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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7화 〉십삼장[十三章], 불이불조[不餌不釣] 9 (87/130)



〈 87화 〉십삼장[十三章], 불이불조[不餌不釣] 9

당소소의 예상과는 다르게, 독무후는 제독전에 있지 않았다.

“…됐다.”


무후당의 지붕에 걸터앉아 쾌재를 부르는 당소소를 지켜보는 독무후. 그는 옆에서 투덜대는 황철의 옆구리를 쿡 찌르며 말했다.


“어떠냐?”

“무엇을 말입니까.”

“내 제자 말이다.”


황철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독무후의 물음에 답했다.


“다 늙은 시종을 지붕에 앉혀놓고 하는 소리가 고작 제자 자랑입니까?”

“다 늙어서 한번 지붕에서 굴러 떨어져 볼 테냐? 묻는 말에만 답하라고.”

“…재미있는 아이입니다.”

독무후가 주먹을 치켜들자, 황철은 엉덩이를 옆으로 살짝 움직이며 고분하게 대답했다.


“늦었고, 재능도 없고, 이해하는 방식이 꽤 낡은 방식입니다.”

“무공이라곤 접해보지 않은 아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게지.”


당소소는 그런 그들의 대담을 듣지 못했는지, 다시 비수를 던지며 터득의 쾌감을 만끽하고 있었다. 고통과피로 속에서도 가실  모르는 헤벌쭉한 미소. 독무후가 턱을 괴고  장면을 지켜보고 있자, 황철은 당소소에 대한 평가를 이어갔다.


“그 모든 것을 악착같은 마음으로 감내하고 있다지만….”


두세 번에 걸쳐 터득한 바를 확인한 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무후당을 떠나는 당소소. 그녀의 뒤로 황철의 걱정이따라붙었다.


“저런 자세를 언제까지고견지할 수만은 없을 겁니다. 저 아이는 아직 어리니.”


노회한 황철은 여러 인간군상을 봐왔었다. 그 과정 속에서 느꼈던 것은, 심력은 느리게 채워지는 샘과 같다는 것이었다. 노력에 마음을 쓴다면 다시 채워질 것이었으나 그 정도가 느리다. 만약 모조리 사용한다면, 샘은 말라비틀어질 것이다.

그것이 위태로운 당소소의 현 상황이었다.

여유 없이 자신을 소비하고 있었다. 위기에 몸을 던지고, 쫓아갈수 없는것을 자신을 소비해 쫓으려고 한다. 언제고 마음의 샘이 말라 주저앉아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행동을 수없이 이어갔다. 독무후는 황철의 생각을 읽고, 고개를 끄덕였다.

“소소의 심혼이 썩 굳건하다곤 하지만, 아직 어린아이의 오기일 뿐이야.”

“그럼 더더욱 이번 연회는 보내시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보나마나 독마를 상대로 무리를 할 것이 뻔할 터. 못난 시종의 시선으론 주인님만 가는 것이 옳아 보입니다만.”

황철은 독무후에게 말했다. 독무후는 아래로 훌쩍 뛰어내리며 황철의 의문에 답해줬다.


“약속을 지키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니더냐? 이러나저러나 움직이기는 해야 한다. 내가 갈 길을 막는다면,  초조해할 아이이니.”

“주인님께서 그리 생각하신다면  이상 말하진 않겠습니다만….”

“너도 꽤 마음에 들었나보구나.”

독무후는 뒤따라 내려오는 황철에게 말했다. 황철은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돌렸다. 독무후는 목각인형에게 다가가 가슴팍을  차례 올려쳤다. 그러자 돌이 맞물리는 소리가들려오며 지하로 향하는 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도 늘그막에 들인 제자가 썩 마음에 든다. 부러지지 않게 조심히 보살필 생각이다.”


독무후는 계단을 내려가며 말했다.


“하지만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지 못하면, 어찌 나의 제자라  수 있겠느냐.”


