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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화 〉육장[六章], 설중개화[雪中開花] 9 (40/130)



〈 40화 〉육장[六章], 설중개화[雪中開花] 9

“으음….”

당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눈을 떴다. 검은 천장과 어딘지 모르게 개운한 몸. 당소소는 자신의 몸을 확인했다.

채 가시지 않은 고문의 피로도 없었다. 오른쪽 팔을 훑었다. 꼬챙이가 남긴 관통상도, 고통도 없었다. 당소소는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 앞에 놓인 하얀색의 장막을 바라본다.




“뭐야, 씨발.”

나지막이 뱉는 욕설.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듯 했다. 이질적인 감각이었다. 당소소는 손을 들어 자신의 뺨을 꼬집는다. 어떤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서야 당소소는 자신이 지금 자각몽을 꾸고 있다는 것을 인지했다.




“살다 살다 별 이상한 일을 다 겪네. 아니, 애초에 책의 악역에 깃들었는데 이정도로 이상하다고 생각하면 안 될 것 같고….”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장막의 앞에 놓인 푹신한 의자를 바라봤다. 주변을 둘러본다. 다른 요소는 없었다. 그녀는 볼을 긁으며 의자에 앉는 것을 살짝 주저하다, 고갤 저으며 의자에 앉았다.

철컥!


무언가 장전되는 소리에, 당소소는 뒤를 돌아봤다. 뒤에선 영사기가 빛을 쏘고 있었다. 당소소의 눈이 좁아진다. 그리고 고개를 다시 돌리자 주변의 모습은 마치 텅 빈 영화관의 한 곳처럼 많은 의자가 놓여있었다.



“내 돈 주고 영화관을 가본 적은 없는데.”




당소소는 의자의 팔걸이에 손을 올리고, 왼쪽 손으로 턱을 괴었다. 영화관은 김수환의 삶에서 딱 한 번 가본 적이 있었다. 일자리의 사장이 이리저리 핑계를 대며 월급을 미뤄댈 때였다. 너무 배가 고파서, 빵과 음료수라도 받아보려는 생각에 헌혈을 했을 때였다. 김수환의 피를 받아간 사람이, 음식들과 함께 영화예매권을 한 장 줬었다.

“후우….”




당소소는 한숨을 쉬었다. 썩 좋은 기억은 아니었다. 주제는 사랑이야기였다. 대학을 다니던 두 남녀가 사랑을 하고, 우여곡절 끝에 헤어지다 다시 만난다는  시답잖은 내용이었다. 영화는 지루했지만, 그럭저럭 배우들의 얼굴은 봐줄만 했었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영화는 끝나고 영화관을 밝히는 불이 켜진다. 영화에 몰입해서 앉아있던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서 일상으로 돌아간다. 왁자함은 잠시, 고요가 찾아온다.

김수환은 하얀색의 글씨로 올라가는 출연진과 제작진의 이름들을 바라본다. 영화 안에 들어가 이야기를 꾸미던 그들도 결국 이 이야기가 끝나면 일상과 가정으로 돌아갈 것이었다.



‘아.’




김수환은 짧은 감탄을 했다. 자신은 돌아갈 일상과 가정이 없었다.


김수환은 뭐라 형용할 수 없는 마음이 되었다. 터뜨릴 수도 없는 감정이 가슴에 맴돌아, 직원이 나가달라는 말을 하기 전까지 김수환은 계속 그 자리에 앉아있었다.


 후로, 그는 헌혈을 한 뒤 영화예매권만은 받지 않았다.


“…자각몽에서 깨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당소소는 기억을 흐리며, 영사기에서 쏜 빛을 출력하고 있는 하얀 장막을 바라본다. 빛은 아직 아무것도 그려내지 않고 있었다. 오른쪽 손가락은 지루함을 느끼는지, 팔걸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삑!

기계음이 들려오고, 빛은 명멸한다. 몇 차례의 깜빡임이 지나간 후, 영상이 출력되기 시작했다. 영상의 내용은, 사천당가의 이야기였다.


