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4화 〉칠장[七章], 징악징선[懲惡懲善] 3
고풍스런 침상, 코를 찌르는 약향. 백서희가 의원에게 치료를 받고 있었다. 백서희는 자신의 몸에 지나친 치료를 하는 것이 불편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이 정도면 됐어요.”
백서희는 자신의 팔에 붕대를 감는 의원을 보며 말했다. 의원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부가 진탕되었습니다. 깊은 상처는 없지만, 혈맥에 상처를 입었고 얕은 자상이 많아 안정을 취해야 합니다.”
“명심할게요. 지금은 할 일이 있어서.”
백서희는 그렇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백서희가 자리에서 일어나자, 문 앞에 서 있는 비구니가 혀를 찬다. 의원은 목례를 하며 자리를 비켜준다.
“쯧쯧. 무검신니[無劍神尼]의 제자가 그런 추한 꼴로 다니면 쓰나.”
“사부님.”
“천괴와 학귀가 습격했더냐? 잘 버텼다.”
무검신니가 옷걸이에 걸린 백서희의 저고리를 가져다준다. 백서희는 금색의 저고리를 걸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무검신니가 저고리의 매듭을 동여매주며 말했다.
“처음부터 죽일 각오로 습격했다면, 살아남을 사람은 없었겠구나.”
“…모르죠.”
“왜, 운령의 검이 그리 매섭더냐? 허나 그 아이는 지금 벽에 가로막혔을 터인데.”
“아뇨.”
백서희는 무검신니의 말을 부정했다.
“죽이러 왔었어도 아마 독화가 막았을 거예요.”
“그 일자무식에 무공도 익히지 않은 망나니가 말이냐?”
“…그녀는 달라졌어요, 사부님.”
백서희는 천괴와 학귀를 막아서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다. 내공과 무공을 단 하나도 익히지 않고 가장 많은 일을 해냈던 당소소.
적재적소에 위치하며 사람들을 구해내던 용기와, 빈 죽통으로 천괴와 학귀를 속인 지략. 더불어, 아미파와 청성파의 무공을 꿰뚫고 있는 박식함까지.
‘당소소는 그런 강단과 능력을 갖추고 있으면서, 왜…?’
백서희는 당소소를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머릿속엔 안개가 끼는 것 같았다. 자신의 재능을 숨기기 위한 행동이라기엔, 너무 효율이 떨어지는 방식이었다. 무검신니의 시선이 느껴졌다. 백서희는 겪었던 일을 덧붙인다.
“당소소가 천괴와 학귀를 막았어요. 전 그저 옆에서 도왔을 뿐이에요.”
“농담은 그쯤 하거라. 운령은 천괴를, 넌 학귀를 막아섰다는 걸 다 알고 있다. 굳이 무리해서 그녀를 감싸주지 않아도 돼.”
“스승님. 일 년 전에 절 질투하던 자를, 제가 왜 두둔하겠어요?”
“글쎄다. 넌 고지식하잖니?”
백서희는 눈을 들어 무검신니를 바라본다. 무검신니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하는 대신, 고개를 돌려 침실의 입구를 바라봤다.
“…곧 사천교류회를 마치고, 이 사건을 어떻게 끝내야 할지 의논하는 회의가 있을게야. 끝날 때까지 몸이나 추스르고 있거라.”
“사부님. 전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니까요.”
“올곧고 똑 부러지는 널 어떻게 속였을지는 모르겠다만, 당문의 천덕꾸러기는 무공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잖니. 많이 지친 것 같은데, 푹 쉬고.”
백서희의 부정에도 무검신니는 그녀의 어깨를 두드리며 제 생각만을 말할 뿐이었다. 백서희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그녀의 사부는 지나치게 주관이 뚜렷했다. 올바른 것을 추구하나 그 정도가 지나치고, 스스로보기 전까지는 자신의 주관이 정의라고 여겼다. 어떨 때는, 본 이후에도.
