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2화 〉육장[六章], 설중개화[雪中開花] 1
눈이 내린다.
풀잎들은 적의라는 물기를 뿜는다.
그 물기는 서릿발처럼 내리는 폭력에 젖어서 하나가 되고,
그 매운 진눈깨비가 대지를 때리면 꽃잎은 찢기고 나무는 시든다.
그리고 그 설중[雪中]에서, 망울진 한 꽃은 희미한 향을 풍기며 피어난다.
*
정적.
당소소의 인사는 켜켜이 쌓인 적의를 밀어내기엔 부족했다. 당소소는 그들의 반응에 살짝 고개를 숙이며 웃었다.
‘뭐, 이럴 거라는 것쯤은 알고 있었어.’
그녀는 떨리는 손을 숨기며 포권을 풀었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뒤돌아서려는 찰나, 정유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 줌의 박수를 던진다. 운령도 그에 질세라 서둘러 손뼉을 마주쳤고, 그들의 인도에 마지못해 건성으로 치는 손뼉은 애매한 소리를 냈다.
하지만 뒤로 숨긴 적의와, 밀려난 침묵에 당소소는 감회에 젖은 숨결을 뱉었다. 인위적인 광경이었지만, 적어도 그녀에겐 처음 겪는 사람들의 환대였다.
“신기한 기분이야….”
그런 당소소를 유심히 지켜보던 정휘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앞으로 자주 봤으면 좋겠군, 당 소저.”
“…감사합니다.”
당소소는 정휘의 말에 답한 뒤, 단상에서 내려가 자리로 향했다. 그들은 언제 박수를 쳤냐는 듯, 다시 숨겨둔 적의를 꺼내 들며 당소소를 바라봤다. 당소소는 그 시선을 느끼며 한숨을 쉬었다.
‘내가 몹쓸 짓을 하고 다녔다지만, 이건 너무 노골적인데.’
당소소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리에 앉아 턱을 괴었다. 단상 위에선 정휘가 사천교류회의 축사를 읊자, 질시 어린 시선은 점점 잦아들었다. 그런 그녀의 곁으로, 한 여인의 인영이 성큼성큼 다가와 앉는다.
“오랜만이네. 아니, 오랜만은 아닌가?”
“백서희.”
당소소는 자리에 앉은 백서희를 바라봤다. 백서희는 자신의 땋은 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어때, 네가 직접 받아보는 질투와 시기는?”
“…….”
“썩 기분 좋은 경험은 아니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가요.”
당소소는 냉랭한 태도로 그녀의 말을 받았다. 접근하지 말라는 말을 하던 그녀가, 먼저 다가와 자신에게 말을 건넨다. 의도가 읽히지 않았다. 당소소는 괴었던 턱을 풀며 그녀를 경계했다. 백서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네가 괴롭혔던 다른 이들도, 이런 고통을 받았다는 것을 알았다면 좋겠다는 이야기였어.”
“…조언, 감사합니다.”
“응,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거 하나였어. 그럼.”
백서희는 그렇게 말을 남긴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떠나려는 발걸음을, 일말의 연민이 잡는다. 백서희는 귀찮다는 듯, 긴 한숨과 함께 몇 마디를 더 덧붙인다.
“후우…. 묵가장의 남매들이 널 매우 싫어할 거야.”
“네? 묵가장…?”
“사천교류회는 총 다섯 곳에서 개최돼. 청랑검문, 묵가장, 아미파, 청성파, 당문. 전년도의 사천교류회는 당문에서 개최됐었지.”
“…….”
당소소는 백서희의 말을 채 듣기도 전에, 어떤 문제가 발생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또 다시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으며 생각했다.
‘아니, 씨발…. 또 나야?’
“그…. 잘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작년 사천교류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주실 수 있을까요?”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겠지만. 네가 묵가장의 여식인 묵이현에게 꽤 큰 모욕을 줬다고 들었어. 지금 이 시선들, 너도 느껴져?”
백서희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이쪽을 바라보는 자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황급히 고개를 돌리고 시치미를 떼는 자들. 백서희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갔다.
“아마, 작년의 나에게 했던 것처럼 헛소문과 비겁한 암계 같은 것을 썼겠지.”
