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화 〉삼장[三章], 암해고도[暗海孤島] 5
열어둔 창가로 달빛이 쏟아진다. 그 달빛은 이내 범람하여 방 안을 비춘다. 코를 찌르는 향이 있는 약재의 서랍과 쾌청한 자태를 한 난이 쳐있는 병풍. 그리고, 등불을 벗 삼아 책을 넘기고 있는 당청의 얼굴을 비췄다. 그 고즈넉한 독서를 멈추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 당청의 손길이 멈춘다.
“들어와라.”
당청의 허가가 떨어지자, 흑의를 입은 사내가 들어와 당청의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당청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자 책을 덮고 그를 바라봤다. 당청의 시선이 닿자, 그는 고개를 숙이며 입을 열었다.
“보고 드립니다. 마교 측에서, 거래는 성공적으로 마무리 지었다고….”
“그래. 더 남긴 말은 없느냐?”
“보낸 비전서[秘傳書]는 사용이 끝나고 돌려주길 바란다고 언급하긴 했습니다.”
“알았다. 물러가도록.”
사내가 보고를 마치고 당청의 방에서 물러났다. 이윽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당청은 덮었던 책의 겉표지를 두드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창가 너머 밤하늘에 걸린 달을 바라봤다. 그는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성공적인 거래를 자축했다.
‘어마어마한 이득이군.’
다시 깨어난 그의 여동생은 상당히 영리해져있었다. 자신의 정략결혼의 희생자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고 어찌 알았는지는 모르겠으나, 그 대상이 사파의 쓰레기들이라는 것 또한 인지하고 있었다.
당소소는 그것을 타개하기 위해 성도의 명망 있는 학자인 그녀의 스승을 이 판에 끌어들였으며, 당가의 핵심인 가주와 단혼사를 끌어들였다. 거기에 화룡점정으로, 자신의 선수를 쳐 진명에게로 다가갔다. 실로, 절묘한 한수였다.
‘스승의 감시 덕에, 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일단 부정은 해놓았지만, 의심의 씨앗이 심어진 것은 사실….’
오로지 떼만 쓸 줄 알던 당청의 여동생은, 어느새 여성의 무기인 눈물을 효율적으로 다룰 줄 아는 훌륭한 당가의 일원이 되었다.
그래서는 곤란했다. 그녀가 멍청한 당가의 문제아로 남아야, 자신의 장기말이 되어 움직일 수 있었다. 다루지 못하는 말은, 판에서 제외시키는 것이 옳았다. 하지만 당청에게 집중되는 시선에 섣불리 운신하기 어려웠다. 그러던 와중, 잿빛 머리칼의 여인이 당청에게 접근했다.
‘마교에서 왔어요.’
‘…….’
‘그녀에 관한 정보를 주면, 저희도 원하는 정보를 주죠. 반역을 꿈꾸는 당가의 도련님.’
‘마교의 주구가….’
잿빛 머리칼의 여인은 당청의 속내를 꿰뚫어보고 있었다. 당청은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거래를 파토내지도 않았다. 당청은 가치를 잃은 당소소를 거래하고 싶었고, 그들은 그런 당소소를 원했다.
‘당소소는 단혼사와 함께 쌍괴파로 향한다.’
‘원하시던 마교의 비전서, 여기 있어요.’
이해관계가 일치하고, 거래는 성사되었다. 마교는 당소소를 가졌고, 당청은 구주십이천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자신의 아버지를 떨어뜨릴 수 있는 칼을 쥐게 되었다. 당청은 달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책상 위에 놓인 거래의 결과를 다시금 확인했다.
-독시혈강대법[毒屍血殭大法]
마교의 비전서는, 꽤나 쓸 만한 칼이었다. 당청 자신의 목적과 목표와 정확히 일치하는 시린 예기를 토해내는 칼. 당청이 만족스런 웃음을 지으며 독시혈강대법의 제목을 손가락으로 훑었다. 그리고, 그 고양된 감각을 깨는 소리가 들려왔다.
“형, 꽤 만족스러운 모양이네.”
“혁. 기척은 내고 다녀라.”
당청이 손가락을 접고 옆을 돌아봤다. 작은 키와 실눈을 한 소년이 그 곳에 서있었다. 혁이라 불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책상으로 다가가 비전서를 손으로 툭툭 두드린다. 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 입을 열었다.
“이것 덕분에 계획은 완성됐어. 언제든 말만 하라고.”
“흣흣. 녀석, 즐거우냐?”
“즐겁지.”
당청의 물음에 당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짙은 미소를 그리며 더욱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너무 즐거워. 소소에게 칠혼독을 먹였을 때만큼, 몸이 떨려와. 난 이렇게 당가의 미래에 한 번 더 기여를 한 셈이잖아?”
“아직 만족하지 말거라. 당가의 미래는 아직 어둡다. 우리가 한걸음 더 나아가 등불을 들어야 한다.”
“알고 있어, 형. 그럼, 이제 움직일 시간인가?”
