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화 〉십장[十章], 불굴일향[不屈一香] 7
쌍검무쌍의 작중, 사흉혈맥[四凶血脈]이라 불리는 설정이 있었다.
야장[冶匠], 도철일맥[饕餮一脈].
학사[學士], 도올일맥[檮杌一脈].
의원[醫員], 혼돈일맥[混沌一脈].
무인[武人], 궁기일맥[窮奇一脈].
고대의 흉수에 빗댄 이름을 가진 네 종류의 일인전승 문파. 각각의 경지가 이질적이고 요원하기에, 경외감을 담은 명칭이었다. 몇 백 년을 이어 내려온 네 문파이기에 그 명맥이 끊길 법도 하건만, 쌍검무쌍의 소설에선 넷 모두 온전히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사흉혈맥은 주인공이 이어받게 되는 아홉 개의 기연 중 첫 번째 기연이었다. 궁기일맥의 무공을 이어받고 혼돈일맥의 신체개조를 받는다. 흥미본위로 입학한 정천무관에선 도올일맥의 도움을 받아 재능을 개화하고, 도올일맥의 안내를 받은 도철일맥이 필생의 걸작을 쥐어주며 다음 기연으로 안내한다.
그 일련의 과정에서 도올일맥이 도철일맥에게 도달하기 위한 물품이라며 건네준 열쇠의 역할을 하는 검. 그 검이 당소소의 눈앞에 있었다.
“묻지 않느냐. 네가 어떻게 도철일맥을 알고 있고, 이 검이 도철삼보의 하나인 무궁검이라는 것을 어찌 알고 있냐고.”
“…….”
당소소는 당회의 다그침에 입을 살짝 벌리다가, 도로 닫는다. 그 입술에선 망설임이 묻어났다. 당회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정녕…!”
당회는 침묵을 지키는 당소소에게 한 발짝 앞으로 다가섰다. 그녀를 다그치기 위해 두꺼운 팔을 든 찰나, 독무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회야, 열쇠가 없잖느냐. 어서 오지 않고 뭐하고 있니?”
“…조금 이따 이야기하지.”
당회는 당소소를 노려보다, 고개를 팩 돌리며 당무고의 안쪽으로 사라졌다. 당회가 모습을 감추자, 당소소는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숨을 뱉었다. 하마터면 이 세상이 책 속이고 자신에겐 남자의 영혼이 깃들었다는 말을 해야 할 판국이었으니까.
물론, 좋은 반응이 돌아오진 않았으리라.
“십년감수했네.”
당소소가 가지고 있던 감정에 영향을 받아 혼잣말을 자주하는 경향이, 결국 위기를 불러왔다. 당소소는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안도마저도 혼잣말로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소소의 연기를 너무 오래해서 그런가? 습관이 점점 몸에 배는 것 같아.’
그녀는 요 근래 몸이 갖고 있던 감정과 습관이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온다는 것을 인지했다. 당소소의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가늘게 뜨던 눈을 부릅뜨며 눈을 치켜세웠다.
‘…그냥 넘어갈 뻔했어. 난 그동안 당소소의 감정, 김수환의 감정. 그리고 김수환의 이성을 나눠서 생각하고 있었어.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구분을 하지 않고 있다. 이건 중요한 문제야.’
이마를 짚은 손에 힘이 들어간다. 앞머리를 와락 움켜쥐며 당소소의 눈가에 두려움이 얽힌다.
‘나는 지금 김수환으로 생각하고, 당소소로 느끼고 있어. 그리고 둘의 기억과 감정을 모두 가지고 있지. 그런데 그 경계가 완전히 무너진다면, 지금과도 같은 상황이 또 발생할 거야. 당소소의 것인 기억이나 감정이 발작해서 제대로 된 생각을 하게 될 수 없을지도 몰라.’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불빛이 없는 좁은 방안에 있으면 발작하는 것. 공포를 느끼면 몸에 피가 모두 빠진 듯 무기력 해지는 것. 당장 자신의 몸을 짓누르는 원래 몸의 고통도 이정도일 진데, 당소소의 감정과 김수환의 경계가 무너진다면 어떤 증상이 더 튀어나올지 알 수 없었으니까.
당소소는 눈을 찡그리며 되돌아갈 방도를 찾았다. 더 이상 경계가 무너지는 것을 원치 않는다면, 당소소처럼 행동하는 것을 포기하는 방도가 있었다.
‘하지만 그래선 안 돼.’
자신의 정신은 김수환이었지만, 몸은 원래 당소소의 것이었다. 그리고 주변 사람들도 자신을 당소소로 대하고 있다. 포기한다면 이야기는 뒤죽박죽이 된다. 그러나 앞선 이유 덕에 둘을 구분하는 것도 그만둘 수 없었다.
‘게다가 구분하는 것을 멈춘다면, 난 더는 달릴 수 없게 될 지도 몰라.’
