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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1화 〉십사장[十四章], 쟁인자유[爭人者濡] 3 (91/130)



〈 91화 〉십사장[十四章], 쟁인자유[爭人者濡] 3

울음소리는 점점 잦아지고, 들썩이던 어깨도 어느덧 잠잠해졌다. 진정된 기색의 당소소. 슬픔을 비운 자리에, 이윽고 다른 감정이 찾아온다.


‘또 울었군.’


부끄러움이 확 밀려들며 얼굴을 덮쳤다. 안색이 붉어지며 고개를 들 수 없었다. 항상 김수환의 이성을 유지하려고 노력하지만, 종종 자신을 휩쓰는 감정의 파도는 영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당소소는 팔을 들어 소매로 눈가의 물기를 닦았다.

‘아무리 감정을 조절하는  힘들다지만, 남자의 정신머릴 가지고 있으면서 이런 같잖은 것에 계속 울긴….’

제아무리 당소소임을 받아들이고, 당소소의 인생을 대신 살아가고 있다지만 자신의 본질은 김수환의 이성이었다.

전생이 억울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이미 받아들이고 그녀의 내부에서 삭아 바스러진 감정들이었다. 당소소는 팔을 내리고, 연철전에서의 마음가짐을 다시 한 번 되새긴다.


‘이 이질적인 감정과 생각을 구분해야해.’

당소소와 김수환을 구분해야한다는 다짐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그녀의 감정을 고요하게 가라앉혔다. 얼추 마음을 추스른 당소소는, 한숨을 쉬었다. 그러자, 독무후가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네 친구가 기다리고 있을 게다.”

“…죄송해요, 스승님.”

“까짓것 울 수도 있는 게지. 나도  나이  하루 종일 울상이었단다.”

“스승님이요?”

“그래. 영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천지라.”

독무후는 당소소를 달래며 껴안았던 그녀의 머리를 놓아준다. 채 울음기가 가시지 않은 제자의 상기된 얼굴이 그녀를 반겼다. 독무후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구겨진 옷을 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추 정리가 된  같으니, 기막은 걷어도 괜찮겠지.”

독무후의 말과 함께 마차 주위를 감싸던기막이 걷힌다. 그녀는 기막을 걷은 뒤, 마차의 벽에 걸어둔 장포를 걸치고 마차의 문을 열었다. 마차의  너머에선 마부가 독무후에게 고개를 숙였다. 독무후는 마차를 내리며 말했다.

“기다리게 했군. 사제 간에 할 이야기들이 있어서 좀 늦었네.”

“아닙니다.”

“짐은 객잔 위로 올려두게. 따로 숙소가 있을 터이니, 그 곳에서 대기하도록 하도록 하고.”

“예,제독전주님.”

독무후는 마부화 대화를 나누며 마차에서 내렸다. 독무후는 당소소를 바라보며 고갯짓을 했다.


“가자꾸나.”

“예.”

당소소는 채 닦지 않은 눈물을 마저 닦은 뒤, 독무후를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마부가 문을 닫고 마차를 몰아 마굿간으로 향한다. 당소소는 고개를 들어, 오늘 묵을 숙소를 확인했다.


“백능상단이 보유한 객잔이라곤 하더구나.”

“이건 객잔이라기 보단 별장 같은데…. 진짜 객잔이 맞나?”

거대하고 화려한 건물. 그럼에도, 오가는 사람하나 없이 고즈넉한분위기. 당소소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혹시라도 객잔을 오가는 사람이 있나 확인했다. 주의 깊게 살펴본 터일까, 한 무리의 상단이입구에 서있는 것을 목격했다. 그들은 입구에 서서객잔을 지키고 있는 직원들과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아니, 왜 숙식이  된다는 것이오? 변주객잔이 언제부터 사람을 가려 받게 된 것이오?”

“오늘 저녁부터 익일 아침까지 한 분께서 객잔의 모든 장소를 대여하셨습니다.”

“그 한 분이 누구요? 대체 어떤 자이기에 이 거대한 변주객잔을 통째로 대여를 한단 말이오?”

