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화 〉육장[六章], 설중개화[雪中開花] 8
당웅과 흑풍대가 다급한 걸음으로 청검각의 안쪽으로 향했다. 드문드문 보이는 시체들이 그들의 불안감을 증폭시켰지만, 흑풍대는 훈련받은 당가의 무인들이었다. 독한 마음으로 대강당으로 가는 입구에 도착했다.
“…….”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천괴를 상대로 혈투를 벌이고 있는 운령과, 피를 뿌리며 학귀에게 몰아세워지고 있는 백서희, 진명이었다. 그리고 또 하나.
“…아가씨.”
곤하게 누워있는 당소소. 당웅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숨을 멈추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간다.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쥔다. 미약하지만 맥박이 있었다. 당웅은 그제야 숨을 쉬며 흑풍대에게 엄호하라 명했다. 그리고, 원망하는 눈빛으로 진명을 바라봤다.
‘놈….’
하지만, 이내 눈을 감는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목숨을 잃지 않은 것만으로도, 그가 썩 괜찮은 무공을 가졌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 곳곳에 입은 흉터는 얼마나 당소소의 명을 충실히 이행했는지도 말해주고 있었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당웅은 당소소를 들어올렸다.
“…….”
가벼웠다. 느껴지는 숨결은 곧장 꺼질 듯이 엄엄했다. 피가 튄 고운 얼굴은, 시체라도 되는 양 창백했다. 열흘 동안 납치되어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사람이, 사천교류회에서 수많은 악의를 받아내고 닥쳐온 긴급상황에 대한 정확한 대처를 한 것이었다.
당웅은 죄책감으로 짓이겨지는 가슴을 애써 무시하고, 고개를 들어 흑풍대를 바라봤다. 흑풍대는 당웅이 움직일 수 있게 엄호를 준비했다. 그런 그들을 방해하는 일단의 무리.
“씨발놈들, 독을 풀어?”
“비열한새끼들! 곱게 가진 못할 것이다!”
찢겨진 천장에서 흑림영의 무리들이 쏟아진다. 수는, 스무 명. 당웅은 깊은 한숨을 쉰다. 그가 옆에 있는 흑풍대원을 바라보자, 고개를 끄덕이며 당소소를 대신 받아들었다. 당웅은 손가락으로 허리춤을 훑었다. 남은 암기는, 세 자루. 비수와 비도, 그리고 철사. 충분했다.
“비열이라…. 과연 몸을 지키기 위해 독과 암기를 쓰는 쪽이 비열일까, 타인을 죽이고 자신의 동료에 아픔을 느끼는 것이 비열일까?”
“…놈!”
“큭큭!”
당웅은 제대로 된 대답을 하지 못하는 흑림영의 무인을 비웃으며, 장갑을 낀 손으로 철사를 쥐었다.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고, 서로를 향해 내달리려는 찰나. 천괴와 운령이 뒤엉키며 그들의 앞을 막아선다.
콰직!
바닥을 나뒹구는 운령. 운령은 왼팔로 바닥을 찍으며 그 반동으로 몸을 회전시키며 기상을 한다. 그런 그녀를 반으로 쪼개기 위해 짓이겨오는 방천극. 운령은 한 손으로 검신을 받히고, 내리찍는 방천극을 막아섰다.
“으윽…!”
“꼬맹이치고 제법이구나. 허초와 실초를 꽤 구분할 줄 알아. 아미의 멍청이는 못하던 것인데 말이야.”
“조용히 햇!”
신경질적으로 부르짖는 운령. 그리고, 힘겹게 방천극을 흘려낸다. 천괴는 방천극의 미끄러짐에도, 그저 웃음을 머금으며 물처럼 흐느적거리며 빈틈없는 자세를 만들어냈다. 운령은 한걸음 물러서고, 숨을 골랐다.
“후우…!”
