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오장[五章], 군학일계[群鶴一鷄] 2
당소소는 가주실의 문 앞에 서서, 별안간 괴성이 들려오는 뒤를 돌아봤다. 무언가 원망이 가득 찬, 여자들의 비명소리였다.
‘…익숙한 목소린데. 설마, 하연이 그러겠어.’
그녀는 고개를 저으며, 문을 두드린다. 그러자, 축 가라앉은 당진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신가.”
“소소에요, 아버지.”
“들어와라.”
당진천의 허가가 떨어지자, 당소소는 문을 열고 가주실의 안으로 들어갔다. 등불 하나에 의지해, 종이를 뒤적거리는 당진천이 그녀를 반겼다. 그녀는 조용히 문을 닫고 맞은편의 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실을 만지작거리며 당진천이 일을 끝내기만을 기다렸다.
몇 장의 서류에 도장을 찍은 당진천은, 눈을 비비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당소소도 그에 맞춰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진천은 당소소에게 다가가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당소소는 부끄러움에 목을 움츠렸다.
“그래, 우리 딸. 무슨 일이냐.”
“…제가 사천교류회에 가잖아요?”
“뭐, 그렇지. 기왕이면 안 갔으면 좋겠다만…. 그래서, 뭐가 궁금해서 왔느냐?”
“거기에서 쓸 무공이 필요해요.”
“사천교류회에서 쓸 무공이라…. 갑자기 왜?”
당진천이 의아함을 느껴 묻자, 당소소는 제멋대로 엉켜있는 실을 보여주며 말했다.
“저는 멍청하고, 약해요. 그래서 허세라도 부리기 위해선, 단 하나라도 쓸 수 있는 무공이 필요해요.”
“…누가 너더러 멍청하다고 했느냐? 시비들?”
“아니, 꼭 누가 그런 건 아니지만….”
당진천이 짐짓 화를 내며 말하자, 당소소는 슬쩍 시선을 피하며 변명했다.
“시간대를 보아하니, 선생을 만나고 오는 길인가보구나.”
당진천은 창가를 바라보며, 시간을 가늠하곤 딸의 일정을 추측했다. 당진천은 턱을 쓰다듬으며 당소소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선생이 뭐라고 하더냐?”
“예전엔 열 개를 알려줘도 하나를 모를 머리였다고 했는데, 그나마 지금은 하나를 알려주면 하나를 알 정도는 된다고….”
“음….”
당진천은 풀이 죽은 딸의 말에 예전 학사의 말을 떠올렸다. 하나를 알려주면, 다섯을 알고 나머지는 잔꾀로 채운다던 당청. 확실히, 머리는 좋았었다. 덕성이나 무재 같은, 나머지 것이 받혀주질 못해 그런 꼴을 당했을 뿐.
하지만 지금의 당소소에겐 당청과 같이 뛰어난 오성은 없지만, 당청은 가지지 못한 좋은 성격이 있었다. 당진천은 당소소의 앞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며 말했다.
“넌 충분히 똑똑하단다, 소소. 그리고 다른 뛰어난 이들이 가지지 못한 것도 가지고 있어.”
“그것으론 부족해요.”
그런 당진천의 말에도 당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불안한 눈빛으로 당진천을 바라봤다. 당진천은 그녀가 불안해하는 원인을 짚었다.
“사천교류회 때문에 많이 불안해하는구나.”
“…시간이 많이 없어요.”
당진천의 말에,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사천성의 유지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사천교류회도 문제였지만, 당소소의 몸은 내공을 전혀 쌓지 않은 상태였다. 하루라도 빨리 무공을 익히지 않는다면, 주인공은커녕 그의 손짓 한 번에 눕는 졸개들도 당해낼 수 없을 테니까.
“그래, 그럼 이 아빠가 간단한 무공 하나를 알려주도록 하마.”
