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3화 〉십삼장[十三章], 불이불조[不餌不釣] 5
당진천은 집무실에 앉아 차곡차곡 쌓여있는 경위서를 둘러본다. 마주앉은 독무후는 다리를 꼬고 창가를 보며 당진천의 시선을 피했다. 당진천은 자신의 머리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왜 혼자 처리 하셨습니까.”
“제자가 어찌 스승을 모른단 말이냐.”
당진천은 가장 위에 있는 경위서를 집어 펼쳐본다. 큰 글씨로 호방하게 써내려간 글자들이 그의 눈에 들어온다.
경위, 불쾌[不快]!
당진천은 고개를 저으며 경위서를 덮고 자신의 스승에게 말했다.
“성정은 여전하시군요.”
“그러는 너도 정신을 잃을 정도였지 않았느냐.”
“…어찌되었건, 대로변에서 사람 하나를 구워버리는 것은 너무 지나친 행동이셨습니다.”
“흥, 말리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달려가 백능상단을 씨몰살을 시켰을 녀석이 하는 말이라 들리지 않는구나.”
독무후는 콧방귀를 뀌며 턱을 괴었다. 당진천은 독무후의 경위서를 책상의 빈 곳에 올리고, 다음 경위서를 집어 훑었다. 독무후의 지시. 또 다음 경위서도, 독무후의 지시. 당진천은 한숨을 쉬며 경위서를 훑는 것을 그만뒀다. 이미 독무후가 흑풍대를 윽박질러 책임소재를 자신에게 돌려놓았기에.
“잘도 가문의 어른을 파는군.”
“어쩌겠느냐, 사실인 것을.”
“관부는 또 어떻게 설득하신 겁니까?”
독무후는 당진천의 질문에 대답대신 품속에 넣어 둔 금룡패를 슬쩍 꺼내 보여준다. 당진천은 혀를 차며 팔짱을 꼈다.
“황실의 은인이라는 표식인 금룡패를 하필 스승님께…, 고양이에게 생선을 맡긴 격이군.”
“흐흣. 어쩌겠느냐, 주겠다는 것을.”
독무후는 슬쩍 웃어 보이며 다시 금룡패를 집어넣는다. 그리고 다시금 창가를 바라보며 묻는다.
“그래서, 무엇 때문에 날 잡아두고 있는 것이냐?”
“곧 올 겁니다.”
당진천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시녀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가주님, 총관께서 오셨습니다.”
“들라하여라.”
문이 열리고, 장보가 고개를 숙이며 안으로 들어왔다. 당진천은 눈썹을 긁적이며 말했다.
“왔으면 저기 와서 앉게.”
“예, 가주님.”
장보는 슬슬 독무후의 눈치를 보며 그녀의 옆에 앉았다. 무공의 효능으로 사십 대 미부같이 보이던 이십 년 전의 모습과는 다르게 당소소를 쏙 빼닮은 어린 몸의 독무후. 그 역시도 장보에게 익숙해지지 않는 모습이었다. 독무후는 그 시선이 탐탁찮은 듯, 길게 하품을 하며 말했다.
“그리 눈치 보지 말거라.”
“예, 예. 독무후님.”
“네가 눈치를 보아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지 않느냐.”
독무후의 말에 그는 황급히 정신을 차리며 당진천을 바라봤다. 당진천의 표정은 고요했다. 무엇하나 읽을 수 없었다. 장보는 침을 삼킨다.
“가, 가주님.”
“총관. 요즘 꽤 고생하고 있다고 들었네.”
“별 것 아닙니다. 총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일 뿐….”
