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사장[四章], 여명도래[黎明到來] 5
“으음….”
당소소는 이불 속에서 몸을 뒤척였다. 별안간, 얼굴을 찡그리더니 눈을 떴다. 조심스레, 주변을 둘러본다. 공포가 얽혀있던 어둠은 없었다. 그 자리는, 장신구들과 깨진 동경이 차지하고 있었다. 자신을 제정신으로 있게 하던 촛불 또한 없었다. 그 대신, 하연이 눈물을 흘리며 웃고 있었다.
“아가씨.”
“…하연, 울면 화장 번져.”
“흥…. 아가씨느은…, 흑. 쌍괴파에 가셨을 때, 웅묘[熊猫]같은 모양새를 하셔놓고. 단혼사님이 다 말해주셨어요.”
“으, 으흠. 어쨌건 사실이잖아?”
당소소는 그 말을 던지고, 이불을 걷고 침상에서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다리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당소소는 그대로 풀썩 제자리에 주저앉을 뿐이었다.
“어.”
“아…. 우리 아가씨 어떻게 해….”
하연은 이젠 그칠 생각 따윈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는지, 당소소의 처량한 모습을 보며 펑펑 울기 시작했다. 당소소는 난감한 듯, 볼을 긁다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서럽게 울고 있는 하연에게 말했다.
“일단, 그치자. 아버지께 가야하잖아.”
“그, 그치만…. 아가씨가….”
“난 괜찮아. 며칠 지나면 금방 제대로 걸을 거야. 사천당가는, 독과 약을 다루는 곳이잖아?”
“흐윽, 네에….”
당소소는 그 말을 하며 크게 숨을 들이키며 침상을 부여잡았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다리로,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을 닦던 하연은, 황급히 그녀를 부축한다. 당소소는 숨을 뱉으며 하연에게 말했다.
“고마워, 하연.”
“정말, 그냥 누워있으시지….”
“그래도, 이젠 시간이 얼마 없어.”
당소소는 자신을 말리는 하연에게, 다짐하듯 말했다. 당소소는, 이 년 후에 주인공과 조우한다. 쌍검무쌍의 이야기를 따라가기 위해 자신은 그를 따라가야만 했다. 주인공의 주위에는 천재이거나, 비범한 능력을 지닌 자들밖에 없었다.
아무런 능력이 없는 자신이 그들을 쫒아가기 위해 주어진 짧은 시간, 열여덟 살과 스무 살의 사이. 그 사이에, 평범한 사람인 자신이 그들을 쫒아 다닐 수 있을 만큼의 힘이 있어야 했다.
김수환이 가장 사랑하는 쌍검무쌍의 이야기. 그 그늘에 가려진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그리고 그런 거창한 이야기에 가려진, 평범한 삶이라는 조그마한 소망을 위해.
악역 당소소는, 움직여야 했다.
“난, 지금 행복해.”
당소소는 웃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하연은, 웃지 못했다.
*
당진천은 자신의 앞에 서있는 남성을 불만스런 표정으로 올려다보았다. 자신과 꼭 닮은 얼굴에, 둘째 부인을 닮은 자색의 눈동자. 고집스런 성격이 단적으로 드러나는 앙다문 입술을 보는 당진천은, 벌써부터 피곤함을 느꼈다.
“회야, 어째서 안 간다는 것이냐?”
“아직 연철전의 일이 끝나지 않았는데, 어찌 절 찾으시는 겁니까? 가주님. 전 바쁩니다.”
“…청과 혁이 반기를 품고 당가를 도모했다. 청은 죽었고, 혁은 청이 죽는 틈을 타 도망쳤지. 이대론 주기적으로 있는 사천교류회[四川交流會]에 열흘 동안 납치된 네 여동생을 보내야 할 판이라고 말했잖느냐?”
“가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
당진천은 셋째 아들인 당회의 말에 골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당청과 당혁이 없는 이상, 이제 당회가 자신의 뒤를 맡아주어야 했다.
하지만, 당회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둘째 부인이 당소소를 낳고 산고를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당회는 당소소를 혐오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첫째 부인인 독고수아의 괴롭힘에 가족을 혐오하고, 결국 당회는 연철전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는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당소소를 당가의 밖으로 보낼 순 없으니, 당진천은 완고한 당회에게 다시 한 번 사천교류회의 필요성을 설파했다.
“몇 번을 말해야 그 중요성을 깨닫겠느냐. 당문은 주기적으로 정파에게 우리가 어떤 상태이고, 어떤 독과 어떤 암기를 개발했는지. 그리고 어떤 마음을 지니고 있는지 알려줘야 한다고.”
“음, 적혈비[積血匕]를 만들었네요. 그리고….”
“여기서 말하란 말이 아니지 않느냐….”
