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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화 〉십일장[十一章], 화무파종[花舞播種] 4 (72/130)



〈 72화 〉십일장[十一章], 화무파종[花舞播種] 4

엉거주춤한 자세로 의자에 앉아 땅을 바라보는 당소소. 그리고 그런 당소소를 마주보고 앉은 백서희.

“…….”
“…….”

말을 꺼내기엔 너무 무거운 공기였다. 백서희는 어색해하는 당소소를 바라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이렇게 낯을 가리는 사람이 아니었지 않나? 자신의 치부를 들켜도 뻔뻔하게 응대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백서희는 일 년 전의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돌리고 있는 당소소를 지그시 바라봤다. 자신을 헐뜯고 해코지했었던 사실이 자신에게 들통이 났어도, 뻔뻔한 태도를 일관하던 그녀. 백서희는 예전과는 다른 당소소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소소는 그런 그녀를 슬쩍 흘겨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쟤가  여기 있지? 불편해죽겠네. 아니, 그것보다 언제 들어온 거야?’

당소소는 바닥을 바라보며 백서희의 방문에 대해 생각했다. 여러 가지 잡다한 망상들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으며 망상들을 털어낸다. 작중의 백서희는 무뚝뚝하고 검만을 생각하던 여인이었으니까. 그런 망상 대신, 당소소는 입을 살짝 벌려 그녀가 왜 이곳에 왔는지 물으려고 했다.

“하….”

하지만 차마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부끄러움을 느끼는 당소소의 감정과, 내성적인 김수환의 이성이 재빨리 당소소의 입을 틀어막았다. 시녀 이외의 여성을 방 안에 들인 것은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처음이었기에. 당소소의 입에선 그저 힘들어하는 짧은 한숨만이 튀어나왔을 뿐이었다.

“흐음.”

백서희는 콧소리를 내며 머리를 긁던 손을 내리고 책상을 두드렸다.

‘운령을 처음 만났을 때와 비슷하네.’

당소소에겐 다행스럽게도, 백서희는 당소소가 보여주는 모습과 비슷한 행동을 하는 운령을 잘 다루는 편이었다. 백서희는 당소소를 바라보던 시선을 옆으로 쓱 돌린다. 깨진 동경이 그녀의 눈에 들어온다. 한줄기로 땋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말했다.

“동경이 깨져있네.”
“으, 응?”
“전체적으로 꽤 낡은 장식품들에…. 그리고 이거 내가 줬던 상자구나.”

백서희는 탁자위에 올려진 나무상자에 손가락을 살짝 문댄다. 살짝 눌러앉은 먼지가 그녀의 손가락에 묻어나왔다. 백서희는 그 먼지를 무심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아직 안 썼고.”
“음. 쓸 일도 없고, 그건 너무 비싸보여서.”
“비싸다….”

백서희는 당소소의 짠내나는 변명에 손가락을 비벼 먼지를 털어낸다. 당소소의 과거를 설명하던 당진천의 말들이 백서희의 머릿속에 떠오른다. 백서희는 턱을 쓰다듬더니 낡은 옷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옷장 좀 봐도 될까?”
“으, 응.”

당소소가 수줍게 허락하자, 백서희는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옷장에 다가갔다. 그리고 옷장의 문을 열자, 백서희의 눈썹이 움찔거렸다.

“세상에.”

눈뜨고는 봐줄  없는 모양새의 옷들이 그녀를 반겼다. 대부분의 옷들이 유행에 뒤처진 것들이었다. 재질도 오래되어 낡고 염색물이 빠지고 있는 비단옷. 상단의 딸인 백서희의 눈엔 이 옷들은 유행 따위가 아닌, 시대에 뒤쳐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백서희는 아찔해지는 정신에 눈을 감았다.

“이게 끝이야? 아니지? 다른 옷장 있는 거지? 그냥 여긴 창고지?”
“응? 옷장은 그거밖에 없는데.”
“…하아.  시녀는 용케 널 사람 꼴로 입혀서 내보냈구나.”

