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화 〉팔장[八章], 적의환향[赤衣還鄕] 4
복잡한 심경으로 청랑호를 바라보는 당진천의 곁으로, 백서희가 다가왔다. 당진천은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맞이했다.
“자네가 온 것을 보면, 봉황비는 보여준 것 같군.”
“예. 오라버니의 전언입니다. 가까운 시일 내에 친교를 맺고 싶다고….”
“왜 직접 오질 않고?”
당진천의 물음에, 백서희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자신이 간다면, 분명히 교섭에 실패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확하네. 자네 오라버니가 왔으면 말도 섞질 않았겠지.”
당진천은 그렇게 말하며 백서희쪽으로 몸을 완전히 돌렸다. 백서희는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 일단 먼저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말해보게.”
“친교를 맺고자 하는 것은 맞지만, 친교를 맺고자하는 대상이 가주님이 아니라 가주님의 여식이라고….”
당진천은 그녀의 말에 잠시 백서희를 바라봤다. 백서희는 찾아온 침묵에 지레 겁먹어 고개를 더욱 낮게 떨어뜨렸다. 당진천은 건조한 목소리로 질문했다.
“이유는?”
“사천당가의 미래를 보고 투자를 하고 싶다는 뜻입니다.”
“자네는 다른 생각인 것 같군.”
백서희는 당진천의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천교류회에서의 사건 때문에 안팎으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피로가 쌓여 있을 텐데, 굳이 그녀를 지목해서 가주님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이…. 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거래를 논하고 싶다면, 가주님과 진행을 하는 것이 상식적이라고 봅니다.”
“훌륭한 생각이네. 그래서 자네의 오라버니가 자넬 보낸 것이겠지.”
“…죄송합니다.”
“자네의 오라버니가 한 행동인데, 자네가 사죄할 것 까지야.”
백서희의 사죄에, 당진천은 고개를 저었다.
“데리고 가게. 대신, 백능상단의 거처에 녹풍대를 좀 배치해둬도 괜찮겠지?”
“예, 당연히 그리 하셔도 됩니다. 하지만…. 정말, 허락하시는 겁니까?”
“무슨 의도로 부르는 건지 알고 있으니까. 당가는 이제 한동안 누굴 만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움직일 것이야. 나에게 잘 보이려면, 지금 밖에 없을 터. 하지만 난 백능상단을 그리 곱게 보는 사람이 아니야.”
“그래서 마부를 쏘는 대신, 말을 쏘는 거였군요.”
백서희의 말에 당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리고 백진오는 믿지 않지만, 자네는 믿고 있으니까.”
“저, 절 믿다니요. 전 그녀를 비난한 사람인걸요.”
백서희는 난감함에 얼굴을 붉히며, 당진천의 말을 부정했다. 당진천은 그런 백서희에게 웃음을 던져준다.
“내 딸도 자네에게 몹쓸 짓을 했잖나. 그 건에 관해서 사과도 했고, 자네에게 몹쓸 짓을 한 딸을 비호하기 위해 직접 날 찾아오기도 했지.”
“그건, 그것이 올바르다고 느꼈기 때문에….”
“백능상단에서 나고 자라서 무검신니라는 고집 센 사람에게 배운 것 치곤, 꽤나 바르게 자랐군.”
당진천은 백서희와 눈을 마주친다. 백서희는 그 말에 어찌 행동할지 몰라 쩔쩔매고만 있었다. 당진천은 혼란스러워하는 백서희에게 무심한 표정으로 몇 마디를 던졌다.
“…세상사는 복잡하지. 단순하게만 보였던 검술의 투로도, 어느 날 보면 수천 갈래의 길이 보이기도 하네.”
백서희의 동공이 좁아진다. 무심하게 던진 그것은, 독천이라는 지고의 고수가 내려주는 심득이었다. 당진천은 어깨를 좁히고 자신을 노려보는 백서희에게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그렇게 긴장하지 않아도 된다네. 이건 무론도 아니고 뭣도 아닌, 단순한 마음가짐의 이야기일 뿐이니까.”
“예.”
“먼저 앞서간 이들이 알려준 대로만 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자네의 몸 안에 그들의 격[格]이 쌓이게 되지. 그것은 훌륭한 규범이고, 굳건한 기본이 될 것이야. 하지만 그 격은 과거의 것이고, 그 안에 자네는 없네.”
