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오장[五章], 군학일계[群鶴一鷄] 10
당소소는 동경을 바라본다. 이젠 익숙한 보라색 눈동자의 미녀가, 지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머리를 빗겨주던 하연은 빼꼼 고개를 내밀어 당소소의 의사를 물어온다.
“이대로 괜찮으신가요?”
“괜찮아.”
“그렇게 긴장하지 마세요, 서신만 전해주는 건데.”
하연은 금색의 비녀를 쥐고, 당소소의 귀 윗머리와 위쪽 머리 조금을 그러모은다. 그리고, 금빛 비녀로 고정한다. 당소소는 손을 올려 비녀로 고정한 자신의 머리를 살짝 매만진다. 하연은 그런 그녀를 보며 웃었다. 그리고, 탁자에 올려둔 빈 죽통을 그녀에게 건넸다.
“무형지독, 챙겨 가셔야죠?”
“우으윽.”
당소소가 얼굴을 붉히며 이상한 괴성을 내자, 하연은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부끄러워하시지 마세요. 당가의 사람들을 위해 나선 거잖아요?”
“…너, 그거 놀리는 거지?”
“흐흐, 아까 운령 도사님을 보면서 깨달으신 게 많으신가 보군요.”
“진짜 그러지마….”
당소소는 부끄러워했지만, 죽통을 챙기며 소매에 숨겼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에서 대기하고 있는 진명과 당웅을 바라봤다. 아니나 다를까 둘은 서로 째려보며 기싸움을 하는 중이었다. 당소소는 한숨을 푹 쉬며 진명에게 말했다.
“진명, 눈 깔아요.”
“아니, 왜 저한테만 그러십니까?”
“제 말만 듣잖아요?”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그래도 좀 억울한데….”
당소소는 그런 진명의 변명을 한 귀로 흘려들으며 눈을 감고 들뜬 감정을 진정시켰다.
‘공식적인 행사에는 처음 나오는 것이라, 내 몸 안에 있던 감정이 긴장한 탓일 거야.’
차분해지는 마음. 당소소는 눈을 떠 창밖에 걸린 달을 바라본다. 그녀는 달을 바라보며, 당웅에게 질문을 던진다.
“당웅, 흑풍대 일조는 지금 어디에 있죠?”
“멀지 않은 곳에서 명령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요. 후우. 갈까요?”
당소소는 창가에 던졌던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린다. 숨을 고르고, 주먹을 움켜쥐고, 청검각의 대강당으로 향하는 걸음을 옮겼다.
*
어둠이 내린 밤. 청랑호의 검은 물결 위에 얹힌 연등이 어둠을 몰아내고 있었다. 그 불빛을 받은 청검각은 어둠을 젖히고 자신의 고상한 전각을 조심스레 드러내고 있었다. 대강당으로 향하는 길. 하연은 그 광경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말했다.
“화려하네요.”
“흥, 다 부질없는 짓이다. 금전이 아깝군. 실용적이지 못해. 제아무리 위세를 드러내고 싶다지만, 이런 식으로 비효율적인 광경은 솔직히 별로군.”
분위기를 깨는 당웅의 말에, 하연의 날카로운 시선이 꽂힌다. 당웅은 그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주위를 경계했다. 진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당웅의 말에 딴죽을 걸었다.
“어휴, 삭막한 새끼.”
“더러운 사파 녀석에게 들을 말은 아니군.”
“이 새끼가 아까부터?”
진명이 단검의 손잡이를 쥐자, 당소소는 그를 돌아보며 인상을 쓴다. 진명은 그 시선에 혀를 찬 뒤, 손을 다시 뗐다. 당소소는 냉랭한 말투로 진명을 꾸짖었다.
“머릿속이 복잡하니까, 조금만 조용히.”
“…예.”
그 말과 함께, 당소소 일행은 청검각의 대강당에 도착했다. 화려한 색상의 등불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고, 온갖 산해진미들의 자극적인 향기들이 퍼져 나온다. 서로 간의 안부를 물으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대화들도, 조금씩 새어 나오고 있었다.
입구에서 피곤한 표정으로 명부를 작성 중이던 제자가, 당소소의 얼굴을 확인하곤 퍼뜩 정신을 차렸다. 당소소는 제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사천당가, 당소소에요.”
