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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5화 〉십이장[十二章], 황혼지영[黃昏之影] 2 (75/130)



〈 75화 〉십이장[十二章], 황혼지영[黃昏之影] 2

당가의 가주전. 원목을 깎아 만든 긴 의자 위에 백서희가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그녀는 머리를 아래로 숙인 채 무릎에 양 손을 올렸다. 치마를  움켜쥐는 손가락은, 힘을 지나치게 준 탓에 제 힘을 못 이겨 파르르 떨고 있었다.



‘괜찮을 거야. 이곳은 독의 종주, 사천당가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야. 무사할 거니까. 내가 정말 걱정해야하는 것은 백능상단이 당소소를 암살하려고 한 흉수로 지목되는 것.’




백서희는 그 생각을 하며 눈을 지그시 감았다. 자신이 누굴 걱정할 상황이 아니었다. 백능상단의 딸이 백능상가에 당가의 딸을 데려갔고, 그 곳에서 당가의 딸이 음독을 했다. 비록 미수에 그쳤지만, 백서희가 용의선상에 오르는 것은 피할 순 없을 터. 분노한 독천이 백능상단을 상대로 칼을 뽑기 전에, 백능상단이 무고하다는 증거를 제시해야만 했다.

“…….”

그러나 평소라면 곧장 생각해냈을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백서희의 숨이 거칠어졌다. 손가락은 더욱 세게 치마를 구겼다.


‘나는…. 아미파의 후기지수라고 불리는 나는…. 백능상단의 규수인 나는…. 대체 왜 아무것도 할 수 없지? 나는 어째서 이렇게 무력한 거야?’



눈시울이 젖어간다. 코끝이 아려오고, 무력감이 뺨을 적신다. 숨이 차오른다. 독기에 몸을 가누지 못하던 당소소의 모습이 떠올랐다. 떨리는 숨을 뱉는다.

‘아무것도 가지고 있지 않던 너는…. 어째서, 어떻게 날 구해준거야?’

“흐흑.”



굳게 쌓았던 감정의 둑이 무너졌다. 백서희의 어깨가 들썩인다. 그녀에겐 무재가 있었다. 집안의 전폭적인 지지도 있었으며, 사문의 기대도 받고 있었다. 모두의 선망 또한.

하지만 그녀를 구해준 당소소에겐 아무것도 없었다. 가문의 총애, 무공, 사람. 그리고 기억마저도.




“넌, 어째서….”

당소소를 만나지 못했었던  년. 처음엔 확신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그녀의 태도, 습관, 행동, 언행에서 느껴지는 기억의 공백. 상냥한 태도와 묘하게 남자다운 습관. 평소엔 소심하다 위기가 닥치면 다른 사람이라도 된 양 목숨을 내던지는 과감한 행동.

‘넌  악행을 몰랐었구나.’



그리고 은근슬쩍 떠본 당소소의 예전 악행을, 그녀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다. 백서희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이고, 짙은 회의를 쏟아냈다.




‘넌 아무것도 몰랐어. 그런데, 모든 일을….’


백서희는 밀려오는 회한에 잠겼다.


미풍객잔에서 봤었던 그녀를 떠올렸다. 살갑게 다가오는 당소소. 매몰찬 응대에 충격을 받아 굳어있는 당소소. 사과하며 서글프게 웃던 당소소. 뒤돌아 울던 당소소.


사천교류회에서 봤었던 그녀를 떠올렸다. 퉁명스레 대하니 서운한 표정을 짓던 당소소. 모두가 기억하지 못하는 악행에 손가락질을 해도, 묵묵히 그 모두를 구하던 당소소.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당소소.

백능상가에서의 그녀. 독을 먹은 것이 자신뿐이라 다행이라던 당소소. 혹여 상대가 누명을 쓸까봐, 바닥에 떨어진 음식을 삼키고 안심하던 당소소.



‘기억하지 못하면, 기억하지 못한 채로 살아가면 되잖아. 조금은 자신에게 관대하게 살아가면 되는 거잖아. 여태 그랬던 것처럼. 속죄하지 않고 편하게 살아가면 되잖아.  그렇게  수 있는 위치에 있잖아.’

기억을 잃었다는 사실이 면죄부가 되진 않는다. 누구보다 백서희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당소소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기억에도 없는 악행을 사과하고 자신을 증오하는 모든 이를 위해 움직였다. 가장 자신을 고깝게 바라보던 백서희를 구해주었다.




“아….”



백서희는 인사불성이 되어 울음을 터뜨렸다. 옷깃이 축축하게 젖어간다.  울음소리 사이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백서희는 충혈된 눈으로 고개를 들어 문을 바라봤다. 무표정한 당진천이 그곳에 서있었다. 백서희의 울음이 멈췄다. 공포가 비애를 밀어내고 그녀의 마음을 채워갔다.


“흑….”


“…….”



당진천은 백서희의 젖은 뺨을 보다 가주전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책상에 다가가 가주전의 의자에 앉았다. 당진천은 책상위에 손을 올리고, 백서희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백서희는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당진천에게 말했다.



“백능상단은, 저는 아니에요. 저는, 하지 않았어요. 저는 소소를….”


