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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6화 〉십오장[十五章], 독심괴취[毒深怪聚] 3 (96/130)



〈 96화 〉십오장[十五章], 독심괴취[毒深怪聚] 3

“으, 으으….”


천근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리는 당혁. 작은 손이 시야에 들어오고, 촌철을 잡는다. 그의 눈앞에 박힌 촌철이 천천히 뽑힌다. 장포를 입은 작은 몸이 쭈그려 앉으며 그의 얼굴을 바라본다. 당소소를 닮은 어린 얼굴, 나뭇가지 하나 꺾을 힘도 없어 보이는 여리한 몸이 보였다.

“누가 널 보냈느냐?”

“이, 입이, 으….”

“아 참, 늙으니 깜빡깜빡하는구나.”

독무후는 뽑아든 촌철을 당혁의 손등에 박아 넣었다. 두부를 찌르듯 부드럽게 스미는 칼날. 다행인지, 환신향에 중독된 당혁은 고통을 느낄 수 없었다. 그녀는 당혁의 등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서희라고 불러도 되겠지?”

“예? 아, 네!”

“내 제자를 돌봐주거라.”


백서희는 독무후의 말에 잠시 당황했으나, 이내 당소소가 헐떡이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무릎을 꿇고 그녀를 바라봤다. 독무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인지한 백서희는, 당소소를 구석으로 데려가 그녀의 뺨을 움켜쥐고 들어올렸다.

“학, 하악.”

“소소, 정신차려봐.”

“…나는, 괜찮아. 응. 멀쩡해. 정말이야.”


백서희와 눈을 맞춘 당소소의 동공은 힘이 풀린 듯 커다랬다. 백서희는 그녀가부자연스런 움직임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반신반의하는 목소리가당소소에게 전해진다.

“정말이야?”

“괜찮아. 팔에 박혀있는 금침[金針]들만 좀 빼면. 응, 괜찮을 것 같아.”

당소소는 팔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는 듯, 어깨를 움찔거리며 팔을 덜렁거렸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의 팔에 박혀있는 침은 전무했다.

백서희의 볼이 꿈틀거렸다. 자세한 내막은 모르지만, 그녀가 학대를 받아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백서희. 당소소가 지금 어떤 상태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너, 실험을 당한거야?”

“마비독이, 해독이 잘못됐다나봐. 응. 팔이 안 움직여. 그런데 금침을 좀 놓으니까 감각이 돌아오는 것 같기도 하고. 침을 좀 빼줄 수 있어?”

“…소소. 침은 없어. 지금 네 몸은 멀쩡해.”

“그래도 오늘은 아프진 않아서 다행이야. 마비독은 그렇게 안 아프거든….”

당소소는 어깨를 움찔거리다가 헤죽 웃는다. 백서희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당소소의 뺨을 움켜쥔 손의 힘이 풀린다. 손아귀가 느슨해지자, 당소소의 고개가 돌아간다. 바닥에 누워 독무후에게 추궁을 받고 있는 당혁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녀의 동공이 수축한다.


“…서희.”

“으, 응? 이제 정신이 좀 들어?”

“몸이 이상해.”


당소소가 절박한 눈으로 백서희를 바라본다. 백서희는 당황하며 그녀의 얼굴을 다시 돌려세운다.

“무슨 말이야. 괜찮아. 저 놈은 쓰러졌어. 이제 더는 너로 장난칠 수 없어.”

“몸이, 간지러워. 숨이, 막혀. 목이, 타는 거 같아.”

“정신 차려. 네 몸은 멀쩡해.”

“내 손톱은 다시 났어? 오른쪽 팔에 감각이 없어. 흉터는 남았어? 녹아내린 흔적이 있을 것 같은데.”


당소소는 왼손을 들어 자신의 팔을 움켜쥔다. 소매를 들춘 오른 팔은, 다행스럽게도 아무런 흉터도 남아있지 않았다. 당소소는 드러난 맨살을 벅벅 긁는다.

“간지러워.”

피가 난다. 그래도 긁는다.

“간지러워. 간지러워.”

“하지 마. 네 몸은 괜찮아. 내가 옆에있어. 괜찮아.”

