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육장[六章], 설중개화[雪中開花] 6
“왜, 그런…?”
“흥, 가만히 있었어도 어련히 알아서 예뻐해 줬을 텐데.”
학귀가 당소소의 상완에서 꼬챙이를 빼들었다. 그는 자신의 손을 슬쩍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은 감촉. 여태껏 자신이 찔러왔던 살결들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학귀의 눈이 반짝인다. 당소소는 꼬챙이가 꿰뚫고 간 상처 부위를 움켜쥐며 신음소리를 흘렸다.
“아윽…!”
“그렇게 원한다면야, 순번을 바꿔줄 순 있지.”
학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꼬챙이를 든다. 백서희는 그 모습에 숨을 들이켠다. 배는 찢어질 듯이 아팠고, 복호검법이 한 번에 파훼 된 것은 제정신을 차릴 수 없는 일이었다. 거기에, 자신이 이 혈사를 일으켰다는 적의 선언까지. 또다시 정신이 혼미해진다.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
백서희는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사문에서 배운 불문[佛文]을 왼다. 모든 것이 비어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온갖 괴로움을 견뎌낸다는 경전의 문구.
혼란했던 심신은 맑아진다. 생기가 돌아오는 눈으로, 찔러오는 꼬챙이를 확인한다.
콰직!
학귀의 꼬챙이가 애꿎은 바닥을 찔렀다. 그의 표정이 급변한다. 그리고, 저 멀리 도망가 몸을 추스르고 있는 백서희를 바라봤다. 그대로 쫓아가려는 찰나, 그의 앞에 깨진 그릇 하나가 나뒹군다. 학귀가 시선을 돌리자, 진명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어이, 거지새끼. 싸움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어딜 도망가?”
“…허.”
“그리고 각오해두는 게 좋을 거야. 아가씨의 핏값은 좀 세거든. 후배야.”
진명의 말에, 학귀는 같잖다는 듯 침을 뱉으며 진명에게 걸어오고 있었다.
‘기회는 한 번. 그 한 번으로, 저 새끼를 전투불능으로 만들어야 한다.’
진명은 자신의 오른손을 흘끔 바라봤다. 당가의 암기. 소문으로만 무성했지만, 실제로 사용하게 될 줄은 진명 자신도 상상하지 못했다. 내구력은 물론이고, 다양한 기능과 확실한 살상력은 부르는 것이 값일 정도였다. 물론, 그 값을 준다고 팔아줄 곳도 아니었지만.
‘이런 고급품은, 사파에 있을 땐 엄두도 내지 못하던 건데…. 뭐, 얼마든 던지겠다만.’
투척은 평소의 싸움방식으로 충분히 숙달하고 있었다. 살기 위해 흙을 뿌리고 돌을 던지고 몸에 튄 피를 받아 뿌리고. 인식을 속이고 적의 의표를 찌르는 행위는 사파에서 살아남기 위해 매일 하던 행동이었다. 진명은 비수를 고쳐 쥐었다.
“절정에도 이르지 못한 버러지가!”
학귀는 분노하며 점점 속도를 내며 진명에게 달려들었다. 감정의 통제는, 더는 필요하지 않았다. 독을 뱉든, 가시를 뱉든 자신의 무력으로 무마시키겠다는 생각이었다. 그의 돌격은, 진명이 머릿속으로 그어둔 임계점을 돌파했다.
피슛!
진명의 손에서 비수가 날아갔다. 단검보다 작고, 코등이가 없는 모양새. 회전하며 날아가는 그 비수는, 학귀의 심장을 노리고 쇄도해갔다. 학귀는, 그 모든 것을 예측하였다. 검기를 두른 꼬챙이는, 비수를 간단히 튕겨냈다.
“푸핫, 이런 장난질을…. 읏!”
꼬챙이에 튕겨 나간 비수는, 철침 하나를 토해내며 반으로 갈렸다. 철침은 본래 노리던 학귀의 심장을 향해 날아갔다. 비수 하나라는 것에 대한 방심과, 자신의 경지를 믿는 오만. 그것이, 학귀의 인지를 방해했다.