“철혜검봉 백서희 아가씨입니다.”


직원의 입에 백서희의 이름이 담긴다. 상단을 대표해 직원에게 따지던 이의 입이 꾹 닫힌다. 직원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행수님. 대신 주변 객잔에 연락을 취해보겠습니다.”

“크흠. 백서희 소저께서 대여를 하셨다면야, 어쩔 수 없지….”


백서희의 이름을 듣자 꼬리를 내리는 상인들. 일단의 무리가 순순히 변주객잔을 떠났다. 변주객잔으로 향하려던 당소소의 발걸음을, 독무후의 목소리가 붙잡는다.

“잠시만 기다리거라.”

“네?”

당소소가 발걸음을 멈추자, 독무후는 장포의 품을 뒤적거렸다. 익숙한 촉감이 그녀의 손끝에 감겼다. 독무후는 그것을 붙잡아, 장포에서 꺼냈다. 회색가죽으로 만들어진 장갑이 당소소의 앞에 내밀어졌다.


“쓰거라.”

“이건….”

“모자란 스승이 제자의 손을 미처 신경 쓰지 못했더구나. 손의 부담을 덜어 줄 것이다.”

“아, 손.”

당소소는 아직 아물지 않은 손가락을 바라본다. 독무후는 모습을 안쓰럽다는 듯 바라보며 말했다.

“껴보겠느냐?”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갑을 꼈다. 가죽은 살짝 답답한 기색이 느껴질 정도로 감겨왔다. 손가락을 움직였다. 다소 뻑뻑한 감각은 움직임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여유로워졌다. 주먹을 움켜쥐었다. 답답한 기색은  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오랫동안 써온 것처럼 그녀의 손길에 잘 길들여졌다.

“불편하진 않느냐?”

“편해요. 엄청 좋은 재질인 것 같고.”

“내가 왕년에 쓰던 장갑이라 너에게 맞을지 걱정했었는데, 우려하던 일은 없었구나.”

“왕년에 쓰시던 거라면….”

독무후의 말에 쌍검무쌍의 내용이 절로 떠올랐다. 전투에 임하는 독무후의 손엔, 언제나 회색장갑이 끼워져 있다는 서술이 있었다. 만독에도 그 광택이 바라지 않고, 천인[千刃]에도 흠집하나 나지 않는다는 그녀의 장갑.

그렇기에, 고작 장갑 따위에 여러 수식어가 붙으며 당가의 그 어떤 유명한 극독과 암기보다 더 이름난 기물이 되었다.


‘만독통치[萬毒通治], 불인독수[不刃毒手]….’

“설마 이 장갑, 회룡피갑 인가요?”

“그새 이 스승의 뒷조사라도 했느냐?”

독무후는 툴툴 웃으며 변주객잔으로 향했다. 당소소는 손을꼼지락거리며 머뭇거렸다. 그녀의 행동, 말투 모두 보지 않아도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뻔했다. 독무후는 자신을 걱정하는 제자에게 기특함을느끼며, 뒷짐을 진 채 말했다.


“스승이 준 선물을 사양하는 것은 큰 무례라는 거, 알고 있느냐?”

“그렇지만 제가 이 장갑을 가져버린다면 스승님께선 어떻게 하시려고…!”

“그 장갑도 쓰지 않은지 어언이십 년을 훌쩍 넘었단다. 쓸모가 없어졌거든.”

“회룡피갑으로 독과 암기를 사용하셔야 하잖아요.”

독무후는 고개를 저은 뒤, 뒷짐 진 손을 보란 듯이 쥐었다 펴며 말했다.

“이젠 내 손가죽이 더 질기더구나.”

“하지만….”

“거짓 같으냐?”

독무후의 웃음기 섞인 질문. 당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독무후는 머뭇거리는 제자를 뒤로 한 채 변주객잔으로 걸어갔다. 당소소는 잠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그리고 장갑을 벗어, 한 손으로 꼭 움켜쥐었다.

*

“후우.”

