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화 〉구장[九章], 만화백절[晩花百折] 1
늦게나마 꽃은 피었다.
계절은 겨울의 한가운데.
뿌리를 안은 포근한 흙이나 줄기를 감싸는 봄바람도 없고, 꽃잎에 쬐는 나른한 햇볕도 없었다.
언 땅은 뿌리를 잡아 뜯고, 서리가 얽힌 찬바람은 줄기를 엔다.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매섭게 꽃잎을 때리는 눈발.
꽃은 늦게 영근 그 몸을 웅크리고 봄을 기다린다.
아직 봄은 멀었다.
*
다시 동이 튼 청랑호의 아침. 각 문파의 사람들이 분주하게 짐을 꾸리고 있었다. 흑풍대의 무인들 또한 짐을 정리하고 말과 마차에 짐을 싣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는 당진천의 곁으로, 정휘가 다가온다.
“떠나시는 겁니까?”
“마음 같아선 좀 더 오래 머물며 딸아이의 몸도 돌보고 청랑검문의 내부상황도 좀 더 돌봐주고 싶네만….”
“가주님, 청랑검문은 강합니다.”
정휘는 왁자지껄한 청검각을 바라보며 말했다. 몸에 붕대를 감은 제자들이 웃으며 무너진 건물을 수리하고 있었다.
“제자들은 강하고, 전 아직 건재합니다. 아들은 이번에 제 경지를 뛰어넘었지요. 가주님이 지지를 해 준 덕에, 청랑검문과 제휴를 맺은 거래처들 또한 습격을 받기 전 보다 더 큰 믿음을 주고 있습니다.”
“다 자네의 좋은 지휘와 대처 덕분 아니겠나? 천괴와 학귀를 상대로 냉정하게 지휘를 할 수 있는 건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네.”
“제가 뭐 한게 있습니까? 가주님의 따님이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인데요.”
당진천은 그 말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말을 돌렸다.
“…일단은 명목상 벌이니, 너무 즐기진 말게.”
“의견을 취합해서 전달하라는 명으로 당가의 제약당을 유치할 권한을 주셔놓고, 벌이라니요. 덕분에 묵가장의 휘하에 있던 문파들이 청랑검문을 지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이 많은건 꼭 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 아니지.”
당진천은 마차에 오르는 당소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씁쓸한 웃음을 짓는 당진천을 말없이 바라보는 정휘. 당진천은 정휘의 어깨를 한차례 두드리며 말했다.
“당분간 고생을 좀 해주게.”
“가주님도, 부디 따님과 잘 풀리셨으면 좋겠습니다.”
“격려 고맙네.”
당진천이 웃으며 마차로 걸어갔다. 정휘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그런데 정유 이녀석은 어디로간거야?”
*
“옷은 다 챙겼고…. 아가씨, 짐은 다 챙기셨나요?”
“뭐, 대충 다 챙긴 것 같은데.”
“금 백 관짜리 부채 안챙기셨거든요.”
하연은 마차 안에 상자 두 개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이젠 익숙해진 실뜨기를 하던 당소소는, 그 상자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너무 비싸서 부담스러워.”
“비싼 것이 당연하죠. 무려 사천당가와 백능상단이 친교를 맺는다는 것의 증표인걸요. 거기에 백서희 소저께서도 화해와 감사의 표시로 장신구를 주셨잖아요? 이런건 값비싼 것을 받더라도 사양하지 않는 것이 예의일거에요. 서로간의 관계를 그만큼 중하게 여긴다는 뜻이니까.”
“그렇구나. 그런데 화해…. 했나?”
당소소는 백서희의 태도를 곱씹으며 고민했다. 사건 이후, 괜스레 사근사근해진 백서희를 보면 자신에게 호의적인 것은 확실했다. 하지만 서로 과거의 일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당소소는 낯을 가리는 성격상 굳이 묻지 않았다.
‘백서희는 그런 사소한 것을 귀찮다 여기며 굳이 말하지 않을 애지…. 뭐, 상관없나?’
