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9화 〉십일장[十一章], 화무파종[花舞播種] 1 (69/130)



〈 69화 〉십일장[十一章], 화무파종[花舞播種] 1

설중에 향기가 퍼지고, 홀로 핀 꽃은 열매를 맺는다.


적막과 고독만 켜켜이 쌓여왔던 이 설원에

내일은 꽃들이 피기를.

꽃은 이른 봄바람에 춤을 추고, 담백한 소망을 담은 씨앗을 뿌린다.

*




화려한 장식품들과 금이  동경. 탁자 위에 놓인 두 개의 나무상자 너머로, 연분홍색의 장막이 드리워진 침상이 있었다.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침상이 움직인다.



“…….”


당소소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멍한 얼굴로 눈을 끔뻑이며 고개를 푹 숙인다. 독봉당의 이불이었다. 느껴지는 안락감에 몸을 웅크리기를 한 다경, 그녀는 손을 꼼지락거리며 낯선 감각을 음미했다. 차가운 철을 만졌을 때의 그 감각과 한기가 단전에서 퍼져나오며, 전신에 찌르르하게 퍼졌다.




“이게….”

당소소는 몸을 움찔거린 뒤, 자신의 단전 부근을 매만졌다. 금속의 냉기 속에서 느껴지는  톨의 내공. 뚜렷하게 느껴지는 자신을 둘러싼 자연지기의 감각. 낯선 정보들이 머리를 때리고, 시야가 아찔해지는 어지럼증이 느껴졌다. 그래도 당소소는 헤벌쭉 웃었다.

“흐흐.”

“쯧쯧. 품위 있게 좀 웃거라. 시커먼 남정네마냥 음흉하게 웃긴.”


“힉!”




당소소는 옆에서 들려오는 독무후의 음성에 헛바람을 들이키며 웃음을 지웠다. 독무후가 장막을 걷고 당소소에게 손을 내밀었다.



“손을 내보거라.”

“네….”



당소소가 쑥스러움에 시선을 돌리고 독무후의 작은 손에 손을 얹었다. 짜릿한 감각이 손을 타고 흘렀다. 당소소의 인상이 절로 찌푸려진다. 독무후는 그런 당소소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기감[氣感]은 제대로 느끼게 된 모양이구나.”


“네.  따끔하네요.”

독무후의 내공이 당소소의 내부를 간단하게 훑자, 단전이  뇌린은루를 구성하고 있던 뇌기가 움찔거린다. 독무후는  뇌기를 이용해 당소소의 기맥에 방전을 일으키며 당소소의 갓 깨어난 날카로운 기감을 마비시켰다. 독무후는 당소소의 손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당분간은 새로 느끼게 된 감각 때문에 고생을 좀  것이다. 머지않아 익숙해질 테니, 너무 걱정하진 말도록 하고.”



어지럽던 머리, 잔뜩 엉켜있던 감각들이 조금 가셨다. 당소소는 마른 입술을 적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자신의 입술을 적시며 문득 자신이 얼마나 누워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이런 시술 같은 것을 하면 일주일을 자고 그러니까. 단전과 혈맥을 복구한다는 시술이었으니, 한 달은 걸렸을지도?’



당소소는 무협 소설의 익숙한 장면들을 떠올리며 왠지 기대감에 부푼 어투로 물었다.

“스승님, 제가 얼마나 누워있었나요?”

“하루?”

“…아하.”


약간 실망한 당소소. 들뜬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녀는 실망한 티를 내는 대신, 눈을 지그시 감고 뇌린은루가 품고 있는 내공을 느꼈다. 단전을 감싸고 있는 짜릿한 기운과, 그 안에서 느껴지는 쌀알 같은 내공 한 톨. 당소소는 금세 실망한 티를 지우고 웃다가, 문득 드는 의문에 눈을 뜨고 독무후를 바라봤다.



“스승님.”


“왜 그러느냐?”

“단전 안에 내공을 느꼈는데, 무언가 스승님의 기운이랑 다르게 느껴져요. 이게 오뢰전리공인가요?”