“그건, 죄송….”
“사과를 받자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야. 단지, 운령의 부탁을 받아 알려준 것일 뿐. 이 시선들, 이 혐오들. 네 소문 탓도 있겠지만 그 두 남매가 주도하는 것이기도 해. 묵가장은 사천성 군소문파의 수장과도 같은 문파니까. 그럼, 잘 해보도록 하고.”
백서희는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뗐다. 그녀가 사라지자, 단상에서의 축사도 끝나고 정휘가 퇴장했다. 그에 맞춰서, 잦아들었던 험담과 시선들은 밀물이 밀려오듯 당소소의 마음에 부딪혀왔다.
“저거, 거만한 표정을 좀 봐…”
“에휴….”
당소소는 한숨을 쉬며 눈을 감았다. 좋은 시선을 바라진 않았다. 어차피, 자신은 악역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리 큰 기대도 하지 않았다. 이 행사는 곧 마칠 것이고, 이 유치한 시선들 또한 곧 그치겠지라는 생각이었다. 헤어진다면, 일 년간 볼 일이 없는 자들일 테니까.
“어머, 당 소저님. 오랜만에 뵙네요. 일 년 만인가?”
반대로 생각한다면, 그들에겐 일 년에 한 번 찾아온 기회나 마찬가지였다. 부정적인 감정을 흘려내는 당소소에게, 남녀 한 쌍이 찾아와 인사했다.
“정확하겐 열한 달이지. 누이.”
당소소는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검은색 계통의 무복을 걸친 사내. 두 개로 동여맨 쪽 머리를 천으로 감싼 모양새의 여인. 당소소는 그들이 자신을 소개하지 않아도, 어떤 이들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묵가장의 두 자제분을 봬요. 사천당가, 당소소입니다.”
“언제부터 우리사이에 그런 격식을 차렸다고 그러세요? 저희, 친했잖아요?”
“네?”
“새삼스럽지만, 묵전이라고 하외다. 자리에 좀 앉겠소.”
자신을 묵전이라 소개한 묵가장의 인물은, 당소소의 동의도 구하지 않고 털썩 자리에 앉는다. 묵이현은 들고 온 부채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자리에 앉아 당소소를 바라봤다. 당소소는 눈을 가늘게 뜨며 그 둘을 번갈아 봤다.
‘친하다? 그럼, 백서희의 말은 거짓말인가? 아닐 텐데. 쌍검무쌍에서의 그녀는 게을렀지만, 거짓말은 하지 않았어. 그럼 따로 꿍꿍이가 있다는 건데.’
“식사는 하셨나요?”
묵이현의 질문이 당소소의 생각을 끊었다. 당소소는 고개를 저으며 대화를 시작했다.
“아뇨, 아직.”
“그럼, 친한 저희끼리 같이 식사라도 하면서, 좀 더 친목을 다져보죠.”
“이보시오.”
“예, 말씀하십쇼.”
“여기 술 세 병과 고기볶음 하나만 가져다주시오.”
당소소의 대답이 떨어지자, 둘은 제멋대로 입을 열며 돌아다니는 제자를 불러 음식을 주문했다. 당소소의 미간이 좁아졌다. 예법을 잘 모르는 당소소조차, 그들이 상당히 무례한 행동을 하고 있다는 중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무례의 발화점은 당소소가 했던 지난날의 행동.’
당소소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적개심을 숨겼다. 그리고, 입을 열어 사과했다.
“지난날의 잘못은 뼈저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어머, 우리사이에 그런 것 가지고. 저희는 그런 거 전혀 신경 쓰지 않아요. 그렇지, 오빠?”
“물론. 같은 정파끼리 이런 사소한 일들을 가지고 왈가왈부하다니, 저희 남매를 그리 옹졸한 사람으로 봤소? 내 새삼 당 소저의 안목에 실망이 크오.”
“…죄송합니다.”
당소소는 그들이 던지는 말에 내심 안도를 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약간 무례한 태도를 통해 자신의 잘못을 성토하려는 것 같다고, 그녀는 판단했다.
‘그래도, 다른 일들보단 쉽게 풀려서 다행이야.’