“당청?”

빛은 당청과 당진천의 대담을 그려내고 있었다. 음성은, 자신의 머릿속으로 직접 들려왔다.


-죽어주십시오.


-소소는 어찌했느냐?

-죽어주신다면, 지금처럼 아무것도 모르는  살게 하겠습니다.

당청은 가주실에서 당진천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당진천은 당청이 자신의 앞에 놓은 노리개와 독약을 바라본다. 자신이 무림맹에 가서 사줬던, 당소소의 노리개였다. 그리고 앞에 놓인 것은 오묘한 색을 띄고 있는 독약.

-칠혼독입니다. 소소를 통해 실험은 끝냈으니, 그 정도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겁니다. 그리고 이걸 마시고 아버지가 죽는다면, 당문의 칠대극독은 이제 팔대극독이  테지요.


-내가 널 죽인다면….


-소소와 회 역시 죽겠지요. 그리고 혁이 곧장 무림맹으로 달려가 독천이 미쳐서 자신의 자식들을 죽였다는 소문을 퍼뜨릴 겁니다.


-믿을 자는 있고?

-당문이 눈엣가시로 보이는 자가 어디 한둘입니까?



당청의 말에 당진천은 아들의 얼굴을 바라본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칠혼독을 집어든다. 화면을 보던 당소소는 괸 턱을 풀고 안색을 바꾸었다.

“씨발, 뭐야.”



당진천은 칠혼독을 마신다. 평온한 표정을 지으며 당청을 바라본다. 당청은 고개를 까딱이며 인사를 하고 가주실을 빠져나간다. 당진천은 천장을 바라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굳게 다문 입가를 비집고 피가 흐르며, 그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



당소소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면을 노려봤다. 그리고, 영상을 비추는 영사기를 바라봤다. 일어나지 않은 일이었다. 하지만, 기분이 너무 불쾌했다. 당소소는 출력되는 영상을 끄기 위해 영사기에 달려간다. 하지만 아무리 달려도 영사기에는 가까워지지 않았다.



“허억, 허억…!”

머릿속을 비집고 들어오는 불쾌한 영상에,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당소소는 고개를 돌렸다. 영사기는 무심하게 명멸한다. 또 다른 영상이 출력된다. 진명과 당소소가 출력되었다.


-이 씨발년이!


-으윽….


진명이 자랑하는 무공이 당소소의 머리채를 휘어잡으며 고개를 젖혔다. 당소소는 눈물을 흘리며 그를 바라봤다.

-잘못했어요, 제발 때리지 마세요! 제발, 제발 너무 아파요…!


-뭘 잘못했는데?


-그냥, 그냥 다. 제가 살아있는 게 잘못했어요! 제가 숨 쉬고 있는  잘못했어요…!




짜악!

그런 애원에도 진명의 손은 무심하게 당소소의 뺨을 갈겼다. 그녀의 얼굴이 크게 젖혀지고 다리가 풀려 주저앉는다.

-흐윽, 으윽.

-너같은 더러운 년 때문에 내 동생이 죽었어. 너 때문에 내가 이딴 곳에서…! 더러운 놈의 핏줄인 더러운 년!



진명의 주먹이 들린다. 그가 들어 올린 주먹이 확대되고, 그 주먹이 휘둘러지며 화면은 암전한다. 당소소는 머리가 아파오는 듯 했다. 눈을 감으며 입가를 매만졌다.


“이건, 내가 움직이지 않았을 때의 미래. 일어난 미래는 아니야….”



진명과 자신의 영상을 보고나서야, 비로소 그녀는 이 영상이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이 영상은 쌍검무쌍의 뒷이야기였다. 당소소의 몸에 김수환이 아니라, 그대로 당소소가 있었다면 벌어졌을 일들이었다. 그녀의 이성은 그것을 이해하고 있었다. 그리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은 그러지 못했다. 슬프고, 아팠다.


