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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화 〉오장[五章], 군학일계[群鶴一鷄] 3 (24/130)



〈 24화 〉오장[五章], 군학일계[群鶴一鷄] 3

진명은 한걸음을 디뎠다. 목재 비무대는 삐걱거리는 나무 소리를 토해낸다. 천천히 단혼사의 주위를 돌며 거리를 가늠한다.


걸음은 세 걸음, 도달해야할 거리는 영원처럼 아득하게만 보였다.

‘…살살 한다고?’



진명은 한숨을 쉬며 단검을 한 바퀴 돌리며 역수로 쥐었다. 그리고 내딛는 한걸음. 단혼사의 걸음 한 번이 마중 나온다.


쿵!


목조 비무대는 단혼사의 발구름에 한순간 요동친다. 진명은 이를 악물고 자세를 낮춰 그 파동에 저항했다. 그 순간, 공기를 찢으며 들어오는 단혼사의 채찍 같은 권격. 진각을 통해 끌어올린 힘이 실린 그의 주먹은, 단순한 살덩이가 아닌 철퇴와도 같았다. 진명은 상체를 최대한 비틀며 명치를 노리며 휘둘러진 팔을 잡아갔다.

찌직!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진명은 단혼사의 팔을 양 손으로 부여잡는 것을 성공했다. 가슴을 바짝 붙이며, 단검을 들지 않은 손은 후퇴를 용납하지 않게 팔 바깥쪽으로 깊게 걸어 잠갔다. 그리고, 역수로 쥔 단도가 단혼사의 힘줄에 닿는다.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흑풍대 무인들의 외침이 들려온다.


“저, 저런!”

“단혼사님!”

진명은 쿵쾅거리는 심장을 느끼며,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내공이 없는 날 것의 싸움에선, 싸움의 우세는 세상의 법칙을 따른다. 단단한 것이 무른 것을 짓이기고, 긴 것이 짧은 것을 이긴다. 그 법칙 안엔, 맨손과 무기가 다툰다면 당연히 무기가 유리하다는 법칙도 포함되어 있었다.


단혼사와 진명의 시선이 교차한다. 승리의 희열에 젖어있는 진명의 눈과, 평온한 단혼사의 눈. 진명은 곧바로 단혼사의 힘줄을 그어 올린다.



“이런 미친!”

“자네의 잔혈투검. 언제 겪어도 재밌는 무공이야.”

단혼사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어 올리는 단검을 발을 들어 걷어찼다. 검 끝과 발끝이 만나며 진명의 단검을 역으로 튕겨낸다. 단혼사는 들어 올린 발 그대로 비무대를 짓밟으며 진각을 밟았다.

쿠웅!

걸음은 모두 좁혀지고, 거리는 숨결이 맞닿을 거리. 위험 또한, 지근에 있었다. 진명은 서둘러 한걸음 물러서고 단검을 한차례 휘두른다. 슬쩍 회피하는 단혼사. 진명은 한 호흡을 벌었다.

“쓰읍!”

숨을 뱉고, 들이키며 양손을 위 아래로 천천히 흔들었다. 그가 잔혈객이라는 이름을 얻게 했던, 잔혈투검[殘血鬪劍]의 시동이 걸렸다. 단혼사는 아랑곳 않고 진명의 하복부에 주먹을 내리꽂았다.

진각의 힘이 실린 정권이 그의 복부를 향해 날아갔다. 위 아래로 흔들리던 손이 움직인다. 단검을 들지 않은 왼손은 정권의 윗부분을 스치고 들어가, 아래쪽으로 밀어내며 궤도를 수정한다. 그리고 위아래로 흔들리며 탄력을 받은 단검은 단혼사의 목을 취해갔다.


뻐억!


북을 후려갈기는 소리가 비무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갔다.



“으, 으윽…!”


“내공을 사용했다면, 진각의 힘을 받은 주먹을 흘렸을 수도 있겠군.”


“씨, 발…. 살살 한다면서요….”


“살살 때렸잖느냐.”

