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칠장[七章], 징악징선[懲惡懲善] 4
“아미의 못난 제자가 사천당가의 가주님을 뵙니다.”
백서희는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엔 당진천의 모습이 보였다. 꽤나 큰 키 덕에, 그녀는 당진천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단정하게 틀어 올린 머리는 아무런 장식이 없는 관으로 고정했다. 짙은 눈썹과 다소 싸늘해 보이는 눈빛은 당소소의 판박이인 듯했다. 그 외에는 평범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구주십이천인 독천이 평범…? 그럴 리가.’
백서희는 속으로 그렇게 되물으며 다시 당진천을 주의 깊게 살핀다. 얼굴 전체에서 묻어나는 날카로운 인상과 걸친 녹색 장포 아래에서 뭉글거리는 위험. 평범함으로 덮어 둔 예기는 마치 검집에 넣어 둔 명검과도 같았다.
평범할수록 위험하다. 무림의 상식이었다.
하물며, 상대는 초절정이라는 경지를 넘어서 무림의 가장 강한 사람 중 하나라는 독천. 그의 별호 그대로 하늘에 닿을 무공에, 평범이라는 장막을 드리운 것이었다.
‘…어이가 없네.’
백서희는 터무니없는 당진천의 실력에 허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당진천은 자신을 탐색하는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가볍게 웃으며 백서희의 주의를 돌렸다.
“그래. 고생했다는 이야기는 들었네.”
“앗, 죄송합니다.”
“죄송할 것까지야. 무인으로서 상대의 기량을 파악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 아니겠나?”
“…면목이 없습니다.”
당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백서희를 바라봤다. 꽤나 피를 흘렸는지 다소 창백해 보이는 안색이었다. 꼼꼼하게 감은 붕대 너머로 풍겨오는 미약한 혈향과 약향. 당진천은 그 약향을 맡으며 생각했다.
‘이 향은…. 악산의원의 것이었나. 꽤 괜찮은 금창약을 썼군.’
그녀는 약간의 빈혈기가 있는지, 다리가 조금씩 떨려오고 있었다. 불안정하게 뛰는 혈맥은 진탕된 내부를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리고 떨리는 동공에서 묻어나오는 두려움. 당진천은 간략한 탐색을 끝내며 입을 열었다.
“안정을 취해야 할 듯한데, 날 찾아온 연유가 무엇인가?”
“가주님께서 알아야 할 것이 있어서….”
“내가?”
당진천이 되묻자, 백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킨다. 그녀는 숨을 뱉으며 마음을 진정시킨 뒤, 당진천의 물음에 답했다.
“예. 가주님의 따님에 관해서 알려드릴 게 있어서입니다.”
“소소에 관해 말인가?”
백서희의 말에 당진천의 미간에 주름이 진다. 그는 일 년 전 사천교류회의 주최자였다. 백서희와 당소소의 관계가 썩 좋지 않다는 것은 당진천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무슨 의도일까. 좋은 의도는 아닐 터인데. 사천교류회에서 마찰이 있었나?’
당진천은 작년의 사건을 말미암아 백서희의 의도를 지레짐작한다. 백서희는 고심에 빠진 당진천을 바라보며 설명했다.
“이번 사천교류회에서의 일과, 습격 당시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번이라. 작년의 일은 말하지 않는가? 소소가 꽤 큰 민폐를 끼쳤었는데.”
“작년의 일은…. 작년의 일일 뿐입니다. 게다가 이미 근신이라는 처벌을 받았지 않았습니까?”
“…그런가.”
당진천은 슬쩍 던져본 말로 그녀가 작년의 일을 걸고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더 말해보라는 허락을 전한다.
“심기가 조금 불편하실 수도 있겠지만….”
“괜찮네. 무언가 문제 될 것이 있으니 나를 따로 찾아온 거겠지. 괘념치 말고 말해보게.”
당진천의 말에 백서희는 그의 투명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예. 우선 사천교류회의 일부터 말씀드려야 하겠네요. 시작은 당가의 독과 암기에 대한 보고서를 전달한 후, 묵가장의 남매가 가주님의 여식에게 접근했습니다.”