독무후는 당소소의 말에 웃음을 지었다. 분명 뇌기로 기감을 둔하게 만들었을 터. 그럼에도 당소소는 자신의 단전 안의 내공을 느꼈다. 독무후는 당소소의 의외의 면모에 기특함을 느끼며 말했다.



“네가 느낀 바와 같단다. 오뢰전리공도 아니고, 뇌람심공은 더더욱 아니지.”

“그럼 무엇이지요?”

“당가의 직계가 익히는 만류귀원신공이란다.”

“만류귀원신공….”



당소소는 단전 부근을 매만지며 독무후를 바라봤다.



“원랜 뇌린은루를 구성하는 오뢰전리공에 맞춰, 너에게도 오뢰전리공을 전수하려고 했었거늘. 하지만 갑작스레 흐름이 굳어있던 장기가 움직이더구나. 덕분에 고생깨나 했단다.”

“아하하…. 그렇군요.”




당소소는 독무후의 말에 몸을 움찔거리며 멋쩍은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개화한 기감으로 자신의 몸을 감지하고, 그늘진 기억들을 마주하며 굳어있던 기운을 움직였었다. 스승의 고생은, 결국 자신의 탓이었다는 뜻이었다. 당소소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송해요.”


“어째서?”

“제가 멋대로 혈맥의 기를 움직여서, 하마터면 큰일이 날 뻔했잖아요.”



독무후는 당소소의 말에 실소를 머금으며 그녀의 머리를 손으로 툭툭 두드렸다.


“으이구, 이것아. 이 스승을 너무 얕잡아 보는구나.  모습은 이래도, 한 가닥 하는 사람이건만.”

“그래도.”

“씁.”


독무후가 당소소의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거칠게 숨을 들이켜자, 당소소는 입술을 바짝 당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독무후는 당소소의 머리에서 손을 떼며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착 감기는 감각과 손짓에 따라 다양하게 변하는 표정. 그녀는 잠시 멍하니 생각했다.



‘무언가 중독성이 있는걸.’


“스승님?”

“아, 그래. 왜 만류귀원신공인지 설명을 해야겠지. 본래는 네 오뢰전리공으로 뇌린은루의 독기를 통제하고, 단전과 동화시키려고 했었다. 하지만 뇌린은루의 독기를 너무 키워버려서 네가 익힐 기초수준의 오뢰전리공으로는 통제하기가 어려웠지.”


“그런데 이 기운은 통제라기엔 무언가….”



독무후는 의문을 느끼고 있는 당소소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주며 말했다.



“융화[融和]. 만류귀원신공은 네가 독기의 기운을 계속해서 상생시키던 그 오행의 생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내공심법이다. 너도 느끼고 있겠지만, 거대해진 뇌린은루의 독기는 내 뇌람심공으로 통제하고 있단다.”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전을 구성하고 있는 광물들은 독무후가 불어넣은 뇌기들로 하여금 서로 얽혀있었다. 마치, 전기가 통해 자력이 생긴 금속처럼.

“오뢰전리공은 오행의 극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통제와 괴리를 목표로 하는 내공심법. 앞서 말했다시피, 너무나 거대한 흐름이 되어서 네 수준의 오뢰전리공으로는 통제가 어려웠단다. 그렇기에 내가 간접적으로 통제를 하고, 대신 씨앗을 심은 게지.”


“씨앗이요?”

“뇌람심공에 대해서 알고 있느냐?”


독무후의 질문에 당소소는 잠시 눈가를 찡그리며 쌍검무쌍의 내용을 훑었다. 어떤 무공인지에 관한 묘사들은 가득했지만, 더 깊은 내용은 나오지 않았다. 당소소는 자신 없는 태도로 대답했다.



“양뢰와 음뢰를 다룬다는  정도는 알고 있어요.”

“그래. 뇌람심공은 양뢰와 음뢰를 다루는 내공심법. 그리고 뇌람심공의 양뢰는 만류귀원신공이고, 음뢰는 오뢰전리공이란다.”


“예? 뇌람심공에 만류귀원신공이? 하지만 그건 직계에게만 전승되는 무공이라고 들었는데요.”