“하….”



진명은 단혼사의 말에 얼굴을 잔뜩 구기며 배를 부여잡고 쓰러졌다. 단혼사는 자신을 바라보던 왕오를 바라봤다. 왕오는 익숙한 듯, 비무대에 올라가 진명을 들쳐업고 물었다.



“또 제독전으로 데려갈까요?”


“가서 네 형님 배에 고약이나 발라주고 와라. 출발까진 얼마 남질 않았으니.”

“어휴, 형님. 그냥 촌구석에서 사파나 하지 이게 무슨 고생이시오?”


“왕오…. 조용히, 해라….”




진명은 끙끙 앓으며 왕오의 머리를 힘없이 때렸다. 왕오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명을 업고 내각으로 움직였다. 단혼사는 그들을 보낸 뒤, 비무대에서 내려와 느닷없이 연병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모두의 시선이 쏠린 그의 도착점은, 당소소가 숨어있는 나무였다.



“어디부터 보았느냐, 소소.”


“…사천교류회에 갈 인원들을 모집하는 것부터 봤어요.”



단혼사가 당소소를 불러 세우자, 당소소는 나무의 뒤편에서 모습을 보였다. 당소소를 헐뜯었던 흑풍대의 무인들이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단혼사는 그들을 한차례 훑어보더니, 당소소에게 물었다.


“무슨 생각을 했느냐?”

“음, 서로 제 수발을 들기 싫어하는 것이요? 괜찮아요, 제 잘못이니까.”

“…그러냐. 불편하진 않았느냐?”


“네? 전 혼자가 편한걸요. 여행도 하연만 있다면 뭐…. 불편…. 불편한가?”


단혼사의 질문에 당소소는 이상한 것을 다 물어본다는 듯, 덤덤하게 말했다. 김수환을 동정하는 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어깨를 나란히 하던 이들은 없었다. 김수환에겐 익숙한 일이었고, 이미 당소소에게도 익숙해진 일이었다. 생각을 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그 모습에, 단혼사는 혀를 차며 뒤돌아섰다. 그리고 손가락을 들어 흑풍대의 대원 몇 명을 지목했다.



“흑풍대 일조.”

“예, 예? 왜 하필 가장 실력이 좋은 일조를…!”


“잔말 말고 따라가. 그리고 사천교류회에선 조장은 진명이다.”

“그 사파 나부랭이를 왜…?”



단혼사는 진명과 말다툼을 했던 흑풍대의 무인을 바라봤다. 흑풍대의 무인은  시선에 몸을 움찔거리며 긴장했다. 단혼사는 자신의 찢어진 소매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너희 중에 진명과 같은 조건으로  소매를 찢을 수 있는 사람이 있나?”

“…없습니다. 그래도 녹풍대에는….”

“사천교류회의 인원은 흑풍대로만 구성되어야한다. 녹풍대는 혼란스런 당가를 수습하고, 각자 맡은 업무를 수행해야해. 사천교류회는, 우리로선 껄끄러운 일이지만 역으로 우리가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곳이다. 그런 곳에, 흑풍대의 말단을 보낸다면 어찌 되겠느냐?”

“…예,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그 말을 남기고, 흑풍대는 단혼사에게 목례를 하며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당소소는 맹한 얼굴로 흑풍대의 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들과의 관계는, 쌍검무쌍의 이야기 안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는 당소소의 기억에서도 찾을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지금의 당소소는 그들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당소소는 단혼사에게 물음을 던졌다.



“제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저는, 저들에게 어떤 짓을 했었던 걸까요?”


“…….”

단혼사는 섣불리 그녀의 물음에 대답해 줄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녀의 머리를 한차례 쓰다듬어주는 것뿐이었다.

*

“아가씨, 옷은 다 챙기셨어요?”

“갈아입을 거 두 개정도만 들고 가면  것 같은데. 입고 있는 거 하나, 번갈아 입을 거 하나 번갈아 가면서….”