당진천의 말에 장보는 극구 부인하며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 같이 서로간의 안부를 묻는 말. 하지만 느낌이 달랐다. 낯설었다. 그가 가주의 자리에 오를 때부터 함께 해온 장보였지만, 어떤 표정조차 짓지 않는 것은 본 적이 없었다. 그는 가문 내에서 퍽 인자한 사람이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의 얼굴에서 그 어떤 감정의 편린도 느껴지지 않았다. 장보는 팔걸이에 올려놨던 손을 조심스레 무릎에 모았다. 심드렁한 태도의 독무후와 왠지 모르게 위압감이 느껴지는 당진천. 쉬이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장보가 물었다.
“그, 어떤 것 때문에 절 부르셨는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어떨 것 같은가?”
“아무래도 하인들의 처분 문제인 듯싶습니다.”
당진천은 미미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장보의 말을 긍정했다.
“언제까지고 그들을 구금해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책임자인 자네와 처벌에 대해서 토론을 해야 하겠지.”
“당가의 일을 외부로 발설할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렇다면?”
“안타깝지만, 잘못한 자들은 벌을 받아야 하겠지요. 암풍대 쪽에 처리를 맡기는 것이 옳은 듯합니다.”
“옳은 말이네.”
당진천은 장보의 말을 긍정했다. 그리고 독무후를 바라보며 물었다.
“제독전주는 장보를 언제부터 봤는가?”
“제가 황실로 떠나기 전, 제 아버지를 따라다니며 일을 배우는 것 까진 봤습니다.”
갑작스레 변하는 말투. 독무후는 당황하지 않고 능숙하게 그 말을 받았다. 존댓말을 요구하는 것은, 공적인 자리로 취급하겠다는 것. 당진천은 독무후의 말을 짚으며 말했다.
“그렇네. 자네가 당가의 총관을 받게 된 시기도, 내가 가주의 자리에 오른 것도. 이젠 스무 해가 넘어갔지.”
“…많은 세월이 흘렀군요.”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 갖은 일에 치여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총관, 자네 덕분에 여기까지 올 수 있었네.”
“아닙니다. 제가 무엇을 하였다고….”
몸 둘 바를 몰라 하는 장보. 당진천은 그제야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잔뜩 긴장되었던 가주전 안의 공기도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당진천은 그대로 걸어가 장보를 지나, 그 뒤편에서 멈췄다.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네. 당가를 가꿔주는 것도, 내 아이들을 도와준 것도.”
“가주님이 그렇게 생각해주시는 것만으로도, 소인은 만족합니다.”
겸손한 태도를 견지하는 장보. 당진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돌아 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헌데, 왜 그랬나?”
“예? 무슨 말씀이신지….”
“왜 아직도 내 아이들을 도와주느냔 말이네.”
“그런 사실은 없습니다, 가주님.”
태연한 체 말하는 장보. 독무후는 그를 힐끗 쳐다봤다. 제 딴에는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살짝 가빠진 숨결은 숨길 수가 없었다. 미묘하게 빨라진 혈류로 인해 올라가는 체온. 부자연스럽게 움직이는 손가락과 얼굴근육까지. 독무후는 헛웃음을 지으며 다시 창가로 시선을 돌렸다.
“소소가 마교에 납치되었을 때. 마교의 종자들이 어찌 알고 당청과 당혁에게 접촉했겠는가?”
“그것은 당청과 당혁의 독단적인 행동이었습니다. 전 그저 독강시들을 발견하고 소란을 수습했을 뿐….”
“그리고 시녀가 나에게 보고해왔던 당소소의 동선. 당가 안에서 시녀 하나와 백능상단의 사신, 그리고 나만 알고 있었을 텐데. 마교의 종자들이 어찌 알았을까?”
“그걸 제게 물어보신다면, 하지 않았기에 전 답해드릴 것이 없습니다.”
장보의 대답. 당진천은 별 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문 쪽으로 고개를 돌려 말했다.
“암풍대주, 게 있느냐.”
“예.”
축 가라앉은 당웅의 대답이 들려온다. 그리고 당웅이 가주실 안으로 들어왔다. 손가락 하나가 없는 그의 손에는, 식은땀을 질질 흘리고 있는 하인 한 명이 쥐어져 있었다. 당진천의 시선이 장보를 훑는다. 이젠 차마 숨길 수 없는 당혹감이 전신에서 묻어나왔다.
