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6화 〉육장[六章], 설중개화[雪中開花] 5 (36/130)



〈 36화 〉육장[六章], 설중개화[雪中開花] 5

당소소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운령을 바라봤다. 운령은 그런 그녀를 슬쩍 돌아보며 외쳤다.


“가요, 언니!”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시선은 주변을 훑는다. 천괴와 학귀의 난입, 그들에게 달려들어 죽어간 많은 사람들. 그리고, 바깥에서 흑림총련의 정예와의 전투. 상황은 그렇게 좋진 않았다.

하지만, 그럭저럭 당소소의 의도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흑풍대를 보내 더 큰 피해를 막았고, 대피시킬 수 있는 자들을 최대한 대피시켰으며, 쌍검무쌍의 지식으로 시간을 끌어 운령이 정신을 가다듬고 검을 뽑을 시간을 벌었다. 그리고, 그 시간은 당소소의 목숨을 구했다.

‘최악은 아니야. 최악은….’


당소소는 그렇게 생각하며 바닥에 쓰러져있는 시체를 바라봤다. 물론, 최악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선도 아니었다.




‘집중하자.’

당소소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런 잡념은 당진천의 가르침에 어긋났다. 잡다한 것을 잊은 채로, 오직  나은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일만을 생각해야했다. 당소소는 다시 눈을 뜨고, 피를 너무 흘려 창백해진 묵전에게 다가갔다.



“흐윽, 으윽…!”

“움직일  있어?”

“…너, 왜 나를…?”


고통스러운 얼굴로 의문을 뱉는 묵전. 당소소는 그러한 쓸모없는 것에 답변을 하기보다, 피가 흐르는 그의 어깨를 바라보며 어떻게 지혈해야할 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주변을 둘러본다. 마땅한 천 같은 것은 없었다. 당소소는 혀를 차며 소매에 숨겨둔 비수를 꺼내들었다.


찌익!

그녀는 비수로 소매를 찢어 지혈을 할 천을 만들고, 그의 어깨에 강하게 동여맸다. 묵전이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내며 당소소를 거칠게 밀어냈다.

“으, 으윽!”


“좀 참아, 씨발아.”

당소소는 인상을 쓰며 욕을 뱉고, 다소 거친 손길로 매듭을 맸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저앉아 울고 있는 묵이현을 바라본다. 당소소는 둘은 이 싸움에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을 내렸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묵전을 보며 말했다.



“너희 둘은 여기서 나가.”

“으윽…. 날 왜 구해준거지?”



묵전은 자리에서 일어나 당소소를 바라봤다. 당소소는 뺨에  피를  문지르며 말했다.

“너네 예뻐서 구해준  아니니까, 빨리  동생 데리고 꺼져.”


“…….”




그는 더 이상 이야기 하지 않았다. 비척거리는 걸음으로 묵이현에게 다가가, 대강당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학귀는 놓치지 않았다. 진명을 쫓아다니던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묵가장의 남매를 바라봤다.

“안 돼. 생살을  찔러야해.”

“어이, 거지영감. 안 쫓아오고 뭐해? 이 선배의 발놀림을 따라잡지 못하겠어? 이래서 기수가 딸리는 애들은….”


“큭큭! 아가야, 그런 같잖은 도발로  즐거움을 막아설 순 없단다.”


진명은 비 오듯 땀을 흘리며, 힘겨운 목소리로 학귀를 도발했다. 하지만, 학귀는 진명의 도발을 웃어넘기며, 발걸음을 틀었다. 진명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떨궜다.



“하, 씨발….”


진명은 자신의 주제를 잘 알고 있었다. 학귀 번중은, 자신이 사파에 몸담았을 때부터 살업으로 이름을 날리던 고수였다. 절정에 이르지 못한 자신의 무예로 부딪혔다간 반드시 죽는다는 것쯤은 몸으로 깨닫고 있었다.


그가 살인으로 단련해나간 무술은, 이미 일가를 이룰 수준이었으니까. 그가 아직 죽지 않은 것은, 단혼사로부터 그가 몸담고 있는 경지의 편린을 잠시 느껴서일 뿐이라는  또한 알고 있었다.


스릉!


진명의 허리춤에서 단검이 뽑혀 나왔다.




“이제 땀을 좀 뺐으니, 맞짱이나 한번 뜰까? 후배야.”