그와 그녀를 구분하는 것. 그것이 이야기의 비극을 희극으로 바꾼다는 아무도 알 수 없는 길에 발을 올릴 수 있었던 연유 중 하나였다.
죽음 이전의 그 삶으로 하여금, 지금이 당소소의 이야기라는 것을 잊지 않을 수 있었다.
그녀의 이야기이기에 객관적인 태도로 고통과 공포에도 제 정신을 유지할 수 있었다. 타인의 이야기이기에 죽지 않는다는 허울뿐인 최면을 걸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김수환이 지닌 심혼이었다. 스승은 긍정적으로 바라봤다지만, 자신이 보기엔 꽤나 약아빠진 의지였다.
“후우.”
당소소는 한숨을 쉬며 손가락으로 무궁검의 우둘투둘한 검신을 훑었다. 주인공은 도올일맥의 학사에게 무궁검을 받는다. 열쇠의 역할을 한다지만 그 자체로도 도철의 세 보물 중 하나이기에, 도철일맥의 대장장이에게 기연을 얻기 전까지 주무기로 활용된다.
그리고 무궁검은 기연을 얻은 주인공을 떠나, 오랫동안 주인공 곁을 지켜왔던 무당파[武當派]의 여도사 손에 쥐여지게 된다.
쌍검무쌍의 이야기에선 그렇다. 하지만 그녀의 삶에선, 그녀의 주무기로 사용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사흉혈맥을 모두 잇고, 아홉 개의 기연을 빼앗아一.
‘그럴 수도 없을 거고, 그런 짓도 하지 않겠지만.’
주인공은 애초부터 모든 기연을 받을 수 있는 체질을 타고났다. 거기에 명석한 두뇌는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알고 새로운 하나를 만들어낸다. 먼저 선점을 한다고 해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몸도 아니니 본래 주인에게 들려주는 편이 효율이 더 좋을 것이다.
‘뺏는다면 적들이 차지하는 기연 정도인가.’
당소소는 실소를 지으며 무궁검에서 손을 뗀다. 검에서 느껴지는 한기가 사라지며 이유모를 상실감이 몸을 감쌌다.
몸은 이곳에 속해있는데, 정신은 다른 곳을 떠돌고 있다. 그 감각은 마치 세상에서 괴리된 유령 같은 기분이 들게 했다. 당소소는 주먹을 움켜쥐며 독무후가 있을 앞을 바라봤다.
스승의 온기, 아버지의 온기. 그녀를 걱정하는 하연과 진명의 온기.
피부에 와 닿는 그 온도가 이 삶이 당소소의 이야기이되, 허구가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게 했다. 그것은 이제 김수환이 깃든 당소소의 심혼이 되어 있었다.
‘구분은 하되 배제는 하지 않아야해. 아직은 그 정도로 충분해. 인지만 하고 있다면, 감정과 기억은 통제할 수 있어.’
당소소는 생각을 끝맺었다. 어질하던 머릿속의 소란이 가라앉았다. 그러자, 바뀔 앞날에 전전긍긍하는 통에 차마 떠올리지 못했던 것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당소소는 맑아진 정신으로 당회에게 던져줄 변명을 궁리했다.
‘사천교류회의 일화를 보건데, 분명 무궁검이 여기 있을 개연성이 있을 거야. 무궁검은 도올일맥이 가지고 있었을 텐데. 도올일맥의 정보는….’
도올일맥을 이은 학사의 외관은 제멋대로 뜯겨나간 수염과 백발.
그 노인은 항상 겁에 질려 있었으며, 수염이 뜯겨나간 후유증 때문인지 종종 턱을 가리고 움찔거렸다.
장서를 찢지 말라는 말버릇 같은 것이 있었고, 쪽지시험 같은 것으로 주인공이나 다른 이들의 재능을 파악했었다. 절친한 도철일맥의 대장장이에게 무궁검을 받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출신은.
“아하.”
당소소는 훌륭한 변명거리를 쥐고 웃었다.
*
철컥!
쇠가 맞물리는 소리가 들리며 탁자 위에 있는 나무상자의 뚜껑이 열렸다. 굳은 기름 아래에 희끄무레한 은색의 물체가 시야에 잡혔다. 당회는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말했다.
“물에 닿으면 폭발적으로 열을 뿜어내고, 가만히 내버려 둬도 반응을 하더군요. 그래서 고래기름을 어렵게 구해 보관했습니다.”
“맞아. 금리석은 물보다 가볍지만, 그 안에 품고 있는 자연지기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하단다. 그래서 오독문의 오뢰전리공을 연마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는 광물이야.”
독무후는 그렇게 말하며 나무상자의 뚜껑을 닫았다. 그녀의 설명에도 당회는 의문이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당회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당무고 안에 위치한 또 하나의 창고의 문고리를 잡았다. 그는 원석고[圓石庫]라는 이름의 창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은이 담긴 호리병, 백금과 주사가 담긴 두 나무상자를 탁자위로 내려놓았다.
