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오장[五章], 군학일계[群鶴一鷄] 1
저 사람은 문파의 촉망받는 천재, 또 저 여자는 게으른 천재. 옆에서 싱글거리는 사람은 문파의 미래를 짊어진 천재, 묵묵히 찻잔을 홀짝이는 저 사람은 힘을 숨기고 있는 천재.
그리고 나는, 실을 만지작거리는 닭 한 마리.
*
창가로 볕이 들어와, 당소소의 얼굴을 비춘다. 당소소는 앓는 소리를 내며, 이불을 뒤집어 쓴다. 그런 당소소의 이불을, 하연은 조심스레 걷으며 말했다.
“아가씨, 일어나셔서 탕약을 드셔야죠.”
“음…, 오 분만….”
“네? 오분…?”
당소소는 잠결에 뱉은 말에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하연의 시선을 외면하며 이불을 끌어당겼다.
“…일 다경만.”
“몸이 얼른 나으셔야, 사천교류회에도 가실 수 있죠. 여기, 탕약이에요.”
“으윽.”
당소소는 하연의 보챔에 찌뿌둥한 몸을 일으키고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하연이 내미는 탕약을 받아들어 냄새를 맡아본다.
“으읏!”
당소소는 고개를 뒤로 확 빼며 원망스런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본다. 하연은 엄격한 눈빛으로 어서 탕약을 먹으라는 눈빛으로 맞섰다. 당소소는 떨떠름한 얼굴로 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약을 좀 더 맛있게 만들 순 없어?”
“아마 당가라면, 그런 곳에 넣을 재료를 아껴서 다른 약품을 만들 때 쓸 거예요.”
“그건…, 그렇네.”
당소소는 하연의 말에 체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리고, 약을 쭉 들이켰다. 울컥 올라오는 쓴 맛에 당소소가 기침을 하자, 하연은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콜록…!”
“잘하셨어요. 오늘은, 학사님을 만나실 거죠?”
“뭐, 평소의 일상이니까….”
“그럼 화검공자께 연락을 드릴까요?”
하연의 말에, 당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사마문은 이제 없을 것이다. 굳이 들쑤시진 않았지만, 철두철미한 자인만큼 종적을 지우고 새 신분을 찾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자신은 해야 할 것이 있었다.
“무공을 익힐 거야.”
“네? 실뜨기로 수련하고 계시잖아요.”
“사천교류회까지 쓸 수 있는 걸로 배워야해. 지금의 난, 그냥 음…. 얼굴이 예쁜 가주의 딸일 뿐이잖아?”
당소소는 남성이었던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예쁘다고 하는 발언이 꽤나 부끄러웠다. 그녀는 슬쩍 기침을 하더니, 붉어진 얼굴을 돌렸다. 하연은 그런 당소소가 마냥 귀여운지, 웃으며 그녀가 내미는 탕약그릇을 회수했다.
“무리는 하지마세요. 그렇게 급하지 않아도 괜찮잖아요? 가주님도 계시고, 당가도 있는데.”
“뭐, 당장은 그렇겠지….”
당소소는 하연의 말을 애매하게 맞장구치며, 침상에서 일어났다. 약간 휘청거리지만, 무언가 지지하지 않고 설 수 있었다. 당소소가 하연을 바라보자 하연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목욕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오늘은 약재 하나만 발라.”
“그저 예쁘기 만한 가주의 따님이, 그렇게 대충 씻다가 못생겨지면 어떻게 해요?”
“진짜, 놀리지 말고.”
당소소는 뾰로통한 얼굴로 하연의 팔을 툭 쳤다. 하연은 쿡쿡 웃으며 목욕을 준비하기 위해 침소를 빠져나갔다.
*
말끔하게 치워진 객실에서, 잔뜩 지친 기색의 당소소가 원망스런 눈빛으로 하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하연은 그런 당소소의 시선을 외면하며 두볼 가득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당소소는 푹 가라앉은 목소리로 하연을 책망했다.
“…두개만 바른다며.”
“준비가 그렇게 되었는걸요. 일곱 개의 약재를 뭐, 무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고….”
“너도 힘들잖아. 나도 힘들고. 그러니까 합리적으로….”
“아가씨를 씻겨주는 것인데, 제가 왜 힘들어요. 앗, 곧 학사님이 오실 시간이네요.”
하연은 그렇게 말하며 객실을 나섰다. 당소소는 길게 한숨을 쉬며 허리를 곧게 펴 학사를 맞을 준비를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전히 당소소의 눈치를 슬쩍슬쩍 보는 학사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어험, 흠….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편하게 대하셔도 된다고 했잖아요, 선생님.”
당소소가 생글거리며 말하자, 학사는 헛기침을 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함세. 제자님.”
“그리고, 감사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당소소는 자리에서 일어나, 학사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학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저는, 아니 나는 아무것도 한 적이 없는데….”
“절 도와주셨잖아요. 당청 오라버니를 주시해서.”
“…뭐, 별 것 아닌 행동을 했다만. 일단은 여기까지 하지.”
