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구장[九章], 만화백절[晩花百折] 4
많은 석비가 세워진 묘지. 향이 타고 있는 한 묘 앞에, 당진천은 복잡한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그런 당진천의 곁으로 머리를 양 갈래로 땋은 소녀 한 명이 다가간다. 당진천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셨습니까, 스승님.”
“넌 어째 커도 귀염성이 없니? 이모라고도 부르지 않고, 조우를 언니와 형부가 묻힌 곳에서 하자고 하질 않나.”
“…반로환동[反老還童]은 또 언제 하셨습니까?”
당진천은 질색을 하며 옆을 돌아봤다. 독무후가 짓궂은 웃음을 하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갈색의 눈동자를 제외한다면 영락없는 당소소의 어릴 적 모습이었다. 당진천은 이마를 짚으며 아픈 골치를 달랬다. 독무후는 당진천의 다리를 장난스레 걷어차며 말했다.
“이모는 저 먼 황궁에서 개고생하고 왔는데, 처음 묻는다는 소리가 그거야?”
“달리 물어볼 것이 있습니까?”
“우리 귀여운 조카, 가주됐다고 무게 잡는 거 봐. 언니가 보면 자랑스러워하겠어.”
독무후는 고개를 까딱하며 눈앞의 묘지를 바라봤다. 당진천은 그 말에 난감한 기색을 보이며 한숨을 쉬었다. 독무후는 까치발을 들어 당진천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반로환동을 한 건 대충 십 년 전쯤인가…. 황궁에서 좋은 것만 주워 먹었더니, 이렇게 됐지 뭐야.”
“좀 거북합니다, 스승님.”
“누군 좋아서 이런 꼴을 하는 줄 알아? 반로환동 같은 거 하지 않아도 죽을 때까지 젊은 몸으로 살 수 있을 텐데….”
“어련하시겠습니까. 그래서, 평소엔 제 말은 죽어도 듣지 않으시더니 이번엔 응하신 이유가 뭡니까?”
“근데 이 녀석 말본새 봐라.”
독무후는 당진천의 볼을 쭉 잡아당겼다. 당진천은 인상을 쓰며 고개를 저었다. 독무후는 그런 당진천을 보며 짧게 웃더니 볼을 놓고 말했다.
“황궁의 정세가 안정화되니 더는 봐줄 독이 없더구나. 처음 갔을 땐 온갖 독으로 천자를 독살하려고 들더니…. 산처럼 쌓인 영약과 신병이기들은 좀 아쉬웠지만 내 귀여운 조카가 부르는데 어쩔 수 없었지.”
“아쉬운 쪽은 독살을 위해 음식에 넣은 독 아닙니까?”
“녀석, 건방져진 거 봐.”
독무후는 그렇게 말하며 혀로 입술을 핥았다. 당진천은 그녀가 꼬집은 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떻게 황궁을 나오셨습니까? 스승님 정도 되는 고수를 곱게 놓아줬을 것 같진 않은데.”
“세상은 한번 바뀌었지. 현 황제는 무림에 큰 관심이 없어. 아니, 오히려 이용하려고 하신다.”
“요즘 부쩍 무림맹의 권한이 강화된 연유가 거기에 있었군요.”
“지방에 절도사를 파견해서 관리하는 것은 한계가 있지. 땅덩어리는 넓고, 지방의 군권을 쥔 절도사들 때문에 힘들게 찾은 황궁의 일시적 평화를 깨긴 싫으니까. 그래서 절도사의 권한 중 일부를 떼어 정파 무림에 자경단의 역할을 맡긴 셈이야.”
독무후는 그렇게 말하며 심지가 줄어들고 있는 향을 바라봤다. 당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독무후가 쉽게 빠져나올 수 있던 이유를 유추했다.
“황실이 안정됐으니, 이젠 지방으로 가서 일하라는 거군요.”
“너에겐 좋은 일 아니더냐? 하연에겐 다 들었다. 내가 황실에 비밀리로 불려간 사이, 질척거리는 비구니들과 제멋대로인 도사놈들이 귀찮게 한다며? 가서 기강 한번 다져줄까?”
“전 스승님이 쉬셨으면 좋겠습니다만.”
“나 같은 사람은 골방에서 편히 늙어 죽을 성격은 아니야. 황궁에 있던 이십 년 동안 원체 좀이 쑤셨어야지.”
독무후는 당진천의 말을 받으며 귀를 후볐다. 그리고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야기를 얼추 들어보니, 꽤 힘들어 보이는구나.”
“그다지 힘들지는….”
“수신제가[修身齊家], 치국평천하[治國平天下]라고 했다. 몸은 닦았으나 집안을 평안하게 만들지 않고 천하를 생각했으니, 고생할 것은 뻔하지 않으냐?”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독무후는 수심 어린 당진천의 말에 그의 등을 툭툭 치며 말했다.
“그래서 평생 안 들어주던 조카의 부탁을 들어준 거야. 제자가 부족한 부분을, 스승이 채워줘야 하지 않겠니?”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그냥 고맙다는 한마디면 충분하단다.”
