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육장[六章], 설중개화[雪中開花] 10
당소소는 빈 죽통을 집었다. 그리고 오른팔을 움직여본다. 숨조차 쉴 수 없을 정도의 격통이 그녀를 찾아온다. 당소소는 자신의 팔을 움켜쥐며 주저앉았다.
“으윽….”
“아가씨!”
흑풍대가 당소소에게 달려든다. 당소소는 왼팔을 들어,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괜찮지 않았다.
머릿속은 이성과 감정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엉켜있었고, 고통은 열을 토해냈다. 그녀의 시선으로 보는 세상은, 그 고통과 열기에 녹아내리는 듯이 보였다. 쏟아낸 피는 고문의 피로와 합쳐져 일어서지도 못할 정도의 현기증을 가져왔다.
결국 그녀의 감정은 고통을 참아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게 했다.
“흐윽, 흑….”
“…그만 두시지요. 무공이 없는 몸으로, 이정도도 열심히 하신 겁니다. 그 누구도 아가씨를 책망할 사람은 없습니다. 저희조차 저 전장에 발들일 엄두를 못 내고 있습니다.”
춘일이 그렇게 말해오며 당소소에게 다가왔다. 당소소는 표출된 감정을 틈타, 정신을 부여잡는다. 약간만 움직여도 이정도의 고통이라면, 움직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심지어 고통에는 통제할 수 없는 본신의 감정까지 딸려오고 있었다.
‘진통제가 필요해.’
그녀는 전생에서 강도 높은 노동 후, 입에 달고 살았던 약을 떠올린다. 약의 성분이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 같은 성분이라는 설명도 떠올린다. 당소소는 춘일을 돌아봤다. 그녀의 눈에는 절박한 열망이 깃들어있었다.
“마비독, 있나요?”
“예? 남아있긴 합니다만….”
“마비독에 약간만 중독된다면, 전 움직일 수 있나요?”
“…….”
춘일은 그녀의 말에 만류하려는 말조차 잊었다.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에겐, 어떤 광기마저 느껴졌다. 춘일이 답변을 망설이는 사이, 재차 번지는 고통에 당소소는 눈을 찡그리며 아랫입술을 깨문다.
“흐윽….”
“예. 양을 조절한다면, 마취의 역할을 할 순 있습니다. 하지만 위험….”
“지금 위험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지원이 오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야 해요.”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어서 마비독을 가져오라 고갯짓했다. 춘일은 이빨을 꽉 깨물었다. 당청의 묵인 하에 가문에서 고립되어가던 그녀에게 이런 짐을 맡기는 것이 옳은지, 아니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그녀를 강제로 피신시키는 것이 옳은지. 그는 선택하지 못했다.
괴로운 선택에 몸부림치는 춘일에게, 당소소는 일그러진 미소를 짓는다. 그리고 타이르는 듯한 말투로 그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독술사는 지독해야해. 춘일. 독천이신 아버지가 그렇게 말했어.”
“무엇을 하시려는 건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대신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춘일은 아직 교활하지 않네. 나는 독천의 딸이자 사천당가의 아가씨야. 흑풍대의 일개 대원에게 칠대극독을 넘겨줄 만큼, 당가는 그렇게 무른 곳이 아니잖아? 내가 해야 해.”
“…알겠습니다.”
당소소가 던진 말에 춘일은 비로소 선택했다. 독술사는 교활하고, 지독해야한다. 당가의 무인이라면 모두 가슴에 새긴 격언이다.
“죄송합니다, 아가씨….”
춘일은 죄책감에서 눈을 돌렸다. 그리고, 교활하게도 마비독이 담긴 죽통을 꺼냈다. 지독하게도 지친 그녀의 상처부위에 투명한 액체 한 방울을 떨어뜨린다.
“하아….”
