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팔장[八章], 적의환향[赤衣還鄕] 3
침상 위에서 몸을 뒤척거리는 당소소. 하연은 그런 당소소에게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주무세요.”
“너무 자서 잠이 안 오는 걸. 거기에 아직 정오도 안 지났잖아.”
“그래도 돌아다니는 건 안 돼요.”
당소소는 하연의 말에 입을 살짝 내밀며 불만을 표한다. 그리곤, 이불을 걷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희미한 고통이 그녀의 팔을 쿡쿡 쑤셔댔다. 당소소는 인상을 찌푸린다.
“아가씨. 누워계시라니까요.”
“그냥, 다들 어떻게 됐는지 보고 싶어. 몸도 이 정도면 괜찮고.”
그녀는 하연을 보며 살짝 웃으며 고통을 감췄다. 하연은 고개를 저으며 당소소의 어깨에 녹색의 장포를 걸쳐준다.
“아가씨, 왜 이렇게 초조해하세요….”
“그냥, 궁금해서 그래.”
당소소는 어색한 손길로 외투를 여미며 말했다.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바꾸고자 앞으로 나섰던 그녀였다. 그녀의 행동으로 이야기는 바뀌었고, 어디에서 어떤 변수가 터져 나올지 몰랐다. 정신을 날카롭게 세우고,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계속해서 예의주시해야했다.
“혹시, 모르니까.”
막연한 불안감이 그녀의 정신을 움켜쥐고 있었다.
“어떤 것이 모르는 건가요? 저에게 말씀 해 주시면 제가 알아올게요.”
“음….”
당소소는 입술을 살짝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입을 다물고 고개를 저었다. 예정된 이야기를, 자신의 욕심으로 바꾸는 것. 아직 누군가에게 이 부담을 떠넘길 만큼, 그녀는 뻔뻔하지 못했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말해줄게.”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문을 열었다. 문을 지키고 서 있던 진명이 그녀를 바라본다.
“좀 쉬시지 않고, 어딜 가십니까?”
“그러는 넌.”
“아니, 뭐…. 저야 몸은 튼튼하지 않습니까?”
“어깨에 구멍이 뚫리고 종아리를 꿰맸으면서, 허세는.”
당소소는 붕대투성이인 진명을 바라봤다. 진명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린다. 당소소는 진명의 어깨를 손가락으로 쿡 쑤셨다.
“어어억!”
“이것 봐. 쉬는 것도 일이야. 내가 허락할 때, 실컷 농땡이 피워.”
“아가씨야말로, 쉬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난 푹 쉬어서 괜찮아.”
“아가씨가 안 쉬면, 제가 어떻게 쉽니까….”
진명이 울상이 되어 말하자, 당소소는 빙긋 웃으며 뒷짐을 지고 걸음을 옮겼다. 진명은 절뚝거리며 당소소의 뒤를 따른다. 따라오려던 하연을, 진명은 괜찮다는 손짓을 하며 만류한다. 그러면서 당소소에게 질문을 던졌다.
“헌데, 이젠 존댓말 안 하시네요?”
“왜, 해 줄까?”
“아뇨, 편하신 대로 하셔도 됩니다. 오히려 전 이편이 편한데…. 단지 궁금해서 그렇죠.”
당소소는 진명을 돌아봤다. 자신을 폭행하던 진명은 이제 없었다. 그는 이제, 자신의 호위인 진명이었다. 확실히 뒤바뀐 미래였다. 그렇기에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넌 이제 내 시다니까.”
“예? 시다?”
“아니, 어…. 내 사람이 됐으니까. 흠흠.”
당소소는 무심코 튀어나온 과거의 언어를, 잽싸게 얼버무렸다. 진명은 그런 당소소를 멍하니 바라봤다. 또다시 튀어나온 저잣거리의 언어에, 진명은 잠시 넋을 놓고 있었다. 그리고 화들짝 정신을 차리며 물었다.
“그럼 존댓말을 쓰던 동안은 절 믿지 않고 계셨던 겁니까?”
