말씀입니까?”
단혼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진명의 말을 긍정했다. 진명은 분노와 고통으로 떨리는 손을 부여잡았다. 이 격렬한 패배감은, 더 이상 겪고 싶지 않았다. 진명은 당소소가 남긴 말들 중, 한 구절을 붙잡았다.
‘저 여자는 단혼사님 만큼 강해.’
“제가 당가의 무인이 된다면, 당신처럼 강해질 수 있습니까?”
“억울한가보군.”
“…그 빌어먹을 년에게 치욕을 당했으니까요.”
“흥, 솔직하지 못하긴.”
단혼사는 그의 말에 콧방귀를 뀌었다. 당소소를 눈앞에서 빼앗긴 것에 대한 사실을 인정하기 싫은 듯 했다.
잔혈객 진명. 그저 패악이나 저지르고 다니는 사파 나부랭이라고 생각했었다. 당소소의 언급이 없었다면, 귀찮지만 굳이 신경을 쓸 필요까진 없는 존재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그녀의 말대로 그는 아직 돌아올 수 있는 곳에 있었다. 신기할 정도로 정확하게.
단혼사의 시선은 손톱이 파고들어 피를 흘리고 있는 그의 주먹을 바라봤다. 독심은, 당가의 덕목 중 하나였다.
“일어서라. 주변을 정리해야겠어.”
“예.”
“그리고, 당가로 간다.”
단혼사는 그 말을 던진 뒤, 강당을 떠났다. 진명은 분노를 가슴에 품고,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