당소소는 긴 한숨을 뱉었다. 고통이 느껴지지 않았다. 코끝에는 찌릿한 감각이 맴돌고, 사지는 살덩이가 붙어있는 것 같은 감각이 느껴진다. 인지가 무뎌진다. 인지가 무뎌지니, 몸 안을 휘도는 감정도 무뎌진다. 당소소는 재차 오른팔을 움직였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든 것이 무뎌지는 순간에도, 이성만큼은 또렷했다.
‘독공은 기본적으로 심리의 싸움이다.’
당진천의 가르침이 그녀의 머리에 스민다. 당소소는 천장을 바라봤다. 달이 구름에 숨었다. 천장에 걸린 등불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전투의 여파에 휩쓸려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당소소의 입술이 달싹였다.
“불이 꺼져도, 적을 중독 시킬 수 있나요?”
“당가의 흑풍대는 빛보다 어둠과 더 친합니다.”
흑풍대의 대원 하나가 물음에 답했다.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또 다른 가르침을 떠올린다.
‘야, 무형지독이 뭐냐?’
‘무공 이름 아닐까요? 일단 먹는 것은 아닌 것 같은데. 아닌가? 먹는 건가?’
당소소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털어내고 다른 가르침을 떠올린다.
‘거짓말을 하는 데 있어서 많은 것이 필요하지만, 가장 필요한 것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개연성?’
‘혼이 담긴 언변!’
당소소는 머릿속에 스미는 하연의 가르침을 삼킨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봤다.
‘독공에선, 언변으로 부를 만한 것이 무얼까.’
그런 생각을 하던 당소소는 진명을 바라봤다. 다리에 생긴 자상 때문에, 격렬하게 움직이지 못했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사기조각과 단검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는 행동을 통해, 타고난 내공량으로 학귀와 맞서는 백서희를 성공적으로 보조하고 있었다. 심지어, 당웅과 운령에게 간간히 도움을 주기까지.
그는 흐름을 읽고, 전장을 통제하고 있었다.
머리에 스민 두 가르침이 그녀에게 답했다.
‘상황을 통제하는 것. 수많은 선택지 중에, 단 하나의 행동을 강요하는 것. 그것이 심리이고, 독공의 언변.’
당소소의 머릿속에선 쌍괴파의 수많은 무인들을 중 단 열 명을 잡아 제압한, 단혼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상황을 통제하는 것이란, 그런 것이었다. 당소소는 생각을 마치고 춘일에게 물었다.
“무형지독의 독효에 대해 좀 아나요?”
“예. 신경을 마비시키고, 전신을 괴사시키는 극독이죠.”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는 독은?”
“아가씨의 상처에 발랐던 신경독 계통의 마비독을 극한까지 제련한다면….”
춘일의 대답에 모든 가르침과 그녀가 체득한 정보는 한 곳에서 맺어졌다. 당소소는 앞으로 걸어 나가며 말했다.
“제가 천괴와 학귀에게 다가가면, 암기로 모든 등불을 잘라주세요.”
“예.”
“그리고 그 어둠을 틈 타 제 손짓에 맞춰 마비독을 사용해주세요.”
당소소는 부들거리는 팔을 진정시켰다. 그리고 빈 죽통의 마개를 열었다. 그녀의 발걸음은 천괴와 학귀를 향했다.
“아미의 게으른 망아지가 미친 듯이 날뛰기에 영락없이 죽은 줄 알았거늘, 독천의 딸이라 그 목숨도 꽤 질기구나!”
천괴는 당소소의 생환을 확인하자, 방천극으로 운령을 당웅쪽으로 튕겨냈다. 당웅은 공격을 멈추고 운령을 받았다. 뒤로 물러서서 천괴의 공격을 피할 준비를 했다. 하지만, 후속공격은 오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자, 우아한 걸음으로 전장을 거니는 당소소가 보였다. 당웅은 다급하게 외쳤다.
“아가씨, 어서 피하십쇼!”
당웅의 그런 외침이 들리지 않는 지, 그녀는 전장 한복판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고개를 숙인다. 떨리는 팔을 감추고, 절도 있는 자세로 포권을 했다.