하지만 그에겐, 계약을 맺은 주군이 생겼고 그녀는 자신을 믿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녀가 하고자 하는 것을 따르는 것도 자신의 주제였다.

진명은 학귀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학귀는 묵이현과 묵전을 향해 걸어가던 걸음을 멈추고 진명을 돌아본다. 학귀의 왼손에 쥐여진 살점이 묻어있는 꼬챙이가 점점 그의 가슴께로 올라간다. 진명의 시선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묵가장의 남매들에게 향했다.


‘대충 저 남매가 빠져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일 각.’

“진명, 안 돼!”


주군의 외침이 들려온다. 진명은 그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저 좆밥 아닙니다, 아가씨.”

등을 굽혀, 자세를 낮춘다. 좁은 보폭은 오른발을 내밀어 좀  키운다. 하중이 단단해지며 전신에 탄탄함이 깃든다. 앞으로 내민 양손은 조그마한 타원을 그리며, 위아래로 움직임을 보였다.  움직임은, 어디로 뻗어갈지 모르는 가변성과 뻗어나가는 행동에 힘을 실어준다.


진명의 자세에 학귀의 꼬챙이에는 검기가 어린다. 살점이 쪼그라들고, 혈기가 증발하며 핏빛의 증기를 뿜었다. 그 으스스한 광경은, 그의 별호처럼 잔학한 마귀같은 모양새였다. 학귀는 불만족스런 얼굴로 말했다.

“질긴 고기는 질색인데….”


“그 이빨 다 뽑아줄 테니까 아가리 닫고 오셔.”



진명은 학귀의 성질을 긁으며 단전을 두드렸다. 미약하고 탁한 기운. 하지만 충분했다. 단전을 벗어난 내공은 진명의 전신을 데우며 단검을 쥔 오른손으로 향했다. 그런 진명에게 느릿한 걸음으로 다가오는 학귀.


츠륵!


선수는, 진명이었다. 위아래로 흔드는 반탄력을 받으며 허공에 휘두르는 단검. 학귀의 걸음을 멈춘다. 그 찰나의 호흡을 타고, 진명의 발걸음은 학귀의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허리는 더욱 낮게, 보폭은 더욱 크게. 손에 머물러 있던 그의 진기는 곧장 양발로 향한다.

스륵!


학귀의 꼬챙이는 진명의 머리가 있던 부근을 찔러 넣었다. 하지만 진명은 이미 자세를 낮춘 상태. 그 빈틈을 진명은 놓치지 않았다. 진명의 시야는 바닥을 훑었다. 깨진 그릇 조각들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손으로 그 유리조각을 집는다.

“이 쥐새끼가! 곱게 고기가 되어라!”


자신의  수가 허공을 갈랐다는 데에서 오는 분노. 사파의 무인들이 가지는 특징이었다. 그리고, 진명은 이런 변수를 즐긴다. 바닥에 잔뜩 몸을 눕힌 진명을 향해 마구잡이로 찔러오는 핏빛의 검기. 진명은 눕혔던 몸을 펼치며, 왼쪽으로 튕겨져 나갔다.

금빛의 잉어가 몸을 비틀어, 천개의 물결을 헤쳐 넘는다는 금리도천파[金鯉到千波]의 한수. 잔뜩 밀려온 검기는 애꿎은 바닥만을 벌집으로 만들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절정의 고수였다. 꼬챙이는 몸을 비틀어, 곧장 진명의 몸을 추적한다.

진명의 왼손이 움직인다.


팟!


사기조각이 가루가 되어 터져나가는 소리. 꼬챙이의 진로를 막았다. 진명은 한바퀴 공중제비를 돌며 옆으로 안착했다. 잔뜩 낮아진 자세. 진기는 아직 다리의 혈도에 머물러있었다.  의외의 한수가 벌어준 것은 반 보. 진명은 보폭을 당겨, 짧은 걸음으로 학귀에게 다가선다.


학귀는 온전한 자세를 다시 갖춘 뒤, 숨을 뱉고 외쳤다.

“이리저리 도망가는 게, 영락없는 쥐새끼구나! 헌데, 다 피할  없었나보지?”

“후욱, 후욱! 긁힌 상처로 유세를 떨긴….”


진명은 참았던 숨을 뱉었다. 뇌는 지끈거리고, 몸은 비명을 토했다. 몸의 모든 구성요소 하나하나가 그에게 숨결을 내놓으라 부르짖고 있었다. 진명은 크게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자신의 종아리를 내려다보며 검기에 스친 상처를 바라봤다. 예리한 검이 베고 지나간 듯 길고 깊은 자상이 나있었다.