“묵가장이라.”
당진천은 일 년 전 봤었던 묵전과 묵이현의 얼굴을 떠올린다. 특별한 인상은 없었다. 굳이 뽑아보자면, 당소소가 부린 말썽에 휘말렸다는 것뿐.
‘그리고 묵가장주가 당가를 상대로 이빨을 보인다는 것 정도인가.’
군소방파인 묵가장과 정파의 오대세가 중 하나인 사천당가. 당연한 말이지만 상대가 되질 않았다. 하지만 당진천이 무림맹의 일을 맡으며 당가의 명예를 챙기기 시작하며, 묵가장이 비빌 언덕이 생기기 시작했다.
사천에서 주목을 받지 못하던 작은 문파들을 규합하고, 대의를 운운하며 지분을 요구한다. 과거의 당가였다면, 암풍대가 찾아가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입을 조용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당진천 치하의 당가는 그런 행동을 취하지 않았다. 그저 사천성 내의 지분을 조금씩 떼어주며, 당가의 이름을 명예롭게 하는 데에 주력했다. 사천성 정파의 상생을 위한다는 미명 아래에. 균열은 그곳에서 시작되었다.
‘청과 장로들은 그런 행동이 탐탁지 않았을 것이고, 반대로 묵가장은 쾌재를 불렀겠지.’
독과 암기를 통해 만들어낸 공포로 사천성 전역을 휘어잡았던 당가. 당진천의 대에 들어와선 그 공포를 내려놓고 대화를 시도한다. 처음엔 무서웠겠지만, 지금은 그저 우리에 갇힌 맹수와 같은 취급이었다.
역린을 건드리지만 않는다면, 위험은 없었다.
당진천도 그들이 당가를 얕잡아보고 있다는 것은 인지하고 있었다. 다만 사천성에 눌러앉아 온건한 방법으로 그들을 누르기엔, 당진천이 무림맹에서 맡은 일이 너무나 많았다.
“묵가장의 남매는 가주님의 여식을 의도적으로 도발했습니다. 무례한 언동과 태도로….”
“소소가 일 년 전에 했던 일이 있었으니, 그들도 응어리진 것이 많았겠지.”
이해한다는 듯 뱉어진 당진천의 말. 하지만 굳은 얼굴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고 있지 않았다. 백서희는 바뀐 당진천의 기세에 슬쩍 눈치를 봤다. 그 눈빛을 본 백서희는 순간 묵전과 묵이현이 했던 일들을 말해도 괜찮을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운령과 정유가 사건을 설명하기 전까진 나도 영락없이 당소소의 잘못인 줄 알았어.’
그녀는 연회의 분위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 잠시 바람을 쐬러 나갔었다. 그리고 강당으로 다시 돌아온 직후 손목이 부러진 정유를 목격하게 되었다. 주변엔 당소소를 책망하는 연회의 시선과 그녀의 손에 쥐어진 독이 든 죽통 하나. 그녀는 당소소에 관한 편견으로 성급하게 결론을 내렸었다.
“말해도 괜찮단다.”
당진천은 생각에 빠진 백서희를 바라보며 말을 재촉했다. 백서희는 심호흡을 한 뒤, 운령과 정유에게 들었던 일을 빠짐없이 말했다.
“용서를 구하던 당 소저를 모욕하고, 당가의 가풍을 들먹이며 그녀가 입은 의복을 깔봤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지고 오던 청랑검문의 제자에게 의도적으로 발을 걸어, 음식을 뒤집어쓰게 했습니다.”
“그렇군.”
“그리고 당 소저가 참지 못하고 그, 음….”
“괜찮네. 있는 그대로 말하게.”
주저하는 백서희. 당진천은 부담스러운 눈빛을 주며 백서희를 채근했다. 백서희는 한숨을 쉬며 당진천의 요구에 응했다.
“후우. ‘묵가장 이 씨발년놈들이, 진짜 뒤지고 싶지? 너희 옷도 다 찢어줘?’라고 말했죠.”
