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0화 〉십일장[十一章], 화무파종[花舞播種] 2
“오랜만이야.”
백서희의 인사에, 당소소는 당황하며 백서희를 바라봤다. 백서희는 당소소의 당황하는 얼굴을 확인하자, 더욱 짙은 미소를 지었다.
“잘 지냈어?”
“응? 어, 나름 잘 지냈다고나 할까….”
“가주님이 걱정하시던 것을 보면 아니던걸.”
“크흠.”
당진천은 백서희의 말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당소소는 볼을 살짝 긁으며 말했다.
“살짝 고생했었는데, 뭐 이젠 괜찮아.”
“그래….”
“소소, 너도 여기 와서 앉거라. 이젠 너도 업무에 대해 배워야하지 않겠느냐?”
“…네.”
당소소는 잠시 무슨 상황인지 머리를 굴려 파악하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시녀 하나가 문을 닫고, 당소소에게 의자 하나를 내어온다. 위치는 당진천의 옆. 당소소는 쭈뼛거리며 그 자리에 앉는다. 당진천은 소소를 잠시 바라보더니, 시녀에게 말했다.
“물러나도 좋네.”
시녀가 은근히 웃으며 물러서자, 당진천은 그 시녀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소소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보고 웅크렸다. 당진천은 한결 풀어진 표정을 하며 백서희에게 말했다.
“그럼, 이야기를 계속하지. 백능상단에서 만찬을 준비를 했다?”
“예. 사천교류회에서 서로간의 대화를 튼 김에, 친목을 좀 더 도모하자는 의미라고 합니다.”
당진천은 백서희의 말에 새끼손가락으로 볼을 긁으며 피식 웃었다.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되네. 자넨 그런 것엔 영 재주가 없지 않나.”
“…상황이 영 좋지 않게 흘러갔습니다. 사천교류회에서의 일 때문인지, 아미파와 청성파에선 백능상단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입장을 분명히 하라며 압박까지 주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백능상단 정도라면 두 거대문파의 협박 정도는 받아넘길 수 있지 않나?”
“하지만 손해가 만만찮겠지요. 당가가 백능상단과 거래를 하게 된다면, 저희는 굳이 아미파와 청성파의 압박을 정면으로 돌파해야할 이유가 사라지게 됩니다. 그들도 당가와 저희가 손을 잡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으니까요. 그리고 당가주님은 그, 음….”
우물쭈물하는 백서희에게 당진천은 웃음을 보였다.
“난 자네를 좋게 보고 있으니, 백능상단의 사신으로 보낸다면 협상에 도움이 될 테니까.”
“…예.”
“백진오라고 했던가. 상당히 고약한 자로군.”
“…….”
당진천은 백서희를 바라봤다. 백서희는 당진천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백서희는 비록 속가라고는 하지만, 무검신니의 제자인 아미파의 문도. 백진오는 그런 그녀에게 직접 사문에게 손해를 주는 거래를 성사시키라는 명령을 내린 것이었다. 당진천은 그 점을 꼬집고 들어온 것이었다.
고통스럽지 않느냐, 힘들진 않느냐. 질문을 하는 듯한 말이었다. 백서희는 당진천의 시선을 받으며 눈가를 움찔거렸다.
‘맞아. 하기 싫어. 그냥 나는 검이나 휘두르고 살고 싶어. 하지만.’
백서희는 당소소를 바라봤다. 아무것도 모른다는 표정을 하며 방 안의 장식품들을 구경하는 천진한 얼굴. 천괴와 학귀를 윽박지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표독스럽기까지 했던 과거를 완전히 지운 듯 했다. 백서희는 백진오의 말을 떠올린다.
-네가 지금 당가의 가주에게 가서 말하려는 그 내용이, 우리 백능상단에게 이득이 될 것 같아?
-그래서 그 망나니와 거래를 트겠다? 널 질투하고 네 식사에 설사약을 타던 그 머저리에게? 정말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이젠 그럴 수 없겠지.’
백서희는 학귀의 꼬챙이에 찔려 울음을 삼키던 당소소를 떠올린다. 사천교류회의 습격은 자신의 탓이 아니라 달래던 그녀를 떠올린다. 비록 과거는 불우에 젖은 악녀였지만, 지금은 부정할 수 없는 은인이자 의인이었다.
그렇기에 백능상단과 사천당가간의 가교역할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것은 목숨의 은혜를 갚는 이전의 일이었다. 자신이 백능상단의 투자물인 이유 이전의 일이었다.
당소소가 고개를 돌려 백서희와 눈을 마주친다. 당소소는 백서희의 눈치를 보다 멋쩍은 미소를 던진다. 백서희는 그 미소에 어쩔 수 없다는 웃음을 지었다.