“제길!”
그리고 그것을 인지했을 땐, 이미 철침이 가슴 부근에 도달한 다음이었다. 학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내공을 한데 모아 철심을 튕겨내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튕겨나간 철심은 궤도를 바꿔 하늘로 비스듬히 치솟았다.
뿌득!
무언가 터져나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학귀가 눈을 부여잡고, 괴성을 지르고 있었다.
“으아아악! 제길! 이런 씨발…! 아아악!”
학귀의 오른쪽 눈이, 철침에 터져나갔다. 진명은 자신의 손과 학귀를 번갈아 보면서 웃었다.
“당가의 암기, 당가의 암기하더니…. 성능 확실하구만.”
진명은 백서희를 바라봤다. 기왕이면, 위태위태한 자신의 아가씨를 데리고 도망가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그럼…. 시간은 벌었겠다. 빨리 데리고 나가라. 백서희.’
백서희는 눈물을 흘리며 몸을 떨고 있는 당소소를 바라봤다.
“흐윽, 으으윽….”
“너, 왜 날 감싼 거야. 무공도 모르는 애가.”
백서희는 그렇게 말하며 서둘러 주변을 둘러봤다.
당소소의 상처는, 겉보기엔 작아 보였지만 더러운 꼬챙이가 꿰뚫고 지나간 상처였다. 그저 무턱대고 지혈하고 동여맸다간,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백서희는 그런 상처는 술 같은 것으로 더러움을 씻어내고, 그 뒤에 지혈해야 한다는 사문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백서희는 땅바닥을 굴러다니는 술병 하나를 쥐고, 당소소가 쥐고 있는 비수를 뺏어 들어 자신의 소매를 잘라내려고 했다. 당소소의 기어가는 한마디가 그녀에게 들려온다.
“내 걸로…. 내걸로, 으읏…. 해….”
“뭐?”
“내 옷은…. 이제 못쓰니까. 한번 찢어서 괜찮아….”
당소소의 말에 백서희는 잠시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자신을 지키고 울음을 터뜨리고 있는 당소소가, 과거의 망나니 당소소가 맞나 과거를 되돌려본다.
‘가증스러운 년이! 여긴 당문이에요. 그 못난 얼굴을 보이지 말고 조용히 있었으면 좋겠어요.’
‘칫, 무공을 좀 익혔다고 잘난체하긴!’
‘그, 그런 별 것 아닌 사치품으로 내 기를 꺾을 수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마!’
‘…약은 확실히 탔겠지? 저년이 이걸 먹으면 다시는 공식 선상에 나올 수 없는 추태를….’
백서희는 혼란스러워진 고개를 젓는다. 제자 복이 없던 아미파에서, 수십 년 만에 나타난 후기지수에 관한 관심을 참지 못하던 당소소. 그리고, 대신 공격을 맞아주며 다른 사람의 옷 따위를 걱정하는 당소소.
백서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자신의 소매를 찢어 술에 적시며 생각했다.
‘같은 얼굴을 한 쌍둥이라는 가능성이 더 크겠어.’
뜬금없이 찾아와 사과했던 그녀. 당연히 백서희는 용서해 줄 생각은 없었다. 작년 사천교류회 이후에도 종종 괴롭힘을 했던 그녀를 쉽게 용서하기엔 자신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불가의 가르침을 받고 있다지만, 자신은 그런 부처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이미 인지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속가제자의 삶을 선택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는 백서희에게, 당소소가 통증을 무릅쓰고 말했다.
“네, 네….”
“응?”
“네 탓이 아니야….”
백서희는 당소소가 하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큰 소리를 내며 반박했다.
“무슨 소리야? 저 사파의 악당들이 온 것은 다 내탓…!”
“저들은, 원래 여기에 올 생각이었던 거야…. 백능상단의, 으윽…. 일은 명분을 만들기 위한 수단이고…. 후기지수들을 납치해, 사파의 힘을 회복해보겠다는…. 그런 생각이겠지. 윽!”