백서희는 옷장 문을 닫으며 한숨을 쉬었다. 당소소에게 괴롭힘을 당할 당시엔 벌을 받았으면 하는 막연한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안하무인의 표독스런 명문가의 아가씨였으니까. 패물과 값비싼 비단옷을 지어 입는, 유행에 민감하던 전형적인 아가씨.

‘이런 느낌의 벌을 바란  아니었어. 대체 어쩌다가 이 지경에…?’

백서희는 영문도 모른 채 눈을 깜빡이는 당소소를 흘겨봤다. 안쓰러움에 선물한 장신구들은 비싸 보인다고 사용하지도 않고, 옷장엔 노인이 생각날 정도의 옛날 느낌의 옷이 걸려있었다. 방 안의 장식품들은 죄다 낡아있었고, 설상가상으로 얼굴을 비쳐봐야 할 동경엔 금이 가있었다.

“대체 이 동경은 왜 안 바꾸는 거야?  아버님께 말하면 새 동경으로 바꿔주실 텐데.”

백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언성을 높이며 물었다. 당소소는 그 말에 몸을 움찔거리며 말했다.

“…마음이 편해서.”
“저게?”

백서희는 당소소의 말에 기가 찬다는 듯 되물었다.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경을 바라본다. 바꾸려는 마음을 먹었다면, 진작 바꿀 순 있었다. 하지만 당소소는 금이  두 쪽으로 갈라진 동경을 보면 항상 마음이 놓였다.

‘나와 당소소를 구분하는 느낌이라서.’

당소소는 끝말을 삼켰다. 백서희는 우울한 기색이 된 당소소를 바라보며 이마에 손을 올렸다.

“시녀들은 대체 이런걸 보고하지 않고 왜 내버려두는 거야?”
“내가 내버려두라고 했어. 장식품들은 굳이 바꿀 필요도 느끼지 못하고 있고. 옷도  필요성을  느껴서. 지금도 잘 입고 다니는데, 굳이?”
“어휴.”

백서희는 한숨을 쉬며 당소소를 바라봤다. 근본적인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천진한 얼굴이었다.

‘주인이 이지경이니, 그걸 바라보는 시녀들도 죽을 맛이었을 테지. 옷을 사야한다고, 잘 꾸미고 다녀야한다고 아무리 설파해도 듣질 않을 테니.’

백서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소소.”
“응?”
“당장 일어나.”

백서희는 화가  음성으로 당소소에게 쏘아붙였다. 당소소가 엉거주춤 일어서자, 당소소의 팔을 확 끌어안고 팔짱을 꼈다.

“음, 이러면 곤란한데. 우린 아직 어리고….”
“무슨 소리야? 당장 옷 사러 가야하는데.”
“어, 어?”

백서희가 당소소를 질질 끌고 침소 밖으로 나섰다. 때마침 시녀장 수업을 마친 하연이 바깥에서 시녀들을 살펴보고 있었다. 침소에서 나오는 둘을 바라본 하연은, 허리를 숙이며 둘을 맞이했다.

“이름이 하연이라고 했었나요?”
“예. 독봉당의 시녀, 하연입니다.”

백서희의 입가가 아래로 비틀린다. 사천교류회에서도 봤었던, 당소소의 전속시녀였으니까. 백서희는 하연에게 한 발짝 다가서며 화난 음성으로 물었다.

“당신, 소소가 이 꼴이 될  까지 대체 뭘 하셨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부주의하여 아가씨의 주변을 살피지 못했습니다.”

하연은 백서희의 말에 허리를 더 깊게 숙였다. 백서희의 책망이 어떤 것에서 비롯된 것인지 곧장 이해했다. 당소소의 몸가짐에 관해선 변명할 거리는 많았으나, 주인의 마음을 돌리지 못한 것도 자신의 잘못이었기에.

“옷들도 죄 낡아빠졌고, 동경엔 금이 가있고…. 우선 제일 급한 옷부터 처리해야 할 텐데.”
“드디어, 아가씨가 옷을 사시는 겁니까?”

