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7화 〉오장[五章], 군학일계[群鶴一鷄] 6 (27/130)



〈 27화 〉오장[五章], 군학일계[群鶴一鷄] 6

사천성은 정파의 영역이다. 이를 부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파가 아닌 이들은 어디에서 살아남을 것인가.

“니  기야? 씹새야.”

“예, 예?”

“산적  해 먹고 사는 거면 흑림총련[黑林總聯]에서 훈련받고 왔을 것 아니야? 너희 말로 녹림의 집이라고 말해줘야 해?”


“그렇긴 한데….”

 해답은 바로 산이었다. 촉한의 배경이 되기도  사천성은, 천혜의 요새라고 칭할 수 있을 정도로 험한 산악지형을 자랑한다.


중부와 동부를 제외한다면, 벼랑 끝에 낸 길인 잔도[棧道]를 통해서 움직일 수 있는 지형이 대부분. 그렇기에 정파의 시선은 비교적 평탄한 사천성의 중심인 성도에 쏠렸다. 사파들은 살아남기 위해선 산을 타고 바깥으로 퍼져나가야 했다.

그렇기에 필연적으로 사파와 산적은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약한 둘이 싸워봤자 정파만 웃는 꼴이라는 것을, 머지않아 두 세력은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태어난 흑림총련. 산적들이 녹림의 집이라고 부르는 곳이 바로 그것이었다.

사파는 녹림에게 무공을, 녹림은 사파에게 산에서의 지식을 알려주는 연합이 탄생하게 된다. 그리고 서로 간의 싸움을 막기 위해, 흑림총련에선 교육을 받은 자들은 기수로 끊으며 선후배로 존중해주는 문화를 만들어냈다.


진명은 손가락을 세며 자신의 흑림총련 졸업 시기를 가늠했다.



“내가 흑림총련을 졸업했을 때가 몇 기더라…. 이십삼….”

“전 십칠 기입니다, 선배님!”


“십, 칠….”




진명은 순간 입을 멈추고 시선을 위로 올리며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씨발, 저 새끼 뭐야. 나도 나름 윗기수인데…?’

생각이 길면 잡힌다. 진명은 의아해하는 산적에게 격하게 팔짱을 끼며 자신의 말을 얼버무렸다.



“으, 응. 십삼 기였지. 후배야. 이런 곳에서 후배를 다 만나고, 참 인연이라는  신기하군. 핫핫!”

“근데, 방금 이십삼이라고…?”

“…십삼이라고 했잖아, 십삼. 씨발아. 피차 힘든 시기인데, 정신이라도 똑바로 차려야 밥 빌어먹고 살지 않겠냐? 내가 언제 이십삼이라고 했어?”

“죄, 죄송합니다!”

“그래, 죄송한 거 알면 됐고….”

진명은 재빨리 얼버무리며 산적의 귀에 다가가 은근하게 속삭였다.

“이 선배가 요즘 좋은 곳에 취직해서 말이야. 높으신 분을 모시는 중인데, 그냥 보내줬으면 좋겠는걸. 너희들한테도 해가 되는 이야기는 아닐 거야.”

“저도 그냥 보내드리고 싶은데…. 요즘 산채 쪽 사정이 말이 아니지 말입니다. 저희도 겨울을 날 준비는 해야 해서….”

“그래? 얼마 정도면 되는데. 조금 정도라면 내가 그냥 줄 수도 있으니까….”


“금 한 냥.”

“이런 미친 새끼가.”


진명은 정색을 하며 산적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산적은 머리를 긁적이며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니, 저희도 먹고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곱게 닦은 길의 통행료라도 걷어야 하는데….”

“길을 잘 닦아놓은  이곳으로 오게 유도해서 손님을 받을 속셈이면서, 무슨 숭고한 희생인 것 마냥…. 그리고 누가 통행료를  한 냥을 받아, 미친놈아? 그러니까 산채의 사정이 말이 아니지.”

“어쨌건, 저는 양보 못 합니다. 이건 아무리 녹림의 집 선배라도 안되는 겁니다.”