“새삼스럽지만, 인사드리지요. 사천당가의 자손이자 독천의 여식, 당소소입니다.”
전장의 모든 시선이 쏠린다. 그녀가 포권을 풀자, 하늘로 쏘아진 비수가 등불을 잘라낸다. 당소소에게 달려들던 천괴가, 그 비수에 보법을 거두고 방천극을 들어 올려 방어자세를 취했다.
팟, 파앗!
등불이 떨어진다. 시야가 암전한다. 그러자, 흑풍대가 흩어졌다. 학귀와 전투를 벌이던 백서희와 진명도 어둠을 틈타 조금 멀리 떨어진다. 천장에 걸린 등불은, 바닥에 붙은 불꽃이 되어 그 미약한 빛들을 뿌린다. 그 빛들은, 당소소를 비추고 있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하지만 고통을 막고 감각을 막아도 증상은 있었기 때문인지, 그녀의 귀에선 환청이 들려왔다.
-너에게 그 하나란 무엇이냐?
당소소는 그 환청을 무시하며 한걸음 앞으로 나아갔다, 전장의 모든 시선은, 오로지 그녀에게 향해있었다. 그녀가 죽통을 쥔 오른팔을 가볍게 휘두른다.
“커윽!”
“그르르륵!”
혼란스러워하는 흑림영의 무인 세 명이 거품을 물고 쓰러진다. 죽통을 가볍게 턴다. 네 명의 산적이 쓰러진다. 공포에 휩싸인 흑림영의 무인들. 당소소는 마지막으로 한차례, 죽통을 퍼올렸다.
“빌어먹을 년!”
방향은, 천괴와 학귀. 그녀의 움직임에, 천괴가 왼팔로 코와 입을 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녀는 그 광경을 보며 고개를 쳐들고 요염하게 웃었다. 당웅은 그 광경을 보며 숨을 멈췄다.
기억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라진 기억에서 비롯된 갖은 모욕을 감내했을 것이다. 몸은 당장 쓰러지라 고함을 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단 하나의 생각으로 그녀는 버티고 서있을 것이다. 당웅은 허탈하게 웃었다.
‘…저 아가씨는, 정말 너무하는군.’
두 달 간의 긴 잠에서 깬 망나니 아가씨는, 어리석고 착해빠진 폭군이 되어있었다.
그 수많은 악의에도, 당웅에게 용서하지 않을 권리 따윈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그 손으로 미움을 쏟아내는 교류회의 인원들을 구했다. 묵가장의 남매를 구했다. 그리고, 목숨을 걸어서 천괴와 학귀를 상대하고 있었다.
산적들조차 속아 넘어가지 않은, 엉터리 무형지독으로.
그녀는, 미워하고 싶어도 미워할 수 없는 당가의 고귀한 아가씨였다.
‘그 산적들이 왜 두려워하지 않았는지, 이젠 난 알고 있어.’
처음 휘두른 무형지독은 심리를 이용하지 못했다. 혼이 담긴 언변이 없었다.
‘자포자기로 휘두른 무형지독의 어설픈 성공도 알아.’
두 번째로 휘두른 무형지독. 그곳엔 상황의 통제가 없었다.
당소소가 학귀를 바라본다. 학귀는 자신의 몸을 벅벅 긁어대며 이를 갈아댔다.
“이, 이 비열한 년! 너, 너 무슨 독을 푼 거야! 무슨 독을 풀었어!”
치가 떨리는 분노에도, 학귀는 움직일 수 없었다. 상황은 그녀의 통제 아래에 있었다. 당소소는 쌍검무쌍의 기억을 훑는다.
천괴는 적을 속이는 것에 능하다. 하지만 그런 만큼, 매사에 조심스럽다. 학귀는 뛰어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만큼, 자신의 몸에 생긴 이상에 민감하다.
그들은 그것 때문에 당진천에게 제압되었고, 주인공에게 죽음을 맞이했다.