백서희는 길게 숨을 뱉었다. 이미 무검신니가 그렇게 생각한 이상, 그 생각을 바꿀 순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을 바꿔줄 수 있는 사람에게 가야겠지.’
그녀는 머릿속에 당진천의 얼굴을 그렸다. 그리고, 태연스런 얼굴로 둘러댔다.
“알겠어요. 잠시, 운령을 보고 와서 쉬도록 할게요. 저도 이기지 못한 천괴를 상대했으니, 필시 많이 다쳤을 거예요.”
“그건 그저, 상성의 차이일 뿐이니라. 천괴는 아미파의 무공들처럼 거칠게 몰아치는 무공에 강한 무인이었다. 허[虛]에 능하고, 변칙에 능한 자였으니.”
백서희의 마음을 달래려는 스승의 상냥한 말. 하지만 백서희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상대가 바뀌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백서희는 운령의 움직임을 학귀의 움직임에 맞춰본다. 그녀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불 보듯 뻔한 결과였다. 그렇지만 스승은 자신의 주장에 반문하는 것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 백서희는 자신의 생각을 굳이 말하지 않았다.
“네. 상심하지 않을게요. 그럼, 가 봐도 될까요?”
“그렇게 하거라. 대신, 얼굴만 보고 와서 푹 쉬려무나. 이 스승은 회의에 가봐야 해서 더 돌봐줄 수 없겠구나.”
백서희는 허리를 숙여 떠나는 사부를 배웅했다. 백서희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발걸음을 떼자, 그녀와 닮은 비단옷의 사내가 벽을 두드리며 문 너머에 나타났다. 백서희는 한숨을 쉬었다.
“너 왜 여기 있는데.”
“하나뿐인 오라버니한테 반응이 그게 뭐냐? 사천교류회에 끌려간 우리 동생이 걱정돼서 온 거지.”
“돈 벌려고 온 거면서.”
백서희가 퉁명스럽게 말하자, 비단옷의 사내는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그것도 없진 않지. 백능상단을 이어받을 자로서 이런 큰 건을 놓친다면, 자리를 내려놓고 저잣거리에서 만두나 팔아야 하지 않겠어?”
“기분 안 좋으니까, 적당히 하고 가.”
“어허. 내가 뭐 때문에 여기 왔다고 생각해? 물론 동생이 얼마나 다쳤는지 보러 온 것도 있지만….”
비단옷의 사내가 의미심장한 눈길을 백서희에게 던진다. 백서희는 골치가 아픈 듯, 이마를 감싸 쥐었다.
“넌 백능상단의 일원이야, 서희. 우린 너에게 상단의 일을 시키는 대신 네 가능성에 투자했어. 넌 그 투자에 보답해야 할 의무가 있고.”
“백진오.”
“네가 지금 당가의 가주에게 가서 말하려는 그 내용이, 우리 백능상단에게 이득이 될 것 같아?”
백진오는 팔짱을 끼며 백서희를 노려본다. 그는 머릿속 주판을 쉴 새 없이 튕기고 있었다. 당진천에게 당소소의 활약을 제대로 알려주는 것이 이득이 되냐는 계산. 계산이 끝난 백진오는 혀를 차며 그녀의 행동을 평가했다.
‘…덜떨어진 것.’
백진오의 답은, 아니오였다.
백능상단은 아미파에 줄을 대고 있었지만, 청성파와도 친했다. 하지만, 폐쇄적인 사천당가와는 영 인연이 없었다.
친교를 맺기 위해 노력은 해봤지만, 당가가 필요로 하는 특수한 광물이나 독물은 당가가 자체적으로 갖춰 둔 광산과 인력으로 자급자족한다. 거기에 그들이 필요한 생필품들은 다른 상단들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래서 백진오는 불확실한 사천당가에 줄을 대는 것 보다, 아미파와 청성파의 사이를 더욱 견고하게 만드는 것을 택했다. 그들은 독과 암기를 감시하는 파수꾼이 되어, 백능상단의 훌륭한 우군이 되었다.