“아, 옛! 그, 수행하시는 분들은 따로 옆쪽 소강당에서 음식을 즐기시며 대기하고 계시면 됩니다. 여기, 붓을 들어 이름을 작성해주시면 됩니다.”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붓을 쥐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 세 글자를 적었다.
‘당소소.’
당소소는 자신의 이름을 적고 좀처럼 붓을 떼지 못했다. 감회에 젖어 있는 그녀를 청랑검문의 제자는 이상한 눈으로 바라봤다.
“저, 당소소 소저?”
“아, 네. 잠깐 다른 생각을 해서. 붓은 여기에 두면 되나요?”
“예. 그럼, 부디 연회를 즐겨주시길 바랍니다. 수행하시는 분들은 제가 따로 안내해드리죠.”
청랑검문의 제자가 자리에서 일어선다. 당소소를 바라보는 세 줄기의 눈빛이 느껴졌다. 걱정이 가득 담긴 눈빛들. 당소소는 그 눈빛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웃었다.
“좀 이따 봐.”
“아가씨.”
하연은 당소소의 한 손을 양손으로 쥐고, 그녀에게 말했다.
“아가씨는 사천당가의 독화 당소소에요. 전혀 움츠러들 필요 없어요. 아셨죠?”
“고마워, 하연.”
당소소는 부드러운 손짓으로 하연의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하연은 걱정스런 표정으로 허전한 자신의 손을 움켜쥐었다. 그런 하연과 호위들을, 제자는 무심하게 안내했다.
“가시죠. 그리 먼 곳은 아닙니다.”
“…예.”
당웅이 떠나고, 진명이 떠났다. 하지만 하연은 자리에 남아, 하연은 망설임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답했다. 혹시라도 무서워하진 않을지, 비난을 두려워하고 있진 않을지. 당소소는 그런 하연을 돌아봤다. 하연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이고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당소소는 긴장한 표정을 숨기지도 않았고, 애써 웃음 짓지도 않았다. 그녀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서툴렀다. 적어도, 하연에겐 그러했다. 당소소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담담한 결의가, 하연의 마음을 진정시켰다.
‘무운을.’
하연은 눈인사를 하며 제자의 안내를 받아 떠났다. 당소소는 그들이 떠난 자리에서, 자신이 적어둔 당소소라는 세 글자를 매만졌다. 그리고, 손길을 거두며 웃었다. 시선은 화기애애한 연회에 닿았다.
미담을 주고받는 대화들, 서로의 무예를 칭찬하는 대화들. 서로의 문파에 안녕을 바라는 대화들. 듣기만 해도, 행복에 겨운 왁자함이었다. 그는, 그녀는 이런 왁자함을 좋아했다. 하지만, 당소소는 웃음을 거뒀다.
“미안. 내가 분위기를 못 읽어서.”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연회장에 들어선다. 그녀의 출현을, 청랑검문의 제자가 큰 소리로 알렸다.
“사천당가의 당소소님이 오셨습니다.”
당소소는 그 알림에 맞춰 가볍게 인사를 했다. 분위기는 적막에 휩싸인다. 따뜻한 대화들이 차게 식고, 느긋하던 시선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그저 눈치 없는 곡조만이 애처롭게 울리고 있었다. 그녀는 청랑검문의 제자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자리를 안내해 주실 수 있나요?”
“아, 앗! 네!”
당소소의 부탁을 들은 제자는 허둥지둥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뒤를 따르며, 고개를 꼿꼿하게 세우고 걸었다. 그녀의 움직임에 딱딱하게 굳었던 적막은 몽글거리는 웅성임으로 변해갔다. 그 웅성거림 속, 차마 풀어지지 않은 적개심이 뭉친 조롱이 그녀의 가슴에 꽂혔다.
“저 여자, 당가에서도 내놓은 자식이래. 어찌나 남들에게 못되게 구는지….”
“기루에 자주 드나든다던데, 음주가무에 환장한 년이라는 소문이….”
“화검공자를 그렇게 만든 악녀라며? 아까 청성파의 여도사가 울고불고….”