독무후는 웃으며 말했다. 당진천은 그런 독무후의 따스한 말에 못 이겨 결국 웃음을 지었다. 묘 앞에 피워둔 향이 다 타오르고, 한 줄기의 바람이 일었다. 독무후는 흩날리는 두 갈래의 머리를 쥐며 말했다.
“언니는 형부를 좋아했지. 그리고 형부를 좋아하는 만큼, 당가도 좋아했었어.”
“예, 두 분은 당가를 소중히 여기셨었죠. 그런 만큼, 전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일어난 일을 그리 마음 두지 말아라. 난 그런 두 사람을 좋아했고, 그리고 그 두 사람의 자식인 널 좋아한단다. 너도 최선을 다했잖니?”
“스승님은 이런 낯간지러운 말 안 하시잖습니까?”
“뭐, 늙어서 그런가?”
독무후는 땋은 머리의 끝부분을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몸을 돌리며 말했다.
“그럼 이제, 네가 좋아하는 귀여운 딸을 한번 보러 가볼까.”
“예.”
“칠혼독이라. 위험한 걸 먹였어.”
“혼돈의를 불러 어찌 살려는 뒀지만, 단전과 혈맥이 녹아내린 상태입니다. 내공을 쌓는다면….”
독무후는 묘지에서 나가는 돌계단을 밟으며 말했다.
“온몸에서 피를 뿜으며 죽겠지.”
“…예. 그래서 스승님을 불렀습니다. 오독문의 방도론 해결책이 있을 것 같기에.”
“뭐, 네 생각대로 방도가 없는 건 아니지만….”
산에서 내려가며 보이는 별채의 외딴곳인 독봉당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독무후의 눈엔 많은 생각이 담겨있었다.
“의지는 있는데 각오가 되어 있진 않은 것 같더군.”
*
창백한 안색의 당소소가 탕약을 홀짝이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곁을, 하연이 걱정스러운 눈치로 지키고 있었다. 울컥 올라오는 쓴맛에 인상을 찡그린 당소소가 말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불러서 뭐라고 하셨어?”
“시비들을 감독하는 시녀장을 맡아줬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잘됐네. 힘들게 고생한 보상을 받을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당소소는 그동안 자신의 밑에서 고생만 해왔을 하연을 생각했다. 그리고, 고생만 잔뜩 하고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하던 김수환의 삶을 떠올렸다.
‘옳은 일을 한 사람은 옳은 대우를 받아야 해.’
그녀는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빈 그릇을 내려놓고 웃었다. 당소소의 웃음에 하연은 얼굴에 그늘을 그리며 말했다.
“하지만 제가 시녀장이 된다면 당분간 아가씨의 일엔 소홀하게 될 것 같아서 걱정이에요.”
“그래도 잘 될 기회잖아.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수 있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야. 난 네가 꼭 시녀장이 됐으면 좋겠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당소소의 웃음에 하연은 어쩔 수 없이 웃음을 지어주었다. 그런 하연의 뒤로 꼬마 한 명이 허리를 껴안으며 말했다.
“잘 있었느냐, 하연아.”
“꺅! 누, 누구니?”
“네 주인도 못 알아볼 정도로 컸다니, 살짝 섭섭한걸.”
독무후는 하연의 허리를 놓아주며 방긋 웃었다. 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독무후의 전신을 훑었다.
“어…. 무후, 님…?”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 그래서, 새로운 주인은 마음에 드느냐?”
“네, 나름 재밌으신 분이랍니다.”
독무후는 하연의 대답을 듣고, 당소소를 마주보며 앉았다. 그리고, 자신과 똑같이 생긴 보랏빛 눈의 당소소를 바라봤다. 당소소의 시선 또한 독무후의 갈색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어린아이가 독무후…?’
당소소는 놀란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쌍검무쌍에서의 독무후는 제대로 된 묘사가 나오질 않았었다. 그저 장막이나 그늘에 모습을 감추고 주인공에게 해독제나 조언을 하던 사람으로 나왔을 뿐. 이런 소녀일 줄은 당소소조차 상상하지 못했다.
독무후는 턱을 괴고 생각에 빠진 당소소의 얼굴을 바라봤다.
“네가 당소소구나.”
“앗, 독무후님을 뵙니다.”
당소소가 정신을 차리고 황급히 일어나려고 하자, 독무후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조카의 자식한테 그런 극진한 예의를 받을 생각은 없단다. 가뜩이나 몸도 허해 보이는데, 편히 앉아있거라.”
“…네.”
“…….”
독무후는 말없이 당소소를 바라봤다. 당소소는 독무후가 소녀의 몸이라는 괴리감과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녀의 시선에 슬쩍 눈을 돌렸다. 독무후는 당소소가 시선을 피하자, 하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잠시 나가있거라.”
“예, 무후님.”
하연이 독무후의 말을 듣고 나가자, 독무후는 자리에서 일어나 당소소에게 다가간다.