“믿음을 줬어야 믿지.”
“아니, 전 그래도 나름 열심히 했는데…?”
“그래서 이제 믿어주는 거잖아?”
당소소의 말에 진명은 억울했지만 반박할 수 없었다. 학귀를 성공적으로 막아낸 것을 제외한다면, 그는 당가에 몸을 담았던 기간 내내 실수를 해왔다. 진명은 복잡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걸, 좋아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
‘나랑 함께 있으면,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당소소는 진명의 말에 대답하며, 내심 미안한 마음을 품었다. 당소소는 그 후로 말없이 걷다가, 목적지 앞에서 멈춰섰다. 사천교류회가 열렸던 청검각의 대강당 앞이었다.
“…….”
싸움의 흔적이 역력한 강당은, 채 정리되지 않았다. 진명은 생각에 잠긴 당소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무슨 생각 하십니까?”
“…별 생각 안 해.”
“표정에 다 드러나는데요.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아닌가요?”
진명의 말에, 당소소는 손등으로 서둘러 입가를 가리며 진명을 바라봤다. 진명은 키득거리며 당소소를 앞서갔다. 당소소는 진명의 등을 노려보다 그의 뒤를 따라갔다.
청검각의 밖으로 나서자, 흰색 천으로 덮인 사상자들이 청검각의 앞마당에 누워있었다. 사상자를 수습하며 울부짖는 수많은 사람. 정오도 지나지 않았건만, 청랑호를 가득 메운 수많은 감정은 밤의 호수같이 어둡게 찰랑거렸다.
분노의 감정이 물결치고, 슬픔의 감정이 수면을 때린다. 공허한 감정은 자애롭게 비추는 햇빛의 온기를 빨아들인다. 그 감정의 호수를 바라보며, 당소소의 표정은 다시금 어두워졌다. 그런 당소소의 곁으로, 팔에 부목을 댄 정유가 다가왔다.
“오셨습니까, 당 소저.”
“네. 손목은, 좀 괜찮으신가요.”
당소소는 정유를 돌아보며 가볍게 인사를 했다. 정유는 당소소의 걱정에 괜찮다는 의미로 다친 팔을 흔들었다. 그리고, 당소소의 상태를 물었다.
“당 소저야말로, 몸은 괜찮으십니까?”
“전 괜찮아요. 저보단, 다른 사람들이 문제겠죠.”
당소소의 대답에, 정유의 시선은 사상자를 수습 중인 청검각의 장원으로 향했다. 차오르는 여러 감정들. 정유는 입꼬리를 비틀어 내렸다.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공이 없는 몸으로, 많은 일을 해 주셨습니다. 그때 소저가 정신을 일깨워주지 않으셨다면, 어떻게 됐을지…. 당 소저가 없었다면, 청랑검문은 정말 큰 위기를 맞이했을지도 모릅니다. 더 많은 사상자와, 더 큰 피해가 발생했겠지요. 어쩌면 제 풍랑과도 작별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 참, 제가 풍랑을 소개했던가요? 정말 착하고 늠름한 아이….”
“으음….”
당소소는 또다시 시작된 정유의 수다에, 인상을 찌푸리며 몰래 한걸음 멀어졌다. 정유는 그런 당소소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핫핫. 농담입니다. 어두운 생각은 좀 달아나셨습니까?”
“하하…. 농담이 아닌 것 같았는데요.”
“당 소저. 소저가 그런 표정을 지을 이유는, 그 어디에도 없습니다. 자부심을 가지세요.”
정유의 말에도, 당소소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러자, 정유는 다친 팔을 맞잡으며, 당소소에게 포권을 했다.
“청랑검문의 소문주, 정유가 은인 당소소 소저에게 인사를 올립니다.”
당소소는 그런 정유의 태도에 당황하며, 황급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어서 푸세요.”
“좀 더 당당해지셔도 됩니다. 소저가 없었다면, 이렇게 사상자를 수습하는 일마저 할 수 없었을 겁니다. 소저는, 이곳에서 가장 당당하셔야 할 사람입니다.”