당혁의 말에 당청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전서를 품 안에 집어넣었다. 당청은 그 누구보다 사천당가를 사랑했다. 그러나, 당진천이 집권하고 있는 현재의 당가는 너무나도 경직되어 있었다. 명예와 협의에 얽혀, 구파일방의 눈치를 보며 스스로의 가능성을 닫고 있었다.
‘더 이상 고여 있을 시간은 없다.’
그렇기에 당청, 자신이 해야 했다. 자신이 집권하는 당가는, 능히 천하를 탐할 수 있는 가문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확신이 있었다. 명예와 협의라는 족쇄는 사천당가가 멀리 날갯짓을 하는 데에 방해가 될 뿐이었으니까.
“제독전[制毒殿]으로 가자.”
당청은 손을 뻗어 등불의 심지를 움켜쥐었다. 등불의 불길이 잠들었다. 그리고, 당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하연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다급한 발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 몸을 숨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당청의 시비들이 성난 몸짓으로 그 모퉁이를 지나쳤다.
“이 건방진 년, 대체 어디있는거야?”
“감히 선배들을 피해?”
그녀들이 지나가고 나서 한참 후에야, 하연은 안도의 숨을 뱉으며 모퉁이에서 걸어 나왔다. 최근 들어 그녀들의 간섭이 더 악랄해지고 있었다. 당소소의 눈에 띌까 무서웠던 시비들은, 좀더 치밀하고 은밀하게 하연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독봉당의 주인이 보이지 않는다며 생필품을 제공하지 않는 것까지 파고들어간 것은 덤이었다.
‘아가씨….’
그런 힘든 상황에도, 하연은 당소소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며칠째 그녀가 보이질 않았다. 당진천에게 직접 물어보았지만, 곧 돌아온다는 말 뿐. 더 이상의 답변은 해주질 않았다. 하연은 외진 길을 따라 별채의 영역을 벗어나고, 독봉당에 도착했다.
그리고 그 독봉당에는, 썩 달갑지 않은 손님들이 와있었다.
“이년, 역시 도망갔었잖아?”
“웃겨. 어차피 여기로 올 거면서, 그렇게 잘못을 지적받기 싫었니?”
당청의 시비들이 독봉당의 앞에서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그녀들의 뒤엔, 고개를 숙인 채 하연과 그녀들의 눈치를 보는 독봉당의 시녀들이 있었다. 하연은 체념하며 눈을 감았다. 그 태도가 눈에 켕겼는지, 당청의 시비들 중 하나가 나서서 그녀의 어깨를 찔러댔다.
“어쭈, 이 년 봐라. 어디 해 보라 이거지?”
“제가 무엇을 그리 잘못했나요.”
하연의 대꾸에, 나머지 한명의 시비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독봉당 시비들의 옆구리를 찔렀다.
“야, 말해.”
“아, 아가씨의 방을 허락도 없이 더럽혔어요….”
“야밤중에, 자신이 먹고 싶어서 아가씨의 핑계를 대고 소면과 죽엽청을 가져왔어요….”
“자신이 독봉당의 주인이 된 양, 유세를….”
독봉당 시비들에게 말을 시킨 시비는, 어깨를 으쓱하며 하연을 바라본다. 하연은 그녀들의 말에 기가 찰 노릇이었다. 그녀는 독봉당의 다른 시비들에게 척진 적이 없었다. 오히려, 쓰러지기 전 당소소에게 독박을 쓰던 것은 자신이었다. 하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분명, 경력이 더 오래된 당청의 시비들이 꾸민 짓이라는 것은 머리로 이해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슴은 동고동락한 독봉당 시비들에게 느끼는 배신감이 물결쳤다. 하연은 감정에 몸을 싣고 입을 열었다.
“치졸한 년들.”
“뭐?”
“치졸한 년들이라고 했다. 왜. 너희들이 날 자르기라도 하게? 난 소소아가씨의 전담 시비야. 너희들이 나에게 뭐라 할 순 없어.”
“하, 이 년이 정신줄을 놨나.”
하연의 당돌한 말에 당청의 시비들은 하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하연의 머리채를 잡아 고개를 꺾는다.
“주제를 알아야지. 그 년이 없으면, 넌 그냥 아무것도 아닌 시비일 뿐이야!”
“윽!”
“어딜, 선배들에게 대들려고 들어?”
하연이 팔을 들어 저항하려고 하자, 나머지 한명의 시비가 하연의 발을 걸어 그녀를 바닥에 넘어뜨렸다. 쿵 소리와 함께 하연이 흙바닥에 얼굴을 박았다. 독봉당 시비들은 그런 하연의 모습을 차마 보지 못하겠는 지, 고개를 돌렸다.
“왜, 날 못살게 구는 거야….”
“흥, 끝까지! 자기가 잘못해놓고, 세상 착한 척은 다하는 거 봐. 야, 얘 창고에 처박아버려.”
“…….”
“뭐 하는 거야, 빨리 안해? 너희도 이년처럼 되고 싶어?”
당청의 시비들은 독봉당 시비들을 윽박지른다. 독봉당 시비들은 눈을 질끈 감고, 쓰러져있는 하연의 팔다리를 잡았다. 하연은 그런 그녀들을 보며 웃었다.