온갖 감정에 버무려진 백서희는 평소같이 차분한 언행을  수 없었다. 그저 자신없이 더듬거리며 자신의 결백을 되뇔 뿐. 당진천은 백서희의 그 말에 자리에서 일어난다. 백서희는 흠칫거리며 더듬던 말을 삼킨다. 당진천은 그대로 백서희에게 다가간다. 백서희는 몸을 파르르 떨며 횡설수설 변명을 늘어놓았다.



“죄송합니다, 이렇게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정말로….”


“일단 소소는 멀쩡하네. 자넨 흉수에 대해서 생각은  해봤는가?”


“흑, 네?”



당진천은 한숨을 쉬며 백서희의 시선을 마주봤다. 백서희가 어리둥절하며 되묻자, 당진천은 백서희의 의문에 답해주었다.


“녹풍대가 왜 자넬 가주전으로 데려왔겠는가.”

“가장 유력한 용의자를 직접 추궁하시기 위해…?”


“가장 도움이 되는 목격자와 협력하기 위해서라네.”


“…….”


백서희는 그 말에 눈을 크게 떴다. 공포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 않았던 당진천의 얼굴이 보였다. 자신을 추궁하는 얼굴이 아니었다. 오히려 용의자일지도 모르는 자신을 걱정하는 눈길이었다. 백서희는 그 시선에 눈물을 쏟아내며 고개를 숙였다.


“그러니, 안심하시게.”


“흐윽….”

당진천은 머리를 긁적이며 시녀를 불렀다.


“여봐라. 수건을 좀 가져오너라.”

“예, 가주님.”


문 밖에서 대답이 들려오고, 시녀 하나가 수건 한 장을 당진천에게 내밀었다. 당진천이 수건을 받자, 시녀는 고개를 숙이며 다시 가주전을 나가 문을 닫았다. 당진천은 백서희에게 수건을 건네며 말했다.

“솔직히 말하겠네. 처음엔 분노가 눈을 가려 백능상단이 수작을 했던 것이라 생각했었다만,  더 깊게 생각하니 백능상단이 굳이 소소를 노릴 이유는 없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득이 되지 않으니까. 거기에 자네 형제가 꾸민 짓이라기엔, 너무 노골적이고 빈틈이 많아.”

“…제 오라버니가 일을 꾸몄다면, 정체 자체를 예측하기 힘들게 꾸몄을 거예요. 여러 사건을 배배 꼬아서 판단에 혼선을 주겠죠. 그렇게 살아온 사람이니까.”

백서희는 수건을 받아 눈물을 훔치며, 당진천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진천은 숨을 길게 내쉬며 이마에 손을 얹었다.

“얼핏 차도살인지계를 생각한  같이 보이나, 구성이 너무 어설퍼. 백능상단과는 사천교류회 이후로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자네를 사신으로 보내 거래의 시기를 앞당기고 싶어 할 정도로 우리를 필요로 하고 있었지.”


“말씀대하신대로….”

“자네를 보내 날 안심시키고, 뒤를 찌르는 기만전술이라고 가정해도 역시 허술하다. 내가 사천성을 오랫동안 비워, 최근 사천무림의 후배들을 대부분 모르네. 그런 나조차 알고 있는 철혜검봉이라는 아미파의 유일무이한 후기지수를 이런 일에 소모한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 이야기.”

“…….”




백서희는 당진천이 지나가듯 얹은 칭찬에  둘 바를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당진천은 손을 내리고 뒷짐을 지며 추측을 이어갔다.




“그렇다면 다른 세력이 암중에서 독을 탔다는 사실밖에 남질 않는다. 그럼 사천당가의 앞마당에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철두철미한 자들이 이런 같잖은 계획을 짰다? 말이 되지 않네.”

“마치, 알아내주길 바라는 것같이….”



백서희는 당진천의 말에 그제야 사건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힘겹게 사천당가의 앞마당에 잠복해, 독으로 일가를 이룬 독천의 딸에게 하독을 한다는 발상. 당진천의 말따마나 너무나 어처구니없는 계획이었다. 당진천은 백서희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당가의 눈을 피해, 다른 누구도 아닌 소소를 독살한다는 건…. 수지가 맞지 않아도 너무 맞지 않는다. 그렇기에 백능상단이 용의자가 아니라는 것이고, 이 이면에 다른 계획이 있다는 거겠지.”


“흑림총련의 잔당일까요? 천괴와 학귀를 잃고, 세력을 와해당한 앙심에 일을 벌인 것이라면.”

“천괴와 학귀를 잃고 정파의 공격에 와해된 그들이, 당가의 눈을 피해 성도에 잠입할 수 있을 것 같진 않군.”



당진천은 백서희의 추측에 고개를 저었다. 사건의 단편만으로 이면을 더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백서희는 결국 추측하는 것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고착상태에 빠진 가주전의 문 너머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작은 주인님, 황철입니다.”

“무슨 일이지?”

“독무후께서 독의 성분을 알아내셨다고….”