“아니에요. 제가 없었어도, 소문주께선 괜찮았을 거예요….”
당소소가 난감해하자, 정유는 그런 당소소를 바라보며 포권을 풀었다. 그리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소저는 참 신기하신 분입니다.”
“제가 신기한가요?”
“위기에는 누구보다 냉철하시고, 칭찬에는 어색해하시며, 다른 이의 슬픔에는 누구보다도 더 슬퍼하십니다. 마치, 가족을 잃은 것처럼요.”
“…과분한 말이에요. 전 그저 당문의 망나니인걸요.”
정유는 당소소의 말에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죠. 안하무인의 망나니. 그런데 그거 아십니까?”
“무엇을….”
“망나니는 자신을 망나니라고 하지 않는 법입니다.”
정유는 그렇게 말하며 품 안을 뒤져, 조그마한 막대 하나를 꺼낸다. 봉황이 음각된 은색의 막대. 당소소가 눈빛으로 그것이 무엇인지 묻자, 정유가 답했다.
“은장도입니다. 사천교류회의 위기를 넘기게 해 주신 것에 대한 보답이라고 할까요.”
“그런가요? 그래도 이런 비싼걸….”
“비싼 것? 뭐…. 그리 비싼 건 아닙니다.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저희도, 조그마한 성의를 표시하고 싶어서.”
정유의 재촉에, 당소소는 아무런 의심 없이 그가 내민 은장도에 손을 뻗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진명이 핀잔을 준다.
“어이, 형씨.”
“…형씨?”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아가씨한테 무슨 짓이야. 반대쪽 팔도 부러지고 싶어?”
진명은 그렇게 말하며 당소소의 앞을 가로막았다. 정유는 진명의 얼굴을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당소소는 그런 진명에게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은장도가 뭔데?”
“사귀자는 겁니다. 정확히는, 진지하게 만나보자는 거지요. 그때 쌍괴파에 찾아오셨던 것처럼.”
“아? 어, 음….”
일그러지는 당소소의 얼굴.
‘이런, 미친. 이 양반, 쌍검무쌍에서도 잘 껄떡거리는 건 알았는데….’
당소소는 자신의 얼굴을 서둘러 감싸며, 튀어나오는 감정을 숨겼다.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남자의 정신으로, 남자의 고백을 받는다는 건 꽤나 혼란스러운 일이었다. 정유는 진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말투가 꽤 불손하십니다.”
“불손한 건 은장도를 내미는 네 손모가지고.”
“하하…. 그런 뜻이 아니었습니다만.”
정유와 진명의 시선이 부딪힌다. 그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사이, 그녀의 옆으로 나른한 눈길의 백서희가 걸어온다. 둘은 신경전을 벌이느라 그녀의 접근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몸은 괜찮아?”
무심하게 물어오는 안부.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급한 눈빛을 보낸다.
‘살려줘, 살려줘!’
필사적인 그녀의 눈짓에, 무표정한 백서희의 얼굴은 어쩔 수 없는 미소를 그렸다. 그리고, 당소소의 팔짱을 끼며 진명에게 말했다.
“못생긴 호위 아저씨.”
“…뭐?”
“당소소 좀 잠시 빌려 갈게.”
“잠깐만. 백서희 소저라고 했나? 오해가 정말 많이 있는 것 같은데. 그러니까, 네 사매를 놀라게 한 건 내가 아니라….”
도망가려면 지금이었다. 황급히 변명을 내뱉는 진명의 말을, 당소소 또한 황급히 자르며 말했다.
“진명, 정유 소협과 화해하고 와. 이건 명령이니까, 꼭 하고 와야 해!”
“아니, 좀 제 이야기를….”
“뭐, 학귀와의 싸움에서 날 도와줬으니 그 이야기는 없던 것으로 쳐줄게.”
“아니, 없던 것으로 치는 게 아니라 원래 없던 것…!”
