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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8화 〉팔장[八章], 적의환향[赤衣還鄕] 2 (48/130)



〈 48화 〉팔장[八章], 적의환향[赤衣還鄕] 2

당진천의 발언에, 무검신니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노려봤다.



“정녕 그리 하셔야겠나요? 아미파와 청성파가 당가를 적극적으로 몰아세우지 않은 것도….”

“공멸하지 않기 위해서.”

“네, 세 세력이 중앙에서 균형을 이루며 버티고 있기에, 악한 세력들이 감히 움직일  없는 거예요. 당가가 이런 식으로 나온다면, 필연적으로 저희는 당가를 공격하게 될 겁니다. 감당하실 수 있겠어요?”


당진천은 무검신니의 말에 관자놀이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제대로  고수를 배출하지 못해 속가제자에게 본산의 무공을 전수해야 했던 문파와, 청운적하검이라는 문파 최고의 절기를 익히지 못해 침체해가는 문파.  감당을 하지 못하겠나?”


“당가주 당신…!”

“그러니 말은 제대로 해야지. 내가, 당신들을 몰아세우지 않은 거요. 심정 같아선, 당신들에게도 책임을 묻고 싶었어.”

당진천의 말에 무검신니와 유엽진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말이 심하오, 당가주.”



유엽진인이 당진천의 말을 지적했지만, 당진천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화합을 바라지 않았다면, 무림맹의 부름을 받지 않았다면, 제 스승인 독무후가 계셨다면 당신들은 과연 당가를 이렇게 대우할 수 있었겠습니까?”


“…….”

“그리고 과연 내가 이 자리에 없었다면, 내 딸과 당가의 식구들은 어떤 대우를 받았겠습니까?”


“그건….”


“당가의 비밀을 보고한다는 호의를 계속 받고 싶었다면, 나에게도 호의를 베푸셔야 하는 게 옳았지 않겠습니까?”


유엽진인은 차마 대답하지 못했다. 당진천은 한숨을 쉬며 정휘를 바라봤다.


“정휘.”


“예.”


“이의는 있나?”

정휘는 그 물음에 잠시 고뇌를 하며, 자신을 노려보는 무검신니와 유엽진인을 의식했다.



‘이것은 청랑검문을 키울 기회야. 하지만, 잡는다면 아미파와 청성파와는 척을 지게 된다.’

군소방파가 무림맹에 연줄을 댈 수 있는 방도는 그리 많지 않았다. 지금 당진천은 정휘에게 아미파와 청성파의 권리를 거둬, 청랑검문에게 주겠다는 제안을 하는 중이었다. 다시 말해, 군소방파인 청랑검문에게 무림맹으로의 연줄을 내민 것이다.

득도 있겠지만 위험 또한 컸다. 당문에게 집중될 아미파와 청성파의 공세를, 일정 부분 청랑검문에게 부담시키려는 것이었다. 그의 말대로, 어찌 보면 벌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나에게, 묵가장의 역할을 맡게 하려는 속셈이군.’




정휘는 당진천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없습니다.”

“좋네.”




당진천은 정휘의 대답을 들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두의 시선이 그에게 모인다. 당진천은 느릿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이제 회의를 끝마칠 건데…. 이의가 있다면, 손을 들어줬으면 좋겠군.”



당진천은 자리에 있는 모두를 훑어봤다. 하고 싶은 말은 산더미였지만, 차마 살기 어린 당진천의 얼굴을 바라보고서  말들을 꺼낼 수 없었다. 당진천은 겁먹은 그들의 얼굴을 보며 피식 웃었다.



“내 앞에선 하지 못할 말들이 많은 것 같군.”



당진천의 시선이 정휘에게 닿자, 정휘가 말했다.


“허락하신다면, 제가 남아 문주님들의 의견을  받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당진천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객실을 빠져나갔다. 그가 빠져나가는 동안,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철컥!

문이 닫혔다.



“후우.”

당진천은 천장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권위와 폭거를 휘두르며 승냥이들을 고분고분하게 만든 것은, 꽤 불쾌했다. 하지만, 이제 겨우  걸음이었다.

이리저리 흩어졌던 방계의 이사를 관리해야 하고, 당청을 지지하던 가문 내의 불순분자들을 정리해야 하며, 앞으로 이어질 아미파와 청성파의 공세 또한 생각해야 한다. 거기에, 당회를 소문주로 세우는 것과 무림맹에서의 업무까지.


벌써 정신적 피로가 당진천의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아가씨께서 깨어나셨습니다.”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던 녹색 무복의 무인. 녹풍대였다. 당진천은 그의 보고에,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말을 안 듣는  예나 지금이나 똑같군. 무리했으면, 쭉 자고 있을 것이지.”