“대충 그렇다고 치지뭐.”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떠오른 의문을 얼버무렸다. 자신이 백서희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고, 백서희가 자신에게 호감을 가지게 됐다면 굳이 신경 쓸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실을 만지작 거리는 당소소의 곁으로, 진명이 다가와 말했다.
“출발할겁니다. 마차에 오르시죠.”
“알았어. 그런데, 정유랑은 화해했지?”
당소소는 질문을 던지고 자조했다. 백서희와의 관계도 애매한데, 누가 누구에게 화해의 여부를 묻느냐는 생각이었다. 진명은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요, 누구의 분부신데. 그것보다 어서 마차에 오르십쇼. 곧 가주님도 오십니다.”
“알았어.”
당소소는 진명의 채근에 실을 풀어 오른손에 감았다. 마차에 오르려고 문 옆에 달린 손잡이를 쥐자, 하연이 도움을 주기 위해 손을 내밀었다. 당소소는 잠깐 망설였지만, 그 손을 쥐며 마차 위로 올라갔다.
“진명, 아가씨가 아직 다 낫지 않았으니 조심히 모세요.”
“언젠 거칠게 몰았다는 것처럼 말하시네.”
“…아무튼, 조심히 모세요.”
“이 마당쇠에게 여부가 있겠습니까.”
당소소가 마차에 타자, 하연은 문을 닫기 위해 서있는 진명에게 말했다. 진명은 어깨를 으쓱하며 너스레를 떨곤, 문을 닫았다. 당소소는 그 구석에 앉아, 턱을 괴고 창밖을 바라봤다. 비명과 쇳소리가 넘실거리던 청랑호는, 언제 그랬냐는 듯 푸른 얼굴만을 내밀고 있었다.
“인사는 안하고 가셔도 되나요? 청성파의 귀여운 도사님이 꽤나 따르시던 것 같은데.”
당소소의 귓가로 하연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하연이 마차 밖에서 창을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다. 당소소는 나른한 목소리로 답했다.
“곧 다시 만나게 될 텐데 뭘….”
“아가씨는 가끔 내일 날씨도 맞출 것처럼 이야기 하세요.”
“내가 언제.”
당소소가 하연을 내려다보며 말하자, 하연은 웃음을 지으며 멀리 시선을 던졌다. 팔에 붕대를 감은 사내가 긴장한 기색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하연의 눈은 장난기로 휘어진다.
“그럼, 전 흑풍대 무인들을 도와주러 가볼게요. 혹시라도 빼먹은 것이 있을지 모르니까.”
“그래.”
당소소의 허락이 떨어지자, 하연은 자신의 입가를 가리며 마차에서 멀어졌다. 그녀의 행동에 잠시 의심의 눈초리를 한 당소소였지만, 이내 신경을 끄고 손에 감은 실을 풀었다. 손가락에 실을 걸자, 남성의 목소리가 그녀의 주의를 끌었다.
“흠흠. 당 소저?”
“…정유 소협?”
“비록 만남은 짧았다지만 우애가 꽤 쌓였다고 생각했는데. 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다니, 이 정 모, 좀 섭섭하오.”
“아, 죄송해요. 좀 정신이 없어서…. 그래도 자주 뵐 수 있을 거에요. 내년에 정천무관에 가시잖아요?”
당소소의 말에 정유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정천무관…? 저는 아마 복잡한 청랑검문을 이어받기 위해서 아버지의 밑에서 꽤 오래 있을 것 같습니다만….”
“아.”
당소소는 정유의 말에 짧게 감탄사를 토했다. 흑림총련의 음모를 막아내 사천성의 후기지수들은 납치당하지 않았다. 청랑검문 또한 망하지 않았고, 그로 인해 정유가 정천무관에 투신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었다.
‘이러면…. 많은 것이 틀어지는데.’
당소소의 얼굴엔 약간의 동요가 번졌다. 그런 당소소의 얼굴을 바라보던 정유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소저께선 제가 정천무관으로 가는 것을 원하시오?”
