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화 〉육장[六章], 설중개화[雪中開花] 7
당웅은 굉음이 들려오는 청검각을 돌아봤다. 진명에게 맡긴 아가씨에 대한 걱정이 마음 한편에서 뭉실 솟아오른다. 그런 당웅의 시선을 잡아당기는 흑림영의 웃음소리들.
“크하핫! 더 내놓아라, 더!”
“비단옷들을 입은 것을 보니 형편이 좋아 보이는구나. 씨벌것들!”
“두령께서 나머지는 다 죽이라고 하신다! 가증스러운 정파새끼들을 모두 도륙 내버려!”
목제다리를 건너려는 피난민들을 향해 흑림영의 무인들이 달려들었다. 정유와 정휘가 그들의 앞을 막아서며 풍랑천검식을 펼친다. 참격의 물결이 퍼져나가며 그들의 진격을 막아선다. 하지만, 배를 점거한 자들이 정유와 정휘에게 활을 겨누고 있었다. 당웅은 손을 들어 수신호를 보낸다.
“흑풍대!”
당웅의 손은 저 멀리 어둠 속에서 활을 겨눈 흑림영의 무인들을 향했다. 먼 거리였고, 어둠에 몸을 숨겨 불확실한 표적. 흑풍대에겐 손쉬운 대상이었다.
“윽!”
“크흑!”
흑풍대가 던진 비수는 신음마저 죽이며 적을 꿰뚫었다. 당웅의 수신호가 바뀐다. 흑풍대의 일원들은 제각기 손에 장갑을 끼며, 청검각으로 상륙하려는 이들에게 달려들었다.
정유는 주위를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한다. 사파의 무인들에게 둘러싸인 상황. 적도 정예였지만, 전투에 나서는 이들도 요인을 호위하기 위해 차출된 자들. 오랫동안 싸운다면 적들을 소탕하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선 안 돼.’
당소소가 자신에게 강조하던 말이 떠오른다. 천괴와 학귀는 자신들의 상대가 아니라는 말. 충격에서 벗어나고 나서야 그들의 무위를 실감할 수 있었다. 적진 한복판에 떨어져서 여유롭게 웃고, 각 문파에서 차출된 호위들을 가지고 놀던 자들. 그녀의 말대로, 문파에서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그들을 불러오기 위해선, 우선 이 고착상태에서 벗어나야 했다.
‘…당 소저가 그 틈바구니에서 살아남을지는, 생각하지 않기로 해야겠군.’
정유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당소소의 얼굴을 지웠다. 그리고, 청성의 도사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들은 상륙해오는 적들을 향해 화려한 검무를 보였다.
‘청성…. 정교함은 있다만, 꿰뚫기엔 힘이 부족해. 제대로 된 본산의 제자들이 아니야. 애물단지인 운령 소저에게 그리 많은 인원을 투자하긴 싫었겠지.’
정유의 시선은 목제다리로 향했다. 그곳에선 백능상단의 상인들과 무인들이 밀려드는 흑림영을 어렵사리 막아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조차 역부족이라, 청랑검문의 남은 제자들이 그 곳으로 들러붙고 있었다.
‘아미는 사실상 백능상단의 무인들과 속가제자들뿐이라 큰 기대를 하긴 어렵다.’
정유의 눈은 당웅에게로 향했다. 그가 지휘하는 흑풍대는 적재적소에서 상대의 저격을 끊어주고, 위험인자들은 중독시키거나 암살. 그가 이 전장을 조율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만들게 된 것은 당문이 당소소 소저를 보낸다고 공문을 보내왔기 때문. 문파에서도 당 소저의 위치에 맞는 인원과 호위들을 보내왔겠지. 그저 적당히 구색을 갖춘 청성파와, 백서희 소저의 무력을 믿고 상인들과 그 상인들의 호위만을 데려온 아미파…. 결국 제대로 된 호위를 데려온 것은, 무공을 모르는 당 소저를 호위하는 당문 밖에 없다.’