“…….”
“아가리를 확 찢어버리기 전에 닫으라고도….”
“자, 잠깐.”
“묵이현이 모함을 하려고 하자 무형지독이 든 죽통을 꺼내며 위협을 하기도 했습니다.”
“크흠….”
당진천은 난감한 듯, 헛기침하며 시선을 멀리 돌렸다.
‘…그러라고 알려준 건 아니었는데.’
당진천은 잠시 사고를 멈추고 당소소가 누워있는 뒤를 슬쩍 돌아봤다.
‘검천이랑 날 비교할 때 했던 욕을 배운 건가? 욕은 그렇다 쳐도…. 그 상냥하던 딸이 맞나?’
백서희는 당진천이 머릿속의 혼란을 수습하기도 전에, 당소소의 행적을 읊었다.
“묵전은 기다렸다는 듯 칼을 뽑아 들이밀었고….”
“칼을 뽑았다? 청랑검문의 땅에서 당가의 대변인에게?”
“예. 그리고 묵이현의 모함을 무형지독으로 묵살하자…. 휘둘렀습니다.”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당진천은 손을 올려 자신의 눈썹을 한차례 긁었다. 그리고, 잠시 자신의 태도를 고찰했다. 당진천의 당가는 표독스러웠던 태도를 버리고 점잖아졌었다. 남들에게 세웠던 검도 부러뜨려가며 대화를 시도했다.
그러자 그들은, 단 하나뿐인 당진천의 역린을 건드렸다.
당진천은 어떤 기색도 보이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정유가 묵전의 공세를 막았습니다. 갑작스레 휘둘러 온 검이라 대비도 하지 못하고 막아서서 손목이 부러졌었죠. 그리고 전, 정유를 응급처치하는 과정에서 알지도 못한 채 당 소저를 비난했습니다.”
“비난이라?”
“예. 전 영락없이 그녀가 잘못한 줄 알고 있었습니다. 우선, 제 사과를….”
“소소는 널 용서했느냐?”
고개를 숙여오는 백서희에게, 당진천이 물어왔다. 백서희는 자신이 부끄러운 듯, 시선을 아래로 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괜찮다. 게다가 넌 지금 위험을 감수하고 이 자리에 선 게 아니더냐? 걱정은 하지 말고, 쭉 말해줬으면 좋겠구나.”
“…그 어수선한 상황에서 천괴와 학귀가 습격해왔습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무형지독으로 했던 위협 덕에 대부분의 인파가 대피했습니다. 그땐 왜 그랬는지 이해하지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도 분란이 일어날 것을 미리 예측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예측?’
당진천은 백서희의 말에 학사의 밑에서 수학했던 딸의 모습을 떠올린다. 그리고 난감한 웃음을 지었다.
“…아마 아닐 것이다.”
“예?”
“아니다. 이어서 말하거라.”
“예. 천괴는 묵전을 먼저 노렸습니다. 적극적인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죠. 납치를 목적으로 온 듯했습니다. 학귀 또한 마찬가지. 대신 그는 상해를 입히는 것을 더 우선시 여겼지만요.”
백서희는 그 말을 하고 분한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리고 설명을 이어갔다.
“제가 천괴에게 한 합에 나가떨어지는 동안, 당 소저는 혼란을 수습하고 남아있는 인원을 대피시켰습니다. 그리고 대화를 통해 천괴를 도발해 그의 주의를 끌었고, 다른 이들이 대피할 시간과 운령이 마음을 다잡을 시간을 벌었습니다.”
“천괴에게 도발을?”
“예. 마음을 다잡은 운령이 천괴를 상대하자, 당 소저는 묵전과 묵이현을 구하고…. 부끄럽지만, 학귀에게 공격당하려는 절 대신해 팔에 상처를 입었습니다. 죄송합니다….”
당진천은 고개를 저으며 백서희의 사죄를 물렀다. 이미 자신의 딸이 용서했다면, 구태여 두 번씩이나 받을 이유는 없었으니까. 게다가 그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해주기 위해 용기를 내 자신을 찾아온 기특한 처자였다. 그녀를 크게 책망할 이유는 없었다.