“음, 뭐…. 사람은 큰 물에서 놀아야 하기도 하고. 장차 문파를 이끌어 갈 사람이면 많이 배워야하니까. 갈 수 있으면 가는게 좋지 않나, 그런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런데 굳이 원하지 않는다면 뭐….”
당소소는 횡설수설하며 마차의 천장을 바라봤다. 정유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당 소저는 정천무관에 갈 생각이시오?”
“아마….”
당소소가 고개를 끄덕이자, 정유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럼 까짓거 가겠습니다.”
“가업을 잇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나요? 그저 제 말에 충동적으로 정하기엔….”
당소소의 말에 정유는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께선 아직 정정하시고 저도 아직 이 경지에 만족할 생각이 없으니, 소저의 말대로 더 큰 물에서 놀아봐야하지 않겠습니까? 오히려 소저께 고마울 지경입니다. 정천무관이라는 선택지는 머릿속에서 전혀 없었기에.”
당소소는 정유의 말에 대해검호라 불리는 그의 모습을 그리며 말했다.
“정유 소협이라면, 높은 경지에 도달할 수 있을 거에요.”
“확신이라도 하는 듯이 말하시는군요.”
“…그럴 것 같아서.”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슬쩍 시선을 피했다. 멀리서 당진천이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작별인사를 건내기 위해 당소소가 입을 열자, 정유가 먼저 헛기침을 하며 말을 시작했다.
“흠흠, 당소소 소저. 제가 긴히 할 말이 있소. 조금 무례하게 들릴 진 모르겠지만, 양해를 좀 해주시오.”
“뭔데요.”
당소소는 냉랭한 말투로 대꾸하며 자신의 팔을 슬쩍 내려다본다. 묘한 분위기를 감지한 탓인지, 팔에 은근한 소름이 돋아 있었다. 정유는 마부석에 앉은 진명을 바라본다. 진명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올렸다. 정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제가 소저를 좋아하면 안됩니까? 제가 소저를 좋아하면 안되는 거냐구요.”
“……?”
“제가 소저를 좋아할 수도 있잖습니까?”
“…….”
“그런데 이 빌어먹을 세상이 왜 저희의 사랑을…!”
쾅!
당소소는 마차의 벽을 내리치며 정유의 이어질 말을 끊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진명.”
“푸큭!”
마부석에 앉은 진명이 웃음을 참지 못하고 입가를 가렸다. 한참을 낄낄대던 진명이, 마부석에서 내려 당소소가 앉아있는 창가로 걸어왔다. 그렇게 한참을 웃었어도, 채 가시지 못한 웃음기가 비틀린 입가에 흥건하게 고여있었다.
“너지?”
“뭐…. 푸흡! 뭐가요?”
“너잖아, 씨발아.”
“끅, 끄흑!”
당소소의 추궁에 이젠 대꾸조차 하지 못하고 눈물까지 흘리며 웃는 진명과, 그런 진명을 배신감 가득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정유.
“형님이라고 부르면, 무조건 성공하는 고백법을 알려준다면서….”
“푸하핫! 상식적으로 누가 그런 고백을 하냐? 난 화해한 기념으로 서로 농담하는 줄 알았지.”
“…….”
정유는 부끄러움과 배신감에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당소소는 또 다시 골이 지끈거려 머리에 손을 짚었다.
“제가 책임지고 조질테니까…. 나중에 봐요….”
“죄송하게 됐습니다, 소저….”
“네….”
정유는 당소소의 욕설을 인지할 수 조차 없을정도로 상심했다. 그리고,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청검각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당소소는 복잡한 심정으로 정유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아직도 낄낄거리고 있는 진명의 코를 세게 움켜쥐었다.
“윽!”
“너 진짜 뒤질래? 공구리가 어떤 단어인지 알려줘?”
“눈치없게 구애하길래, 그런 취향을 좋아하는 줄 알고 비슷한 쪽으로 알려준 것 뿐입니다? 제가 알려주지 않았어도 어차피 또 은장도를 내밀며 고백했을 텐데….”