진명은 어처구니없는 부분에서 완강한 산적을 보며, 헛웃음을 터뜨리며 뒤를 돌아봤다. 뭐 하고 있냐는 당웅의 시선이 진명에게 쏟아진다. 진명은 자신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며 생각했다.

‘아 씨, 여기서 싸우면 무조건 노숙인데….’



진명은 골치가 썩는 것 같았다. 자신이 처음 맡은 지휘에서, 흑규의 실수로 휴식도 하지 못하고 움직이는 중이었다. 여기서 싸움이 일어나 숙소에 도착하지 못하고 노숙까지 하게 된다면, 당소소를 볼 낯이 없었다.

“진명, 아직 멀었나?”


“거의 다 돼가니, 좀만 참으쇼!”

당웅의 질문에, 진명은 황급히 대꾸하며 산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야, 현실적으로   냥은 못 준다. 그거 하나 있으면 너희가 겨울을 날 수도 있는 금액인데,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겠냐?”

“그렇,  하지요…. 그래도  되는 건  되는 겁니다. 이건 녹림의 집 선배라도 양보 못 해요.”


“진짜 미치겠네. 어디서 이런 꼴통새끼가….”


진명은 인상을 쓰며 산적을 노려본다. 산적은 수염투성이의 턱을 들이밀며 완강히 고개를 저었다. 마음 같아선  턱을 후려쳐 돌려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자신의 주인이 밤이슬을 맞으며 자야 할 수도 있었다. 진명은 팔짱을 끼고 머리를 굴렸다.


‘금 한 냥을 씨발, 어디서 구해? 어….’




그리고, 번뜩이는 묘수가 떠올랐다. 진명은 미소를 띠며 팔짱을 풀어 뒤편으로 손가락질을 했다.


“야, 금 한 냥 줄게.”


“지, 진짭니까?”

“근데 우리가 아니라, 저 뒤에 백능상단이라고. 거기가 우리랑 친해. 그쪽에서 받아.”

진명은 자신의 묘수에 스스로 칭찬을 하고 싶었다. 마침 당소소와 마찰도 있었겠다, 그들에게 덤터기를 씌우겠다는 생각. 산적은 진명의 제안에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깐, 산채에 사람을 보내 논의를 좀….”


“빨리빨리 하자. 흑림총련에서 그따위로 배웠어?”


“아이구, 선배님. 죄송합니다, 어서 알아볼 테니…. 야, 올라 갔다 와 봐.”

산적이 연신 굽신거리며 부하의 머리통을 후리며 올라가 보라는 눈짓을 했다. 진명은 그런 산적의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며 마차가 있는 곳으로 돌아가 당소소에게 말했다.

“곧 지나갈  있을 겁니다.”


“그래? 그럼 다행이고.”

“…무슨 짓을 했길래?”



당웅은 의심 가득한 얼굴로 진명에게 물었다. 진명은 그런 당웅을 바라보며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그리 깔보는 사파의 방식으로, 싸움 없이 깔끔하게 처리했지.”


“사파의 방식…?”

“그런  있으니, 너무 알려고 하진 말고.”

“…수상한데.”


당웅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명의 방식을 의심했다. 진명은 그러거나 말거나, 팔짱을 끼고 산적들을 지켜볼 뿐이었다. 그리고 위로 올라갔던 부하가 내려오며, 산적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그 산적은 진명을 바라보며 고개를 연신 끄덕이더니, 진명에게 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거, 갈 준비들이나 하고 계셔.”



진명은 그렇게 말을 남기고 산적에게 다가갔다. 산적은 손을 비비며 진명을 맞았다.

“아이구, 진명 선배님. 오셨습니까.”


“그래. 이야기는  끝났냐? 내가 모시는 분이 원체 바쁘신 분이라, 빨리 길을 열어줬으면 좋겠는데.”


“아, 당연히 열어드려야지요. 얘들아, 길 열어드려라!”