당소소의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조롱이 들려오는 쪽을 쳐다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 거대한 웅성거림에서 그를 찾기란 어려운 일이었다. 마음 한쪽에 처박아두었던 불안감이 고개를 들었다.
당소소의 숨이 거칠어지려는 찰나,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
“저기요.”
“네?”
“저 그렇게 울고불고하진 않았어요.”
“앗, 아…. 네. 죄송….”
당소소는 숨을 고르고 운령의 목소리를 찾는다. 험담하던 자를 쫓아낸 운령은 여전히 미안했는지,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 황급히 모습을 감췄다. 당소소는 그 모습에 픽 웃으며 긴장을 풀었다.
‘너 그렇게 울고불고했거든….’
당소소는 그런 생각을 하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내하던 제자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갔다. 제자는 사천당가라 적힌 명패가 놓인 탁자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포권을 하며 말했다.
“여기입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시길.”
“감사해요.”
당소소는 제자가 안내한 자리에 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가 자리에 앉자, 긴장했던 분위기는 서서히 풀어지기 시작했다. 이따금 고개를 길게 빼며 당소소를 바라보고 험담을 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아까에 비하면 잘 들리지도 않았다.
‘뭐 했다고 이렇게 지치냐….’
당소소는 길게 숨을 뱉으며 책상 위로 늘어졌다. 그런 그녀에게 다가오는 청성파의 여도사.
“언니, 그렇게 있으면 사람들이 얕봐요.”
“으, 응?”
“사천의 세 세력 중 하나인 당문의 아가씨인 언니가 그런 주책없는 자세를 하고 있으면 어떻게 해요?”
“그, 다 좋은데 언니라는 말은 좀….”
당소소는 몸을 일으킨 뒤, 멋쩍게 웃으며 운령을 바라봤다. 운령은 그 말에, 축 젖은 눈빛을 당소소에게 보였다. 당소소는 그 시선을 외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마음대로 해라….”
“언니는 철혜검봉 백서희 언니를 알고 있어요? 아미파의 유명한 후기지수인데.”
“응, 뭐…. 대충은.”
“오시던 길에 안 계시던가요? 언니가 이렇게 늦을 사람이 아닌데.”
당소소는 어색한 말투로 운령의 질문에 답했다. 운령은 당소소에게 질문을 하고, 팔짱을 끼며 주위를 돌아봤다. 백서희를 찾으려는 행동이었다. 당소소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내가 들어올 땐 아무도 없었어.”
“그런가요….”
“너무 걱정하지 마. 어디 가서 처맞고 다닐 실력은 아니니까.”
“처맞고…?”
“무, 무예가 출중하니까. 응.”
당소소는 자신의 실언을 황급히 얼버무렸다. 그리고 사천당가를 대표해서 온 자신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우물쭈물하고 있는 군소방파의 자제들을 바라봤다. 그리고 운령에게 넌지시 물었다.
“그, 운령이라고 불러도 되지?”
“네, 언니!”
“운령. 다른 분들이 나랑 인사를 하고 싶은 것 같은데, 잠시 자리를 좀 비켜줄 수 있어?”
“네…. 그럼, 좀 이따 올게요.”
운령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물길을 막고 있던 바위가 사라지자, 그녀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기다리던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당소소는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서 일어나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안녕하십니까, 전 구룡현의 구룡문주….”
“아, 네. 사천당가의 당소소라고 합니다.”
“반갑소. 이번에 새로 둥지를 튼 창권문의 사범이오.”
“…당소소에요.”
지루한 인사가 오가고, 그녀는 점점 지쳐갔다. 그런 그녀를 구해주려는, 한 사람이 걸어왔다. 다들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파랗게 질려 뒷걸음질 쳤다. 당소소 또한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질끈 눈을 감았다.
“다들, 인사는 이쯤 하시지요. 그동안 공식석상에서 모습을 보이지 않던 당가의 금지옥엽이 궁금하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무림맹에 전달할 당가의 비전서를 전달해야 하고, 기회가 이번에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소? 조금 시간을 두고, 비전서를 전달한 후에….”
“그만하거라, 아들아.”