별처럼 동굴을 밝히는 천장을 바라보다, 아래로 내려가는 걸음을 계속했다. 이윽고 당소소가 뇌린은루를 삼켰던 곳이 나타났다. 비처의 안은 깔끔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황철이 벽에 걸린 횃불을 가져와 독무후의 옆에 섰다. 독무후는 탁자의 아랫부분에 달린 서랍을열었다. 독무후는 실소를 비치며 서랍 안을 바라봤다.


“이 나이를 먹고 다시 이걸 찾을 일은 없을 줄 알았건만.”


서랍의 안엔 커다랗고 낡은 청동열쇠 하나가 있었다. 독무후는 그 열쇠를 쥔 뒤, 앞으로 걸어갔다. 그녀가 반구형의 끝에 다다르고 손을 들어 한차례 벽을 쓸어내린다. 우둘투둘한 벽면에 뜬금없는 자물쇠 하나가 달려있었다. 독무후는 청동열쇠를 자물쇠에 넣고 돌렸다.

카락!

녹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자물쇠가 열렸다. 독무후는 자물쇠를 휙 던졌다. 황철이 능숙한 솜씨로 받자, 독무후는 벽면 사이에 있는 미세한실금 사이로 손을 넣는다. 쇠가 긁히는 소리와 함께 벽이 앞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드러난 안쪽은 꽤나 거대한 방 안이었다. 거대한 방 안이 갖은 잡동사니들과 암기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네모난 목함에 잔뜩 꽂혀있는 침, 검은 색의 철사, 빨간 채찍과 독특한 모양의 비수들. 큼지막한 장포와 옷가지 등등. 독무후는 감회에 젖은 얼굴로 옷들이 걸린 곳으로 다가갔다.

“후후.”


독무후는 옷걸이에 걸린 낡은 장포를 살짝 꼬집었다. 흑색바탕의 두꺼운 재질. 단 한 올의 자수는 없었고, 대신 안을 비단으로 덧대 암기와 독물들을 수납할 수 있는 주머니들을 만들어 놓았다. 그녀는 장포를 놓고 옆으로 시선을돌린다.

여러 주머니가 달려있는 혁대[革帶]가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난 터라, 낡고 삭고많은 상흔이 새겨져 있었다. 암기가 쓸고 간 흔적, 세월이 쓸고간 흔적. 그녀의 손때가 고스란히 눈에 밟혔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시선은 회색을 띄고 있는 가죽장갑으로 향했다.

“…이게 여기 있었나?”

독무후는 가죽장갑을 옷걸이에서 가져와 자신의 손에 끼워본다. 조막만한 손은 장갑과 맞지 않았다. 그녀는 쓰게 웃으며 장갑을 벗었다. 황철은 그런 독무후의 행동에 의외라는  말했다.


“회룡피갑[灰龍皮匣]은 지니고 계셨을 줄 알았습니다만.”

“나도 가져갈까 했었는데, 내 손가죽이  질기더구나.”

독무후는 웃으며 회룡피갑을 챙겼다. 용의 가죽을 만들었다는 그 이름처럼, 오독문 시절부터 독무후의 손과 함께해왔음에도 그 색과 질감이 바래지않고 오히려 고풍스런 기색을 풍기고 있었다.

“내 손엔 맞질 않으니, 제자에게 선물을 주도록 할까.”

독무후는 살가죽이 벗겨진 당소소의 손가락을 떠올린다. 마침 그녀의 제자도 독과 암기를 다루는 무인으로서 손을 보호하기 위해 장갑이필요한 참이었다. 수십 년의 세월을 거치며 주인과 함께 만독을 거쳐 간 회룡피갑은, 암기를 다루기에도 용이한 도구였다.

“만독을 머금은 회룡피갑이라면 오독문의 기보[奇寶]라고 해도 부족하지 않을 테지요.”


은근히 아쉬움을 표시하는 황철. 독무후는 그를 노려보며 말했다.