산적이 우렁차게 말을 뱉자, 수하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등에 차고 있던 도끼를 꺼내 들었다. 공기를 울리는 쇳소리들. 진명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그리고, 산적을 바라보며 말한다.


“야, 흑림총련에  번 찔러 줘? 선배 대우를 이렇게 좆같이 해도 돼?”


“아가야, 산채에서 뭐라고 하더냐.”



산적이 부하에게 묻자, 부하는 손가락으로 숫자를 세며 느릿하게 말했다.

“산채의 노인에게 듣길, 잔혈객 진명…. 흑림총련, 이십삼 기라고….”

“…….”


“씨발놈이 어디서 구라를 쳐? 얘들아, 이 놈 아가리를 회쳐버려라!”




산적이 냅다 진명을 도끼로 찍으려고 들자, 진명이 손사래를 치며 그들을 막아섰다.

“아니, 아니! 잠깐. 선배님. 내가 기수가지고 거짓말은 쳤지만, 뒤에 오는 백능상단은 진짜요. 우리는 그냥 보내주고, 걔네들한테 돈 더 뜯으면 되잖아?”

“그것도 구라일지 어떻게 알아? 무엇보다, 이런 모욕을 준 새끼를 살려 보낸다면 녹림의 협객 못하지!”


“…아, 씨발. 싸우면 진짜 노숙인데.”

진명이 체념하며 단검에 손을 가져가자, 당웅은 진명을 비웃으며 허리에 꽂아둔 비수를 집어 들었다.



“그럼 그렇지….”

“잠깐!”

진명을 엄호하기 위해 몸을 던지는 흑풍대를 막아서는 당소소의 음성. 마차를 내리는 그녀의 입가엔, 사악한 미소가 어려있었다. 당웅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금방 해결될 일이니, 마차에서 쉬고 계시면….”

“지금 싸우고 있는 거죠?”

“…예. 산적들이 길을 막고 있습니다.”


“그럼, 내가 나설 차례가 맞네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아버님께 청해 배워둔 무공이 있어요.”

당소소는 흑풍대를 뒤로 물리고, 소매를 뒤적거린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쥐어진 죽통 하나. 당웅은  모습을 보며 자신의 가주가 사랑하는 딸에게 무슨 독을 주었을지 상상했다.



‘극독계열은 아닐 건데…. 혈액독? 아니면, 균류? 아니야. 초심자가 다루기가 어려워. 다루는 것에 실패해도 그다지 큰 반동이 오지 않는 약한 신경독 쪽이 옳겠지.’

당웅은 생각을 마치고, 당소소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가씨, 어떤 이름의 신경독입니까?”


“신경? 아. 무형지독이에요.”


“예? 무형…?”

당웅은 당소소의 말을 듣고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당소소가 앞으로 걸어 나가자, 당웅은 당소소의 앞을 서둘러 막아선다.


“아니, 가주께서 알려주신 독공이 무형지독을 다루는 거였습니까?”


“뭐, 비슷한 거지. 문제 될 게 있어?”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닌가? 문제가 되나?”

‘아무리 가주께서 팔불출이여도, 무형지독을  망나니 딸에게…?’

당웅이 혼란스러워하자, 당소소는 믿음직한 웃음으로 답하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여태 고생했으니까, 잠깐 쉬고 있어. 몸 쓰는 일은, 쉬는 것도 일이야.”

“예? 그게 무슨….”


“후후, 내가 쟤네 피똥 싸게 해줄게.”



당소소는 슬쩍 웃음을 흘리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진명이 단검을 들고 산적과 대치하고 있던 와중, 당소소의 모습을 발견한다.



“헛것이 보이나….”

진명이 고개를 젓고 다시 눈을 돌려 산적의 움직임에 집중하자, 당소소의 위풍당당한 목소리가 길거리를 울렸다.

“멈춰!”

“진짜네.”

진명은 다시 고개를 돌려 당소소의 모습을 확인했다. 산적은 진명에게 겨누고 있던 도끼를 회수해, 다시 당소소에게 겨누며 말했다.