“용서해주셔서, 감사드려요.”
“별말씀을. 저희는 손을 잡고 같이 가야 할 사천성의 정파잖아요?”
당소소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묵이현도 그 웃음에 싱그러운 미소를 지어 주었다. 옆에 앉은 묵전은 의자를 뒤로 까딱이며 당소소를 마주 보고 있지 않았다. 묵전은 시선을 돌려, 지나가던 제자를 붙잡고 물었다.
“음식은 언제 나오는 거지?”
“이제 막 가지러 갔으니, 좀 기다리셔야 할 듯….”
“지금 사천당가의 금지옥엽께서 기다리시는 게 안 보여!”
“예, 옛?”
묵전의 고함에, 강당의 이목이 쏠렸다. 당소소의 눈가가 움찔거리며 묵전의 말을 짚었다.
“전, 기다린 적이 없는데요.”
“아, 참. 기다리시오. 감히 당문의 아가씨를 모욕하는 이들은 내 참을 수가 없어서. 아무리 최근 두각을 나타내는 청랑검문이라지만, 대체 어떤 생각으로 당 소저를 이리 모욕하는지…!”
“지금, 무슨 소리신가요.”
당소소는 정색을 하며 묵전에게 대꾸했다. 묵전은 당소소의 그 말을, 무덤덤한 표정으로 받아넘겼다.
“아, 기다리지 않았군. 그럼, 내가 사죄를 드려야지. 미안하오, 당 소저.”
“…….”
“헌데, 작년이 기억이 나지 않으신가 보오?”
비아냥거리는 묵전의 말. 당소소는 입가를 움찔거리며 터져 나오려는 욕설을 구겨 넣었다.
그의 의도는 이해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을 깎아내려, 자신들이 당했던 것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는 것. 그렇기에, 당소소는 어떤 행동을 취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냥…. 내버려 둬야 하나?’
“오빠도 참, 짓궂다니깐. 우리 아름다운 독화 당소소님께서 그런 것을 바라셨을 것 같아?”
“네가 여자는 얼굴값을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푸훗, 그건 농담이지. 그렇죠, 당 소저?”
“…….”
당소소의 눈은 가늘어졌다. 그들의 목적은 대화에 익숙하지 않은 그녀조차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노골적이었다.
우선 당소소를 화나게 만든다. 그리고, 자신들의 편에 선 군소방파의 인물들을 부려 그런 당소소를 우스꽝스러운 존재로 만든다. 별 것 아닌 것으로 화를 내는, 당가의 망나니로. 이미 모두가 알고 있다지만, 소문으로 떠도는 이야기와 직접 눈앞에서 보이는 것은 다를 테니까.
당소소는 날뛰기 시작하는 감정을 진정시켰다. 이 감정을 따라간다면, 예전의 그녀와 다를 바가 없었다. 지금의 당소소 자신은 소박하고 평범한 사람이었다. 당소소는 한숨을 푹 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당장은, 그들의 의도대로 움직여주고 싶었다. 자신의 잘못이었으니까.
“네, 그렇네요.”
“역시 그렇다잖아, 오빠. 주책은.”
“이거, 당소소 소저가 이 묵전을 우스꽝스러운 사람으로 만들려나 보군. 음식을 기다리는 것 같기에, 언제 오는 지 물어봐 주었을 뿐인데.”
“…아쉽게도, 전 그런 마음을 품은 적이 없어요.”
당소소는 그렇게 대꾸하며 시선을 멀리 돌렸다. 악의에 노출되는 아픔은 아쉽지만, 그녀에겐 익숙했다. 당소소는 짧게 숨을 뱉고, 무릎에 손을 올려 손가락을 두드렸다. 빨리 이 상황이 지나갔으면 하는 마음을 품으며.
묵전과 묵이현은 그런 당소소를 바라보며, 통쾌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묵이현은 부채로 자신의 입가를 가리며 생각했다.
‘저년, 뭔가 잘못먹은 것 같은데…. 오늘은 꽤 고분고분해.’
‘감히 작년 사천교류회에서 그런 모욕을 주다니.’