“내 제자에게 주는 것이 그리 아깝더냐?”

“그것이 아니오라….”

“오독문은 장문령부[掌門令符]가 있잖느냐?”

“…물건이 아까워서 말씀드린 것이 아니라, 오독문에도 관심을 가져주시라는 말이었습니다.”

황철은 독무후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독무후는 콧방귀를 뀌며 옷걸이에 걸린 장포를 빼내 황철에게 던졌다.


“조만간 돌아갈 것이니, 그리 보채지 않아도 된다.”

“예, 주인님.”

“그것보다  무기나 챙기거라.”


독무후는 실패에 감긴 검은 색의 철사를 황철에게 던졌다. 황철의눈빛이 변한다.

“그 정도입니까?”

“무엇이 말이냐.”

독무후는 의미심장한 황철의 말을 대충 흘려들으며 암기들을 뒤적거렸다. 황철이 말했다.


“이 노구가 나서야 할 정도로 중대사인지 말입니다.”

“푸훗. 널 너무 높게 치는구나. 그저, 네가따분해 보였을 뿐이니라.”


독무후는 황철의 말에 웃으며 목함을 집어 뚜껑을 열어안을 확인했다. 드문드문 녹이 슨 철침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목함을 다시 닫고 황철에게 던진다. 시선을 위로 올린다. 세월이 지나도 아직 예리한 비수 열 자루가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가져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작아진 키로는 닿질 않았다. 독무후는 뾰로통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저거나챙기거라.”

“십촌철[十寸鐵]을 말씀이십니까?”

“그냥 비수 쪼가리들에 거창하게 이름씩이나 붙이곤….”

“요즘  노구에게 너무하신 거, 알고 계십니까?”

황철은 독무후와 대수롭지 않은 대화를 나누며 벽에 걸린 비수를 챙겼다. 독무후는 짧게 웃으며 여러 암기를 챙겼다. 끝이 꺾인 수전[手箭], 철침들이 꽂힌 죽통과 자그마한 쇠구슬들이 잘그락거리는 가죽자루. 그리고, 두 개의칼날이 날개처럼펼쳐진 비수 하나. 황철은 그 비수를 유심히 바라보며 말했다.

“쌍살호접인[雙殺胡蝶刃]은….”

“뭘 그리 중얼거리는 게야? 잔말 말고 챙기라면 챙기거라.”

“문파 하나라도 홀로 상대하실 생각입니까?”

“인정하기 싫다만, 그 독 어쩌고 나부랭이는 문파 하나 정돈 쉽게 말아먹을  있는 놈이긴 하지.”

독무후는 그렇게 말하며 마지막으로 자그마한 죽검 하나를 황철에게 던지고 다시 되돌아왔다. 황철은 투덜거리며 장포에 암기들을 수납했다. 독무후는 점점 암기들로 인해 부풀어 오르는 장포를 바라보며 말했다.

“…넌 당가를 지키고 있거라.”

“무슨 말씀이십니까. 오독문주의 하인이자 오독문의 총관입니다.”

“단순히 겨루기만 하면 될 문제가 아니다.”


독무후는 사건의 기저에 깔린 수상쩍은 암류를 깨닫고 있었다. 사천교류회의 습격. 그것은 그저 기폭에 불과했고, 증세는 그 이전부터 있어왔다.


“내가 당가를 떠나기 전 까지만 해도 아미파의 본산에는 그럭저럭 그들의 신공절학을 이을 후기지수가 꽤 있었다. 청성 또한 마찬가지.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아미파에는 백서희만이, 청성파에는 운령과 운류만이 남았습니다.”

“그래. 사천교류회의 사건은 사천성 무림을 주무르던 암류가 잠깐 겉으로 드러난 것에 불과하다.”

독무후의 눈길에 예기가 어린다. 모든 암기를 정갈히 집어넣은 황철은, 장포를 독무후의 어깨에 걸쳐주며 말했다.