당진천은 당소소의 머리 위에 올린 손을 거두고, 병풍을 걷어 비수 한 자루와 죽통 한 자루를 당소소의 손에 쥐어 주었다. 당소소는 손에 쥔 죽통과 비수의 감촉을 느끼며 눈을 빛냈다. 드디어 자신도 쌍검무쌍 속 등장인물들처럼 무공을 사용한다는 생각에, 당소소의 감정은 물론이고 김수환의 이성도 흥분을 감출 수 없었다.
“독공과 암기술인가요? 음, 그래도 아직 팔에 힘은 많이 없는데…. 그래도 독공은 할 수 있을지도?”
“죽통을 열어보아라.”
“그, 그래도 되나요? 여기 안에 독이 있을 것 같은데….”
당진천은 허락의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소소는 들뜬 마음으로 죽통의 마개를 열었다.
“…….”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당소소는 죽통을 흔들어도 보고, 털어도 보고, 안쪽을 들여다 본 뒤에 가는 눈으로 당진천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놀리냐는, 원망의 눈빛. 당진천은 기침으로 목을 가다듬으며, 당소소에게 말했다.
“으흠, 팔을 쭉 내밀어 보거라.”
“…진짜 독공 맞죠?”
“물론이란다, 딸아. 팔을 쭉 내밀어.”
당소소는 당진천의 요구대로 팔을 곧게 뻗었다. 당진천은 그런 딸을 보며 다음에 취할 행동을 말해주었다.
“자, 따라 해보아라. 이것이.”
“이것이?”
“당가의 무형지독[無形之毒]이니라.”
“당가의 무형지독…. 잠깐만요.”
당소소의 매서운 눈길이 당진천에게 꽂혔다. 당진천은 그런 딸의 눈길을 감당하지 못해,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
당소소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의 눈치를 보는 당진천을 바라봤다. 평소에 사근사근하던 딸의 매서운 시선을 버티지 못한 당진천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딸아. 지금 무술을 배운다면, 평생 남는 후유증을 앓을 가능성이 높단다. 제대로 몸을 회복하고, 효율적으로 단련을 해야만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어.”
“그래도, 당장 필요한걸요.”
“기만도, 제대로 된 독공이란다. 딸아. 잘 보거라.”
당소소의 손에서 죽통을 빼앗아 든 당진천은, 한 발 앞으로 내딛으며 죽통을 바닥에 흩뿌렸다. 구주십이천의 일인인, 독천의 서슬 퍼런 살기가 퍼져나간다. 그리고,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외쳤다.
“당가의 무형지독에 대해 들어봤는가? 아쉽지만, 해독제는 주지 않을 거야.”
“…오.”
정말로 적을 중독 시켰다는 듯이 행동하는 당진천. 당소소는 그 기백에 자신도 모르게 한발 뒤로 물러섰다. 그런 딸이 귀여웠는지, 당진천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죽통의 마개를 주우며 말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다시피 당가의 칠대극독 중 하나인 무형지독은 색, 향, 형태 모두 존재하지 않아. 아는 것이 힘이라지만, 때로는 아는 것이 독이 될 수도 있지. 독천의 딸이 독이 든 통을 내밀며 무형지독을 언급하면, 두렵지 않을 자는 손에 꼽을 게야.”
“그래서 독공이라고 하셨던 거군요.”
당진천은 재빠르게 이해한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다시 그녀의 손에 텅 빈 죽통을 쥐어 주었다.
“그래. 어느 독을 쓰느냐에 따라 다르겠지만, 독공은 기본적으로 심리의 싸움이란다. 어느 지점에 어느 독을 살포해야 할지, 그 곳이 나와 내 동료가 영향을 받지 않는 지점인지. 그가 알아차리지 못하게 독을 살포해야할지, 아니면 눈에 띄는 독을 던져놓고 그 뒤를 노려야 할지.”
“독은 검기나 장풍을 쏘는 것이 아니니까요.”
