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육장[六章], 설중개화[雪中開花] 4
천괴는 당소소의 말에 잠시 얼이 빠져나간 듯,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재밌군.”
천괴가 당소소를 바라봤다. 그 시선에, 당소소의 몸엔 긴장감이 흐르기 시작했다. 묵전을 고문하고 다른 이들을 살해하던 그의 모든 주의가, 그녀에게 향하고 있었다. 당소소는 감정이 고조된 숨을 뱉는다.
천괴라는 관객이 자리에 앉았다. 당소소는 다시 숨을 들이켜며 쌍검무쌍의 내용을 되새긴다. 그 내용은 대본이 되어 그녀의 손에 들린다. 당소소는 그 기억을 움켜쥐고 한 걸음 앞으로 걸어간다. 무고하게 죽어간 시체들과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청검각의 강당은 그녀가 오른 무대였다.
“천괴. 쾌락에 목을 맨 추악한 늙은이.”
“호오.”
당소소는 쌍검무쌍의 서술 한 줄을 읽었다. 관객이 반응하기 시작한다. 백서희의 검에도 그저 웃어넘기던 천괴의 동요. 당소소는 그 동요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 관객은, 무대에 오른 그녀에게 모든 정신을 몰입하고 있었다.
그는 손에 낭자한 선혈과 폭력을 내려놓고, 당소소가 넌지시 내민 그럴싸해 보이는 극장에 앉은 것이다.
‘지금 나에겐, 저 살인귀들을 제압할 무력도 그들을 속일 수 있는 뛰어난 지능도 없어.’
당소소는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천괴의 몸은 이제 앞으로 나서는 그녀에게 완전히 돌아서 있었다. 당소소는 자신을 바라보는 운령을 돌아봤다.
‘오직 내게 있는 것은, 전생이 기억하는 쌍검무쌍의 내용 하나.’
“운령.”
“언니, 청운적하검은…. 그게, 전 아직 잘 몰라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전 몰라요. 아니, 익히긴 했는데, 그게….”
운령은 당소소의 시선에 횡설수설하며 눈물을 흘린다. 당소소는 그 눈물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넌, 알고 있어.”
청운적하검은 청성파에서도 극히 소수의 인원에게만 허락되는 고절한 검술이었다.
청운[靑雲]이라 불리는 유검[柔劍]과 적하[赤霞]라 불리는 강검[强劍]을 넘나들며, 순간순간 양극단으로 흐르는 변화를 통제해야 하는 그야말로 극악의 검술. 그 악명높은 난이도 덕에 본산의 모든 제자에게 열려있지만, 그 누구도 익힐 수 없던 검술이었다.
하지만 운령은 쌍검무쌍에서도 손꼽히는 천재였다. 그녀의 축복받은 무재는 청운적하검의 그 고고한 문조차 손쉽게 열게 했다. 운령은 당소소의 말에 떨리는 몸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미안해요, 언니. 거짓말이야. 사실 알고 있어요. 그런데, 무서워요. 그냥 무서워요….”
단지, 무서웠을 뿐이었다. 어린 여인의 몸으로 토해내는 그 미증유의 힘이, 그 힘을 다루는 고통이, 이 힘을 마주할 상대방에 대한 걱정이. 그 모든 감정이 응어리진 공포가 그녀의 구름을 흘러가지 못하게 단단하게 묶고 있었다. 운령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떨궜다.
당소소는 무공을 알지 못한다. 또, 번뜩이는 지혜로 타개책을 제시해줄 수도 없었다. 단지 자신이 알고 있고, 곧 이루어질 미래에 대한 한 구절을 읊어줄 수 있는 게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청성의 검법은 구름이라고들 하지?”
“흐윽, 네.”
“운령, 구름은 무엇이든 될 수 있잖아.”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흥미로운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천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늘을 담은 푸른 구름도, 지평을 적시는 붉은 노을도. 모두, 네가 원하는 데로야.”
운령은 당소소의 말에 들썩이던 어깨를 멈추고 그녀를 바라봤다. 여리고 작은 어깨였다. 희고 고운 손은, 굳은살이라곤 없었다. 느껴지는 기운조차 미력해 내공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를 둘러싼 소문은, 일자무식에 패악질을 일삼는 망나니였다.
그런 그녀가, 구름의 검을 이야기했다. 운령은 떨리는 손을, 허리에 가져갔다. 그리고 청운적하검을 익히고 나서 몇 달간 쥐지 못했던 검을 쥐었다. 당소소가 남긴 말에는, 묘한 힘이 있었다.
“모두, 내가 원하는 대로….”
당소소는 천괴의 앞에 섰다. 천괴는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내가 쾌락에 목을 맸다? 더 이야기해줬으면 좋겠는걸.”
“흐으윽!”