하연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간절한 눈빛으로 백서희를 바라봤다. 애절하기까지한 하연의 눈에, 백서희는 순식간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이해했다.
주인이 자신을 관리하는 것을 극도로 거부하니, 시녀 된 자로서 어찌 감히 그 뜻을 거스르겠는가. 복잡한 심정이 된 백서희는 다소 낮아진 목소리로 답했다.

“네, 지금 옷을 사러 가는 길이에요.”
“감사합니다, 백서희 아가씨. 정말 감사합니다…!”

하연은 격한 반응을 보이며 길을 내주었다. 당소소는 그런 하연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하연, 그 반응은 뭐야?”
“소소 아가씨는 모르세요. 제가 그 지옥 같은 옷장에서 어떻게 옷을 발굴하는지! 옷을 사셔야 한다고 말하면, 여기 이렇게 옷이 많은데 대체  사냐고 하시고….”
“으, 으흠.”

확실히 자신이 의복에 무관심하긴 했었다는 것을 알기에, 당소소는 하연의 열변에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슬쩍 돌렸다. 전생에서도 편한   벌로  년을 돌려 입었던가. 김수환이 학교에서 마음에 드는 몇 가지 중 하나가 바로 교복이었다. 별 생각하지 않고 입을 수 있는 옷들이었으니까.

‘그냥 저것들 입으면 될 텐데.’

답답해하던 하연과 경악하는 백서희에겐 더욱 속 터질 일이었지만, 당소소는 아직도 옷에 대해 별 생각이 없었다. 그저 분위기에 편승해 고개를 끄덕일 뿐. 백서희는  생각을 하는 것이 표정에 드러나는 당소소를 바라봤다. 그리고 팔짱낀 손을 당기며 하연에게 말했다.

“가주님께 보고해주세요.”
“네, 당장 보고하겠습니다. 그럼, 부디 조심히 다녀오시길.”

하연은 싱글거리며 인사를 한 뒤, 빠르게 독봉당을 빠져나갔다. 당소소가 그런 하연을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자, 백서희는 당소소의 눈을 빤히 바라봤다. 당소소는 백서희의 시선이 민망했는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돈도 아깝고.”
“…대체  네가  돈이 아까운 건진 모르겠는데, 어차피 내가 사는 거니까 걱정하지 말고 따라와.”

백서희는 당소소의 말을 딱 잘라냈다. 당소소는 백서희가 이런 호의를 베푸는 것이 목숨을 구해준 것에서 나온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녀는 팔을 슬쩍 빼며 말했다.

“사주지 않아도 되는데. 난 괜찮아. 아, 혹시 사천교류회에서의 일 때문에 그런 거라면….”
“에잇, 왜 이렇게 궁시렁거려?”

백서희는 당소소의 팔을 확 당기며 그녀를 끌고 갔다. 독봉당의 시녀들도 질질 끌려가는 당소소를 보며 내심 다행이라는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아가씨, 옷 많이 사서 오셔요!”
“정말 다행이다.”
“…….”

당소소는 시녀들이 가슴을 쓸어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인상을 구기고 생각했다.

‘내가 이상한건가?’

당소소는 깊은 고민에 잠긴 채 백서희의 손길에 의해 당가를 나섰다.

*

백서희와 당소소는 백능상가[白陵商街]라는 팻말이 세워진 곳에 멈춰 섰다. 백능상단의 상인들이 세운 건물들이 있는 거리가 하나의 거대한 건물이 되어 있었다. 당소소는 그 건물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백화점 같네.’

당소소가 흥미어린 눈으로 두리번거리고 있자, 주변의 상인들이 백서희를 알아보고 다가와 허리를 굽실거렸다.

“아이고, 아가씨. 오셨습니까.”
“백능상가 성도지부에 오실 예정이셨으면, 미리 준비를 해놓는 것인데요.”
“괜찮아요. 시찰을 하러 온 것도 아니고.”