백서희는 그런 진명을 향해 싱긋 웃어주며 당소소를 데리고 사라졌다. 진명의 눈썹이 움찔거린다. 정유는 그런 진명을 헛기침으로 불러세우며 말했다.
“흠흠. 당신의 무례한 말투는, 제가 남해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게….”
“거, 좀 분위기 파악을 하쇼. 잔뜩 감상에 젖은 순수한 아가씨한테, 은장도를 쳐 내밀고 있으니….”
“분위기 파악? 분명 어머니께선 슬픔을 위로해주는 아버지에게 반해서 약혼하게 되셨다고 했소. 청랑호의 선상에서 은장도를 받아 사귀게 됐고, 결국 결혼을 하게 되셨지. 그리고 운남으로 신혼여행을 가셔서 많은 일들을….”
“차여놓고 말이 많아.”
진명의 단호한 말에, 쉴 새 없이 움직이던 정유의 입이 멈췄다. 진명이 정유의 어깨를 툭툭 치며 당소소를 따라가려고 하자, 정유의 손이 진명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정유는 축 가라앉은 목소리로 진명에게 물었다.
“그럼, 자네는 분위기 파악을 잘하는 편인가?”
“누구처럼 남해도에서 있었던 일을 나불거리진 않지. 나름 잘나갔던 몸이니까.”
“…잘 나가?”
“…….”
정유는 진명의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진명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정유는 서둘러 자신의 말을 얼버무렸다.
“농담, 농담이오.”
“그래서, 내 어깨에 손을 올린 이유가 뭐요?”
“그 분위기라는 거, 파악하는 방법을 좀 알려주시오. 그래도 당신에게는, 당 소저가 편하게 대하는 것 같은데….”
정유의 요청. 진명은 턱을 쓰다듬으며 그를 바라봤다. 화해하고 오라는 당소소의 명령이 떠오른다. 그리고,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님이라고 불러주면, 아가씨와 이야기하는 방법을 못 알려줄 것도 없지.”
*
“휴….”
당소소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뒤를 돌아봤다.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서, 처음으로 받아보는 고백이었다. 때마침 나타난 백서희가 아니었다면, 어색하고 난감한 상황이 지속 되었을 것이다. 마음이 놓이자, 당소소는 자신의 팔짱을 낀 백서희의 몸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무심한 표정으로 깊게 팔짱을 낀 터라, 당소소의 팔에 백서희의 몸이 여과 없이 닿고 있었다. 당소소는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그, 그….”
“응?”
“팔이, 팔이 너무 깊어….”
백서희는 잔뜩 부끄러워하는 당소소를 바라보다, 더욱 깊게 팔짱을 꼈다. 어쩔 줄 몰라하며 허우적대는 당소소. 백서희는 피식 웃더니 팔짱을 풀고 말했다.
“무슨 일이었어?”
“정유가 은장도를 줘서….”
“아하.”
백서희는 짧게 감탄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그런 그녀의 뒤를, 당소소는 종종걸음으로 따라갔다. 갑작스레 사근사근해진 백서희의 태도에, 당소소는 당황했다.
‘쟤 왜 저러지? 약 먹었나?’
당소소가 백서희의 태도에 대해 생각하는 동안, 백서희는 부지런히 걸음을 옮겨 별채의 한 곳에 멈춰섰다. 그녀의 걸음이 멈추자, 퍼뜩 정신을 차린 당소소는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여긴 어디야?”
“이 귀여운 소저가 사천교류회의 영웅이라고?”
낯선 남자의 음성. 방 안에서 걸어 나오는 사내는, 백능상단의 후계자 백진오였다. 백서희는 백진오의 등장에 당소소를 슬쩍 자신의 뒤로 숨겼다. 그리고, 백진오에게 경고했다.
“내가 당진천 가주님에게 허락을 받아오긴 했지만, 평소처럼 까불거리다간 정말 죽을 수도 있어. 나한테든, 가주님한테든.”
“내가 설마 독천의 따님에게 해코지할까. 잠깐 사천성의 미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뿐이야.”
백진오는 웃음을 지으며 당소소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