당소소는 그 지식을 확실히 깨우치고 있었다. 그래서 독을 뿌리며 상황을 통제했다. 당소소의 무형지독에 중독된 분위기는, 천괴를 뒷걸음질 치게 했다. 그 중독된 분위기에 증폭된 미약한 신경독은, 학귀를 미치게 만들었다.
-너에게 그 하나는 무엇이냐?
또 다시 환청.
‘열이 불러오는 착각인가?’
당소소는 환청을 덜어내기 위해 고개를 저어본다.
-너에게 그 하나는 무엇이냐?
하지만, 답변을 요구하는 듯 계속해서 물어온다. 그 보챔에 못이긴 그녀는, 나지막하게 읊조렸다.
“이야기의 그늘에 신음하는 모든 이에게 행복을.”
환청이 멎는다. 그 물음의 정체는, 그녀가 그녀에게 묻는 각오였다.
비명과 쇳소리만 가득하던 주위는 눈이라도 내린 듯 고요했다. 그곳에서, 당소소는 김수환이 느꼈었던 고독을 느낀다.
‘이야기의 큰 흐름은 따라가려고 했어. 하지만…. 다른 이들의 행복을 바라는 나의 욕망 때문에, 이야기를 바꿔도 되는 것일까? 이야기가 변질되는 것은 아닐까? 이야기가 뒤틀려 더 많은 사람이 고통에 신음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당소소는 끓어오르는 의문에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의문에 답해줄 이는 없을 것이다. 그녀의 고독을 달래줄 수 있는 이도 없을 것이다.
누구하나 이해해줄 수 없는 홀로 가야하는 먼 길에서, 고독과 의문만이 그녀의 벗일 것이다.
“…….”
당소소는 죽통을 뻗은 채 침묵하고 있었다.
백서희는 그런 당소소를 바라봤다. 상처 입은 몸을 가누는 그녀의 애처로운 모습에서, 백서희는 어떤 편린을 읽었다. 무인이기 이전에 되어야 하는 것. 무공을 깨우치기 이전에 깨우쳐야 할 그 어떤 것.
의로움에 목숨을 걸고, 마땅히 그래야 할 도리에 인생을 바치는 것.
사람들이, 협[俠]이라 말하는 그 편린을.
‘모두, 날 보고 있어.’
당웅의 체념, 백서희의 경외. 천괴의 경계, 학귀의 분노. 수많은 생각이 뒤엉킨 시선은, 모두 그녀에게 향했다. 당소소는 그 모든 시선을 받으며 한걸음 나아갔다. 나름의 답을 내린 당소소의 입술이 달싹인다.
“이것은, 무형지독.”
학사의 목소리가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다. 하나를 알려주면, 하나를 알 수 있을 것이라는 말. 그의 말처럼 하나의 가르침은 뿌리가 된다. 이윽고 하나의 깨달음으로, 하나의 꽃잎으로 영글었다.
“색, 향, 형태 모두 존재하지 않아.”
이어지는 그녀의 말. 하나의 가르침, 하나의 깨달음. 또 하나의 가르침, 또 하나의 깨달음. 그 모든 배움이 꽃잎이 되어, 마침내 꽃은 피어난다.
“너희는 이미 중독됐어.”
홀로 가는 먼 길. 눈처럼 쌓인 고난과 살을 에는 의문들. 그녀는 그 길에 오른다. 그녀는 평생을 뒤를 돌아보며 고뇌할 것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걷는다.
“해독제가 필요해?”
당소소의 말이 맺힌다. 적은 웃지 못했다. 그렇기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피었다. 이야기의 그늘에서 고통받고, 신음하고, 망가지는 그 모든 이들에게 행복을 주겠다는 한 조각의 지독한 마음이 핀다.
미움과 폭력이 쌓인 고요한 설중에, 한 송이의 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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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독심[一片毒心] - 육장[六章], 설중개화[雪中開花]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