“에휴, 얼빠진 새끼.”
당소소는 팍 인상을 쓰며 진명의 코를 놓았다. 코가 풀려난 진명은 저 멀리 걸어가는 정유를 목을 빼고 지켜보며, 또 다시 키득거렸다. 당소소는 진명에게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아직 뺨 세 대 계산 안한거 알지?”
“예?”
“사천제일권의 싸대기는 어떤 느낌일까….”
“잠깐…!”
차륵!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창에 달려있는 장막을 쳤다. 진명은 당황하며 창가에 한걸음 다가섰지만, 그런 진명을 당진천이 노려보고 있었다.
“뭐하나?”
“아, 가주님….”
“운전안하나?”
“아, 해야죠. 예.”
진명은 마부석으로 걸어가다가 잠시 걸음을 멈추고, 당진천에게 물었다.
“가주님 그런데 그…. 뺨을 맞다가 뺨이 찢어지거나 그러면, 당가에서 치료가 가능 합니까? 가급적이면 덜 고통스럽게.”
“이상한 것을 묻는군.”
“제게는 좀 중요한 일이라서….”
당진천은 잠시 눈을 가늘게 뜨더니, 그의 질문에 답해줬다.
“살점을 도려내서라도 치료할 수 있으니, 걱정말고 마차나 모시게.”
당진천은 그렇게 말하며 당소소가 올라탄 마차에 탔다. 진명은 자신도 모르게 오른쪽 뺨을 감싸쥐었다. 장난의 대가로 자신의 볼을 잃는 것은, 깊이 생각해 볼 일이었다.
*
당소소는 마차에 올라탄 당진천을 바라봤다. 묘하게 어색한 분위기를 풍기는 당진천은, 차마 당소소를 마주하지 못하고 이리저리 시선을 돌려댔다. 당소소 또한, 소심한 성격에 볼을 긁적거리며 당진천에게 선뜻 말을 걸지 못했다.
“실뜨기는 이제 익숙하….”
히힝!
한껏 용기를 내서 던진 당진천의 말을 말의 울음소리가 끊었다. 그리고 마차가 움직였다. 당진천은 슬쩍 주먹을 쥐고 인상을 찌푸렸다.
‘…단혼사에게 슬쩍 언질을 줘야겠군.’
“실뜨기는 이제 익숙하느냐?”
“네, 아버지.”
당진천의 물음에 아무생각없이 답하는 당소소. 하지만 당진천은 그런 당소소의 태도가 냉랭하게 느껴졌다.
‘사천교류회에 오기 전엔 그렇게 사근사근하던 아이가….’
‘나중에 정유를 어떻게 봐야 하냐? 진짜 미치겠네….’
그저 복잡한 생각에 잠겨있던 당소소를 보며, 당진천은 그녀가 아직도 혼낸 것을 마음 속에 담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었다. 당진천은 헛기침을 하며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흠. 그럼 몸이 괜찮아진다면 무공을 배워보자꾸나.”
“네, 아버지.”
당소소는 창가의 장막을 바라보며 별 생각없이 답했다. 당진천은 그런 당소소의 모습을 보며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또 다시 틱틱대는 예전의 딸로 돌아갈 것만 같다는 생각에, 당진천은 절박한 심정으로 말했다.
“미안하다, 딸아! 내가 많이 미안하단다. 그냥 널 걱정해서 큰 소리를 낸거야. 혼내려고 싶어서 혼낸게 아니란다.”
“……?”
“무엇을 사줄꼬? 운남의 과일이 먹고싶으냐? 아니면 저기 백능상단의 노리개가 갖고싶으냐? 아니면 소주와 항주에 가고싶다고 했었는데, 그 곳으로 데려다 줄까?”
당소소는 그런 당진천을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그의 모습에, 슬쩍 웃으며 말했다.
“혼낸 줄도 몰랐으니까, 무공이나 알려주세요.”
“미안하단다 딸아, 다 내잘못이다…!”
당소소의 웃음섞인 말에도, 당진천의 주책은 꽤나 오랜시간동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