“그렇단다. 오히려 그런 상승절예엔 취약한 것이 또 독이다. 검기는 독연을 찢고, 장풍은 독연을 날려버린다. 일부 특수한 독을 제외한다면, 독은 그저 독일뿐이니까. 그렇기에 독공을 사용하는 독술사는 좀 더 교활해지고, 지독해져야한단다.”
당진천은 말을 마치고 잠시 고민을 하다, 벽에 걸려 있는 주머니 하나를 꺼내 당소소에게 건넸다. 당소소는 그 주머니를 받아들며 물었다.
“이게 뭔가요, 아버지?”
“무형지독의 해독약이라고 말하며 먹여라. 아주 좋아할게다.”
“이것도 독인가요?”
당소소의 말에 당진천은 낄낄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냥 설사약이야.”
“아하, 교활하고 지독해져라….”
“그렇지, 우리 딸. 역시, 하나를 알려주면 그 하나는 완벽하게 깨우치는 구나.”
당진천은 당소소의 어깨를 두드리며 칭찬했다. 당소소가 당진천이 준 것들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자, 당진천은 창가 너머 저 멀리 보이는 흑풍대의 도열을 바라봤다. 그리고, 당소소에게 말했다.
“딸아. 사천교류회까지 널 데려다 줄 호위들을 좀 보러 가볼 테냐? 지금 내각과 외각 사이에 있는 연병장에서 뽑고 있을 터인데.”
“그래도 되나요? 아버지는요?”
“난 아직 일이 덜 끝나서. 안내 없이 혼자 갈 수 있겠지?”
“네. 하연은 좀…. 오늘 바빠 보여서. 그럼, 쉬세요. 아버지.”
당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가주실을 나서는 당소소를 눈길로 배웅했다.
*
가주실을 나선 당소소의 걸음은 내각과 외각의 사이에 존재하는 큰 연무장에 도달했다. 돌을 깎아 깔아 둔 바닥과, 칼집이 나있는 허수아비들. 그리고 가운데에 위치한 목조 비무대 앞에선, 검은 무복을 입은 흑풍대가 단혼사의 앞에 집합해있었다.
단혼사는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천교류회에 가고 싶은 인원, 거수하도록.”
“…….”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당소소는 자신도 모르게 구석에 심어진 아름드리나무에 몸을 숨기고, 그 광경을 지켜봤다.
단혼사의 얼굴은 심기가 불편하다는 듯 주름이 졌다. 진명은 고개를 흔들며 앞으로 걸어 나왔다.
“쯧쯧, 겁쟁이들 같으니. 단혼사 영감, 저와 제 동생. 둘이 가겠소.”
“저, 저 사파 놈이…!”
“뭐. 겁먹은 건 사실 아닌가?”
진명이 자신을 매도하는 흑풍대의 무인을 바라보며 물었다. 무인은 그런 진명의 말을 부정하며 말했다.
“넌 잘 모르겠지만, 당소소 아가씨는 너무 거만하다.”
“…거만? 내가 이해하고 있는 그 단어가 맞나?”
“그래. 그녀는 자신의 혈통과 방계에 위치한 자들의 혈통을 비교하며 그들을 깔보고, 외곽의 무인들을 함부로 대하지. 하인들은 말할 필요도 없고. 이번에 갈 여행은 또 어떤 고초를 겪게 할지….”
“지금 내가 아는 사람 이야기 하는 것 맞지?”
진명은 그의 말에 괴리감을 느끼며 무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무인은 뭐 그런 것을 물어보냐는 듯, 어깨를 으쓱거리며 대답을 대신했다. 그러자 진명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무인에게 손짓했다.
“말 좆같이 하는 것 봐라. 한판 뜨게 기어 나와.”
“이 비루한 사파자식이…!”
“그만.”
단혼사는 둘의 싸움을 제지하고, 진명에게 다가가 그의 귀를 잡아당겼다.
“아, 아악! 영감, 뭐하는 짓거리요?”
“내가 널 들일 때 뭐라고 했지?”
“사, 사파 티를 내지 말라고 했소. 헌데, 저 새끼가 먼저 좆같은 말을 하잖…. 윽!”