그 목소리에, 당소소는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장난스런 눈빛의 정유 옆엔, 그를 닮은 진중한 눈빛의 중년이 서 있었다. 당소소는 서둘러 포권을 하며, 예를 갖췄다.
“사천당가 가주의 딸, 당소소가 청랑검문의 문주님을 뵙니다.”
“청랑검문을 이끄는 정휘라고 하네. 당문의 독화가 그렇게 아름답다던 소문이 있던데, 소문이 실제만 못하군. 그럼, 전달식을 시작해도 될까?”
“네, 기꺼이.”
정휘는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당소소의 포권을 받았다. 그리고, 당소소의 의중을 물어왔다.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품속에서 당진천이 건넨 서신을 꺼냈다. 당소소는 서신을 잡은 손에 힘을 준다.
‘마음에 들지 않아.’
당가가 보유하고 있는 독과 암기의 위험성이 적혀있는 서신. 그리고 그것을 요구하는 정파의 무인들. 마치 해가 없음을 증명하기 위해, 배를 갈라 속을 들여다보는 듯한 느낌이었다. 자신들과는 다른 존재로 취급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논리적으론 이해할 수 있었다. 독과 암기는 칼부림이 빈번한 무림에서도, 경계해야 할 대상이었으니까.
당소소는 생각을 거두고, 정휘를 따라 대강당의 전방에 있는 단상 위에 올라섰다.
“후우….”
당소소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시선이 꽂힌다. 그녀를 궁금해하는 시선들, 고깝게 보는 시선들, 기대에 찬 시선들. 당소소는 그 시선을 모두 받으며, 긴장감에 젖은 웃음을 지었다.
‘난, 당신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무공도, 학력도. 그 어떤 재능도.’
당소소의 시선은, 연회에 자리 잡은 수많은 사람을 바라봤다. 그들은 당소소에 비하면, 곱디고운 학이었다.
어떤 이는 뛰어난 무재[武才]가, 어떤 이는 감각적인 상재[商才]가, 또 어떤 이는 뛰어난 학식[學識]을.
당소소는 돌아서서 정휘를 바라본다. 그런 정휘의 손에, 당진천의 서신을 넘겨준다. 정휘는 서신을 건네받으며,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백도무림의 맹약이, 이로써 또다시 굳건해졌소!”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당소소는 숨을 고르며 다시 좌중들을 바라봤다. 긴장감이 몸을 타고 흐른다.
‘분명, 성공적으로 억눌렀을 텐데.’
“아.”
당소소는 그 긴장감에 의문을 품다, 깨우쳤다.
‘이건, 원래 몸 안에 있던 제멋대로인 감정이 아니야.’
이 상황이 되고 나서야, 지금 몸속에 흐르는 긴장감이 그녀를 멋대로 휘두르는 감정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긴장감의 주체는 바로 김수환의, 당소소의 이성이었다.
‘맞아. 난, 이런 시선들이 두려웠어.’
당소소의 거칠어진 숨소리를 들었는지, 정휘는 그녀를 돌아보며 상태를 물어보는 눈빛을 던졌다.
“많이 긴장했나?”
당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그럼, 앞으로 나가 인사를 해주려무나.”
“네, 문주님.”
당소소는 그렇게 대답하고, 앞으로 걸어 나갔다. 정휘를 바라보던 수많은 학이, 그녀를 바라봤다.
“사천당가의 당소소입니다.”
적의가 한 점 한 점, 눈처럼 내리기 시작한다. 쌓인 적의는 침묵이 되었다. 당소소는 떨고 있는 손으로 주먹을 쥐고, 그들을 바라봤다. 수많은 시선이 스쳤다. 그리고, 그들이 당소소를 바라봤다.
대해검호라 불리게 될 정유가 당소소를 마주 봤다. 청성제일검이라 불릴 운령이 당소소를 마주 봤다. 저 멀리 문가에 몸을 기대고 있는, 철혜검봉 백서희가 당소소를 마주 봤다.
당소소는 잘게 떠는 손으로, 그들에게 포권을 했다.
“부디, 어여쁘게 봐주시길.”
학들의 연회에서, 실뜨기를 시작한 병아리는 작은 울음소리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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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독심[一片毒心] - 오장[五章], 군학일계[群鶴一鷄]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