천괴는 묵전의 어깨에 박아놓은 방천극을 뽑았다. 묵전은 신음을 흘리며 핏물이 터져 나오는 상처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피가 번들거리는 방천극이 당소소의 눈앞에 겨눠졌다. 당소소는 그 예기와 피비린내에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꼬맹이, 사천성에서 넌 제법 유명하다는 건 알고 있겠지?”
“알아.”
“큭큭, 맹랑하군. 꼬맹이.”
사천당가의 막내딸에 대한 소문은, 정파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고 있는 흑림총련의 간부들이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그야말로, 안하무인의 망나니.
하지만 천괴가 실제로 마주한 그녀는 달랐다. 소문의 장막에 숨겨져 호부 밑의 견자인 줄 알았던 그녀. 장막을 들추자, 그녀에겐 총기를 보이는 눈과 상황을 주도하는 판단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천괴는 방천극을 비틀어 그녀의 어깨 위에 올린다. 하얀 칼날이 그녀의 가는 목에 드리워졌다. 얼굴에 어리는 공포심. 하지만, 그녀의 눈에는 확고한 신념이 어려있었다. 천괴는 내심, 그녀에게 놀람을 감출 수 없었다.
‘시체가 즐비한 이 상황…. 내 살기를 여과 없이 받는 지금, 무공을 모르는 처자가 저런 태연한 표정을 짓는다? 과연, 독천의 명성에 걸맞은 딸이야.’
‘이 무서움은 통제할 수 있어, 이 무력감도 통제할 수 있어…. 난 죽지 않아. 죽는다면 난, 미래에 쌍검무쌍의 주인공 손에 죽을 거야. 여기서 죽지 않아.’
당소소는 당장이라도 주저앉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천괴를 마주 본다.
‘이 공포는, 과거에서 온 것이 아닌 오로지 나에게서 비롯된 것. …통제 할 수 있어.’
“당신의 인생은 불우했어. 그리고, 불우할 거야.”
“지금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나 보군. 내 손가락에 조금이라도 힘을 가하면, 꼬맹이, 네 목은 땅에 떨어진다고.”
찰칵!
방천극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고, 그녀의 얼굴이 비칠 정도로 날이 선 방천극의 칼날은 조금 더 가까워졌다. 당소소는 그 칼날을 슬쩍 내려다본다. 오금이 저렸다. 하지만, 주저앉는 건 그녀의 이성이 허락하지 않는다. 다시 시선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하지만 죽이지 않잖아. 그렇지? 당신은 내가 입에 담았던, 천리라는 것이 궁금한 거잖아.”
“…맹랑한 줄만 알았더니, 요망하기도 하였나.”
당소소는 손을 들어 방천극의 칼날을 밀어낸다. 그녀의 손짓에, 방천극은 밀려 나간다.
“그래. 목에 칼을 겨눈 상태라면 긴장해서 입을 열지 못할 수도 있겠지. 너라면 아니겠지만…. 어디, 한번 읊어보아라.”
천괴를 자극하는 것은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이미 그의 머릿속에서 별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팽배해져 있었다. 기만이라면 사지를 잘라 흑림총련의 두령에게 던져주고, 아니라면 그것으로 본전이라는 생각. 그의 신경은 당소소의 붉은 입술에 쏠려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입이 열렸다.
“천괴 담륭. 북방의 군부에서 흘러들어온 퇴역군인 출신.”
“조사를 꽤 했나 보군? 하긴, 사천당가의 녹풍대라면 사천성의 모든 정보를 꿰고 있을 법해.”
“부당한 명령을 내리는 상관의 명령에 따라 출전하다 전우를 모두 잃고, 상관에게 욕설과 폭력을 행사하여 하극상을 벌인 것이 표면적인 퇴역의 이유.”
“그래. 그 상관을 패고 난 퇴역군인이 되었다. 근데, 그것이 무슨….”
“그 전우들, 당신이 죽였잖아?”
여유롭게 웃고 있던 천괴는, 미소를 잃었다. 당소소의 말은 이어져갔다.
“비극적으로 부모님을 잃고, 밥을 빌어먹는 유년 시절을 보내고, 하루라도 맞지 않는 날이 없었고 그렇기에 살기 위해 군부에 투신….”
“그래….”
“군부에서도 약한 몸을 가진 당신은 억압된 자들이 분노를 표출하기 위한 대상이 되었어. 그리고, 그 괴롭힘의 끝에 난생처음 전우를 죽였겠지.”
“그래, 맞아…. 아직도 기억나. 배를 찢기고, 내장이 흘러나오는 상황에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날 바라보는 두 눈동자.”
천괴의 입꼬리가 내려갔다. 반개하던 눈을 부릅뜨며 당소소를 바라본다. 당소소는 그 눈빛에 잠시 숨을 멈췄다.