“이, 이게 무슨…?”
“이 자의 몸에서 나온 겁니다.”
당웅은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당진천이 그것을 펼쳐서 읽는다.
-독각혈가에 안전하게 도착. 추후 다시 연락을 취하겠음.
당진천이 종이 안의 내용을 읽고 하인을 바라보자, 당웅은 또 다른 종이를 내민다. 탄내가 당진천의 코를 찌른다. 군데군데 그을린 모양새인 종이였다. 당진천은 그것을 받아 펼쳤다.
-음독실패. 당소소는 지금 제독전에 있음. 추가적인 조치가 필요함.
당진천은 두 종이를 다시 당웅에게 내밀었다. 당웅은 그 종이를 받으며 말했다.
“제독전주께서 처리하신 그 자의 몸에 있던 것입니다.”
그는 그렇게 말하며 하인의 입에 묶인 헝겊을 풀었다.
“살려, 살려주십시오. 가주님.”
“…….”
당진천은 애걸하는 하인을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그에게 다가가, 눈을 맞출 뿐. 하인의 눈동자는 오갈 곳을 모르고 눈 안을 난잡하게 움직여댔다. 하인의 잔뜩 떨리는 변명이 당진천에게 내밀어졌다.
“제가 원해서 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암, 그럼요! 제가 어찌 소소 아가씨에게 해를 끼치겠습니까.”
“이 서신은 그럼 누가 보낸 것이지?”
당웅의 걸걸한 음성이 하인의 심신을 짓누른다. 하인은 기겁을 하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제가 아닙니다! 전 그저 시킨 일을 했을 뿐입니다. 하하, 제가 얼마나 당가를 위하는 지 아십니까? 매일 쓸고 닦고, 잡일을 하고….”
우드득!
“으, 으아악!”
“좀 진정하시게, 고경. 차분해지자고.”
당진천의 발이 하인의 발등을 으깨고 있었다. 하인은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그 발에서 벗어나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당진천의 발끝은 더욱 깊게 파고들어갔다. 당진천은 손가락을 한차례 튕기며 고통에 의해 이성을 잃은 그의 정신을 환기한다.
“이보게, 고경.”
“으윽, 흑! 예, 예! 예, 가주님.”
“난 자네가 관리하던 뜰을 참 좋아했네. 부지런하여 아침같이 일어나 가장먼저 주방 일을 돕는 것도 알고 있네. 부지런히 일을 찾기에 제독전의 장원을 청소하는 것도 자네라는 걸 알고 있고. 헌데, 왜 이런 짓을 했나?”
“아악, 윽…. 암요, 암요! 전 당가를 사랑합니다, 가주님. 절대로 이건 제 뜻이 아닙니다!”
당진천은 그 말에 발등을 밟고 있던 발을 살짝 느슨하게 푼다. 그리고 고경을 향해 물었다.
“그럼 누구의 짓인가?”
“그건, 그건…!”
“자네, 좀 진정하라 하지 않았는가.”
“으으으윽!”
고경이 말을 더듬자, 당진천은 곧장 발등을 으스러뜨렸다.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에 정신을 차리기가 버거웠다. 누가보아도 진정하지 못하는 것은 당진천이었다. 눈가에 성성한 분노 때문에, 당진천이 어떤 상태인지는 누가 봐도 쉬이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안에 있는 사람 그 누구도 당진천을 말리지 못했다.
“고경 이 사람아.”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할 필요는 없다고 하지 않았나. 자네는 벌을 받을 게야. 당가의 식구이니, 은원의 무게는 잘 아리라 생각하네.”
“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이러지 않겠습니…! 아아윽!”
고경의 목소리가 당진천의 심기를 거슬렀다. 당진천은 발에 힘을 주며 말했다.