이기지 못한다. 그건 알고 있었다. 천괴가 운령 자신의 사부나, 사형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것을 합을 겨루면 겨룰수록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여인의 몸, 채 단련이 끝나지 않은 외공. 그러면서 뛰어난 무재 덕에 지원을 받아 비정상적으로 비대한 내공.
이런 내외의 조화가 맞지 않은 상태에선, 절정에 이른 천괴를 이길 수 없었다. 운령은 당소소가 남겼던 말을 되뇌었다.
“나는, 구름….”
천괴는 지친 운령의 기색을 파악하며, 넌지시 제안해온다.
“어린 도사야. 우린 너희를 그렇게 막 대할 생각이 없단다. 그저, 잠깐 흑림총련에 몸을 위탁하는 것뿐이야.”
“…지금 죽어있는 자들은, 막 대할 생각이었나 보지?”
“후후. 쓸모도 없는 자들을, 살려둘 필요는 없지 않겠느냐?”
운령의 볼살이 떨렸다. 한 합만에 그의 회유는 패퇴했다. 운령은 무릎을 살짝 굽힌다. 왼손을 앞으로 뻗는다. 그리고, 그 왼손의 손등에 칼을 얹는다. 장법과 검술을 주력으로 사용하는, 청성의 독특한 기수식이었다.
‘경(勁)의 활용을 좀 더 예리하게…!’
외공은 부족하다. 내공은 차고 넘친다. 그렇다면 이 부조리함을 어디서 해결해야 할 것인가라는 해답은, 발경(發勁)에서 나왔다.
총기어린 운령의 육체는, 발경의 요체를 완전히 깨닫고 있었다.
발 구름에, 팔의 변위에서, 내공의 발휘등 모든 행동에서 비롯되는 모든 힘을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다루는 것. 그것이 경(勁)이었고, 그 힘을 낭비 없이 발출하는 것이 발(發).
발경이란 곧, 효율적인 동작으로 얻어낸 힘을 한 줌의 낭비 없이 활용하는 것이었다. 침추경, 십자경, 전사경, 암경…. 그 모든 이름은 단지 발출의 방식에 따라 임의로 붙여진 이름일 뿐.
쿵!
운령은 진각을 밟으며 힘을 끌어올렸다.
자세는 양 손으로 검을 잡아 뺨에 붙이는 청운적하검의 풍운세. 마보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다리. 밟았던 진각은, 온몸에 고루 그 힘을 뿌린다. 팔, 어깨, 허리, 다리, 발. 모든 것이 축을 이루며 십자[十字]의 축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각 축에 걸리는 반동을 받아 반대편으로 넘기는 십자경[十字勁].
뜬 구름이 바람에 밀려 움직이듯, 표홀한 발걸음이 밀려온다. 청성의 보법, 부운약표[浮雲躍飄]. 발걸음은 진동을 낳는다. 그 진동은 힘이 된다. 그 힘은 세로로 서있는 축으로 전달된다. 세로로 서있는 축은, 허리를 축으로 비틀린다. 나선의 강선이 되어 힘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전사경[纏絲勁]의 형태를 취한다.
치직!
전사경을 담은 힘은, 끓어오르는 내공을 타고 심장부근의 거궐혈[巨闕穴]로 타고 흐른다. 거기서, 세로로의 축 전환.
거궐혈을 중심으로 전사경은 세로의 축으로 들어선다. 걸음은 멈춘다. 목표는 방천극을 찔러오는 천괴.
“푸핫! 터무니없는 재능이군!”
천괴는 축복받았다고 밖에 볼 수 없는 운령의 무예를 한눈에 파악했다. 발경의 체득과, 그 요체를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열일곱의 몸으로 할 만한 것은 절대 아니었다. 절정에 이른 자신조차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니까.
천괴는 고개를 저으며 그녀와 자신의 거리를 가늠했다. 칼의 길이는 대략 이 척[尺] 칠 촌[寸]. 자신의 방천극은 칠 척[尺]. 단순 계산만 하더라도 세 배의 차이가 나는 거리었다. 천괴는, 그 차이를 초식의 차이로 벌릴만한 기량이 있었다.