“생명이라는 거대한 불씨가,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믿는 것에 의해 꺼져가는 그 광경…. 눈이 멀 정도였어, 꼬맹아.”
“…후우.”
“그래서 난 잠깐 그 아름다움에 미쳐서, 동료들을 모두 죽였었다. 하지만 그 끝에 찾아오는 것은 지독한 허무뿐. 열을 죽이고 백을 죽여도, 그 아름다운 순간이 영원할 순 없었다.”
당소소는 그가 덤덤히 털어놓는 말에 정신이 오염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잔인하고 반인륜적인 행각을 마치 숨을 쉬는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행동인 양 털어놓는 천괴. 그의 행적을 모두 알곤 있었지만, 그의 말이 계속될수록 관자놀이가 시큰거렸다.
“그 행동이 계속될수록, 난 혼자가 되었고 당연하게도 동료를 죽인다는 극상의 쾌락은 누릴 수 없었다. 관에게 쫓기고, 정파의 협객들에게 쫓겨 난 이곳 사천성까지 도달했어.”
“…흑림총련의 두령이 당신에게 욕망을 충족시켜 줄 동료를 주겠다고 제안했지.”
“크흣!”
혐오가 묻어나는 당소소의 말. 천괴는 말없이 웃으며 당소소를 바라봤다.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던 자신의 비밀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녀에 대한 궁금증이 더욱 커졌다. 그리고, 살심 또한.
‘사천교류회의 후기지수들을 살려서 데려오라는 두령의 권고. 사파의 입지를 늘리기 위해서라는 목적을 이해도 했고, 받아도 들였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의 말을 어기고 싶어지는걸.’
천괴의 살의가 당소소의 몸을 훑었다. 당소소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온몸의 근육에 힘을 주었다. 힘겹게 열리던 입술도 그 끈적한 살의에 말을 잊었다.
하지만, 이대로 말을 멈추면 그는 객석에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내려놓았던 폭력을 움켜쥐고, 한편의 극을 마친 그녀의 숨통을 끊으려고 들것이다. 당소소는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래서 당신은, 사람을 속이기 위해 천리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돼. 그럴듯한 말로 사람을 속이고, 뒤에서 사람을 해치는 쾌락을 즐기기 위해서.”
“똑똑해. 아주 똑똑해. 그런데, 그 똑똑한 머리로 내 비밀을 나불거리면 이르게 될 천리를 이해하지 못했나?”
“날 죽일 수 있어?”
당소소의 물음에, 방천극은 주저 없이 움직이며 그녀의 심장을 찢어갔다. 당도하기 직전, 그녀의 말이 천괴의 귀에 먼저 닿았다.
“내 말이 기억나지 않나 보네. 나도 천리를 좀 볼 줄 안다고.”
“무슨 뜻이지?”
방천극은 당소소의 가슴 앞에서 멈췄다. 당소소는 공포에 젖은 숨을 뱉는다. 그리고, 천괴의 물음에 답했다.
“네 죽음에 관해서도 말해줄 수 있다는 거야. 그래도, 정말 날 죽일 수 있어?”
“크핫, 정말이지 요망하기 짝이 없는 꼬맹이군! 좋아. 내가 맞이할 천리에 대해 말해보아라. 말하지 않는다면, 죽을 것이다.”
“좋아. 그건 어렵지 않지.”
당소소는 그의 최후를 떠올렸다. 그리고, 그가 겪을 최후에 대해 가감 없이 말해주었다.
“넌, 여기서 죽을 거야.”
방천극이 튕겨 나갔다. 푸른 도복이 물결친다. 새하얀 검신은, 구름처럼 자유로이 허공을 유영하며 마침내 천괴를 향해 겨눠진다.
풍운세[風雲勢].
저 하늘의 구름처럼 잡힐 듯 잡히지 않고 흘러 흘러 마침내 그 끝에 이르는, 청운적하검의 기수식. 부드러움과 강함이 교차하며 천지를 휘돌고 만물에 부딪혀갈 흐름의 예고.
그것은, 검으로 표하는 청성의 예[禮].
운령은 눈물 자국이 있는 얼굴을 들어, 천괴를 바라봤다. 그리고, 당소소의 말을 되뇌었다.
“하늘을 담은 푸른 구름도, 지평을 적시는 붉은 노을도. 모두, 내가 원하는 대로.”
바람이 불었다. 검은 흐른다. 안녕을 묻는 기수식도 그 바람을 따라 푸른 구름으로 흐른다.
카득!
철이 맞물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방천극과 낡은 고검이 제 몸을 부딪친다.
“맹랑한 꼬맹이가!”
“난 구름이야.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하얗고 거대한 구름…!”
청성의 제일가는 검이, 드디어 오랜 녹을 털어내고 그 시린 아름다움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