백서희는 짧게 대꾸하며 당소소를 돌아봤다. 그리고 짧은 고개짓을 하며 말했다.

“들어가자.”
“여기는 뭐하는 곳이야?”
“…너, 백능상가를 몰라?”

백서희는 당소소에게 물었다. 당소소는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천천히 생각했다.

‘이거 쌍검무쌍에 나오는 건가? 아닌데….’

당소소가 침묵을 지키고 있자, 백서희는 이상하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백능상가는 백능상단 소속의 상인들이 파견되어 물건을 파는 거리야. 성도지부는 주로 고급스런 제품들을 취급해. 고급품만을 취급해서 너도  번 와 봤을 텐데?”
“아, 이제야 기억나네. 응, 당연히 기억하지.”

당소소가 황급히 얼버무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백서희는 잠시 당소소를 바라보다, 주변에 서있던 상인들에게 말했다.

“포목점.”
“옛. 예!”
“지금 본 점의 재봉사가 이곳에 있죠?”
“네, 아가씨. 제가 백능의복의 재봉사예요.”

상인 중  명이 걸어 나와 백서희의 앞에 섰다. 그를 흘깃 바라본 백서희는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포목점에서 이 애 치수 좀 재주세요.”
“예. 그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아주머니 가게에도 만들어  옷들 있죠?”
“당연히 있습죠.”

재봉사의 말에 백서희는 고개를 끄덕인 뒤, 당소소에게 말했다.

“들어가자.”

거침없이 걸어가는 백서희. 당소소는 그녀의 뒤를 쫓아가며 백능상가의 안으로 들어섰다.

‘진짜 백화점이네. 소설 속이라 이렇게 만들어진 건가?’

당소소는 감탄하며 주변을 훑어봤다. 구획별로 나뉜 거리는 상점들이 자리해 있었다. 고급스런 화장품을 파는 곳, 약재를 파는 곳. 장신구와 보석을 파는 곳과, 이국에서 들여온 희귀한 물품들을 파는 곳. 여러 성의 특산품을 파는 곳 등등. 전생에서 봤었던 백화점과 흡사한 생김새였다.

“윽!”

정신을 잃고 두리번거리던 당소소는 멈춰선 백서희의 등에 부딪혔다. 백서희는 그런 당소소를 슬쩍 돌아보고, 같이 따라온 재봉사에게 말했다.

“여긴가요?”
“예.”

당소소는 그들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들어 멈춰선 곳을 확인했다. 화려한 색감의 옷들, 눈길을 사로잡는 옷들이 걸려있는 의복점이었다. 백서희는  의복점에 들어가 옷들의 소매를 들춰보며 의미심장한 콧소리를 냈다.

“흐음.”
“무언가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가씨?”
“당가의 아가씨가 입을 정도로 최고급 재질은 아니네요.”

백서희는 전시된 옷의 소매를 놓으며 재봉사를 바라봤다. 재봉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백서희의 말을 긍정했다.

“그런 최고급 재질은 따로 주문을 받아야 합니다.”
“그렇군요.”
“난 정말 괜찮은데….”
“그럼 포목점에 가야하겠는걸.”

기어가는 듯한 당소소의 말. 백서희는 뺨을 슬쩍 매만지며 당소소의 말을 무시하고, 의복점의 옷들을 훑는다. 그리고 지나가는 듯한 말로 재봉사에게 말했다.

“일단 여기 있는 옷들 다 내 앞으로 달아놓으세요.”
“예, 아가씨.”

백서희는 그렇게 말하며 의복점을 걸어 나갔다.

“아.”

당소소는 눈을 깜빡거리며, 작중에서 백서희가 어떤 역할을 했었는지 떠올렸다. 주인공 일행에게 아무렇지 않게 고급물품을 툭툭 던지던 여인.

‘물주…!’

쌍검무쌍의 백서희.
그녀는 주인공 주변의 명문가 아가씨들 중에서도, 가장 부유한 아가씨였다.

“뭐해? 빨리 안 오고.”

백서희가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는 당소소를 재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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