‘사천성의 균형을 유지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문제였던 사천성 최고의 고수인 독천. 아미파와 청성파는 무림맹에 요청해 사천교류회를 만들고, 당문을 감시하에 두면서 그를 성공적으로 억제했다.’
백진오는 이 균형이 오래도록 지속되길 원했다. 서로를 경계하며 힘을 키우는 이 상황은, 백능상단에게 있어선 캐도 캐도 줄지 않는 금광과도 같았다. 그것을 위해서 백서희를 아미파에 넘겼다. 청성파에겐 기부라는 이름의 지원을 했다.
별 이변만 없다면, 사천성의 세력다툼은 백능상단이 부리는 금력에 의해 백진오의 계획대로 흘러갈 것이다. 백진오는 백서희가 이 계획을 망치지 않기를 바랐다.
“무력이면 무력, 금력이면 금력. 정파의 오대세가라고 불리게 된 이후에도 당가는 그 위세를 넓혀가고 있지. 단 두 가지의 흠결만 제외한다면, 이미 사천성은 당가의 세력권으로 떨어졌을 거야.”
“흠결?”
“독과 암기를 다루는 가문으로서 뗄 수 없었던 그림자와, 후계가 약하다는 것. 당청은 지략은 뛰어나지만, 무력은 약하다. 당혁도 마찬가지. 당회는 언급하기 민망할 정도고. 당소소는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까부는 망나니야.”
백진오는 모르는 체하는 자신의 동생을 노려보며 설명을 이어갔다.
“독천은 자신의 세력을 묶어놓은 사천교류회를 역이용해, 정파의 일과 무림맹의 일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어. 그로 인해 당가의 그림자를 때 내고 명예를 얻었다. 거기까지는 괜찮아. 어차피 그렇게 될 일이었으니까.”
백진오는 그렇게 말하며, 백서희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아미파에겐 백능상단의 자금으로 갖은 영약을 먹인 널 쥐여줬다. 청성파에는 운령이 있다. 지금은 구주십이천의 한 사람을 가지고 있는 당가에 기울어진 모양새지만, 세대교체가 시작될 때부턴 사천성의 균형은 완벽하게 맞아 떨어질 거야. 당가에는 미래가 없으니까.”
“…….”
“하지만 네가 당진천에게 사실을 고하고, 당소소가 무명[武名]을 날리게 된다면 이 완벽한 균형이 무너진다.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평가를 받는 당가에게, 천괴와 학귀를 패퇴시킨 후기지수 하나를 쥐여주게 되는 셈이야.”
“당소소는 무공을 익히지 않았어. 무명을 날린다고 해도, 다른 형제들과 비슷해. 현재로선 오로지 지략만 가지고 있는 아이야.”
백서희의 궁색한 변명에, 백진오는 비웃음을 머금었다.
“가능성.”
백진오는 백서희에게 다가가 손가락으로 그녀의 어깨를 살짝 찔렀다.
“내가 가진 물품이 망가질 가능성. 내 물품보다 더 뛰어난 다른 물품이 나올 가능성.”
“…….”
“당연히 당소소는 너와 운령보다 약하겠지. 하지만, 네가 그녀의 업적을 공언하는 순간, 그녀가 강력한 후계가 될 가능성이 생긴다. 당가가 고민하는 마지막 흠결을 지울 가능성이 생긴다. 그 일어나지도 않을 가능성이, 우리가 가진 물품의 상품가치를 떨어뜨릴 거야.”
“난 상인이 아니야.”
“하지만 백능상단의 일원이지.”
백서희와 백진오의 말이 부딪히고, 시선이 뒤섞였다. 백서희는 침을 삼키며 시간을 가늠한다. 이 실랑이가 조금만 더 길어진다면, 당진천에게 실상을 고할 기회조차 사라지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됐다.