학사는 이런 상황이 어색했는지, 당소소의 인사를 대충 받으며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는 방금 목욕을 마친 모양인지, 은은한 향초의 냄새가 풍겼다. 그리고 무슨 사건을 터뜨릴지만을 고민했었던 그녀의 얼굴엔, 순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예쁘긴 예쁘군. 괜히 당진천, 그 친구가 아끼는 게 아니긴 해.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학사는 고개를 흔들며 은근히 솟아오르는 불안감을 지웠다. 그리고, 들고 온 보따리를 풀어 두루마리 한 권을 내밀었다. 당소소는 그 두루마리를 받으며, 맹한 표정으로 매듭을 풀었다. 두루마리엔, 직접 내려 적은 문장들이 적혀져 있었다.
‘문제 하나, 하늘과 땅은 검고 누르다. 그렇다면 우주는 어떨까?’
당소소는 그 글줄을 읽고 고개를 들어 학사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에, 학사는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수염을 가리며 뒤로 슬쩍 몸을 뺐다. 당소소는 눈을 찡그리며 두루마리를 만지작거렸다.
‘씨발 이거, 쪽지시험이지…?’
“어험. 그, 제자님의 현재 학업이 어느 정도인지 평가하는 문제들이네. 무엇을 어디부터 알려줘야 하는지 파악을 해야 할 터이니….”
“음….”
당소소는 불만스런 얼굴로 두루마리를 바라봤다. 어느 누가 갑자기 치르는 쪽지시험을 좋아할 수 있을까. 심지어, 김수환은 돈을 벌기 위해 바깥으로 나돈 턱에 제대로 배우지도 못했었다. 그에게 쪽지시험은, 피곤한 몸을 쉬게 하는 수면시간과도 같았다.
학사는 점점 말이 없어지는 당소소의 눈치를 보며, 슬쩍 운을 띄웠다.
“하기 싫다면, 하지 않아도 되네. 내 수염만 무사하면….”
“혹시, 쓰러지기 전에 전 어느 정도였나요?”
“음, 어…. 그….”
당소소의 질문에 학사는 말을 이리저리 뭉개며 답변을 회피했다. 당소소는 하연과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리며, 학사에게 독설을 허락했다.
“솔직하게 말하셔도 괜찮아요, 선생님.”
“열을 알려줘야, 하나를 알았었지….”
“그렇군요….”
알고는 있었지만, 당소소의 수준 높은 무식함에 그녀는 속으로 실망을 했다. 쌍검무쌍 속의 당소소는 공부 같은 것이라든지, 무공수련 같은 것들은 일절 하지 않았으니까. 그저 당가의 위세를 빌려 독을 가져와 남을 괴롭히고, 마교의 위세를 빌려 마공을 익힌 뒤 주인공을 막아섰을 뿐.
당소소가 하연을 바라보자, 하연은 곱게 갈린 먹과 붓을 그녀의 앞에 내려놓았다. 당소소는 그 붓을 쥐고, 문제들을 바라봤다.
‘읽을 순 있지만, 잘은 모르겠어….’
하지만, 아무리 싫다곤 해도 자신의 현재 상태는 짚고 가는 것이 옳았다. 앞으로 부딪힐 수많은 천재들을 부지런하게 쫒아가기 위해선, 자신이 어디까지 달릴 수 있는지 알아야 할 테니까.
당소소는 붓을 먹으로 적시고, 두루마리에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일필휘지로 적다가도, 어느 순간은 입가를 가리며 고심하기도 하고. 볼을 긁적이며 난감해 하기도 하길 한 시진. 탁자를 두드리며 시간을 가늠하던 학사가 말했다.
“그만하면 됐다. 이제 손을 놓아도 괜찮아.”
“네….”
“그간 병상에 누워 있었고, 다시 또 아팠으니…. 전부 잊었다고 해도 이해하마.”
당소소는 자신에게 실망한 기색으로 붓을 내려놓았다. 학사는 그런 당소소의 얼굴을 애써 무시하며, 두루마리를 쥐고 한 문제 한 문제를 훑어갔다. 차 한 잔을 마실 시간이 지나고, 학사는 두루마리를 내려놓으며 당소소를 바라봤다.
“어, 어떻죠?”
“음…. 그래도 예전보단 나아졌다네. 많이 풀진 못했지만.”
“…이게 예전보다 나아진 거라고요?”
“예전엔 문제를 내밀면 죽일 듯이 노려봤으니까. 지금은, 아마 하나를 가르친다면…. 하나를 알 수도 있겠어.”
당소소는 풀죽은 얼굴로 책상바닥을 긁었다. 그리고, 체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부터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아는 천재들이나, 알려주지 않아도 알아서 무공을 창안해내는 괴물들과 경쟁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아쉬웠을 뿐.
당소소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고, 학사에게 물었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인가요?”
“그렇네. 그리고, 너무 실망하지 마시게. 예전보단 정말로, 정말로 나아진 것이니까.”
“감사했습니다, 선생님.”