“네년은  뭐냐?”


“어서 길을 열어. 독에 중독돼서 평생을 고생하고 싶지 않다면.”


“뭐라는 거야, 미친년이.”


“흑?”

산적이 콧방귀를 뀌며 손에 쥔 도끼를 당소소에게 던졌다. 당소소는 그 도끼를 바라보며 몸을 움찔거렸다. 진명은 혀를 차며 당소소에게 날아가던 도끼를 잡아챘다.



“어이, 좋게좋게 가려고 했는데 선은 넘지 말자고.”


“무슨 개소리야?”



진명은 산적에게 경고를 던지고 당소소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질끈 감았던 눈을 뜨며 진명을 바라봤다. 진명은 약간 화가 난 얼굴로 당소소를 바라봤다.



“뭐하러 나오셨습니까, 아가씨?”


“적절한 상황에, 적절한 사람이 움직여야 하는 법. 그래야 일이 효율적으로 돌아가지 않겠어?”

“그러니까 뭐하러….”


“이럴 때 쓰려고, 아버지의 독공을 배워왔지. 뒤에서 기다리고 있어.”

“예? 독천의 독공을, 아가씨가요?”

당소소는 진명이 놀라며 던지는 질문에,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그를 살짝 밀어내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독천의 딸, 독화 당소소에 어울리는 거만한 발걸음.




“저년 뭐하냐?”


“글쎄요…. 항복을 하려는 것이 아닐까요?”




극독을 다루는 독술사와 같이, 무심하고 잔혹한 눈길.

“왜 우리를 저런 귀여운 눈길로 노려보는 거지?”

“음…. 금 한 냥이 너무 많아서, 흥정하려는 것은 아닌지?”


“좀 귀여운데, 반 정돈 깎아줄까?”


고운 손으로  죽통을 들어 올리며, 엄숙한 목소리를 뱉는다.

“독천의 딸, 독화 당소소에요.”

“아, 예. 그러시군요.”

미적지근한 산적들의 반응에, 당소소의 볼살이 살짝 떨려왔다. 하지만, 이내 평정을 되찾고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배에 든  싹 쏟아내게 해줄게.’


당소소는 자신감이 있었다. 자신이 해왔던 당소소로서의 연기 중 가장 그럴싸한 연기였기에. 그리고 당소소는 천천히 죽통의 마개를 열어, 바닥으로 흩뿌리며 외쳤다.



“무형지독. 무형, 무음, 무취의 독이에요.”


“무…. 무향? 그게 뭔….”


“너흰, 당가의 무형지독에 중독됐어.”

그녀의 말에 충격을 받았는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 산적들. 당소소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고혹적인 미소를 짓곤 말을 이어갔다.



“어때, 해독약이 필요해?”


“…….”



산적들은 그녀의 말에 서로를 돌아보며 자신들의 몸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우두머리 산적이 옆에 있는 산적을 바라보며 물었다.


“야, 무형지독이 뭐냐?”


“무공 이름 아닐까요? 일단 먹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 먹는 건가?”

“…….”



서로를 바라보던 산적들의 시선이, 착찹한 표정이 된 당소소에게 향했다. 당소소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이런 어설픈 속임수를 알려준 당진천을 원망하고 있을 뿐이었다.



“에휴. 노숙이구만.”


진명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으며, 당웅에게 턱짓을 했다. 당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비수를 쥐었다.

“가지.”

“옛!”



당가의 자랑, 흑풍대가 산적들에게 바람처럼 달려들었다. 산적들은 바람을 만난 풀잎이 되어, 순식간에 바닥에 몸을 눕혔다. 산적을 모두 눕힌 당웅이 진명을 돌아보며 힐난했다.


“진작 이렇게 할 것이지, 무슨 헛짓거리를….”

“쉿.”



진명은 당웅에게 눈치를 주며, 당소소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착잡한 표정으로 빈 죽통을 바라보고 있었다.

“…씨발.”




짧은 욕설과 함께.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