‘한번, 찔러볼까.’
천괴의 생각과 함께 출수는 시작된다.
농풍천극[弄風天戟], 일 식 안침풍[岸侵風]. 한줌의 바람이 언덕을 침노한다. 방천극의 창끝이 운령의 이마를 찔러간다. 그리고, 그 끝이 비틀리며 전사경[纏絲勁]의 묘리를 담는다.
‘적하세[赤霞勢]!’
안침풍을 맞닥뜨린 운령은 곧장 풍운세를 풀어헤친다. 십자의 축은 변함이 없고, 검을 쥔 손은 양손에서 오른손 하나로 옮겨간다. 십자로 교차하는 양 손. 그녀의 몸이 사선으로 기운다. 마치, 당장이라도 넘어질 모양새.
그 교차한 양손을 비집고, 눈을 찔러오는 정교하고 강력한 초식. 운령은 왼손의 모든 마디를, 반으로 접었다.
따앙!
무게중심을 옮겨 힘을 쌓는다는, 이것이 침추경[沈墜勁]의 묘리를 담은 운령의 일장. 청성의 무인이 보았다면, 자신의 생애에 보았던 가장 완벽한 최심장[摧心掌]이라 외칠 만큼 깔끔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그 일격은 창날을 튕겨내는 것에 만족해야했다.
쉬이익!
경과 경이 부딪혀 무위[無爲]. 운령의 부운약표는 구름과 같이 움직이며, 적하세의 불안정한 자세는 몸에 자리 잡은 축을 옆으로 움직여 해결했다. 줄어든 거리는, 삼 척. 천괴는 슬쩍 웃으며 창대를 좌우로 원을 그렸다.
‘이건, 힘이 담겨있지 않아. 묘리도, 초식도 없어. 허초야.’
저벅.
천괴가 내미는 허초에도, 운령은 속지 않았다. 무의 본질을 꿰뚫는 눈. 천괴가 가장 껄끄러워 하는 상대였다. 일 척이 줄어든다. 남은 거리는, 삼 척. 천괴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허초가 아니란다, 꼬마도사야.”
이어지는 동작은 탄력을 받는다. 좌우로 휘돌린 창대는, 내공을 구체화 시킨 창기[槍氣]를 뿌리며 운령의 머리를 쪼개갔다. 농풍천극 이 식, 월천락[月天落]. 운령이 허초라 생각했던 그 행동은, 그녀를 끌어들이며 초식을 준비해가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청운세[靑雲勢]…!’
난폭하게 기운을 몰아가던 그녀의 몸은, 모든 힘을 빼고 뼈가 없는 것 마냥 부드럽게 흘러간다. 직선으로 박아 넣었던 축을, 관절을 조금씩 비틀어 유연하게 만든다. 전사경의 기운이 절로 깃들고, 힘과 힘을 부드럽게 이어주는 화경[化勁]의 묘리가 그녀의 몸 안에 꿈틀거린다.
굳게 쥔 손아귀는 느슨하게 풀고, 한 손은 양 손으로 바꿔서 잡는다. 굳게 땅을 지탱하던 다리는, 사선으로 틀어 느슨하게. 곧게 세운 허리는 약간 구부정하게. 그리고 머리를 짓이겨오는 월천락에 맞춰, 내공을 일으킨다. 그녀의 몸이 이해하고 있는 힘의 법칙에, 내공이 화답을 한다. 우윳빛의 검기가 그녀의 고검에 깃들었다.
내리찍는 방천극과 받아치는 고검이 마주친다. 검기와 검기가 명멸하며 서로 공명하고, 증발한다. 무기와 무기가 맞부딪힌다. 내리찍는 우악스런 방천극은, 흘려내려는 고검을 점점 짓눌러간다.
키이잉!
철판을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고, 달은 푸른 하늘을 찢으며 지상으로 떨어져갔다. 푸른 도복 한 조각이 피와 함께 허공에 부대낀다.
“허윽!”