옳은 일을 한 자는 올바른 대우를 받고, 부정한 일을 한 자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백서희가 아미파에서 받은 가르침이었다. 그녀는 그 가르침을 잊은 적이 없었다.
‘내가 알려주지 않는다면….’
백서희는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그려본다. 당소소가 행했던 의로운 일들은 모두, 책임을 논하는 과정에서 묻힐 것이다. 혈사는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그에 관한 엄벌이 먼저였다.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당소소가 그 과정에서 무엇을 했는지에 관한 것은, 책임을 논하는 이들에겐 사소한 일이었다.
백진오는 그 무관심을 노릴 것이다. 천괴를 패퇴시킨 것은 운령의 몫으로, 학귀를 패퇴시킨 것은 백서희의 몫으로 만들어 둘 것이다. 백능상단의 이득을 위해.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됐다.
‘정말, 복잡한 건 싫은데….’
백서희는 어깨를 늘어뜨리며 체념했다. 그녀가 지금 하고자 하는 일은, 멀리서 관망하는 태도를 유지하며 원칙만 따르는 것으론 할 수 없는 복잡한 일이었다. 그녀는 검술만을 향해 걷던 맹목적인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뒤엉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기 그지없는 당소소의 곁으로 한 발짝, 걸음을 옮겼다. 예전의 당소소는 관심을 줄 가치조차 없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존중받을 가치가 있는 의인이었다.
굳게 닫혀있던 백서희의 입이 열렸다.
“사천당가와의 거래, 하고 싶지 않아?”
“굳이? 어차피 균형만 잘 맞는다면 상관없어. 우리에게 있어서 거래는 목적이 아니야. 이 황금을 토해내는 균형을 유지하는 수단인 거지.”
“사천당가의 독과 암기는 황금으로는 대체할 수 없는 가치가 있지.”
“푸흣, 서희야. 그런 뻔한 생각을 오라버니라고 하지 않았겠느냐? 다 방법이 없어서….”
백서희는 백진오의 비웃음 섞인 반론을 부정했다.
“방법은 있어. 그리고 그 방법은, 당소소가 쥐고 있겠지. 독천에게 사실을 고하는 것이 정말 아무것도 얻는 것이 없을 것이라 생각해?”
“사천성 제일의 고수와의 관계 구축과, 덜떨어진 망나니의 호감을 살 수 있겠지. 그리고 수많은 위험요소를 지니게 된다. 균형이 깨질 수도 있다는 그 위험을….”
“왜 균형이 깨진다고 생각해?”
백서희는 그렇게 말하며 탁자에 기대어 놓은 장검을 쥐었다. 그리고, 다시 백진오를 바라봤다.
“나 철혜검봉 백서희야. 그 균형은, 내 힘으로 맞추면 돼.”
“…재밌네.”
백진오는 자신이 사천성 제일의 후기지수가 될 것이라 선언하는 동생을 바라본다. 그녀는 상인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기에 상도를 몰랐다. 하지만 그렇기에, 상인으로선 감수할 수 없는 위험에 거침없이 몸을 들이밀 수 있었다.
백진오는 백서희를 지나쳐, 의자에 걸터앉아 그녀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망나니와 거래를 트겠다? 널 질투하고 네 식사에 설사약을 타던 그 머저리에게? 정말 할 수 있다고 생각해?”
백서희는 그를 돌아봤다. 백진오가 주판을 튕기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백서희는 웃으며 그 망나니에 관한 것을 생각했다. 자신을 미워했었지만, 이제는 악의를 던진 이들에게 오히려 구원을 내미는 그 이상한 망나니를. 그녀의 입술이 움직인다.
“가능성.”
백서희는 그렇게 대꾸하며 문을 나섰다. 백진오는 흡족한 눈으로 그 뒷모습을 지켜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