정유는 당웅에게 다가가 그를 덮쳐오는 도끼를 쳐내고, 다시 당웅을 바라봤다. 당웅은 뭘 보냐는 듯, 고까운 눈으로 그 시선을 마주해줬다.
“흑풍대 대장이신지요?”
“맞…, 아니. 아니다.”
“그럼?”
“…지금은 부장인 거로 하지.”
정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밀려오는 흑림영의 무인들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대로 아무런 대책 없이 저것들을 놔뒀다간, 정말로 위험할 겁니다. 성함이?”
“당웅.”
팍!
당웅은 통성명을 하는 동안 비수를 꺼내, 청성의 도사를 덮치려는 흑림영에게 던졌다. 자신의 뒤에서 쿵 소리를 내며 쓰러지는 무인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청성의 도사. 정유는 그에 질세라 물에 푹 젖은 채 상륙해오는 두 명의 흑림영에게 검을 휘둘렀다.
“컥!”
“그래서, 뭘 하자고 날 찾아온 거지? 사람 죽이는 것을 경쟁하자 찾아온 것은 아닐 테고.”
당웅의 손이 움직인다. 백능상단의 상인을 향해 큼지막한 도를 휘두르는 산적 하나가 쓰러진다.
“당소소 소저의 부탁입니다. 최대한 빨리 포위망을 뚫고, 각 문파에 이 변고를 전해야 한다고!”
“…아가씨가.”
당웅은 정유의 말에 휘파람을 불었다. 전장에 흩어져있던 흑풍대가 곧장 당웅의 곁으로 모였다. 당웅은 정유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서, 날 부른 데에는 이유가 있어서겠지?”
정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원이 밀집해있는 목제다리 부근을 가리켰다.
“제가 저길 돌파할 겁니다. 그럼 추격하지 못하게, 독무를 깔아 주십쇼.”
“…네가?”
당웅은 정유의 손목을 바라봤다. 그리고, 전선을 지휘하고 있는 정휘를 바라본다.
“지휘를 네가 하고, 문주님이 직접 가시는 편이 더 효율적이지 않나? 자네 손목도 정상이 아닌 듯싶은데.”
“…지휘는 저희 아버지가 맡는 것이 옳을 겁니다. 전 지휘를 잘하지 못해요. 그렇기에 그편이 효율적입니다. 목숨을 걸고 돌파한다면, 이후엔 손목이 부러지든 잘려나가든 신경 쓸 이유는 없겠지요. 무엇보다…, 당소소 소저가 부탁한 일이니.”
정유는 당웅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웅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당웅은 생각을 마치고 입을 열었다.
“독은 얼마나 남았지?”
“대부분 암기만을 소비했을 뿐, 독은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혼전에선 아군도 당할 것을 저어하여….”
“좋은 판단이다.”
당웅은 흑풍대 대원의 대답을 들은 뒤, 정유를 바라봤다. 정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제다리를 틀어막고 사람들을 지휘하고 있는 정휘에게 다가갔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뚫고 가야겠습니다. 길을 좀 비켜주십시오.”
정휘는 정유의 눈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곤, 큰소리로 외쳤다.
“백능상단, 뒤로 물러서시오!”
그러자 목제다리를 틀어막고 있던 백능상단의 인원들이 뒤로 물러선다. 정유는 그들이 물러서는 사이, 청검각의 외곽에 묶여있는 말 한 필을 데려와서 달래고 있었다.
“착하지, 풍랑. 금방 지나갈 테니, 조금만 참으려무나. 그렇게 긴 여행은 아닐 거야. 그래도 좀 힘든 여정일 텐데, 괜찮겠니? 우리 풍랑이 착하지. 그래. 약간 따가울 수도 있으니, 몸에 상처가 안 나게 조심하고. 그래 그래. 끝나면 내가 맛있는 여물을 먹여주마. 그 여물이 뭐냐면….”
“푸륵!”