‘씨발, 단혼사영감이 두들겨 패며 알려준 금리도천파가 아니었으면…!’



진명은 아찔해져가는 정신을 부여잡는다. 아직도 단검의 영역은 짧고 적에게 멀었으며, 꼬챙이의 영역은 길고 자신에게 가까웠다. 이대로는 접근조차 하지 못한다. 학귀가 마구잡이로 찔러오는 것 같은  꼬챙이엔, 진로를 틀어막고 혈류량이 많은 급소를 노리는 잔학한 묘리가 담겨있었다.




‘내외의 조화가 완전하지 않은 놈 치고  한다만, 이제 슬슬 지루해지는 걸.’



학귀는 초조해하는 진명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왼손에 쥐고 있던 꼬챙이를 허공에 던지며 왼발로 진각을 밟는다. 몸을 타고 흐르는 반탄력. 허리를 반바퀴 돌리며 그 힘을 온전히 전달하고, 단전으로 용솟음치는 힘은 내공을 받아 더욱 폭발적으로 솟아오른다.

내공과 몸은 상체를 타고 흐른다.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활배근은, 그 우악스런 내공과 힘을 성공적으로 오른손에 전달한다. 오른손은 거칠게 뻗어진다. 허공을 유영하던 꼬챙이는 어느새 뻗어가는 오른손에 쥐여져 있었다.

‘일점홍[一點紅]!’

“진명!”

 일격은 당소소의 비명을 꿰뚫었다. 공간을 꿰뚫었다. 그리고, 마땅히 걸려야할 시간마저 꿰뚫고 진명의 생각보다 반 호흡 먼저 도달했다. 채 몸을  빼지 못한 진명은 회피를 포기하고 왼쪽 어깨를 비틀어 학귀의 일점홍을 몸으로 받았다.



“크흑!”

비틀어 받은 어깨가 꿰뚫리고, 주저앉는 진명. 본래는 상체가 박살이 나도 이상하지 않은 학귀의 절초였다. 바깥쪽으로 몸을 비틀어 힘을 흘려내고, 꿰뚫리는 시간을 더 지연시켰다. 그리고 그 시간동안 내공을 어깨 쪽으로 모아, 검기가 혈맥을 찢는 것을 막아낸 것.


하지만 그런 훌륭한 임기응변에도, 이미 진명의 왼쪽 팔은  전투에서  수 없게 되었다. 내공은 바닥을 보였으며, 학귀의 검기가 진명의 기혈을 진탕시켜 놓았다.

“흣, 넌 이제 천천히 찢어주지. 그럼….”




학귀는  늘어진 진명의 팔을 보며 누런 이를 보이며 웃었다. 그리고, 서둘러 묵가장의 남매를 찾는다. 고통 속에 신음하던 진명은, 그를 향해 미소를 지어주었다.


“병신…!”


“…….”

학귀의 표정이 처음으로 일그러진다. 절정에도 이르지 못한 자에게 받은 수모에, 격한 분노가 몸을 감싼다. 꼬챙이엔 검기가 감긴다. 그리고 진명을 바라본다. 진명은 학귀의 반응을 눈여겨보며, 은밀하게 오른손을 뒤로 가져갔다. 허리의 뒤편을 더듬는 손은, 단혼사가 너에게 어울리겠다며 쥐여 준 암기 하나가 잡혀있었다.


‘와라. 거지새끼야. 아가리에 암기 하나를 떠먹여주지.’




진명에게 다가가는 학귀. 진명은 숨을 고르며 암기를 던질 준비를 했다. 학귀는 그의 이상한 낌새를 보며 발걸음을 멈췄다. 아쉽게도 학귀는 절정의 고수였고, 감정을 효율적으로 다스릴 줄 아는 자였다.

‘놈은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굳이 내가 다가가 마무리를 지을 필요 또한 없지. 당가의 개자식들은 언제나 위험하니까. 천천히 죽여야 해. 자신이 가진 모든 독을 토해내게 한 뒤에.’

학귀의 꼬챙이에 맺혀있는 검기가 사그라진다. 진명을 바라보던 그의 시선은, 바닥에 누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백서희에게 향했다.



‘두령이 반드시 산 채로 잡아오라던 년이 저년이었군. 백능상단의 딸이자 아미파의 후기지수….’