“제독전에서의 이야기는 들었다. 당가에 반기를 든 자들의 감형을 원한다고?”
“…….”
“피하지 말고 말하거라.”
“예. 저와 관련된 일은 전적으로 제가 잘못한 것이기에.”
“흐음.”
독무후는 땋은 머리의 끝부분을 만지작거리며 당소소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당소소는 헛바람을 들이키며 절로 상체를 뒤로 뺐다. 독무후는 그런 당소소에게 물었다.
“이유는 네가 저지른 행실 때문이고, 게다가 넌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서?”
“네, 저는….”
“무르구나.”
독무후는 아직 옅은 떨림이 가시지 않은 당소소의 손목을 잡았다.
“결국, 그들이 행동한 거란다. 어떤 행동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야.”
“하지만 전, 그들에게 막 대했던 책임을 지지 못했어요.”
“글쎄다.”
독무후는 당소소의 손목을 놓으며 말했다.
“넌 네 행동의 대가로 칠혼독을 먹고, 온몸의 혈맥과 단전이 망가졌단다.”
“…예?”
“영약을 섭취해 내공을 쌓지 못했던 십팔 년의 세월을 줄일 수도 없고, 심지어 무공을 배웠다간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게 되었다. 그 정도라면 나름 책임을 진 셈 아니겠니?”
“그런…!”
당소소는 쿡쿡 쑤셔오는 오른팔의 고통에 팔을 가져다 움켜쥐었다. 옆엔 설 수 없어도, 뒤를 따라가 볼 순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출발선에 설 수조차 없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리를 헤집었다. 독무후는 웃으며 당소소에게 말했다.
“이젠 감형을 시키지 않아도 되겠느냐?”
“…….”
당소소는 독무후의 말에 차마 답하지 못하고 거칠게 숨을 쉴 뿐이었다. 또다시 생각은 팽창했다. 그들을 처벌하면 이 괴로운 생각들이 가실 것 같다는 안온한 마음으로 생각은 수렴한다.
독무후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 당소소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감형은 안 되겠지요.”
“이제야 이해를 하는구나.”
“그래도 지은 죄를 넘어서 더 큰 벌을 받는 것은 안 돼요.”
“왜지?”
당소소의 말에 독무후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의 시선이 닿자, 실망에 젖어있던 당소소의 눈이 처연하게 빛났다. 당소소는 이런 절망적이고 막막한 감정을 알고 있었다. 당진천과 단혼사에게 당청의 모반을 토로했을 때.
그 사건에서, 당소소는 부정을 하기 위해선 구체적인 대안이 제시되어야 함을 배웠었다. 고개를 돌린 독무후의 시선을 마주 보던 당소소의 입이 열렸다.
“당가가 흔들리기 때문이에요.”
“당가가 흔들린다라….”
“제독전은 당가의 핵심기관 중 하나고, 총관과 하인들은 당가의 피를 돌게 하는 혈액과도 같은 존재들이에요. 이들을 쳐낸다면, 유지되고 있는 균형이 무너질 것이 분명해요.”
“당연한 이야길 하는구나.”
“그럼…?”
기대를 하며 되묻는 당소소에게 독무후는 단호한 말을 뱉었다.
“하지만 쳐내야 한단다. 쳐내지 않으면, 장로들은 그들을 손에 쥐고 네 아비의 목을 찌르기 위해 달려들 것이야. 가뜩이나 분파들을 성도로 이주시키면서 흩어졌던 방계의 장로들을 지근에 두고 관리하기 시작할 텐데, 넌 네 아비가 죽기를 바라느냐?”
“아니요, 절대로.”
“그리고 당가의 독심은 흐려져서는 안 된단다. 예외를 두고 관용을 베풀기 시작하면, 권위는 땅으로 떨어지게 된다. 그렇지 않기에 당가는 오래도록 고고하게 있을 수 있는 게야.”
독무후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흥미로운 얼굴로 고뇌하는 당소소를 바라봤다.
‘몇 년간 날 그리워하는 편지만을 보내던 하연이, 최근엔 자기 주인이 귀엽고 불안하다며 편지를 보내왔었지.’
독무후는 온갖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는 당소소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뭔가 이해가 될 것 같기도 한걸.’
독무후는 의자의 팔걸이에 손을 올렸다. 하연의 편지에 쓰여있던 안하무인이라던 당소소는,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고 그 생명을 가문의 명예와 저울질하는 어리숙한 소녀가 되어있었다.
‘대충 왜인지 느낌은 오는데….’
독무후는 당소소의 손목을 잡았을 때 느꼈던 그녀의 상태를 떠올린다. 그녀의 눈은 흥미로 물결쳤다. 독무후는 팔짱을 끼며 당소소에게 말했다.
“네 고뇌를 풀 수 있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도록 할까.”
“…네, 부탁드릴게요.”
“일단 넌 별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란다.”
“알고 있습니다. 전 독천의 자식인걸요.”
당소소의 말에 독무후는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리고 독무후의 두 번째 제자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