영사기는 다시 빛을 비춘다. 이번엔, 사천교류회였다. 평화로운 연회자리엔 당소소 대신 당청이 앉아있었다. 그런 그에게 다가오는 청랑검문의 제자. 제자는 당청의 자리에 음식을 내려놓으며 귀띔했다.

-진명으로부터의 전언입니다. 흑림총련의 천괴, 학귀가 곧 사천교류회를 습격할겁니다.

-그래. 알겠다.

그 제자는 고개를 꾸벅 숙이며, 뒤돌아 사라진다. 당청은 눈썹을 한차례 긁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를 붙잡는 정유.



-어허, 어디 가십니까? 슬픔은 기쁨으로 덮어야 한다고, 당 형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유명한 숙수와 좋은 술을 가져왔건만! 이름을 들으면 당 형조차 놀랄만한 인물인데, 이대로 가실 거요? 거기에 노주노교는 어렵게 구한 특곡등급의 술….

-신경써줘서 고맙네, 정유. 하지만 몸이 좋지 않아서….

당청은 목례를 하며 정유의 말을 잘라낸다. 그리고, 자신의 장포를 매만지며 주변을 둘러본다. 빛은 한차례 명멸하며, 당청의 시야로 주변을 훑었다. 청성파의 운령이 눈에 들어왔다.

-사형과 왔다더니, 그는 보이지 않는군.

당청의 생각이 음성처럼 흘러들어온다. 시선은 옮겨진다. 백서희와 묵가장의 남매. 백서희는 이런 연회를 따분해하며 먼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묵가장의 남매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친교를 다지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럼, 실례하겠네.


-몸조리 잘 하십쇼, 당 형!

-자네도 조심하게.

시선이 깜빡인다. 화면은 전환되어 당청과 정유를 비추고 있었다. 당청은 정유의 어깨를 두드리며 청검각의 대강당을 떠난다.


찌직, 찌직!


당청이 강당을 떠나자, 얼마 지나지 않아 현실에서 겪었던 것처럼 나무판자가 찢기는 소리가 들리며 천장이 무너진다. 그리고 천괴와 학귀가 등장해 무자비한 살육을 벌이기 시작했다. 퇴로는 흑림영의 무인들이 차단한 상태였다.


-오너라, 악적!



백서희가 천괴에게 달려든다. 주변의 상황을 살피던 정휘가 정유의 어깨를 부여잡으며 말했다.



-유, 피해라!


-하지만, 아버지는…!


-네가 저 산적들을 뚫으며 사람들을 지휘해!


정휘는 그렇게 외치며 백서희를 구타하고 있던 천괴에게 달려들었다. 정유는 이빨을 깨물었다. 미간을 좁히며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혼란상태의 인원들을 지휘하며 흑림영의 무인들에게 검을 휘둘렀다. 운령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자신의 사형을 찾았다.

-운류 사형, 어디 있어요…?

애처로운 운령의 목소리에, 곧 운류의 모습이 보인다. 꼬챙이가 마구 찌르고 지나간 듯, 온 몸이 구멍투성이인 시체 하나.  시체는, 화검공자 운류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운령은 자리에 주저앉아 그의 얼굴을 훑었다.

-…사형.

-클클! 얌전히 있으면, 그 반반한 사내놈처럼은 만들지 않으마.

학귀가 그녀에게 다가온다. 피투성이인 얼굴로 운령을 내려다보았다. 운령은 그를 올려다봤다. 자신보다 훨씬 강했던 사형이, 이런 형편없는 몰골을 하고 있었다. 저항은, 할 수 없었다. 학귀는 고개를 떨어뜨리며 체념해버린 운령을 지나, 바닥에 누워있는 백서희에게 도달했다.




-고년, 찌를맛나게 생겼군. 두령의 명도 있으니, 보이지 않는 곳만 찌르고 지혈하면 되겠지?



그는 피에 젖은 꼬챙이를 들어 그녀의 육질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손목을 한차례 찔렀다.