“아이, 참! 또 이상한 소리 하신다. 적어도 여덟 개는 들고 가야죠! 분과 연지는…. 아휴, 역시 안 챙기셨네.”

하연은 분주하게 움직이며 그녀의 옷을 보따리에 싸고 있었다. 당소소는 그런 하연을 옆에 두고, 실뜨기를 하고 있었다. 손가락과 실이 힘겹게 맞물리며, 새로운 도형을 짜낸다. 당소소의 눈이 커지며 웃음이 걸렸다. 그녀는 베시시 웃으며 하연에게 그 도형을 내밀었다.




“하연, 이거 봐. 이제 하나 남았어!”


“네. 저기 옆에 있는 하나 남은 치마 좀 집어주시겠어요, 아가씨?”

“애초에 그렇게 먼 거리도 아니던데, 왜 이렇게 준비를 하는 거야. 대충 입으면 될 것을.”




당소소는 그렇게 툴툴대면서도 옆의 다홍색 치마를 쥐고 하연에게 내밀었다. 하연은 치마를 받아 보따리에 싸고, 매듭을 동여매며 말했다.




“장소의 조명, 시간, 분위기에 따라서 옷을 맞춰 입으셔야 하니까요. 당가의 여식이면, 여기에서 두 배의 옷을 가져가도 이상하지 않아요. 도련님같이 생각하는 아가씨가 이상한 거라고요. 아니, 도련님도 이런 생각은 하실 텐데….”

“으, 으흠! 알았어. 그럼 준비는  끝난 거지? 왕오, 들어오너라!”


“예, 아가씨.”

하연의 말을, 당소소는 서둘러 얼버무리며 왕오를 불렀다. 당소소의 명에, 왕오는 뒤통수를 벅벅 긁으며 당소소의 침소에 들어왔다. 그에겐 여인의 침소가 처음인 듯, 코를 벌름거리며 이리저리 둘러보고 있었다. 하연은 그런 왕오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이봐요. 딴생각 하지 말고 이 짐이나 드세요. 아가씨의 방에서 무례하게.”

“아, 예!”


왕오는 엉기적거리며  보따리와 화장도구를  손에 들고 당소소의 침소를 빠져나갔다. 하연은 곰 같은 행동을 보이는 왕오의 뒷모습에, 고개를 설레설레 젓곤 당소소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럼. 가실까요, 아가씨?”


“그래, 하연.”



당소소는 그녀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소에서 나가자, 독봉당의 장원엔 당청의 시비들과 독봉당의 시비들이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맞았다. 하연과 당소소가 그들을 지나치자, 그들은 몸을 움찔거리며 당소소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니까  순진한 얼굴로 그런 끔찍한 짓을…?’




당청의 시비들은 하연과 당소소를 번갈아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들의 시선을 확인한 당소소는, 손을 흔들며 웃어주었다. 그리고 반갑다는 듯 인사했다.


“오, 너희도 이제 독봉당 소속이야?”


“흐, 히익!”

“……?”




당청의 시비들이 보여주는 격한 반응에 잠시 놀란 당소소는, 고개를 돌려 하연을 바라봤다. 하연은 다만, 시치미를 떼며 헛기침을  뿐이었다.


“흠, 어서 가시죠, 아가씨. 단혼사님은 시간엄수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니까요.”


“…그, 그래.”



당소소는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옮겨 독봉당을 빠져나갔다. 그 뒤를 따르는 하연은,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슬쩍 뒤를 돌아봤다.

“…….”



하연의 시선을 피하는 시비들. 하연은 그녀들을 주시하고 있다는 손짓을  뒤, 다시금 당소소의 뒤를 따랐다. 당소소는 뒤늦게 쫒아오는 하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뭐하고 왔어?”

“아, 아가씨가 독봉당을 비우고 있을 때 해야 할 것들을 알려주고 왔어요.”

“그런 거야? 수고했어.”


당소소는 시치미를 떼는 하연의 말을 듣곤, 고개를 끄덕이며 당가의 입구로 걸어 나갔다.