청운세는, 파훼되었다. 운령은 한쪽 무릎을 꿇고 월천락에 갈려나간 자신의 고검을 바라본다. 그리고, 진탕이 된 속에서 역류하는 핏덩이를 뱉는다.
“케윽…!”
“참, 아까운 아이로다. 조금만 더 사문의 관심이 있었다면, 무릎을 꿇는 것은 나였을 텐데. 뭐, 어쩔 수 없지. 말했잖느냐? 하늘의 뜻은 거역할 수 없다는 것을. 꼬마도사인 자네가 더 잘 알고 있겠지만.”
“후우….”
천괴는 한 손으로 방천극을 든 뒤, 운령의 발목을 향해 휘둘러갔다. 그 광경을 바라보며 운령은 어지러운 머리를 가로저었다.
‘비로소 내 검을 인정하고, 비로소 나의 검을 휘두를 수 있게 되었는데…!’
떨리는 손으로 이가 빠진 검을 쥔다. 그런 그녀의 뺨을 스치는 철사 한 줄기. 내공을 담은 그 철사는 방천극의 궤도를 비틀고, 갈가리 찢겨져 나가며 그 용도를 다했다. 바닥에 처박힌 방천극을 회수하며, 천괴의 시선이 당웅을 훑는다. 당웅은 허리춤에서 비도 하나를 꺼내 오른손에 쥐었다.
“일어설 수 있겠나?”
“네. 적을 죽일 수도 있어요.”
“도가에 몸담은 처자가 입에 담을 말은 아니군.”
당웅은 길게 숨을 뱉으며 마음을 다스린다. 그리고, 운령을 향해 말했다.
“버텨라. 버티면, 지원이 온다. 지금 정유가 포위망을 뚫었다.”
“전 죽일 수 있다니까요.”
운령은 떨리는 목소리로 당웅에게 말했다. 문득 들려오는 학귀의 부르짖음. 운령은 시선을 옆으로 돌려 백서희의 상태를 확인했다.
“으으윽! 이 빌어먹을 년이, 얌전히 이 잔학첨에 꿰여라!”
“너야말로. 아미의 신검 아래에 무릎을 꿇어!”
백서희는 위엄서린 말을 뱉으며, 검기를 일으킨다. 그리고, 들어 올린 검을 내리치는 우직하고 단조로운 짓누름. 하지만 그 곳엔, 신묘한 불가의 검도가 깃들어있었다.
초식의 실체를 비운다. 거짓된 것을 비우고, 진실 된 것조차 비운다. 그렇기에 한줄기 남아있는, 웅혼한 바람이었다.
복호검법, 이 식 풍종적멸[風從寂滅]. 금색의 서광은 주변의 공기를 부여잡는다. 내리깔리는 위압. 그 위압은 아미의 신공인 불혼패엽공[佛魂貝葉功]을 받아 피를 뿌려대는 학귀의 사지를 결박해갔다.
“베여라!”
풍종적멸이 그어지고, 공기를 그러쥐었던 위압은 그 손을 놓는다. 일진광풍[一陣狂風]이 몰아친다. 자욱하게 이는 흙먼지. 그 사이로, 진명은 눈을 좁히며 바닥에 떨어진 유리조각을 던졌다.
팟!
유리조각이 가루가 되는 소리. 진명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씨발놈, 존나 질겨요.”
“크흣, 크흣! 내가 내외의 조화도 이루지 못한 버러지들에게 죽을 거라 생각하나?”
학귀는 기괴한 웃음을 짓곤, 풍종적멸을 받아내느라 우그러진 꼬챙이를 내던진다. 그리고, 목을 꺾으며 기를 일으켰다. 전신에서 피어나는 혈기. 그의 절기인 잔학혈령술[殘虐血令術]이 그의 몸을 불사르고 있었다.
백서희는 그 모습에 시름하며 말했다.
“정말로, 잔학한 귀신과도 같은 악적…!”
학귀는 그 말에 누런 이를 보이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