당소소는 길게 말을 뱉고, 고통에 몸을 떨며 몸을 움츠렸다. 백서희는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그녀의 상처를 천으로 훑었다.
“아아악!”
“참아. 이대로 묶어서 지혈하면 위험해.”
“으그윽. 흐윽…. 씨, 발…. 소설에선, 칼침 맞아도…. 윽! 잘만 싸우던데…!”
당소소는 욕설을 뱉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머릿속이 혼탁했다. 무엇이 자신의 감정이고, 무엇이 정상적인 생각인지 알 수가 없을 정도로. 상처를 술로 닦아내고, 지혈하는 과정에서 퍼져나오는 고통이 그 뒤엉킴을 더욱 가속했다.
“야, 백서희….”
“…말 너무 많이 하지 마. 지금 너, 위험하니까.”
“씨, 팔…. 누가 주역 아니랄까 봐 존나 똘똘한 거 봐….”
“씨발, 존나…?”
당소소가 힘겹게 웃으며 욕을 뱉자, 백서희는 괴리감을 느끼며 당소소를 바라봤다. 당소소는 심호흡으로 고통을 잠시 가라앉히며, 말을 이어갔다.
“후우. 천괴 담륭은 원래 거짓말로 사람을 속여. 천리니 뭐니 하면서…. 그러니 이곳을 습격하려고 했던 건, 다시 말하지만 원래 계획했던 거야. 너무 자책하지 마.”
“그래도, 내 책임을 피할 순 없어. 내가 그들을 도발했어. 그리고…. 천괴에게 한 수로 패퇴했어. 넌 무공을 몰라. 그렇기에 할 수 있는 말이야.”
“참, 넌 상단의 따님 주제에 거짓말에 약했었지. 순진한 애였었어. 정신도 여렸고.”
당소소는 파리해진 안색으로 백서희를 바라봤다. 마치,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듯한 발언. 백서희는 당소소를 바라봤다.
“그래서, 천괴에게 약했던 거고. 그래서, 날 더 용서할 수 없었겠구나.”
“그런….”
“미안해. 그건 진심이었겠지만, 지금은 진심이 아니야. 이건 믿어도 괜찮아….”
당소소는 초췌한 웃음을 던졌다. 그리고, 눈을 감으며 긴 숨을 뱉었다. 백서희는 화들짝 놀라 그녀의 몸을 부둥켜안는다. 숨결은 살아있었다. 하지만, 불규칙적이었다. 맥박은 뛰고 있었다. 하지만, 미약했다. 당소소는 옅은 목소리로 자신을 끌어안고 있는 백서희에게 속삭였다.
“아미의 신검은, 난폭한 바람으로 호랑이를 무릎 꿇린다…. 높고, 정심하게…. 더욱 거칠게…. 그러면, 더는 상대에게 속지 않을 거야…. 그 검술로, 학귀를 막아. 학귀라면, 막을 수 있어.”
“당소소…?”
“난 별 것 아닌 존재지만…. 넌, 아니잖아…?”
“안돼…!”
당소소의 말은 더 이어지지 못했다. 백서희는 좀 더 강하게 그녀의 몸을 움켜쥐었다. 그녀가 사라질 것 같은 아련한 감각. 다행히도, 아직 숨결과 맥박은 느껴지고 있었다. 백서희는 당소소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힌다. 그리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장검을 쥐었다. 그리고, 눈을 치켜들며 아직도 한눈을 잃은 충격에 괴성을 지르고 있는 학귀를 바라봤다.
‘당소소, 넌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 같던 악의. 지금도 백서희의 안에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태도가 바뀐 당소소는, 그 악의를 사과해왔다. 당연하게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러자, 그녀는 온 몸을 던져 자신을 구해온다. 이젠, 어떻게 그녀를 대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백서희가 혼란스러워하자, 그녀는 웃으며 자신의 탓이 아니라 말해온다.
우웅!