묵전은 웃음을 지우고 먼 곳에 시선을 둔 당소소를 노려봤다. 묵가장의 무공에 대한 멸시와, 실력을 보고 싶다며 초청한 녹풍대와 맞서 싸우게 했던 작년의 사천교류회.
묵전은 독에 중독되어 바닥을 나뒹굴었던 치욕을 떠올린다. 왜인진 모르겠으나, 당소소가 순순히 용서를 구하는 지금이, 그에게는 복수를 할 수 있는 적기였다.
“고기볶음과 술 세 병을 가져왔습….”
턱.
묵전은 딴청을 피우며, 묵가장의 보법으로 음식을 가져오던 청랑검문의 제자에게 발을 걸었다. 쟁반은 허공을 유영하고, 바닥에 쏟아질 위기에 처한다.
“저런!”
당황하는 척, 일어서며 탁자를 내리친다. 충격이 퍼져나가고, 쟁반의 궤도는 바뀌어 당소소의 상체에 걸렸다.
접시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당소소의 옷이 붉은 양념과 톡 쏘는 주향을 지닌 술로 더럽혀졌다. 당소소는 자신의 옷을 내려다보며 말을 잃었다.
“…….”
“괜찮소? 이거야 원, 오늘 재수가 없으려나.”
“어머. 괜찮아요? 그래도 다행이다. 그렇게 비싸 보이진 않는 옷 같아서. 이럴 때 보면 당문의 실용이라는 가풍은 참 좋단 말이죠?”
말을 잃은 당소소를 골려 먹는 묵가장의 남매.
당소소는 더럽혀진 옷을 움켜쥐며 하연의 얼굴을 떠올린다. 어울리는 옷을 찾는다며, 몇 시간을 갈아입히고 부족하다면 저잣거리에 나가 구해온 비단옷들. 그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먼저 들었다.
그런 그녀에게 좌중들이 던지는 조소가 달려들었다.
“저거 가짜 비단이었어? 어쩐지….”
“색깔도 흉한게, 양념을 뒤집어써도 어째 색이 똑같네?”
“저런 덜떨어진 사람이 독천 당진천의 딸이라고? 믿을 수 없어. 꼬질꼬질한 게, 어디서 주워온 거 아닌지 몰라?”
당소소는 고개를 들어 묵가장의 남매를 바라봤다. 일련의 소란을 느꼈는지, 정유가 달려와 그 셋 사이를 끼어든다.
“이게 무슨 일이오? 대체 어떤 연유가 있어서 당소소 소저의 옷이 이렇게 더럽혀졌단 말이오? 이걸 가져온 제자를 제가 엄벌하겠소. 그러니, 세 분은 진정하고 자리에 앉으시오. 소란이 끝나고 음식은 이 정 모가 더 좋은 것으로 가져다줄 테니. 당소소 소저, 괜찮소?”
“…….”
당소소는 정유의 물음에도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표현을 하지 않았을 뿐, 감정은 성공적으로 제어할 수 있었다. 당소소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정유의 물음에 답했다. 정유가 볼에 흐르는 식은땀을 닦은 뒤, 제자를 일으켜 추궁했다.
“너, 무슨 짓이냐? 이런 터무니없는 짓을 하다니. 사천교류회가 엉망이 되었잖나? 사천당가의 독천 선배님도 우릴 어떻게 생각하겠나? 정말 이것밖에 안 되는 사나이였나? 자랑스런 청랑검문의 제자가!”
“…죄송합니다. 헌데, 제 발이 어딘가에 걸려서….”
당소소는 정유의 소매를 잡았다. 정유가 그의 뒤를 돌아보자, 고개를 저으며 그를 탓하지 말라는 말을 했다.
‘전, 괜찮아요.’
“묵가장 이 씨발년놈들이, 진짜 뒤지고 싶지? 너희 옷도 다 찢어줘?”
당소소의 걸쭉한 욕설에, 청검각의 대강당은 모두 말을 잃었다. 오직 당소소만이, 자신의 실언을 눈치채고 다만 짧은 감탄을 했을 뿐이었다.
“어, 씨발.”
“…….”
당소소는 정유를 바라봤다. 정유는 슬쩍 눈을 돌려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