당진천은 뒷짐을 지며 말을 이어갔다.
“그 격이 현재와의 괴리를 느낄 때, 자네와의 괴리를 느낄 때. 파격[破格]이 필요할 때가 온다네.”
백서희는 당진천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는 고지식했다. 선현의 가르침이 그녀에게 있어선 지상명제였고, 그녀의 사견은 고려할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태도는, 검을 다루는 것에 있어서도 비슷했다.
‘나는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고, 아미파의 가르침을 받았지만 천괴에게 패했다. 이건, 내가 제대로 배우지 못했다는 것일 거야.’
‘천괴의 변화를 쫒기 위해서, 나도 검술에 변형을 주는 것은…? 아니야. 내 의견은 틀리다. 수백 년 동안 이어지며, 연마되어 내려온 가르침이야. 변형을 준다는 건 옳지 못해. 스승께서도 그렇게 가르치셨어. 흔들릴 테지만, 굳건히 쫓으라고.’
열 번을 고민하고, 백 번을 참오하며, 천 번을 후회했다. 그리고 하나 남은 답은, 변화를 꾀하는 것은 틀렸다는 것이었다. 아미파의 격을 쫓는 것이, 무검신니의 격을 쫓는 것이 옳다는 답뿐이었다.
당진천은 자신의 말을 곧바로 이해하는 백서희를 보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간다.
“격을 하나하나 뜯고, 무너뜨려야 해. 그리고 천천히 다시 쌓아야 하지. 이것이 나에게 맞는 격인지 아닌지. 만약 맞으면, 현재의 규격에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인지.”
“그것이 파격이군요.”
홀린 듯 내뱉는 말. 당진천은 고개를 끄덕인다.
“옳지 않은 것은 깎고, 옳은 것은 쌓는다. 셀 수 없을 정도의 망치질 끝에야 비로소, 우리는 실재하는 격을 얻을 수 있다네.”
“…….”
당진천이 전해주는 심득에 넋을 놓고 있던 백서희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당진천에게 포권을 했다.
“가르침에 감사드립니다. 어찌 보답할지….”
“됐네. 별 대단한 가르침도 아니잖나.”
“그래도, 전 받기만 했습니다. 이건, 예의가 아니란 것을 알고 있습니다.”
단호한 표정으로 당진천을 바라보는 백서희. 그녀는 당진천이 백능상단에게 기회를 베풀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독천씩이나 되는 이가 백능상단의 협잡질을 모를 리 없었고, 능히 이번 사천교류회의 자리에서 문제 삼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리하지 않았다.
당진천은 백서희를 바라보며 말했다.
“굳이 무언가를 주고 싶다면, 내 딸을 잘 돌봐주게. 그거면 족해.”
“…그것뿐인가요?”
“내 딸은 평생을 외롭게 살았네.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제 혈육들에겐 미움을 받았지. 성격도 모질어 당가의 천덕꾸러기가 되었고, 다른 이들에게 말썽을 부렸었어. 난 협행이니, 무림맹이니 하며 소소를 방치하다시피 했었지.”
당진천이 담담히 털어놓는 말에 백서희는 침묵했다.
“자네에게 저지른 잘못을 참작해달라는 말은 아니네. 그저, 그렇게 된 연유를 설명한 것뿐이야.”
“…….”
“그럼, 제시간에는 돌려보내게. 내 말은 잘 안 듣는 아이라서.”
당진천은 백서희의 어깨를 두드린 뒤, 그녀를 지나쳐갔다.
*
백서희는 회상을 마치고 옆을 바라봤다. 당소소가 맹한 표정으로 자리에 앉아있었다. 백서희는 슬쩍 아래를 내려다본다. 당소소는 다리를 살짝 벌린 채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백서희는 미간을 살짝 좁히며 생각했다.
‘왜 이렇게 무방비해?’
백서희는 자신의 무릎으로 당소소의 다리를 살짝 밀어, 그녀의 다리를 좁혀준다. 비싼 비단으로 짜낸 장막을 바라보던 당소소의 시선이 백서희에게로 향한다. 당소소는 잠시 백서희를 바라보다, 웃으며 말했다.