“전, 남들과 교류하는 것이 싫습니다. 제 낙이 무엇인지 아시지 않습니까? 그저 암기만 만들 수 있다면 족하다는 것을.”
“어휴….”
당진천은 당회의 말에 한숨을 쉬며 관자놀이에 손가락을 올렸다. 자신의 아버지가 아무런 말이 없자, 당회는 슬쩍 자신의 의사를 내비쳤다.
“하실 말이 더 없으면, 먼저 가보겠습니다.”
“…추후에 다시 부를 터이니, 지금은 물러가거라 그럼.”
당진천은 당회의 고집에 체념을 하며 그를 보내자, 당회는 꾸벅 고개를 숙이며 물러섰다. 당회가 문가에 가까이 다가갔을 무렵, 문이 열리며 하연의 부축을 받는 당소소가 들어왔다. 당회의 눈과 당소소의 눈이 마주친다.
“쯧.”
당회는 당소소를 확인한 뒤,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영문을 모르는 당소소는 그저 혐오에 젖어 있는 자색의 눈동자를 바라볼 뿐이었다. 당회가 가주실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당진천은 하연에게 어서 당소소를 앉히라는 손짓을 보냈다.
“누워서 쉬고 있지, 뭐 하러 여길 왔느냐.”
“하루빨리 무공을 배우고 싶어서요.”
“…지금 그 몸으로 배울만한 무공이 아니라는 것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래서 어찌 해야 하는지, 조언이라도 듣고자 왔어요. 아빠.”
“…….”
복잡하던 당진천의 머릿속은, 파르르 떨며 무공을 배우고 싶다는 당소소의 말에 더욱더 복잡해졌다.
‘저 불쌍한 것이 저리 배우고 싶어 하는데, 가르쳐 주지 않을 수도 없고….’
당진천은 긴 숨소리를 내며 고심하다, 서랍을 열어 털실 하나를 꺼내 당소소의 손에 쥐어주었다. 당소소가 이것이 무엇이냐는 표정으로 당진천을 올려다보자, 당진천은 당소소의 손에 털실을 끼운 뒤, 이리저리 끼워 맞춰 하나의 모양을 만들어 냈다.
“실…, 뜨기네요.”
“암기를 다루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일 것 같으냐?”
당진천의 말에, 당소소는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며 말했다.
“손재주인가요?”
“집중력. 목표를 정확하게 겨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손재주는 그 다음이고.”
“그럼 이건….”
“혼자서 하는 실뜨기는, 꽤나 집중력이 요구 될 테야. 나도 어릴 때는 그것으로 단련했으니, 열심히 연습해라. 한 다경 안으로 모든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다면, 그 때 다음 단계를 알려주도록 하마.”
당소소는 당진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곤, 의자에 앉아 손가락을 꼼지락대기 시작했다. 당진천은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며, 다시금 당면한 문제들에 대해 고심하기 시작했다.
‘당청은 조용히 장례를 치르는 쪽으로 하고. 당혁은 지금 녹풍대가 추적중이니…. 회만 사천교류회에 가 준다면 문제가 없을 터인데. 아니, 하나 더 남아 있지.’
당진천은 맹한 표정으로 실뜨기를 하고 있는 당소소를 바라봤다. 그리고, 당소소에게 물음을 던졌다.
“소소, 납치를 당했던 건에 대해서 이야기 좀 해도 괜찮으냐?”
“네, 괜찮아요.”
“널 납치했던 자의 인상착의는, 혹시 기억나느냐?”
당소소는 그 질문에 꼼지락거리던 손을 잠시 멈췄다. 그리고,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어두워서 잘 안보였어요.”
“그러냐…. 미안하다. 괜한 이야길 꺼냈구나.”
당진천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두드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당소소에게 물어봤지만, 역시나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되면 그들을 추적할 마땅한 수단이 없었다.
‘분하지만, 추적은 뒤로 미루는 수밖에 없는 건가….’
‘그 녀석을, 괜히 자극해서는 안 돼.’
실뜨기의 다음 도형을 만들다 실패한 당소소는, 엉킨 실을 풀며 생각했다. 그녀와 오면서 훑어본 당가의 분위기는, 말 그대로 초상집이었다. 하루아침에 가문의 적통 둘을 잃고, 당혁의 독강시로 인한 제독전의 타격은 막심한 수준. 거기에 모두가 가릴 것 없이 과로에 찌들어 살고 있었다.
‘내가 화검공자를 범인으로 지목한다면, 아버지는 필시 청성파에 따지러 갈 거야. 청성파와 얼굴을 붉히면 나쁘면 나빴지, 좋진 않을 거고. 무엇보다 그를 자극해서 이야기가 망가지는 건 최악의 흐름이니까.’