“본래는 당가의 직계에게만 전승되는 내공심법이었지만, 네 할아버지가 나에게 꼭 익혀야 한다며 알려줬단다. 나는 한사코 거절했었다만. 뭐, 덕분에 오뢰전리공을 뇌람심공으로 발전시키긴 했었지.”



제자에게 부정을 고백하는 것이 멋쩍었는지, 독무후는 코끝을 긁으며 웃었다.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만류귀원신공이 뇌람심공의 구성요소라서 씨앗이라 비유하신 건가요?”


독무후는 고개를 젓고 반대로 묻는다.

“소소야. 내공심법들에 대해 듣다 보면 간혹 신공이라는 이름이 붙은 내공심법들이 있다. 그렇다면,  그것들이 신공이라는 이름이 붙는지 아느냐?”


“글쎄요…. 강한 무공이라서?”

“신공은 말 그대로 신[神]을 단련하는 일[功]. 영혼과 사고, 상념을 단련하는 무공이란다.”


독무후는 자연스레 당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다소 추상적인 이야기에, 당소소는 시선을 위로 올리며 고심한다.




‘…생각을 단련하고 영혼을 단련한다?’

“만류귀원신공을 뿌리로 삼고, 뇌람심공을  구성요소로…?”


“후후. 누구 제자인지, 정말 똘똘하구나.”

독무후는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은 뒤, 말을 이어갔다.




“뇌람심공은 결국 오뢰전리공이 극성에 이르러 변화한 하나의 형태. 나도 한때는 뇌람심공이 오뢰전리공과 만류귀원신공을 합친 무공이라 생각했다만, 무공을 사용하면 사용할수록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갔지.”

“으음, 둘이 합쳐진 게 아니라, 만류귀원신공에 영향을 받은 오뢰전리공이 변화한 것이군요. 뇌람심공은 만류귀원신공에 포함된 것이었고. 그렇기에 신공이었어요.”




당소소는 독무후의 거친 손길에 고개를 슬쩍 뒤로 빼며 답했다.



“옳다. 그래서 네가 오행의 생을 깨우친 김에 오뢰전리공 대신 만류귀원신공의 내공을 심어두었다. 네가 만류귀원신공을 단련해나가면, 자연스럽게 오뢰전리공은 물론이고 뇌람심공의 기운도 깨우치게 될 것이야. 그렇게 뇌기를 깨우친다면,  기운으로 통제하던 뇌린은루의 독기를 오롯이 자신의 힘으로 통제할  있게  테지.”

“스승님.”

당소소가 물기 어린 시선으로 독무후를 바라본다. 이 가르침은 독무후의 노력과 세월이 묻어나는 것이었다. 수많은 시간을 거쳐 새로운 가르침에 틀을 부수고, 편견을 깨닫고 시선을 틀어서 깨우친 가르침. 당소소의 반응에 독무후는 피식 웃었다.

“그저 내가 겪었던 시행착오를 줄여주었을 뿐이란다. 목표에 도달하는 가장 올바르고 빠른 길을 알려주는 것이 스승 아니더냐?”

“…….”



당소소는 고개를 숙이고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누구도 잘못 걸어가는 길에 손을 내밀지도 않았고,  길이 잘못되었다 알려주지 않았기에. 느껴지는 감정은 절절할 수밖에 없었다.


‘…녀석.’



잔뜩 웅크린 당소소를 바라보는 독무후도 코끝이 시큰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나 사랑이 고팠으면, 스승이 제자에게 가르침을 내리는 이런 당연한 것에 감동하는지. 독무후는 한숨으로 언짢은 기분을 토해내며 말했다.



“아무튼, 몸 상태는 좀 허약하다만 단전과 혈맥은 잘 복구되었단다.”


“네에.”


“…그렇다고 의욕만 앞서서 무공을 단련하진 말고.  몸은 요양이 필요한 상태야.”

“그럴게요.”


당소소는 눈가를 비비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마음의 조급함은 당소소를 재촉하고 있었다. 그런 내막을 모르는 독무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충 설명은 된 듯하니,  아비를 만나러 가자꾸나. 아마 애가 달아서 미쳐있을  같은데….”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것 같아요.”


“큭큭.”