“그리고 말씀하셨던 당청의 잔당들은….”

“가면서 듣지.”

“예.”


당진천이 움직이자, 녹풍대의 대원은  뒤를 따랐다. 당진천이 옆으로 시선을 돌리자, 햇볕을 받은 청랑호가 파랗게 물결치고 있었다. 녹풍대원이 당진천에게 보고했다.



“우선, 총관은 관여의 경중으로 따지면 가벼운 수준입니다.”


“그는 관리역이다. 가볍든, 가볍지 않던 책임을 지는 것을 피할 순 없을 거야.”


“예. 그리고 당청과 당혁의 시비나 하인들은….”

당진천은 발걸음을 멈추고 물결에 부서지는 햇빛을 바라본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벌을 받아야겠지.”


“처분합니까?”

“어떤 벌을 내릴지는 나중에 이야기하지. 녹풍대와 제독전은?”


“제독전은 당청의 세력들이 다수 포진해있습니다. 숙청한다면, 제독전의 업무가 한동안 마비될 것은 피할  없을 것 같습니다.”



당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건 예상하던 바다. 이번에 분파를 성도로 모으며 해결 할 수 있는 문제야. 새로 제독전주를 맡을 이 또한 선출해야겠지.”

“녹풍대는, 모두 가주님께 충성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좋은 소리를 해주는군.”


당진천은 키득거리며 녹풍대원을 바라봤다. 녹풍대원은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런 녹풍대원에게 당진천은 질문을 던졌다.



“장로들은?”

“가주님의 말씀대로 불만은 품었으나, 움직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 내 우유부단함으로 당청을 살렸다면, 당가의 분열은 피할 수 없었을 거다.”


장로들은 당청을 지지하고 있었다. 만약에 당청이  자리에서 죽음을 택하지 않고 당진천의 연민을 받아 살아남았다면, 당가의 혼란은 더욱 커졌을 것이다. 그렇기에 당청은 소문주로서 죽지 않고 찬탈자로서 죽었다.

“독심…. 참, 잔인한 말이야.”

당진천은 그렇게 말하며 별채에 도달해 발걸음을 멈춘다. 익숙한 목소리가 그의 귀에 들려왔다.



“아잇, 씨팔. 왜 이렇게 안 되는 거야?”

“씨, 씨팔이라뇨 아가씨….”


“아니, 실뜨기가  꼴 받게 하잖아. 어? 뭐야….”


당진천은 그 목소리를 듣자, 녹풍대원에게 눈짓했다. 녹풍대원은  눈짓을 받자, 목례를 하며 별채의 호위를 위해 모습을 감췄다. 당진천은 쓴웃음을 지으며 혼잣말을 읊조렸다.




“…이미 배웠군.”




당진천은 당소소가 있는 방까지 걸어가,  앞에  있는 진명을 바라본다. 당진천을 확인한 진명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앗, 오셨습니까.”




당진천은 그런 진명을 탐탁잖은 시선으로 흘겨본 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몸은 좀 어떤가?”


“뭐, 그럭저럭 괜찮습니다만….”


“쯧쯧, 호위라는 녀석이 그리 약해 빠져서야.”

당진천의 말에 진명은 몸 둘 바를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더 깊이 숙였다. 말은 그렇게 했다지만, 당진천은 진명의 실력에 꽤 놀랐다. 검기를 일으킬만한 깨달음이나 내공도 없었고, 외공은 기본적인 신법과 보법을 사용할 줄도 모르는 반쪽짜리 무인이었다.


하지만, 그런 낮은 경지의 무위에도 진명은 학귀를 상대해 시간을 끄는 것에 성공했다. 제대로 된 무공을 가지게 된다면, 훌륭한 전력이 될 것은 분명한 사내였다. 당진천은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흑풍대의 대장 자리가 비게 될 것이야.”


“예?”


“이번엔 잘 해주었다만, 아쉽게도 사천쌍괴 잔혈객이라는 이름은 당가가 필요한 이름이 아니야.”


“그럼….”


“단혼사에겐 말해두겠네. 열심히 배워보도록.”


당진천은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탁자에 앉아 실뜨기하는 당소소가 고개를 돌려 그를 맞이한다.



“아버지?”

“그래, 다녀왔단다.”

당소소는 당진천의 얼굴을 확인하고, 엷게 웃으며 그에게 양손을 내밀었다. 털실은 선명한 도형을 그리고 있었다. 당소소는 자신의 털실에 슬쩍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어떤가요? 이제, 무공을 배울 수 있나요?”