그것보다 더 당진천을 동요시킨 것은 당소소가 언변으로 천괴의 발을 묶어놓았다는 사실이었다.
‘학사께서 알지 못했던, 소소의 재능이 발휘된 것일지도….’
당진천은 그런 상상을 하며 굳어있던 표정을 풀고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백서희는 당진천의 온화한 표정을 보며 말을 이어갔다.
“…전 당 소저를 호위하던 진명과 합을 맞춰 학귀를 막아냈습니다만, 역부족이었죠. 운령 또한 마찬가지. 당 소저는 그런 저희를 구하기 위해, 무형지독으로 독공을 펼쳤습니다. 독공은 성공적이었습니다.”
“그게 천괴한테 먹혔다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당진천. 백서희는 당진천의 반응에 의아했던지, 고개를 갸웃거리다 끄덕였다.
“예. 무형지독은 훌륭하게 먹혀들어, 궁지에 몰린 학귀를 도주하게 하고 천괴를 조급하게 만들었습니다. 해독제를 주는 것으로 분란을 일으키고, 가주님께서 도달할 수 있는 시간까지 벌었습니다. 사실상, 이 습격을 막은 것은 당 소저라고 봐도 무방합니다.”
“허어….”
반쯤은 농담 삼아 알려줬던 독공. 당소소는 그 독공을 최대한 활용하며 자신이 상대해도 골치가 아팠던 천괴와 학귀를 제압했다는 사실을, 당진천은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당진천이 종종 봐왔던 백서희의 성격은, 올곧고 거짓을 혐오하는 성격이었다. 그런 그녀가 하는 말이, 거짓이라고 볼 순 없었다.
‘백능상단의 딸이자, 아미파의 애제자.’
당진천은 그녀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으로 왔는지 대충 알고 있었다. 백능상단은 당가가 커지는 것을 싫어했다. 감시역인 아미파 또한 마찬가지. 그 두 세력의 총애를 받는 그녀가, 단지 당소소의 누명을 벗기고 채 알려지지 못할 활약을 말해주기 위해 자신에게 온 것이었다.
당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고맙구나.”
“아, 아닙니다. 단지 전, 그…. 그러니까, 환심. 예, 환심을 사고 싶어서…. 절대 순수한 의도가 아니었어요.”
당황하여 횡설수설하는 백서희. 당진천은 웃으며 자신의 소매를 가볍게 털었다. 그러자, 봉황이 조각된 금빛의 비녀가 그의 손에 잡혔다. 당진천은 백서희에게 그 비녀를 내밀며 말했다.
“받거라.”
“이건…?”
백서희가 비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진천은 손가락을 들어 봉황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장치가 맞물리는 소리와 함께, 얇은 칼날이 튀어나왔다.
“봉황비[鳳凰匕]라고 한단다. 내 아들놈이 만든 것인데, 친교의 의미로는 좀 부족하려나?”
“예?”
“뭐, 딸아이의 친구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하자꾸나.”
당진천은 그렇게 말하며 봉황의 부리를 눌렀다. 그러자 칼날이 모습을 감추고, 다시 비녀의 형태로 돌아갔다. 그는 백서희의 손에 봉황비를 쥐여주며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자네의 오라버니가, 백진오라는 이름이었던가?”
“예? 아, 네….”
“그 친구에게 그걸 보여준다면 알아서 할 게다.”
당진천은 백서희의 어깨에서 손을 떼며, 그녀를 지나쳐 걸어갔다. 그리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이거 참. 내 정신이 없어서 자네의 오라버니에게 하나 더 해줘야 할 말을 까먹었군.”
“무슨 말씀이신지?”
당진천은 싸늘한 목소리로 한마디를 뱉었다.
“패가망신하기 싫으면, 이번엔 까불지 말고 자리에 앉아있으라고.”
그는 그렇게 말한 뒤, 걸음을 옮겼다.
백서희는 당진천의 으름장에 힘이 풀려, 한참 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