“후후.”
그녀가 포기해버린다면 저 맹한 소녀의 업적이 순수하게 평가받을 일은 없을 테니까. 백능상단과 아미파, 청성파 측에서 백서희의 업적이라 속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당가의 거짓말이라고 속이려들 수도 있었다. 그것이 자신이 봐온 백진오의 모습이었으니까.
“전 괜찮습니다.”
그래서 검의 길에서 잠시 눈을 돌린다. 당소소라는 소녀의 온전한 모습을 지켜보고 싶기에. 과거의 모습은 거짓이었는지,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지금의 모습이 거짓인지.
당진천은 백서희와 당소소를 번갈아 본 뒤,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인다.
“기특한지고.”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백능상단과 당문과의 결연을 위해서라면 이 정도는 가벼운 지출이지요.”
“하지만 아직 어리다. 자네는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길 필요가 있어.”
당진천은 당소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소소는 의문을 품은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당진천은 그런 당소소의 머리에 손을 얹으며 말을 이어갔다.
“희생을 당연히 여기지 말라는 것이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전….”
“설교는 여기까지만 하겠네. 그래서 백능상단이 요구하는 것은 본격적인 거래인가?”
“예. 가벼운 연회에 참석해 만찬을 즐겨주시면 좋겠다는 제안입니다.”
백서희의 대답에 당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소소의 머리에서 손을 뗀다. 그리고 팔걸이에 손을 놓으며 가문의 상황을 생각한다. 외적으로는 분파의 철수, 내적으로는 당청과 당혁의 세력을 솎아내고 있는 상태. 지금 이 상황에서 백능상단과의 거래는 무리였다. 백능상단은 대충 상대해선 자칫 잘못하단 당가의 기둥까지 뽑아갈 거래의 명수였으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지금 당장 거래는 힘드네.”
“그렇게 된다면 연회의 손님이 바뀌게 되겠죠.”
“호오.”
당진천은 흥미로운 눈빛으로 백서희를 바라봤다. 백서희는 침을 삼키고 당진천의 시선을 받았다. 저 발언은 그녀 자신의 의사는 아닐 것이다.
‘아마 백진오의 지시겠지.’
백서희는 숨을 들이켠 뒤, 말했다.
“아미파와 청성파에서도 백능상단의 위치를 분명히 하라 압박해오고 있습니다. 허락된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지요. 백능상단의 위치가 조금 치우친다면, 당가가 받는 부담은 헤아릴 수 없을 겁니다.”
마지막에 덧붙인 말은 자칫하다간 협박처럼 들려 당진천의 심기를 거스를 수도 있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런 것을 고려하지 않고 진심으로 우려를 표하는 것이 백서희라는 인물이었다. 백진오에게 지시받은 말을 하면서도, 그 끝에 묻어나는 사려 깊음. 그녀는 여러모로 상인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당진천은 손가락으로 가볍게 팔걸이를 두드린다.
‘아미파와 청성파의 견제를 위해서라도 백능상단과의 거래는 필요하다. 이치에 맞아. 하지만 당가의 거래를 전담하고 있는 일 장로가 문제야. 그가 맡고 있는 사천상단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다. 내부의 사정이 더 복잡해지겠지. 계약서에 관한 고려도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것은 불 보듯 뻔 한 일.’
당소소는 고심에 잠긴 당진천의 얼굴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당가는 거래를 할 상황이 아니야. 하지만 거래는 필요해. 거래를 늦춰야해. 그러려면, 무슨 일을 해야 거래를 늦출 수 있지?’
당소소의 자문 한 방울이 머릿속에 떨어졌다. 여러 기억을 적셔가며 해답을 찾아갔다.
‘연철전? 내가 관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야. 제독전 또한 제대로 거래를 수행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지. 거기에 이건 내 행동에 영향을 받아 벌어진 일. 내가 책임을 져야해.’
자신에게 던진 질문은 보다 깊은 기억까지 적셔간다. 당소소는 김수환의 삶을 짚어보며 생각했다.
‘비누?’
김수환의 기억에 기대 미용용품이나 여러 공산품을 만든다는 생각이 가장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쉽게도 그녀는 그런 쪽의 지식이 없어, 어떻게 만들어야할지조차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김수환이 배웠던 삽질의 요령이나 공구리는 어떻게 해야 잘 비비는 지에 관한 것을 알려줄 순 없었기에, 당소소는 쌍검무쌍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결국 내가 가장 잘 알고 있고 가장 잘 써먹을 수 있는 것은 쌍검무쌍의 지식이야. 무엇을 제시해야 백능상단의 구미가 당길까.’