검이 울었다. 백서희는 이 소리를 좋아했다. 세상사는 복잡했고, 사람들의 마음도 복잡했다. 상인의 길은 자신과는 맞지 않았다. 일정한 규칙 아래에 딱 맞아 떨어지지 않는 길이었으니까. 그런 그녀의 앞에 나타난 아미파의 검.
그 검은 복잡한 것을 모두 잊게 해주었다. 검술은 또렷한 길이 있었고, 자신은 그 길을 걸을 수 있는 튼튼한 다리가 있었다. 오직 그 길을 오르기만 하면 될 뿐인 과정은, 백서희에겐 썩 마음에 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에게 복잡한 길 하나가 더 드리워졌다.
“그래. 넌, 달라졌구나. 사실만을 말하고 있어.”
그 울음소리를 따라, 검엔 다시 금빛의 서광이 드리운다. 금빛의 검기는 백서희의 수많은 감정을 녹여낸다. 분노, 죄책, 당황, 혼란. 이 모든 것을 녹여내고, 두 줌의 감정을 남긴다.
연민과 후회.
“좀 더 빨리 네 사과를 받아 줄 걸 그랬어. 용서는, 아직 모르겠지만.”
그녀는 미풍객잔에서 서럽게 울고 있던 그녀의 뒷모습을 기억한다. 그땐 자신을 속이기 위해, 혼신의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에게 독설을 듣게 된 것을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아니, 하나 거짓말한 것이 있구나.”
백서희는 검을 양손으로 쥔 뒤, 위로 치켜세웠다. 강당의 바닥이 진동한다. 난데없는, 난폭한 바람이 불어온다. 마치 이곳이 아미파의 험준한 산봉우리인 양, 광풍이 불었고 장엄한 기운처럼 깔리는 기파[氣波]는 학귀의 몸을 움찔거리게 했다.
“윽!”
“넌, 나보다 대단한 사람이야.”
백서희의 말이 끝나고, 검은 아래로 떨어진다. 복호검법 제 일식, 금정풍뢰[金頂風雷].
세차게 뻗어 나간 검기는 학귀의 몸을 찢으며 날아갔다. 학귀는 버둥거리는 손을 가슴에 모으고, 서둘러 기파를 퍼뜨려 몸을 막았다. 하지만, 상체에 긴 상흔이 생기는 것을 막아낼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년놈들이…!”
“후우.”
백서희는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진명이 옆에서 말을 걸어온다.
“이봐, 뭐 하는 짓이야. 어서 소소 아가씨를 데리고…!”
“사천쌍괴 진명. 맞아?”
“맞긴 한데….”
“본산의 사매가 네 얼굴을 보고 도망갔다는 말은 들었어. 당소소도 참 괴상한 부하를 들였구나.”
“아니, 그거 내가 아니라 내 동생…!”
콱!
둘의 대화는 더 이어지지 못했다. 분노에 이성을 잃은 학귀가, 전신에서 붉은 기파를 뿜어대고 있었다. 그의 분노가 어린 일점홍. 다행스럽게도, 한쪽눈을 잃은 상태라 정상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백서희와 진명은 힘겹게 몸을 날려 그 일격을 피했다.
“읏!”
백서희는 배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고통에 인상을 찡그렸다. 하지만, 한 줄의 불문을 읽으며 정신을 집중한다.
“…모지 사바하.”
“그러니까 내 동생 얼굴이 흉악하게 생겨서….”
“이 개자식들, 살결을 하나하나 남김없이 찢어주지!”
진명의 말을 끊으며 내달려오는 학귀. 백서희는 내공을 일으키며 학귀를 향해 내달려갔다.
“사천의 정파를 건드린 것을, 후회하게 해주마!”
“크흐흣! 사지멀쩡하게 끌려갈 생각은 버리도록!”
진명은 제자리에 서서, 억울하다는 듯 외쳤다.
“아니 씨발, 그러니까 내 동생이…!”
쾅!
백서희의 금빛 검기와 학귀의 핏빛 검기가 부딪히며 굉음을 터뜨렸다.
아쉽게도 진명의 항변은 그 굉음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