입구에는 짐마차 한 대와, 당소소가 탈 고풍스런 마차 하나. 그리고, 흑풍대가 탈 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흑풍대의 대원들은 마차와 짐들을 점검하고 있었고, 그 무리들 앞에서 진명이 인상을 쓰며 점검에 대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당소소는 진명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쿡 찌르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진명, 준비는 잘 돼가나요?”

“응? 아, 소소 아가씨군요. 준비는 거의 다 끝나갑니다.”

“우와, 말투 예의 있는 거 봐. 단혼사님이 알려준 거예요?”


“뭐, 네. 그런 셈이죠.”



당소소는 진명의 말투에 피식 웃곤, 익숙한 시선을 느껴 고개를 돌렸다. 당진천이 굳은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 잠깐 가주님을 좀 보고 올게요.”


“그러십쇼.  준비가 끝날 테니, 인사를 하고 오는 거라면 빨리 드리고 오는  좋을 겁니다.”

당소소는 진명에게 말한 뒤, 그녀의 아버지에게 다가갔다. 당진천은 불편한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저, 새끼…. 아니, 저 자가 진명이라는 자냐?”

“네. 개과천선해서 당가의 무인까지 됐어요. 나름 강하던데요?”


“진짜 좆같이 생겼군.”


당진천이 작은 목소리로 말하자, 당소소는 그 말을 듣지 못한 듯,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네? 무슨 말 하셨나요?”


“아니, 별말 안했다. 그냥 사파 출신이니, 만에 하나라도 조심하라는 말을 했어. 그나저나, 내가 알려준 독공은  기억하고 있지?”

당진천의 물음에, 당소소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소매를 뒤적거렸다. 그리고 빈 죽통을 꺼내며 말했다.


“넌 당가의 무형지독에 이미 중독됐어. 어때, 해독약이 필요해?”

“…그래, 우리 딸. 잘 배우고 있구나.”

아무래도 귀엽게만 보이는 위협이었지만, 당진천은 껄껄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감회에 젖은 눈을 하며 당가와 사천교류회로 출발하는 행렬을 바라봤다.


항상 말썽을 부리던 그의 딸, 당소소. 그 딸이 당가의 중대사를 맡아 당가를 대표해 일을 하러 간다는 사실이 그의 가슴을 울렸다. 당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당가의 지금 상황은 최선도 아니지만, 최악도 아니다. 이건, 모두 소소의 덕분이야.’



당진천은 당소소의 행동이 조금이라도 잘못됐다면, 하는 상상을 해본다. 당소소는 여전히 고약한 성격이고, 당청과 당혁이 당소소를 인질로 삼아 자신을 죽인다. 그리고 당소소는, 진명에게 강제로 시집을 보내져 끔찍한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당문은,  긍지를 잃어버렸겠지.’

“준비 끝났습니다, 소소 아가씨!”

진명의 외침에, 당진천은 눈을 뜨고 당소소의 머리에 올린 손을 뗐다. 그리고, 품속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당소소에게 쥐여 준다.



“당가의 암기와 독을 기록해둔 문서란다. 사천교류회에 도착하면, 주최자에게 전달하면 될게야.”

“알았어요. 아버지. 아버지도, 조심하셔야 해요. 일이 많아 보이시던데.”

“오냐. 우리 딸, 조심히 다녀오너라. 혹시라도 무슨 일이 있다면, 당장 서신을 부쳐라.  당장 달려갈 테니. 아니면, 하다못해 단혼사라도 보낼 테니….”


“괜찮아요, 전 독천의 딸이잖아요?”




당소소는 웃으며 당진천의 걱정스런 말을 끊는다. 그리고,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고 멀어진다. 당진천은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마주 손을 흔들어 주었다.

행렬에 도착한 당소소가, 하연과 함께 거대한 마차에 올라탄다. 그리고 진명은 그 마차의 마부로 올라타며 외쳤다.

“사천교류회, 출발하겠소!”




여러 겹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다. 당소소가 이끄는, 사천교류회로 향하는 행렬이 그 길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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