자리에 앉아서 휴식하고 있던 백서희. 나른해 보이는 얼굴엔 미약하게 느껴지는 수심이 담겨있었다. 피로에 젖어 반개한 눈은 객잔의 문으로 향해 있었다. 독무후가 객잔의 입구로 들어서자, 백서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일은 잘 마치신 듯해 다행입니다.”

“그리 걱정할 일은 아니었단다.”


독무후는눈물에 젖어있는 자신의 옷깃을 바라보며 픽 웃었다. 백서희는 독무후에게서 시선을 돌려 문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자께선….”

“그리 불편한 호칭을 하지 않아도 된다. 곧 올게다.”

독무후는 그렇게 말하며 백서희가 앉아있던 탁자에 다가가 주위를 둘러봤다. 거대하고 화려한 외관을 따라, 안쪽의 구색도 상당히 화려했다. 사각형의 무대를 둘러싼 형태의 객잔은 총 사 층의 구성을 하고 있었다. 벽에는 유행을 타고 있는 화백들의 그림과 청자가 놓여있었으며, 금색의 장식과 노란빛의 등불은 적색의 기둥과 맞물려 화려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독무후는 자리에 앉아 턱을 괴며 말했다.

“나도 꽤 화려한 곳에서 지냈다고 자부할  있건만, 그에 버금갈 정도구나.”

“백능상단의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인 객잔입니다. 삼 층 까진 객잔의 역할을 하고 있고, 그 위로는 백능상단의 손님에 한해서 숙박을 제공하고 있지요.”


백서희는 독무후의 말에 고개를숙이며 변주객잔에 대해설명했다. 독무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 번 둘러보고 오마.”

“그렇다면 지배인을 불러 안내를 맡기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산보가번잡해지거니와 되도록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으니.”


독무후는 뒷짐을 지며 걸음을 옮기려고 했다. 멀리서 당소소가 안내를 받으며 걸어오고 있었다. 독무후는 백서희에게 말했다.

“왜 너에게 독공을 알려줬는지 알겠느냐?”

“곧 습격해올 독마와의 일전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인 줄 아옵니다.”

“아니다.”

“그렇다면, 연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 질문에 독무후는 백서희를 돌아봤다.

“독마는 현재 도강언에 있다.”

“그 악적이 본가에 어찌…?”

반개하고 있던 백서희의 눈이 부릅 뜨인다. 나른하던 표정엔 적의와 긴장감이 감돌았다. 독무후는 태연하게 설명을 이어갔다.


“가장 피하고싶은 전장은 성도. 그러나 당가의 영역이기에 침범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차선은 성도에 못지않게 큰 혼란을 가져올  있는 곳으로 택하는 것이 옳지.”

“하지만 백능상단도 그리 녹록하진 않을 겁니다.”

“백능상단의 저력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순전히 성도를 침범하지 못한 이유가 당가이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백서희의 눈썹이 꿈틀거린다. 왜 성도를 침범하지 못하는가. 사천 내에서 가장 강한 문파이기에? 독무후는 그것을 부정했다. 그렇다면, 이유는 하나였다.


“상대가 독마이기 때문에….”

“똘똘하구나. 철혜검봉이라는 별호를 얻을 만 해.”

“그렇다면 길을 재촉하지 않은 연유는 무엇입니까?”


독무후는 혀를 차며 말했다.

“당가의 무인들이 이미 먼저 가있단다.  오라비 또한 사실을 알고 있겠지.”

“그렇다곤 해도, 상대가 독마라면 독무후께서 직접 가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도강언에 도착하는 순간 환란은 시작된다. 다른 방향으로 생각한다면, 도착하기 전엔 폭풍이 오기 전처럼 고요하다는 뜻이지. 그렇기에 다소 여유를 두고 대비할 것은 대비해두는 것이 옳다.미리 도강언의 민초들을 대피시키고, 대응할 수 있는 수단들을 마련한다면 피해도 적을게야.”

독무후는 그렇게 말하며  층의 난간으로 훌쩍 뛰어올랐다.