백서희는 황철의 말에 놀라며 당진천을 바라봤다. 천하십강의 고수 중 하나인 독무후는 행방불명상태라고 세간에 알려져 있었다. 당가에서도 달리 입장을 표명하지 않아, 금분세수를 하고 강호를 은퇴하여 심산유곡을 유랑하고 있다는 잠정적 결론을 내려놓은 상태. 그런 독무후가 사천당가의 본가에서 멀쩡히 살아있다면?

‘사천무림의 역학구도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곳으로 향하게 될 거야. 아니, 몸을 움직이지 않았다 뿐이지 이미 사천의 패자는….’

“…독무후께서 당가에 계셨군요.”




백서희가 당진천을 바라보며 말했다. 당진천은 멋쩍게 웃으며 입가에 손을 가져다댔다.



“조만간 스승이 직접 강호에 모습을 보일 테니, 이 건은 비밀로 해줬으면 좋겠네.”

“여부가 있겠습니까.”

“그래준다니, 다행이군. 그럼….”


당진천은 문 쪽으로 눈짓을 하며 물었다.


“소소를 중독 시킨 독이 무엇인지 들어보겠나? 혹시라도 단서가 될 수도 있을 테니.”

“제가 들어도 되겠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독이라면….”


“상관없네. 자네는 소소가 지키고자 한 사람 아닌가. 그런 자네가 소소에게 해가 될 만한 일은 하지 않지 않겠나?”



당진천의 말에 백서희의 눈길은 갈 곳을 잃고 방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분명 해가 되는 일을 했었다. 기억에 없는 일을 가져와 윽박을 질렀었다. 사죄를 요구하고 그 사죄를 받고도, 그 심성이 어디 가겠냐며 사천교류회에서도 그녀를 퉁명스럽게 대했었다.



“그, 전…. 그러니까….”


“그럼, 나가지.”

당진천은 우물쭈물하던 백서희에게 그렇게 말한 뒤, 가주전의 문을 열고 황철을 맞았다. 황철이 허리를 숙이며 당진천에게 예를 표했다. 당진천은 고개를 끄덕여 그 인사를 받고, 백서희와 함께 가주전의 돌계단을 내려가며 황철에게 물었다.


“어떤 독인가?”

“작은 주인님, 이 아이는…?”




황철의 물음에 당진천은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이 사건의 목격자이자 도움을 줄 아이니, 신경 쓰지 않아도 되네.”


“작은 주인께서 그러시다면…. 우선, 나찰염이라 불리는 독입니다. 고산지대에서 사는 거미인 천산지주[天山蜘蛛]의 독을 채취해 소금에 녹여 하독을 용이하게 만든 독이지요.”

“천산….”

“예. 이름에서   있듯이, 마교가 지배하고 있는 지역의 거미입니다.”

황철의 말에 당진천은 태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동안 잠잠하던 자들이, 요즘 들어 포교활동이 꽤나 적극적이군.”

당진천은 그렇게 말하며 뒷짐을 지고 웃었다. 뒷짐을 진 그의 손 뒤로, 죽통 하나가 잡혔다.




“그렇게 자신들의 집회에 나오라 애원한다면, 못 들어줄 이유도 없겠지.”



가볍게 웃는 말투에서 퍼지는 비릿한 독향. 백서희는 독천의 잔잔한 분노에 몸을 떨면서도, 황철이 던져준 정보를 훑었다.


‘마교의 것. 소금…. 그리고 소소와 내가 먹었던 음식. 백능상가의 인물들은 내가 이미 알고 있는 자들. 소금을 다루는 자들은 없어. 주방장도, 상단의 본 점에서 오랫동안 장사를 해오던 장인. 그렇다면 내 기억에 없는 단 한 사람.’

백서희는 등불의 아래에 있던 그림자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말했다.



“삼 일된 점소이. 음식점에 새로 들어온 점소이가 있었어요.”

“점소이라고 했나?”

“예. 분명해요. 그자라면 음식에 몰래 소금을 뿌릴  있었을 것이고, 정체를 모호하게 숨길 수도 있었을 거예요. 마교의 끄나풀이 상가 안에 숨어있었다면,  자가 가장 확률이 높아요.”



독천은 백서희의 말에 뒷짐을 풀었다. 그리고 황철을 향해 말했다.



“가지.”

“음, 그게 저….”


“보고할 것이 더 있나?”


황철이 당진천을 향해 주저하는 듯 말하자, 당진천은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황철이 설명을 이어가려는 순간, 하얀 구름이 높게 떠있는 맑은 하늘에서 뇌명이 들려왔다.

우르릉!


당진천은 잠시 하늘을 바라봤다. 이윽고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깨달았다.

“…스승님께선 처음부터 알고 계셨군.”


“늦게 보고하라 명하셨기에….”




콰강!

황철의 변명을 찢으며 들려오는 번개울음. 당진천은 자신의 스승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떠올렸다. 독예, 수절, 암화. 다양한 이름으로 불렸다지만, 그녀를 보면 치를 떠는 자들은 독무후를 다르게 불렀다.


‘분명 사천투봉[四川鬪鳳]이라 쓰고, 사천무림의 싸움닭이라 읽었었지.’



그 생각에 화답하듯, 뇌명은 연신 성도의 하늘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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