학사가 위로의 말을 건네며 일어서자, 당소소는 꾸벅 인사를 하며 학사를 배웅했다. 학사가 객실을 떠나자, 당소소는 턱을 괴며 봇을 만지작거렸다. 하연은 그런 당소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많이 실망하셨나요, 아가씨?”
“아니, 그냥 뭐…. 이럴 건 알고 있었는데….”
하연은 잔뜩 기가 죽은 당소소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당소소의 기운을 북돋아주기 위해, 목을 가다듬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음, 뭐 어때요? 얼굴이 예쁜 건, 검강[劍剛]을 뿜는 거나 장원에 급제한 것이랑 똑같다던데. 하물며 정천오화의 그 아름다운 독화…. 앗!”
“너, 그만 놀리랬지?”
당소소가 화가 난 표정으로 일어서자, 하연은 서둘러 객실을 빠져나갔다.
*
“…그게 그렇게 싫으신가요? 여자가 예쁘면 좋은 거지.”
“부끄러우니까, 하지 마.”
당소소는 하연과 함께 가주실을 향하며 대화를 주고받았다. 당소소는 걷는 와중에도 털실로 당진천이 내준 숙제를 열심히 하고 있었다. 낑낑거리며 실을 뜨는 모습에, 하연은 절로 웃음이 지어졌다. 그런 그녀들과 부딪히는 일단의 무리.
“앗…!”
“윽! 눈을 똑바로 뜨고 다…!”
당소소는 부딪힌 충격으로 떨어진 털실을 줍고, 상대를 바라봤다. 상당히 낯이 익은 얼굴들이었다. 개중에는, 독봉당에서 마주쳤었던 얼굴들도 있었다. 당소소는 털실을 한 손에 감은 뒤, 그녀들을 훑어보며 말했다.
“똑바로 뭐?”
“앗. 아, 아가씨. 그게, 무의식적으로….”
“흠….”
당소소는 팔짱을 끼며 그 시비들을 바라봤다. 당청의 휘하에서, 독봉당의 하인들을 괴롭혔던 괘씸한 시비들과, 은근히 하연에게만 일감을 미루던 이기적인 독봉당의 시비들. 당소소는 팔짱을 낀 손으로 팔을 두드리며 생각했다.
‘당청 없고, 당혁 도망갔고…. 당회랑 나만 남았으니, 이젠 하연을 괴롭히지 못할 것 같은데. 거기에 아버지의 시비들은 내 말을 따르고 당회의 시비들은 죄다 대장간에 있으니…. 하연이 실세인가?’
“아가씨.”
“응?”
자신을 불러보는 말에 생각을 멈추고 하연을 돌아보는 당소소. 하연은 웃고 있었다. 하연은 그 웃는 낯으로 그녀들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주제를 모르고 아가씨와 부딪힌, 이 무례한 선배들을 제가 손을 좀 볼까요?”
“아, 아니 뭐 그렇게 까지야…. 난 괜찮았는데.”
“…아가씨. 어깨 아프시죠? 그리고 그 털실. 가주님이 주신 소중한 거잖아요?”
하연은 독기가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당소소를 돌아봤다. 당소소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으, 응. 그렇긴 한데….”
“그럼, 제가 이 무례한 선배들과 잠깐 이야기를 나눠야 할 것 같은데. 독봉당의 방식으로.”
“하, 하연이 하고 싶은 거 다 해. 난 먼저 갈 테니까…. 무공을 배워야 하잖아?”
“네, 아가씨. 조심해서 가셔요. 곧 따라갈게요. 후훗.”
처음 보는 하연의 태도에, 당소소는 서늘함을 느끼며 자리를 피했다. 하연은 그런 당소소를 보내며, 살기어린 미소를 던졌다. 굳어있던 시비들이 정신을 차리고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 네 까짓 게 뭐 어쩔 건데?”
“맞아. 너, 그렇게 착한척하더니 이제야 본성을 드러내는구나!”
짐짓 강한 척을 하며 앞으로 나오는 당청의 시비들. 하연은 아주 만족스럽다는 듯, 싱그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짧게 심호흡. 다시 열리는 하연의 입은, 그동안 당청의 시비들이 하연을 교육해줬던 방법을 그대로 실천했다.
“꿇어, 썅년아. 뒤지고 싶지 않으면.”
“에?”
“비연, 너도 아닌 척 하지 말고 빨리 와서 꿇어.”
“…으, 응.”
시비들이 무릎을 꿇자, 하연은 뒷짐을 지고 그녀들 사이를 걸어가며 말했다.
“독봉당, 특별과정.”
그 말이 들리자, 독봉당의 시비는 공포에 몸을 떨면서 하연을 바라보곤 고개를 저었다. 당청의 시비들만이 무슨 뜻인지 몰라 맹한 표정으로 독봉당의 시비들에게 질문했다.
“독봉당 특별과정이 뭐야?”
“…신입이 오면 당소소님에게 익숙해 져야한다면서, 당소소님이 괴롭히는 방식 그대로 신입에게….”
“아.”
당청의 시비가 짧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러자, 하연은 서로 대화를 나누던 시비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곱게 웃어주었다.
“환영해요.”
꿇어앉은 시비들의 얼굴은 사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