“요는 충분한 휴식으로최적의 상태에서 전투에 임해야 그나마 최선의 결과를 바라볼 수 있다는 게다.”

“확실히, 제가 너무 성급했습니다.”

“이해한다. 본가가 습격받는다는 말을 듣고 어찌 평정심을 유지할  있겠느냐?”


독무후는 쭈뼛거리며 걸어오는 당소소를 바라봤다. 그녀는 귀여워 죽겠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또래아이들이 노는데이 늙은이가 눈치 없게 끼어들기는  그렇겠지.”

“아닙니다, 독무후님이 있어서 얼마나 편한지 모릅니다.”

“말만이라도 고맙네. 그럼, 소소에겐 잠시 산책을 갔다 전해주고.”

독무후는 난간에서 내려가 이 층으로 사라졌다. 백서희는 한숨을 쉬며 마음을 가득 메운 걱정을 쏟아냈다. 그리고, 당소소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리 와서 앉아.”

“어, 응.”


이곳저곳을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는 시선은, 영락없이 촌사람이 난생처음 도회지로 상경했을 때와 같았다. 당소소의 그 모습에,  쏟아내지 못했던 걱정이가시며 백서희의 얼굴엔 실소가 그려졌다.

‘화려한 건물에 주눅이  당가의 규수라니.’

“너, 애월루는 어떻게 간 거야?”

“…그 땐 주변에 집중할 상황이 아니었긴 해. 당가는 애초에 이런 화려한 건물은 없고.”

“뭐, 그렇다고 칠게.”


당소소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녀의 전생에서 화려한 건물이라곤, 완공되어 저 멀리서 바라보던 주택뿐이었다. 내부 장식이 화려하거나 세련된 음식점 같은 것들은 그녀와는 전혀 인연이 없었기에, 낯선 감각은 더욱 가중되었다.

당가의 건물은 실속과 검소를 강조하는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화검공자를 만나기 위해서 나섰던 애월루는 사마문이라는 충격적인 존재 덕에 신경쓸 겨를도 없었으니.

백서희는 그 모습에 실소를 지으며 팔짱을 꼈다.


“어때? 변주객잔.”

“내가 여기에 있어도 되나, 이런 느낌….”

“이게 아가씬지, 시골처녀인지.”

백서희는 당소소의 말에 고개를 저으며 저 멀리서 뻣뻣하게서있는 지배인을 부른다.

“아저씨?”

“예, 아가씨. 말씀만 하십시오.”

“간단한 음식 좀 내오실 수 있나요?”

“간단한 음식이라면, 어떤….”

“그냥 적당히 가져오세요.”

지배인이 백서희의 요청에 되묻자, 백서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곧 잠들 시간이 가까워 오니까 너무 무거운 음식은 좀 그러네요. 목욕물도 좀 데워주시고.”

“…최선을 다해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지배인이 허리를 푹 숙인 뒤, 주방으로 사라졌다. 소심한 당소소와 별 생각이 없는 백서희 사이엔 막간의 침묵이 시작되었다.

“…….”

“…….”


백서희는 그 침묵에 다리를 꼬았다.

‘어떤 의미에선 운령보다 더하네.’


까딱거리는 발끝. 친구가 되자고는 했으나, 아직 서로 가시지 않은 앙금이 남아있는 듯 했다.

팔을 두드리는 손가락. 조용한 것을 좋아하는 백서희였지만, 이런 상황에서까지 침묵을 고수하는 취향은 아니었다.


“…소소.”

“응?”

“취미가 뭐야?”

당소소는 백서희의 말에 미간을 좁히며 고심했다. 소설을 읽는 것이라 답하기엔, 그나마 하나 보던 소설이 쌍검무쌍이기에 답변으로 삼기엔 애매했다. 그렇지만 그것을 제외하자니 취미가 없다시피 했다.

‘내가 평소에 뭘 했더라….’

고심 끝에 당소소는 머리를 긁적이며 백서희의 질문에 답했다.


“공사장 멍하니 바라보는 거?”

“…….”

어찌되었건, 여성들의 수다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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