당소소는 자신도 모르게 옆머리를 꼭 쥐며 고민했다. 그녀가 자신 있게 내밀 수 있는 건 기연들에 관한 정보와 신병이기에 관한 정보. 백능상단의 구미를 자극할만한 것은 아니었다.
‘굳이 더 뽑아보자면, 작중 은거고수들의 위치나 정천무관이 있는 하남성[河南省] 개봉[開封]에서 열리는 무투회. 소주[蘇州]의 선상혈투장, 항주[杭州]의 밤을 움켜쥐고 있는 야왕[夜王]의 정체. 그리고 인접한 섬서성[陝西省] 서안[西安]에서 벌어지는 지하경매장인가.’
개봉무투회. 무림맹이 만들어진 이후로 일 년마다 개최된 유서 깊은 대회였다. 작중의 주인공은 주변에서 우연이나 사술이라 치부되던 실력을 그 곳에서 증명했고, 자신에게 금전을 걸어 많은 이득을 취했다. 쌍두검룡이라는 별호를 얻게 된 것도 개봉무투회 이후였다.
‘꽤 좋았지. 그 장면. 결승전엔 무당파의 예향과 겨뤄서 답보하고 있던 무공에 대한 깨달음을 얻었었는데.’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장면을 되새긴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으며, 개봉무투회에 대한 기억을 털어낸다. 개봉무투회는 지금 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거의 정 반대편의 위치라고 할 수 있는 동쪽의 끝, 강소성[江蘇省]에 위치한 소주와 그 밑인 절강성[浙江省]의 항주 또한 지금 쓸 수 있는 기억은 아니었다.
‘그럼 남은 것은 서안의 경매장.’
당소소는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며 미소를 지었다. 내밀 수 있는 패였다. 사천성에서 치료를 받은 주인공과 일행은, 서안의 경매장에서 큰 소란을 해결하고 명성을 얻는다. 그리고 추후 여행에도 이득을 챙길 수 있는 물품들을 손에 넣는다.
구파일방에 속해있는 화산파와 종남파의 시선을 피해 지하로 숨어든 경매장. 주인을 알 수 없는 장물, 무림인들이 혹할 수밖에 없는 신병이기라던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어둠을 거래하기도 한다. 팔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경매에 올리는 곳.
‘그 중에서도 소수의 인원들에게만 허락된 경매장이 있었어. 월화원[月花園].’
당소소는 주인공이 천무지체가 가지고 있는 용안이라는 능력으로 월화원의 물품을 쓸어 담던 장면을 떠올린다. 사람을 초월한 동체시력으로 대상의 움직임을 하나하나 읽고, 그 본질을 파악하는 능력.
‘혼돈일맥의 신체개조를 받은 뒤에는 숫제 독심술을 쓰는 것 마냥 묘사됐었지.’
당소소는 그 장면을 생각한 뒤,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생각에서 자신을 끄집어냈다. 주인공처럼 엄청난 가치의 물건들을 사들일 순 없겠지만, 선택받은 이들만 들어갈 수 있는 월화원의 입장권은 확실히 내밀 수 있는 패였다. 그녀는 그것을 어떻게 얻을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으니까.
“제가 가겠어요, 아버지.”
“소소야. 이건 그리 간단한 이야기가 아니란다. 사천교류회처럼 연회에 참가해 서신만 주는 일이 아니야. 게다가 방금 일어난 녀석이 벌써부터 돌아다닐 궁리부터 하고 다니느냐? 그냥 지켜보고 있거라.”
당진천은 당소소에게 타이르듯 말했다. 당소소는 고개를 저은 뒤, 당진천을 바라봤다. 확고한 자신이 깃들어있는 얼굴이었다.
“알고 있어요. 백능상단과의 거래를 늦춰야 하잖아요?”
“안다면 어떤 연유에서 그런 말을 하느냐?”
“저에게 거래를 늦출 방도가 있기 때문이에요.”
당소소는 백서희를 바라봤다. 백서희 또한 걱정스런 시선으로 당소소를 바라보고 있었다. 당소소는 꼭 움켜쥔 옆머리를 놓으며 말했다.
“백능상단도 구미가 당길만한 것이에요.”
당소소는 그렇게 말하며 자신이 받았던 부채를 떠올린다. 그런 물품들을 취급하는 백진오라면 거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당소소의 입이 천천히 벌어진다.
“월화원의 입장권.”
“…네가 그걸 어떻게?”
백서희의 입가가 움찔거리며 눈빛이 변했다. 걱정에 적셔진 눈망울은 어느새 의문이 가득 들어차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