“너희들도 나빠. 항상 아가씨를 미친년이라고 하고, 내 잘못은 꼬박꼬박 당청의 시비들에게 보고를 했잖아. 모를 줄 알았어?”
“…우리도 어쩔 수 없었어.”
“어쩔 수 없는 것은 없어, 비연.”
비연이라 불린 시비가 떨리는 목소리로 변명을 했다. 하연은 그런 비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결국, 네가 행동한거야.”
“…윽!”
그 말이 끝나고, 더 이상의 말다툼은 없었다. 그저 저항하는 하연을 강제로 끌고 가, 냄새나는 독봉당의 창고에 가두어 둘 뿐. 하연은 창고의 문을 슬쩍 밀어본다. 역시, 굳게 잠겨있었다. 하연은 털썩 주저앉아 거미줄이 쳐진 천장을 바라봤다. 여러 근심이 거미줄을 치고 있는, 자신의 머릿속 같았다.
“아가씨, 도대체 어디 계신가요…?”
하연은 자신의 무릎을 끌어안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
당소소는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다. 앞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아마 안대가 씌워진 것이리라.
“읍…!”
입가엔 부드러운 비단으로 된 재갈이 물려있었다. 그녀의 정신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내면의 감정은 아직 고요했다. 김수환의 이성은 차분하게 자신이 처한 상황을 파악했다.
‘사마문이 움직였어. 목표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나와 관계된 사람이 분명해.’
당소소는 그 생각을 하며 몸을 조금 움직여 보았다. 의자에 단단하게 묶인 몸. 풀만한 성질의 매듭이 아니었다. 당소소는 숨을 고르며 자신의 과실을 생각했다. 화검공자의 접대를 실패한것이나, 술을 마시고 욕설을 해버린 것들. 마음에 걸리는 것은 많았지만, 그래도 그가 쉽사리 움직일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이곳은 그에겐 적지였고, 자신은 독천의 딸이었으니까.
‘난, 순수하겐 가치가 없을 거야. 그럼, 사천당가를 노리고 날 납치한건가?’
당소소의 우려는 끊임없이 뻗어나갔다. 적게는 자신의 아버지, 넓게는 사천당가와 두 곳의 구파일방에 까지. 그런 우려는, 들려오는 사마문의 목소리가 덜어 내주었다.
“정신이 들어? 소소.”
“읍…!”
“쉬잇. 지금 풀어줄 테니까 기다려.”
그 말이 끝나고, 당소소의 안대가 풀렸다. 당소소는 고개를 흔들며 흐릿한 시야를 교정한 뒤, 사방을 둘러보았다. 좁은 공간, 어두운 음영. 그리고, 그의 앞에 서있는 잔학한 웃음의 사마문. 그는 의자를 가져와 앉으며, 그녀를 마주보았다.
“내가 누군지 기억해?”
“흐으…!”
“아니, 아니. 기억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난 여기에선 화검공자가 아니니까.”
사마문은 턱을 슬쩍 쓰다듬으며 푸른 눈동자를 빛냈다. 반항적인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당소소의 눈. 그 어느 옥석보다 깊은 서광을 보여주고 있었다. 사마문의 웃음기는 짙어졌다. 그리고, 얼굴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마도공자 사마문이라고, 들어본 적 있어?”
“흐으, 흐으…!”
“잘 생겼고, 눈이 파란 색이야. 그리고, 자신이 원하는 여자는 반드시 안아야 직성이 풀리는 남자라고 해. 신기하지?”
사마문의 말이 이어질수록, 당소소의 숨이 거칠어진다. 애써 짓누르고 있던 공포는 좁은 방 안의 어두운 음영과 결탁한다. 그 공포는, 물결이 되어 당소소에게 부딪혀온다. 뒤편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어서 빨리 잘못을 고하라 울부짖고 있었다. 양 쪽에서 밀려오는 파도는 현실을 부정하고, 이것이 다 장난일 것이라 흐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부딪혀오는 파도는.
“내가 널 얼마나 원했는지 몰라, 독화 당소소.”
그저 절망하라 속삭이고 있었다.
당소소는 점점 커져가는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악마들을 속이기 위해 자신이 벌였던 첫 장은 막이 내렸다. 막이내리고 도달한 이곳은 악마를 속이다, 결국 들켜서 멈춰서버린 공포가 넘실거리는 망망대해였다.
“흐으…!”
당소소가 채 통제하지 못한 감정이 눈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당청의 계획을 무너뜨리는 것은 실패로 돌아갔다는 생각에, 그나마 부여잡고 있던 이성이 감정을 부여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놓았다. 사마문은 희열에 몸을 떨며 입을 달싹였다.
“좀 더, 좀 더 슬프게 울어.”
당소소의 이성이라는 조명이 꺼지고. 다시, 막이 올랐다. 펼쳐진 두 번째 장은, 수많은 악마들이 춤을 추는 무도회였다. 당소소는 그 무도회의 구석에서, 고통스러운 얼굴로 사마문의 구애를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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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독심[一片毒心] - 삼장[三章], 암해고도[暗海孤島]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