내내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던 당진천은, 그제야 웃음을 터뜨리며 당소소에게 다가갔다. 그녀의 순진한 얼굴을 본 순간, 보상이니 명예니 부르짖던 일들은 죄다 우스운 것이 되었다. 그리고 그녀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하여간, 아빠 말은 정말  듣는구나.”


“아버지가 실뜨기를 완성하면 무공을 알려주신다고 하셔서….”


“돌아가면 알려줄 테니, 일단 누워서 쉬고 있거라.”




당진천은 그렇게 말하며 당소소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만족스런 얼굴을 하는 당소소. 당진천은 그런 당소소를 바라보며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다.


 누구도 그녀가 활약하는 것을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원하지도 않았다. 회의의 영향으로 무언가 얻어보고자 당소소에게 알랑거리는 자들은, 진실된 마음으로 그녀를 향해 칭찬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당진천은 나지막이 말했다.



“잘했다.”


“네?”

“무공을 모르는 몸으로 천괴와 학귀를 막아 낸 것. 모두를 대피시켜 피해를 최소화한 것. 솔직히, 칭찬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아니면  누가 칭찬해주겠느냐? 난 네가 정말 장하단다.”

“…….”




칭찬에 익숙하지 않았던 당소소는, 당진천의 말에 어색한 손짓으로 실을 풀었다. 그녀는 멋쩍은 듯, 볼을 긁으며 말했다.


“칭찬을 받으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음, 뭐….”


“다만, 네 몸을 좀 소중히 여겨줬으면 하는 게 내 마음이란다. 너를 잃는다면, 슬퍼할 이들이 많단다.”

“그런 사람이….”

당소소는 김수환의 기억에 비춰보며 그런 사람은 없다고 말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하연과 당진천의 시선을 느꼈다. 문 앞에서 자신을 호위하는 진명의 기척도 느꼈다.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명심하거라. 넌 하나뿐인 내 딸이고, 당가의 규수란다. 그 목숨의 무게는, 천금보다도 귀하단다.”




당소소는 그 말에 웃으며 말했다.




“전 죽지 않아요, 아버지.”

“…넌 이번에 죽을 뻔했단다. 만약 천괴와 학귀가 처음부터 생포가 목적이 아니었다면,  그들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죽을 수도 있었어.”


“하지만 죽지 않았잖아요?”

당소소는 그렇게 말한 뒤, 시선을 내려 떨고 있는 왼손을 바라봤다. 그녀는 상처 입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덮었다. 그렇게, 밀려오는 감정을 고통에 의한 것인  숨겼다.



‘사실, 저도 알아요. 아버지.’

당진천이 살고, 당청이 죽었다. 진명은 그녀의 부하가 되었으며, 정휘 또한 살아있었다. 아직 그녀의 이야기가 시작되진 않았지만, 많은 것이 바뀌었다. 그렇다면, 그녀의 이야기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사실을 애써 떠올리지 않았다. 그는 사회를 원망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해가던 패배자였고, 그녀는 무관심 속에서 피폐해진 무능한 망나니였다. 의협심을 가진 협객이나, 고결한 영웅 따위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녀는 죽음은 두렵고 고통은 무서워하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것을 떠올려 버린다면, 당소소는 공포에 발목이 잡혀 움직일  없을 것이다. 이야기의 암류를 바꾼다는 그녀의 목적은, 평생을 가더라도 이룰 수 없었다.



‘난, 죽지 않을 거야. 주인공이 날 죽일 거니까.’



틀림없이 일어날 가능성을 지우고, 그럴 리 없는 예언을 그려 넣는다. 그래야, 비로소 그녀는 공포를 지우고 움직일 수 있었다.


당소소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당진천에게, 굳은 미소를 지어주었다.


“조심할게요. 그래도, 이제 무공을 배울 테니까…!”


“그래서 더 걱정이란다.”




당진천은 당소소의 말을 끊으며, 다시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지금의 너에게 무공을 알려주면, 더 위험한 곳에 몸을 던질 것 같아서.”


“…….”

“무공이랍시고 그저 간단한 심리전 하나를 알려줬더니, 천괴와 학귀에게 덤비는 아이잖느냐. 본격적으로 무공을 알려줬다간, 무림맹주에게라도 달려들  같으니….”


“…걱정마세요, 아버지.  꿈은 안빈낙도인걸요. 이건 정말이에요.”



당진천은 맹랑한 그녀의 말에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온갖 사건에 머리를 들이미는 사람의 꿈이 안빈낙도라니…. 딸아. 집으로 돌아가면, 편하게 쉬자꾸나.”


“네, 아버지. 편하게 쉴게요.”

당소소는 당진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짓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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