풍랑이라 불린 말은 투레질하더니, 정유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귀를 움찔거렸다. 명백히 잔소리를 듣기 싫다는 신호. 정휘는 그런 아들을 보며 픽 웃더니, 짧게 한마디를 했다.
“가라.”
“예, 아버지. 지휘는 맡기겠습니다.”
서로 이유는 묻지 않았다. 정유는 말에 훌쩍 올라타더니, 당웅을 바라봤다. 당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춤을 뒤적여 죽통을 꺼내 들었다.
“상대가 밀집해있다. 그리고, 살상 여부를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다시 말해 제압하기 위한 마비독은 불필요하다는 거다. 그렇다면, 혈관독이 옳겠지. 피가 멎지 않으며, 주변으로 쉬이 퍼질 수 있다.”
“예.”
“그럼, 당가의 무서움을 보여 줄 시간이다.”
흑풍대의 대원들이 저마다 하나씩 죽통을 쥐었다. 흑풍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정유가 풍랑의 박차를 가하며 내달리기 시작했다. 정유가 목제다리로 내달려오자, 흑림영의 무인들이 제각기 무기를 들고 그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저 새끼 잡…. 컥!”
“어딜 빠져나…! 윽!”
정유의 길을 막으며 외치는 이들의 입에 박히는 암기. 정유는 숨을 들이켜며 단전을 두드렸다. 내공의 물결이 온몸으로 퍼져간다. 한 줄기의 바람, 그리고 두 줄기의 파도. 풍랑천식검과 짝을 이루는, 천류만파공[千流萬派功]. 그 장황한 흐름이 그의 손길에 어린다.
“츱!”
숨을 짧게 뱉는다. 검을 쥔 오른손을 어깨 뒤로 크게 젖히고, 그대로 내리친다. 말 위라는 변위가 가지는 힘에, 천류만파공의 힘. 그리고 풍랑천식검의 초식이 더해지며 길을 막는 수많은 무기를 튕겨낸다.
풍덩!
그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나가떨어지는 적들. 하지만, 길은 멀었다. 풍랑은 투레질을 한번 하고, 더욱 빨리 쏘아져 나갔다.
다시 길을 막는 무리들. 정유는 검을 고쳐 잡고, 다시 내공을 끌어올린다. 바람과 파도가, 그의 손에 어렸다. 그리고, 곧장 내리쳤던 검을 올려치며 장애물들을 찢어버렸다.
“놈!”
정유가 채 다음 초식을 끌어오기 전에, 눈치를 챈 적들이 풍랑에게 칼을 휘둘러오기 시작했다. 자잘하게 생기는 상처들. 풍랑 또한 고통에 찬 울음소리를 내지만, 그래도 달려 나간다. 다시 팔을 끌어올리며 초식을 장전. 그때였다.
“으윽…! 피가, 피가…!”
“허억, 허억!”
길을 막던 이들이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그 토해낸 피를 뒤집어쓴 이도,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정유는 쾌재를 부르며 풍랑의 박차를 가했다. 풍랑은 길게 울며 주춤했던 발걸음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씨발, 당가의 독…!”
“우웨에엑!”
마치, 물결이 갈리듯 길을 내어주는 적들. 그리고 종국엔, 목제다리를 건너기 위해 인원이 몰려있는 입구에 도달했다.
정유는 풍랑의 고삐를 틀어쥐었다. 풍랑의 달음박질이 멈췄다. 그리고, 흑풍대의 독 또한 멎었다. 정유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나, 고개를 저으며 불쾌한 감정을 털어낸다.
‘실망하긴. 독이 이 정도 거리까지 도달한 것만 해도 저자들의 독공이 얼마나 절륜한지 알 수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나에게 달렸어.’
정유는 자신을 타이르고, 검을 고쳐 쥐었다. 족히 수십 명은 되어 보이는 인원들. 간간이 보이는 정예들만이 아닌, 그저 산에서 통행세를 걷는 산적들까지 몰려온 듯했다. 정유는 눈을 깜빡이며 그들을 바라봤다.
‘휩쓰는 것으론 안 된다.’