“이런, 씨발놈아! 어디가는거야!”


“흐흐!”

다급한 진명의 외침에, 학귀는 웃었다. 그의 예상이 맞아떨어진 것에 대한 만족의 웃음이었다. 당가의 무인은, 죽어가는 와중에도 비수를 던지는 이들이다. 죽이기 위해서라면, 스스로 독을 뱉게 만들어야 했다.

학귀는 분노하는 진명을 무시하고, 백서희를 향해 움직였다. 당소소 또한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위험했다. 그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공포감이 붙잡고 있는 그녀의 발목을 움직였다. 학귀의 발걸음은 백서희의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런데…, 맛있어 보이네.’

학귀는 다시 왼손으로 꼬챙이를 고쳐 잡으며 백서희의 얼굴과 몸을 확인했다.

“어떻게 살려서 오라는 말은 안했잖아? 살아있기만 하면 되겠지.”


“…뭐야.”



백서희는 멍한 정신으로, 자신에게 다가온 학귀를 올려다봤다. 학귀는 그녀가 정신을 차리든 말든, 마구잡이로 자란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백서희의 몸을 가늠했다.


어딜 찔러야 살고, 어딜 찔러야 죽을 것인가. 어느 부위를 찔러야 더 쫄깃한 손맛이 있을 것인가. 어느 부위가 더 고통스럽고, 또 어느 부위가 더 큰 쾌락을 줄 것인가. 대충 견적을 낸 뒤, 학귀는 고개를 끄덕였다.



“잘 먹겠습니다.”


“뭐야. 뭐야? 뭐야…!”

백서희는 충격에 빠진 채 자신을 찔러오는 꼬챙이를 보며 점점 정신을 차려간다. 그녀를 향해 다가가던 당소소의 걸음은, 이내 달음박질로 바뀐다. 그녀를 천천히 찔러가는 꼬챙이를 보며, 당소소는 생각했다.


‘난 죽지 않아. 그러니, 내 몸으로 막으면 살릴 수 있어.’



하지만 이내 가슴이 쿵쾅거리며 부정적인 감정이, 몸을 옭죄는 공포가 그녀의 생각을 팽창시켰다.

‘난 죽지 않아. 그러니,  몸으로 막으면 살릴  있어. 하지만, 죽지만 않을 뿐 불구는 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그 고통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지? 천괴와 학귀의 태도를 보면 우리를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는데, 그냥 놔둬도 되지 않을까? 내가 굳이 백서희를 살릴 필요가 있을까?’

거대하게 부풀어진 생각. 당소소의 동공이 좁아진다. 백서희의 눈을 찔러가는 꼬챙이가, 점점 그녀를 향해 다가갔다. 가래가 끓는 웃음소리를 내며 학귀가 흥분이 엉킨 말을 뱉었다.



“클클, 별미는 아껴두면 안 되는 법이지.”


“하지 마, 하지 마…! 이 악적, 제발 꺼져…!”


백서희의 가녀린 외침.  목소리에 당소소의 팽창했던 생각은 결국 하나의 점으로 수렴했다.

‘백서희 넌, 살아가야  사람이야.’


그리고 꼬챙이는 살점을 꿰뚫었다. 백서희는 몸을 움찔거리며 찾아올 고통에 몸을 움찔거렸다. 하지만 고통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뺨으로 흐르는 뜨거운 액체. 백서희는 눈을 떠서 자신의 뺨을 훑는다. 그리고 손을 내려다봤다. 피였다. 그리고 눈을 올려 자신의 앞에서 그늘을 만들고 있는 사람을 확인한다.


“당소소…!”


당소소의 내민 팔이, 백서희에게 도달하는 학귀의 꼬챙이에 대신 꿰뚫려있었다. 작열감, 고통, 절망감, 공포. 한 점으로 뭉개두었던  모든 감정이 고통을 타고 흘렀다.



“흐윽…!”


육체의 고통에, 이성을 찢어발기는 정신의 고통에 당소소는 눈물을 흘린다. 하지만, 잔뜩 상처입은 이성은 아직 그녀의 몸을 떠나지 않았다. 당소소는 그 이성에 기대어, 백서희를 돌아보며 고통에 일그러진 미소를 지어주었다.

“미친년…! 어디에 정신을 놓고 다니는 거야….”




가슴 한 구석에 남겨둔, 응어리를 토해내며.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