독무후는 당소소의 말에 소리 내 웃으며 침상의 머리맡에 둔 비녀를 쥐었다. 그리고 당소소의 머리를 묶어주며 말했다.




“소소야.”


“네, 스승님.”


“힘에 부치진 않느냐?”

“음…. 전 괜찮아요.”



독무후는 그렇게 말하며 당소소의 뒷머리에 비녀를 꽂아주었다. 창백한 귀와 목덜미가 드러난다. 그간의 고생이 묻어나는 색이었다. 당진천에게 들은 바로는, 자신의 귀여운 제자는 병상에서 일어난 이후로 단 한 순간조차 쉰 적이 없었다.




‘이 앙큼한 것은 힘들다고 솔직하게 말하지도 않겠지.’




독무후는 작은 손가락로 당소소의 머리를 찬찬히 빗겨주며 말했다.


“사람은 바위가 아니란다. 너무 약하고, 너무 정교하게 만들어진 장치야. 지나치게 움직이다 보면 장치는 마모되어 무너진단다. 넌 얼마나 마모되었을 것 같으냐?”


“…….”

“이번에 뇌린은루를 흡수하며 꽤 지쳤을 것이야. 당분간은 편히 쉬거라.”

“…명심할게요.”

당소소의 대답을 듣자, 독무후는 당소소의 머리칼에서 손을 떼고 고개를 끄덕였다.



“가주전에서  아비가 목을 쭉 빼놓고 있겠네. 난 제독전의 일을  처리해야 해서, 혼자 갔다 와야겠구나.”

“스승님, 부디 조심히.”

“그래.”


독무후는 당소소의 걱정에 슬쩍 웃으며 독봉당을 나섰다. 당소소는 자리에서 일어나 독무후를 배웅하려 했지만, 독무후의 만류에 발걸음을 멈췄다. 독무후가 떠나자, 당소소는 옷장에서 가벼운 외투를 꺼내 걸쳤다. 그리고 깨진 동경을 바라보며 앞머리를 매만진다.



“이 정도면 가도 되겠군.”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인 뒤, 독봉당을 나섰다.


*


가주전으로 향하는 길. 내각의 초입 부근. 무언가 낯선 이들의 등장에 당소소는 고개를 돌려 그들의 행색을 확인했다. 손님을 맞이하는 객실의 앞에 무리 지어  있는 사람들, 물품을 실어놓은 수레들. 그리고 그 수레에 꽂혀있는 깃발 한 자루.


‘백능…. 백능상단이 당가에 왜 왔지?’



당소소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가주전으로 향했다. 가주전의 대문에 들어서자, 하인들이 화색을 띠며 반겼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건강하셔서 정말 다행입니다.”


“네?”

“가주께서 아가씨 걱정에 종일 인상을 쓰고 계셨기에….”

“아.”

당소소는 짧게 감탄사를 뱉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하인을 바라봤다. 한눈에 봐도 지친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멋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걱정 감사해요. 그럼, 아버지께 제가 들어가도 되냐고 여쭤봐 주시겠어요?”

“그렇지 않아도 아가씨께서 찾아오시면 바로 들이라는 명을 하셨었습니다.”



하인은 옆으로 길을 비켜서며 말했다. 당소소는 가볍게 목례를 하며 그를 지나쳤다. 계단을 밟고 문고리를 잡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기에 저희 오라버니가 만찬에 초대를….”

“만찬이라.”




당진천의 목소리였다. 당소소는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아버지, 소소입니다.”

“소, 소소? 으흠! 들어오거라.”



들뜬 목소리를 애써 진정시키는 당진천의 목소리. 당소소는 입가에 떠오른 실소를 지우며 문을 열었다.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는 당진천과 백서희가 마주 보고 앉아있었다.

“크흠. 몸은 괜찮으냐?”

“걱정해주신 덕에, 무사합니다.”

“무사하다니 다행이구나….”


당진천은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당소소의 무사함을 살펴보고 싶었지만, 백서희의 존재가 당진천의 충동을 겨우 억제하고 있었다. 백서희는 고개를 돌려 당소소를 바라봤다. 짧게 훑어보는 시선. 그리고 입이 열린다.

“오랜만이야.”




백서희가 반갑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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