“까먹고 있었네요.”
“…까먹을 게 따로 있지.”
백서희는 당소소의 웃음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려 창가를 바라봤다. 그 둘을 바라보던 백진오는, 한차례 손뼉을 치며 주의를 환기했다.
“자, 그럼 내 소개부터 해야겠지. 난 백능상단의 후계자, 백진오라고 한다네.”
“당소소에요.”
“이렇게 소저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내 귀여운 동생을 지켜준 것에 대한 보상을 하고 싶어서네.”
“귀여운 동생은 무슨….”
백서희는 콧방귀를 뀌며 백진오의 말에 핀잔을 줬다. 백진오는 백서희의 말을 무시하며, 당소소를 바라보며 미소를 짓는다. 당소소는 그런 백진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전 보상을 받을 만큼 잘 하지 않았어요.”
“사천교류회의 영웅인 당소소 소저가 보상을 받지 못한다면, 누가 받을 수 있겠나?”
“제가 좀 더 뛰어났다면, 더 적은 희생으로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냈을 거예요.”
“하하…. 지나치게 겸손하네. 너무 겸손해도 주위의 사람들을 민망하게 하는 법이야.”
당소소는 백진오의 말에 손을 꼼지락거리며 생각했다.
‘내가 좀 더 강했으면, 좀 더 똑똑했다면. 이런 약한 몸이 아니라, 주인공이었다면.’
“괜찮….”
“그냥 받아둬.”
백서희는 당소소의 사양을 잘라내며 말했다.
“저 능구렁이는 너에게 선물을 줘서 네 아버지랑 대화할 구실을 마련하려고 하는 거니까.”
“서희, 말을 가려서 해.”
“네가 선물을 거절하면, 더 귀찮게 들러붙을 거니까. 그냥 받고 치워버려.”
“너….”
당소소는 백서희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백진오는 어색한 웃음으로 상황을 수습하며, 손짓으로 사용인을 불렀다. 말끔한 복색의 중년 사내가 금으로 된 장식이 붙어 있는 목함을 내밀었다. 백진오는 그 상자를 받아, 당소소에게 내밀었다.
“동생이 잠시 흰소리를 했다만, 사천교류회의 영웅에게 자그마한 선물이라도 하고 싶은 내 진심을 알아주길 바라네.”
백진오는 그렇게 말하며 상자를 살짝 들어 당소소를 재촉한다. 당소소는 불안한 눈빛으로 백서희를 바라본다. 백서희는 그 눈빛을 보며 피식 웃더니, 대신 상자를 받아 당소소에게 내밀었다.
“네가 안 받아도 어떤 수를 써서라도 너한테 전해서 어차피 받게 될 거니까, 그냥 지금 받아.”
“그, 그래?”
당소소는 잠시 주저하다가 상자를 받았다. 불만이 가득한 표정으로 백서희를 노려보던 백진오는, 당소소를 바라보며 열어보라는 고갯짓을 했다. 당소소가 상자를 열자, 쥘부채 하나가 비단 위에 놓여있었다. 백진오는 웃음을 지으며 부채에 관한 설명을 늘어놓았다.
“시화선[詩畫仙] 이라는 중원제일의 화공이 직접 매화를 그려 넣은 쥘부채네. 풍류를 즐기는 자들이라면, 천금을 주고서라도 가지고 싶어 할 것이지. 매화미치광이인 화산파의 도인들이 봤다간, 눈을 뒤집으며 내놓으라고 할 걸세.”
당소소는 백진오의 설명에, 부채를 쥐던 손을 슬쩍 거두고 백진오를 바라봤다.
“왜 그러지? 펼쳐봐도 괜찮다네.”
“음….”
“무언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이게 얼마라고요?”
“당장 처분한다고 해도, 금 백 관[貫] 정돈 받을 수 있겠지.”
백진오는 아래에 내려놓은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를 비비며 초조해 했다.
‘까탈스럽고 제멋대로인 성정이라는 소문은 들었건만. 시화선의 그림이 그려진 부채조차 마음에 들지 않아 할 줄이야. 소문엔 음주가무를 즐기며 반반한 남자를 쫓아다닌다던데, 그쪽으로 준비를 해야 했나?’