“사천성 무림에찾아온 일련의 혼란은 마교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다는 말씀이시군요.”

“마교 놈들이 감숙성이나 청해성을 꿰뚫는다면 가장 먼저 당도할 중원의땅이어디겠느냐?”


독무후의 말에 황철은 고개를 끄덕인다.


“곤륜파와 공동파 후엔…. 사천성입니다.”

“그래. 그렇기에 지금 예봉을 꺾어야 한다. 놈들은 당혁을 손에 넣어 기고만장해있을 것이고, 우린 그것을 알고 있다.”

독무후는 낡은 혁대를 매며 장포를 고정시켰다. 황철이 다가와 허리춤의 뒤편에 갈색의 죽검을 꽂아주었다. 독무후가 말했다.

“다시 말해 지금 이 상황은 내 귀여운 제자가 가져온 천고의 기회라는 것이지.”


대략적이지만 상대가 마교의 독각혈가라는 것을 특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소소가 제시해온 해답 덕에 적의 마공을 파훼할 방법 또한 존재했다.

남은 것은, 그들이 군침을흘리며 벌리고 있는 입 속으로 기꺼이 걸어가 주는 것뿐이었다.

“아마 진천이에게가면 네가 뭘 해야 할지 알려줄게다.”

“이 사안을 가주님도 알고 계십니까?”


독무후는 황철의 말에 방을 나서며 웃었다.

“네 작은 주인이 바보처럼 협행 운운하며 바깥을 나돌아 다녔다곤 하지만, 너무얕잡아보는구나.”

“전 그런 생각은….”


황철이 황급히 부인했지만, 독무후는 그가 채 감추지 못한 감정의 편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고놈은  누구보다 음흉해질 수 있는 녀석이다.”

“…작은 주인께서?”

독무후의 답에 황철의 얼굴은의아함으로 물들었다. 독무후는 황철의 얼굴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그의 종아리를 걷어차며 말했다.

짜악!

“억!”

“쯧쯧. 나이가 몇인데. 생각을 숨기는 시늉이라도 하거라.”

“…정말 요즘 저에게 너무 하시는 거, 알고 계십니까?”

“그럼 평소에 잘 하지 그러느냐.”

걸음을 이어가는 독무후. 품안에서 잘그락거리는 암기들이 독무후의 감각을 곤두세웠다. 밝은 계단을 지나 지하를 나섰다. 황철이 그 뒤를 따라 나오고 지하의 문이 닫히자, 먼 곳에서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며 백서희가 나타났다.

“용케 그 짧은 시간에 귀하기짝이 없는 것들을 구했구나.”

“가문의 후광일 뿐입니다.”

“가문의 후광도 잘 쓸 수 있는 사람이 쓰는 법 아니겠느냐?”


독무후는 그렇게 말하며 백서희의 뒤를 따라온 독특한 생김새의 산양을 바라봤다. 독무후가 산양을 쓰다듬자, 백서희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소소가 사천당가의 위명을 이용해 남을 핍박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예전엔 그렇게 자연스러운 일이었건만, 지금은 언제 그랬냐 싶을 정도로 어색한 대입이었다.

“수고했다. 내일 중으로 약을 만들어 놓을 테니, 대금은 그때 청부하도록하거라.”

“예, 독무후님.”

“그래. 고생했을 터인데, 연회로 출발하기 전까지 쉬고 있거라.”


백서희가 포권을 하며 무후당을 떠났다. 떠난 자리엔 동충하초와 묵우의 뿔이 들어있는 목함 두 개가 놓여있었다. 독무후는 그 상자를 바라보며 날카로워진 기감을 얹었다. 내용물엔 문제가 없었다.

마치 전 가주와 사천을 활보하던 때와 같은, 그리운 긴장감이었다.


‘나도 참 주책이군.’


독무후는 입가에 손을 가져가며 소리 없이 웃었다. 그리고, 독마를 맞이할 연회를 준비하기 위해제독전으로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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