진명의 말에 단혼사는 혀를 차며 그의 귀를 놔주었다. 진명은 귀를 부여잡으며 단혼사를 째려봤다. 단혼사는 그 시선을 받으며 진명을 가리켰다.
“진명, 저 자와 정말로 비무를 할 건가?”
“당연한 거 아니오? 어디 자기 가문 아가씨를 그따위로 말해? 좆같은 새끼가.”
“이 사파새끼가…!”
“그만.”
단혼사는 다시 벌어지는 둘의 말다툼을 끊으며, 비무대 위로 훌쩍 올라섰다. 그리고, 진명을 바라보며 올라오라는 손짓을 한다.
“그렇게 혈기를 주체할 수 없다면, 나와 한판 붙자꾸나.”
“정녕 날 죽일 셈이오, 영감?”
“살살 할 테니까 올라와.”
“…알겠소. 그럼 잠시 준비를 좀 합시다.”
단혼사의 명령에 진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연무장의 구석으로 향했다. 허리를 숙이고 무언가를 하는 듯하더니, 다시 허리를 반대로 꺾으며 몸을 풀었다.
휘릭!
얼추 몸이 데워졌는지, 진명은 허리춤에서 단도를 꺼내 손바닥 위에서 한 바퀴를 굴렸다. 몇 차례 가볍게 휘둘러 본 뒤, 진명은 단도를 꽂아 넣고 비무대 위로 올라갔다.
진명은 단혼사를 마주하며 질문을 던졌다.
“살살이라면, 어느 정도요?”
“네 무공은 얼추 알았으니…. 한 손 정도만 쓰도록 하마.”
“반 정도 죽겠구먼.”
진명은 호들갑을 떨며 오른쪽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 댔다. 단도를 뽑으려는 움직임. 단혼사는 고개를 돌려, 말싸움을 벌이던 무인에게 신호를 하라는 턱짓을 보냈다.
“시, 시작이오!”
무인의 외침이 터져 나오자, 진명은 곧바로 허리춤에 가져간 손을 움켜쥐었다. 하지만, 단도를 쥔 것은 아니었다. 그가 쥔 것은, 몸을 푸는 척 하며 주워두었던 돌멩이. 그 돌멩이는 직선으로 쏘아지며 단혼사의 정강이를 향해 날아갔다.
슈욱!
단혼사는 가볍게 왼쪽 다리를 들어, 금계독립[金鷄獨立]의 자세를 취했다. 노란 닭 한 마리가, 한 발로 서있는 형상. 그 틈을 노린 진명이 이번엔 단도를 뽑아 나머지 왼쪽 다리에 던졌다. 단혼사는 가볍게 위로 뛰어 오르며, 단도를 회피했다. 진명은, 그 짧은 체공시간을 놓치지 않았다.
진명이 한걸음을 앞으로 딛는다. 단혼사는 아직 하늘 위. 두발 째, 단혼사가 대지에 가까워진다. 다음 걸음엔 단혼사가 지반을 되찾는다. 진명에게 승부처가 있다면, 여기였다.
진명은 단혼사에게 오른손을 들이밀었다. 단혼사는 가볍게 뻗어오는 손을 잡아챘다. 단혼사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진명이 내민 오른손은, 공세가 아닌, 시야를 가리는 한 수. 단혼사의 눈을 노리며, 진명의 왼손이 뻗어나갔다.
쿵!
들리는 것은, 파육음이 아닌 충돌소리. 단혼사는 진명의 왼손을 막는 대신, 그의 오른손을 들어 올려 그대로 바닥에 메쳐버렸다.
힘을 실을 기반이 존재하지 않는, 허공에서.
진명은 혀로 볼 안쪽을 핥더니, 피가 섞인 침을 뱉으며 일어났다.
“…이거, 잘못하면 한 손에도 죽겠는데?”
진명은 웃으며 바닥에 떨어진 단검을 주웠다. 그리고 자신에게 다가오라 손짓하는 단혼사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