당소소는 망설이던 손을, 이젠 완전히 내렸다. 김수환의 금전감각으로 치환된 금 백 관의 물건은, 차마 엄두도 못 낼 물건이었다. 그가 가진 가장 비싼 물품은 낡은 휴대전화기였으며, 그가 벌었던 모든 돈을 합쳐도, 금 몇 관이 채 되지 않았다.
“이런 건 받을 수 없어요. 너무 비싸서….”
“당 소저의 명예에 비교한다면 아무것도 아니네.”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니고, 정말로 비싼걸요. 이렇게 비싼 건, 태어나서 처음 봐서….”
당소소의 발언에 백진오는 비비던 손가락을 멈추고 당황했다.
‘…이렇게 비싼 건 태어나서 처음 본다고? 사천당가의 아가씨가? 씀씀이가 헤프다는 소문이 잘못된 건가? 아니면 한번 튕겨보는 건가? 더 큰 걸 내놓으라고?’
생각에 빠진 백진오 대신, 백서희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당소소를 바라봤다. 그리고, 부채를 목함에서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줬다.
“괜찮아. 받아.”
“응?”
“많이 힘들었지? 얼마나 서럽게 살았으면, 이런 부채 하나에 벌벌 떨고….”
“어…?”
당황하는 당소소. 백서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오빠. 백능상단 소속 명인이 만들었던 노리개도 아직 있지?”
“뭐? 있긴 하다만….”
“그것도 가져와.”
백서희의 시선은 허름한 옷을 입고, 그것을 가리기 위해 녹색 외투를 여민 당소소의 외견에 닿았다.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는 당소소의 평상복이었다. 나름 고급스러운 재질로 만들어진 옷이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허름하게만 보이는 펑퍼짐한 옷 덕에 백서희의 눈에는 측은함이 어린다.
‘가문에서 얼마나 괴롭힘을 당했으면…. 틀림없이 돈도 제 마음대로 쓰질 못해서 꾸미는 것조차 못 한 게 분명해.’
‘얘 진짜 약 먹었나? 아니, 다쳤는데 약은 먹었을 것이고…. 상한 걸 먹은 건가?’
갑작스레 애절한 눈빛으로 바라보는 백서희. 당소소는 낯선 그녀의 모습에, 엉덩이를 들어 한 뼘 멀어졌다. 백진오는 다시 손가락을 비비더니, 턱짓하며 당소소에게 말했다.
“펼쳐보셔도 되네.”
당소소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이며 부채를 펼쳤다.
차락!
깔끔한 소리를 내며 부채가 펼쳐졌다. 암향부동월황혼[暗香浮動月黃昏]이라는 매혹적인 서체의 글귀와 함께 절조 있는 매화가 고고한 붉은 빛을 뽐내고 있었고, 희미한 상아색의 달이 그 위에 걸려있었다.
“어떤가? 역시 시화선의 비범한 기운이 느껴지지 않나?”
“……?”
당소소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부채를 앞뒤로 훑어봤다.
‘…이런 종이쪼가리가 내 평생 번 돈보다 몇 배는 더 비싼 거야?’
“하하, 당 소저도 그 놀라운 솜씨에 할 말을 잊었나 보군. 역시, 당가의 규수라 보는 눈이 있다니까.”
“아, 네…. 음, 예쁘네요….”
“부담 갖지 마시게. 춘부장께는, 조만간 찾아뵙겠다 전해주고.”
당소소가 어색하게 맞장구치며 부채를 접어 상자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백진오는 당소소의 맞장구에, 마음에 들어 하는 것으로 생각하며 가져가라 손짓했다. 당소소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하고, 두 손으로 상자를 집어 들었다.
“아, 이제 왔군. 이제야 사천교류회의 영웅들이 한자리에 모인 셈인가?”
백진오는 흡족한 웃음을 짓다, 손을 들어 누군가에게 인사했다.
“의외의 인물이 있네?”
“소소언니?”
자신을 두둔하던 귀여운 목소리와, 꿈에서도 나오던 역겨운 목소리. 당소소의 볼살이 꿈틀거린다. 그녀는 미간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본다.
“조만간 찾아갈 거라 했잖아? 뭐, 아직은 화검공자긴 하지만.”
사마문과 운령이 당소소를 바라보며 웃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