“잘못을 빌지 마시게. 그리고 사주한 자에 대해서 밝히게.”
“허윽, 허윽…!”
“그래야 내가 자넬 고통스럽게 하는 일이 없지 않겠나.”
뿌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당진천의 발이 움푹 들어갔다. 고경은 발이 으깨지는 고통에 눈을 까뒤집으며 까무러쳤다. 당진천은 쓰러지려고 하는 그의 멱살을 휘어잡은 뒤, 뺨을 후려갈기며 그를 깨웠다. 뺨이 찢어지며 당진천의 손에 피가 묻었다.
“살려, 살려주십시오….”
“자넨 죽을 걸세.”
“아, 아아….”
“그러니 적어도 고통스럽게 가진 않아야 하지 않겠나?”
당진천의 말에 고경은 체념했다. 이곳은 독과 암기의 가문인 당가였다. 당진천이 집권하기 전 까지는 그 누구보다 사파에 가까웠던 정파였다. 끝까지 입을 다물고 있다간, 인간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겪으며 죽을 것이라는 것을 고경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고통없는 죽음을 제시하는 것이 당진천이 식구였던 자에게 내미는 마지막 자비라는 것 또한, 이해하고 있었다.
죽음을 체념하고 나서야 머릿속이 맑아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 지 명확해졌다.
“전 독효당[毒梟當]의 하인이었습니다….”
“당혁의 하인이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네. 주동자를 말하게.”
“그리고 제 생계가 어렵다는 것을 아신 총관께서 절 부르셨습니다. 충성했던 당혁님께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냐고. 그저 서신만 전해주면 되는 일이라고….”
“천한 놈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느냐!”
장보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소리쳤다. 독무후는 그 행동에 키득거리며 말했다.
“장보야. 앉거라.”
“앉지 못하겠소. 저 놈이 날조를 하지 않…! 어…?”
“앉으라고 하지 않았느냐.”
장보는 온 몸에 힘이 풀린 듯 다시 자리로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손끝에선 방전과 함께 희미한 아지랑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한 차례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말썽쟁이가, 꽤 머리가 굵어졌구나.”
“아니, 아니야…. 난, 아니야….”
“하긴, 자넨 언제나 그랬었지. 다 밝혀질 것인데 꿍꿍이속을 숨기고 행동하는 것. 정이 들었기에 아니길 바랐건만.”
독무후는 장보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당진천에게 말했다.
“적당히 하세요, 가주.”
“…살펴가십시오, 제독전주.”
독무후가 울적한 한숨을 쉬며 가주전을 떠난다. 당진천은 당웅을 바라본다. 당웅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열어 주변을 살핀다. 아무도 없었다. 기감을 퍼뜨려 좀 더 자세히 살핀다. 인기척은 없었다. 당웅은 그제야 문을 닫고 정문을 걸어 잠갔다.
“자네, 자네 뭐하는 건가…?”
“복귀해서 그동안 배웠던 것.”
당웅은 무심히 답한 뒤, 웃옷을 벗어 가주전의 창문을 가린다. 달빛이 가려졌다. 오로지 명멸하는 등불만이 당웅의 몸을 비추고 있었다. 갖가지 방법으로 찢겨나간 흉터가 장보의 눈에 들어온다. 불그스름한 상처들이, 비교적 최근에 입은 흉터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 그만….”
장보가 허우적거리며 느릿하게 말하지만, 당웅의 손길은 거침없었다. 허리춤의 철사를 풀어 장보의 몸을 고정시키고, 무감각한 눈빛으로 장보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럼.”
당진천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 경위서들이 쌓여있는 집무책상에 앉았다.
“총관 장보의 경위에 대해서 듣기로 하겠네.”
당진천의 말이 떨어지자 당웅이 장보에게 다가갔다. 마비독에 마비되어 침을 흘리고 있는 장보의 눈에는 뻗어오는 당웅의 네 손가락만이 보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