검을 머리 위로 들었다. 바람이 된 내공이 불어온다. 첫 초식인 풍의 초식이었다.
‘몰아치는 것으로도 역시 안 된다.’
단전을 두드렸다. 내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 두 번째 초식인, 랑의 초식이었다.
‘한 번이 안 된다면, 백 번을 휩쓸고 천 번을 몰아쳐야 한다.’
정유는 눈을 감았다. 내부를 관조한다. 자신에게 달려오는 모든 적을 인식하고, 자신의 안에서 멀어지는 모든 감각을 부여잡는다. 단 한 순간이라도 의식이 끊긴다면, 성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무수히 휩쓸어, 적을 몰아치고야 마는 세 번째 초식, 천[千].
“가자, 풍랑.”
“히힝!”
박차는 가하지 않았다. 하지만, 풍랑은 부름에 응해 적을 향해 몸을 던졌다. 복근이 당겨진다. 수없이 물결치는 내공도 단전으로부터 퍼져 나온다. 갈빗대를 타고, 활배근을 타고, 승모근에 이르러 그 거력을 상완에 때려 붓는다.
‘천!’
들어 올린 검을 내리친다. 한 명의 산적이 피를 뿌리며 허공을 날았다.
내리친 검을 사선으로 올려친다. 또 하나.
횡으로 벤다. 뛰어올라 풍랑을 노리던 산적의 손목이 주인을 잃었다.
종, 횡, 횡, 참!
끝없이 이어지는 참격의 파문에, 산적들의 무리는 속수무책으로 밀려 나갔다. 그를 지켜보던 흑림영의 인물이, 고함을 질러댔다.
“맞서 싸워! 도망가지 마!”
“씨, 씨발!”
“니미, 저걸 어떻게 상대해!”
“이런 씨발, 맞서 싸우…!”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사선으로 내리그은 정유의 검이 그의 주둥이에 틀어박혔기 때문이다. 풍랑의 무게까지 담긴 그 검은, 이빨을 짓뭉개며 그의 뺨을 길게 찢었다.
“크륵!”
풍랑은 그들을 쏜살같이 지나가며 이내 그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컥, 커억!”
정유는 온몸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손목은 이미 맛이 간 듯 했다. 무리하게 세 번째 초식을 사용한 반동. 혈맥은 퉁퉁 부어올랐고, 과도한 움직임에 근육 대부분이 손상을 입었다. 하지만, 아랫입술을 깨물어 정신을 부여잡고, 고삐를 움켜쥐었다.
‘무공을 모르는 처자가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다. 이 파랑검객 정유가 먼저 쓰러지다니, 무슨 망발인가!’
“푸릉!”
정유의 다짐에 대답하듯, 풍랑이 투레질한다. 그들의 모습은 이내 청랑호에서 모습을 감췄다.
*
“…정말 어처구니없군. 진짜로 뚫을 줄이야.”
“그게 내 아들이오.”
정휘가 당웅의 말에 자랑스러워하며 웃었다. 정유의 목숨을 건 돌파 덕에, 전장에는 소요가 찾아왔다. 그러자, 당웅의 시선이 청검각으로 향했다. 정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귀엽고 순진한 규수인데, 호위하는 자의 처지로서 당연히 걱정될 테지.”
“…무슨 소릴.”
“가 봐도 좋네. 이 정도는, 내 선에서 마무리 지을 수 있네.”
정휘는 당웅을 바라보며 다시 웃었다. 당웅은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썼지만, 굳이 부정은 하지 않았다. 당웅은 휘파람을 불어 흑풍대를 모았다.
“아가씨를 데려온다.”
“옛.”
흑풍대가 전장에서 모습을 감췄다. 정휘는 몸을 돌려, 아군을 통솔했다.
“이대로 굳게 막으시오!”
방진을 갖추는 사천교류회의 인원들. 하지만 전장의 공백기는 흑림총련의 무인들에게도 기회였다. 그 어수선한 틈을 타, 흑림영이 청검각으로 몸을 날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