-으으윽!


-쉬잇. 조용히 울어라. 그럼 후유증은 없게 해주마.


-아아악!

-에헤이, 조용히 울라니까.


꼬챙이는 뽑히고, 다시 종아리를 찍었다. 백서희는 고통에 찬 비명소리를 내질렀다. 눈물에 젖은 백서희의 두 눈엔, 방천극에 꿰여있는 정휘의 수급이 보였다.



-아버지!

정유의 고함소리와 함께 장면은 끝이 난다. 당소소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리고,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막지 못한다면, 저렇게  것이라는 예고였다. 몸을 움켜쥐는 불쾌감에 당소소는 정신을 차릴  없었다.

“빌어먹을…!”

최선은 다했다. 하지만, 상황은 그렇게 크게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당소소 자신도 알고 있었다. 천괴와 학귀는 강했다. 지금 상황의 운령과 백서희가 이길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안쪽의 승패가 정해진다면, 아직 목숨이 붙어있던 정휘도  죽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는 원래 그래야 했을 곳으로 향할 것이다.

당소소는 자신의 무력감에 몸서리를 쳤다. 이야기 뒤에 흐르는 암류는 너무나도 거친 물결이었다. 무공을 익히지 못한 자신의 손으로 바꾸기는, 너무나도 벅찼다.

-독심이 무엇이냐?




그녀의 머릿속에 박히는 음성. 당소소는 화면을 바라봤다. 아무런 영상도 나오질 않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봤다. 아무도 없었다. 의자조차 없었다. 그녀가 일어서자, 그 의자조차 사라진다. 그리고 멀리 있던 하얀 장막이 그녀에게 다가온다. 당소소는 입술을 달싹였다.



“잡다한 것을 잊고, 하나에 집중하는 것.”


-너에게 그 하나는 무엇이냐?

“…….”

당소소는 그 음성에 답하지 않았다. 다만, 눈앞에 드리운 장막을 젖힐 뿐이었다.

*



당소소는 눈을 떴다. 멍처럼 새겨진 피로가 온몸을 짓누르고 있었고, 오른팔은 정신을 찢어대는 듯한 고통으로 욱신거렸다. 당소소는 자신을 안고 있는 흑풍대의 무인을 바라봤다.




“내려주세요.”

“아가씨! 정신을 차리셨습니까?”




흑풍대의 관심이 당소소에게 쏟아진다. 내려줄 생각은 없어보였다. 당소소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내려주세요, 쪽팔리니까.”


“아, 예.”


흑풍대의 무인이 자신을 내려놓자, 당소소는 재빨리 상황을 확인했다. 천괴를 막고 있는 운령과 당웅. 하지만, 패색이 짙어보였다. 시선을 돌려 학귀를 바라본다. 백서희와 진명이 피투성이가 된 채, 핏빛 기운을 두른 학귀에게서 도망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자각몽의 이야기대로 흘러갈 것이다.



“아가씨는 어서 피신을 하시죠. 여기는 흑풍대가 맡겠습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당소소는 자신을 안고 있던 흑풍대의 이름을 묻는다.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당씨 성을 받진 못했습니다. 저는 장춘일이라고 합니다.”


“춘일이라고 부를게요.”

“예, 아가씨.”

춘일은 낯선 당소소의 모습에 머리를 긁적였다. 그녀는 무례가 취미였다. 당소소에게 모욕을 당하지 않은 흑풍대의 사람들은 없을 정도였으니까. 그런 그녀의 공손한 모습은 그에겐 상당히 낯설었다.

“춘일은 독공 좀 쳐요?”

“예?”

“좀 치냐고.”


당소소의 물음에 춘일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뭐…. 흑풍대의 평균정돈 합니다. 여기 있는 흑풍대원들도 아마 저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떨어지진 않을 거구요.”


“그럼 저랑 일 하나 같이해야겠어요.”



당소소는 찢겨진 소매 안에서, 빈 죽통 하나를 꺼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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