“수은과 주사는 소소에게 먹여 독공에 쓰신다고 하셨는데, 백금은 또 어디에 쓰실 생각이십니까? 백금은 광물독이라 부를 만큼의 독성은 없을 텐데요.”
“단전을 만들었으니, 혈맥 또한 만들어야하지 않겠느냐?”
“백금으로, 혈맥을…?”
독무후는 백금이 든 나무상자에 손을 올렸다.
“백금은 쉬이 변하지 않는다. 단전으로 쓰이는 광물독들과는 달리 그 자체로 항상성이 있어. 거기에 자신은 변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들의 반응을 북돋는 성향도 가지고 있지.”
“광물로 단전을 만들고, 백금으로 혈맥을 만든다…. 터무니없는 치료법입니다. 이걸 어떻게 몸에 주입시킬지도 상상이 가질 않지만, 먹이고 나서 어떻게 하실지가 더 상상이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독문의 독문심법 이름에 전리[電離]라는 말이 들어간단다. 자세한건 생략하도록 하자꾸나. 네 말따마나 터무니없는 치료법이니.”
독무후는 빙긋 웃으며 수은이 든 호리병을 쥐었다. 당회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 이상은 오독문의 비술[秘術]이라는 거군.’
당회는 고개를 끄덕인 뒤, 나무상자들을 차곡차곡 쌓고서 들어올렸다. 당회가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 독무후가 당회에게 말했다.
“회야. 칠혼독의 효과가 어떤 것인지 아느냐?”
“…갑자기 칠혼독은 왜 물어보시는 진 잘 모르겠으나, 산공독 마냥 기를 흩어내고 혈맥을 철저히 부수는 독이라 들었습니다.”
당회는 독무후가 당소소와 화해를 시키려니, 하는 생각에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독무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부수적인 효과야.”
독무후는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쿡 찌르며 말했다.
“칠혼독은 혼[魂]을 괴사시킨다.”
“혼이라뇨? 배움이 짧아 잘 이해가 안갑니다.”
독무후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당회에게 설명을 이어갔다.
“사람에겐 영혼이 있단다. 영혼은 혼[魂]귀[鬼]백[魄]으로 구성되어있어. 백은 육체와 육체에 얽매여있는 본능을 뜻하고, 귀는 사람의 기억과 감정. 그리고 혼은 이를 이끄는 이성이지.”
“그렇다면 혼을 괴사시켰다는 말인 즉슨, 소소가 지금 정신을 잃은 상태라도 된다는 말씀이십니까?”
당회가 눈가를 꿈틀거리며 답하자, 독무후는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혼돈의 그자가 무슨 술수를 부린 건진 잘 모르겠다만, 마치 괴사된 부분을 도려내고 새 살이 돋아난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정확히 파고들자면 다른 느낌 같긴 하다만.”
“그래서 그 영혼이 썩어나간 소소를 미워하지 말라는 말씀이신 겁니까?”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이 어디 명령 하나만으로 움직일 수 있다면 좀 좋겠다만, 넌 그렇게 하지 않을 것 아니냐? 그렇다면 사정이나 알고 미워하라는 게지.”
“배려는 감사하나, 소소가 어떤 상황이 되었건 전….”
당회는 굳은 얼굴로 독무후의 말에 답했다. 독무후는 살짝 기분이 상한 듯, 입가를 비틀어 내리며 물었다.
“네 어미를 죽인 것이 소소더냐? 네 아비를 바깥으로 떠돌게 한 것은 소소가 한 짓이더냐?”
“아닙니다. 허나….”
“그럼 널 핍박한 것이 소소더냐?”
“아닙니다. 당청과 당혁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넌 그 분노를 소소에게만 투과하고 있는 게냐?”
“…….”
나무상자를 쥔 당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도 알고 있었다. 주체는 당소소가 아니라는 것을. 하지만 미워하기엔 당청과 당혁의 힘이 너무 거대했다. 대의를 위해 중원을 누비는 아버지의 옷자락을 잡을 수도 없었다.
그래서, 부정적인 감정을 던질 대상을 찾았던 것이었다. 모두가 싫어하는 당소소에게 미움의 감정을 던지는 것은, 그 누구도 뭐라고 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보상이 돌아왔으니까.
당청과 당혁과는 좋은 관계가 되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죽음에 상실감을 느낀 것이라 미루어 짐작하며 당회에게 더 관심을 쏟아주었다.
당회는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는 독무후의 눈을 마주했다. 마치 자신을 꿰뚫어 보는 듯한 시선이었다.
“미움을 베고 누워있는 그 자리. 이제 그만 일어날 때도 되었지 않았느냐?
독무후는 그렇게 말하며 당소소가 있는 곳으로 걸어 나갔다. 당회는 차마 독무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잠시 그 자리에 서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