당소소는 다시 풀린 실을 쥐고, 실뜨기를 시작했다. 억울하고, 화가 나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잠시 찾아온 안정을 포기하기도 싫었다. 당소소가 실뜨기에 열중을 시작하자, 가주실의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주님, 총관 장보입니다.”
“들어오도록.”
당진천이 지친 목소리로 장보의 출입을 허락하자, 문이 열리며 다소 작은 체구의 사내가 들어왔다. 자그마한 눈초리에 삼각형의 수염이 양쪽으로 뻗어있는 깡마른 체구의 남성. 그의 시선은 구석에서 실을 만지작거리는 당소소에게 도달했다.
‘뭐지, 용돈이 떨어져서 가주님께 애교라도 부리고 있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당소소를 바라보고 있자, 당진천이 손가락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장보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장보는 목을 가다듬고, 고개를 숙이며 찾아온 이유를 말했다.
“내일까지 사천교류회 참석자 명단을 제출해야 해서 말입니다.”
“내일까지였나….”
당진천은 다시 골치가 아파오는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러자 총관이 의아한 듯, 물어온다.
“회 도련님은 어떻게 하시고…?”
“알잖나. 회가 대장장이 일에 미쳐있는 것을.”
“아, 그렇지요. 가주님께서도 골치가 아프시겠군요. 청, 혁 도련님을 잃고 남은 것은 회 도련님 하나뿐일 건데….”
“총관.”
당진천은 살짝 높은 음성으로 장보에게 눈치를 주었다. 구석에서 실뜨기를 하고 있는 당소소를 발견한 장보는 황급히 시선을 돌리고, 말을 돌렸다.
“그, 그럼. 사천교류회는 어쩌실 생각이십니까? 역시 가주님이 직접?”
“회가 계속 저지경이라면, 아마 그래야하겠지.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당가를 돌보는 것은….”
“……?”
당진천과 장보의 시선이 당소소에게 향했다. 당소소는 그 시선에 당황하며 손가락에 실을 거는걸 실패했다. 그리고 그 시선들을 둘러보며 멋쩍은 듯, 웃었다.
“헤헤, 좀 어렵네요. 실뜨기.”
“…안돼. 내가 회 이놈을 두들겨 패서라도 끌고 나오도록 하지.”
“역시, 그렇겠죠?”
장보가 당진천의 다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소소는 그런 그들의 대화에 슬쩍 발을 올렸다.
“헌데, 사천교류회가 뭔가요?”
“…알 필요 없….”
“사천성 정파의 유지들이 모여, 서로간의 교류를 하는 회합…. 이었습니다만. 사천당가가 끼게 된 이후로는 사천당가 암기의 종류, 독의 종류…. 같은 사천당가의 위험성을 설명하는 곳으로 변질되었죠.”
“가야하는 것은, 가주나 가주를 대리 할 수 있는 직위의 사람이겠군요?”
“정확합니다, 아가씨.”
장보는 당진천의 눈치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당소소에게 설명했다. 그는 총관으로서, 지금 당가는 저 망나니 아가씨의 손이라도 빌리지 않으면 안 되는 위기에 처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지금 가주께서 집을 비우면, 당문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상황이 될 것이다. 차라리….’
“말은 이렇게 했으나, 그렇게 복잡한 일은 아닐 겁니다. 당가의 독과 암기를 정리해둔 서신을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자리니까요.”
“그럼, 제가 갈 수도 있겠네요?”
“소소. 넌 열흘 동안 납치되어 있다가 방금 일어난 환자야. 몸조리나 똑바로 하도록 해라.”
장보의 떠보기에 혹하는 당소소. 당진천은 그런 당소소를 말렸다. 당소소는 당진천의 만류를 밀어냈다. 김수환은 겪었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가장이 자리를 비운다면 집안이 어떻게 되는 지를.
“아빠, 제가 갈게요. 지금 아빠가 자리를 비운다면, 당가는 정말로 위기일 거예요.”
“안 된다. 내가 알아서 할 터이니, 넌 독봉당으로 돌아가거라.”
“당가의 가풍이 무엇인가요, 아버지?”
후들거리는 다리로 천천히 일어서는 당소소. 그 모습에, 당진천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겨우 자리에 선 당소소는 자신의 힘이 되었던 당진천의 말을 떠올린다. 그리고, 메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마음을 어지럽히는 잡다한 것을 잊은 채로, 눈앞에 닥친 일 만을 생각 하는 것. 그것이, 아버지가 저에게 알려준 독심이잖아요?”
당소소는 그 말과 함께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자신이 맺은 실을 내밀었다. 그리고, 말을 이어갔다.
“언젠가, 제가 넘어지면 아버지가 제 편이 된다고 하셨듯이. 저 역시, 아버지의 편이 될 수 있어요.”
당소소는 환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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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독심[一片毒心] - 사장[四章], 여명도래[黎明到來]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