백서희가 당소소의 왼손을 움켜쥔다. 당소소가 몸부림친다.

“내 오른손에 벌레, 벌레가…! 조, 좀 때줘.”

“아무 것도 없어.”

“거, 거기 있는 독단[毒丹]을 줄래? 그걸 먹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먹어야 하거든.”

“아무 것도 없다니까!”


백서희가 분을 참지 못하고 울컥 소리를 질렀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해 호흡을 끊어 쉬던 당소소의 호흡이 멎었다. 백서희는 당소소의 얼굴을 꼭 안으며 말했다.


“아무 것도 없어, 아무 것도….”

“거짓말 하지 마. 아, 그래. 분명  벌주려고 속이는 거지?”

“아니야. 진정해.”


백서희의 옷깃이 눈물로 적셔진다. 백서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억의 혼탁이었다. 과거의 기억과 현재의 기억이 뒤엉켜 당소소의 온 몸을 짓누르고 있었다. 백서희는 그녀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조용히 불문을 왼다.

“사리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나, 난….”


벽사파마의 내기가 실린 불문이 당소소의 뒤엉킨 기억들을 붙잡는다. 더 엉키는 것을 막고, 몰려든 기억에 파묻힌 이성을 불러온다. 들썩이는 어깨가 점점 잦아들었다.

“…모지 사바하.”

“서희….”


잔뜩 쉰 목소리가 백서희의 귓가를 때렸다. 백서희는 꼭 안았던 당소소의 머리를 살짝놓으며 물었다.

“이제  진정됐어?”

“…일단 잠시만 이대로 있어줘.”

당소소는 눈을 감고 숨을 고른다. 겪어본 적 없는 감정의 격류였다. 몸은 차가웠고, 정신은 아직 기억의 늪을 빠져나오지 못해 허우적대고 있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백서희가 왰던 불문이 바닥에 처박힌 이성을 불러왔을 뿐.

‘다시 저 새끼 얼굴을 봤다간….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여러 일화를 겪으며 이런 부정적인 반응이 얼추 종식했다고 느꼈었다. 아직 어두운 방 안에 홀로 있는 것은 버거웠지만, 갑작스레 발작하거나 격한 감정에 휘둘리는 행동은 독무후의 제자로 거둬지며 점점 잦아들었다.

‘그저 정신과 육체를 서로 조율해 내가는 과정이겠거니 했는데, 이건 좀….’


하지만, 지금 겪은 공포는 여태 겪었던 후유증과는 차원이 다른 고통이었다. 온갖 더러운 기억이 몸의 신경을 좀먹는 기분. 육체에 남은 공포의 본질이었다. 당소소는 잔뜩 긁힌 오른손으로 백서희의 팔을 잡았다. 가냘프게 떨리는 팔은 꽤 애처로웠다.

“무슨 일을 겪었는지, 물어봐도 돼?”

“아직. 아직은 다 기억해내지 못했어.”

백서희의 질문에 당소소는 숨을 고르며 고개를 저었다. 이전과 같이 발작에 따라오는 기억을 모두 잊진 않았다.

마비독을 써서 오른손을 마비시키고 손톱을 뽑는다던지, 독의 내성을 확인해본다며 독을 먹인다던지. 당진천에게 고발하겠다는 말에 당한 물고문같은 것들. 당소소는 속이 메스꺼워졌다.

그만 고통스럽고 싶었다. 몸과 영혼이 맞지 않아 느끼는 괴리이든, 그저 끔찍한 과거의 반추이든. 고통에 익숙하다는 것은 아프지 않다는 것과는 달랐으니까.


‘왜 난 당소소일까.’


백서희의 팔을 잡았던 손이, 힘이 풀려 아래로 툭 떨어진다. 자신이 당소소라는 것은 애초부터 받아들인 일이었다. 다짐도 했었다.

하지만  고통까지 받아들이기는 싫었다. 발작하는 공포에 끌려 다니는 것이 힘들었다. 기억에도 없는 것들이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싫었다.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겠다 다짐한 자신이 싫었다.

‘하다못해 그냥 아무런 존재도 아닌 길거리의 행인이었다면….’

일련의사건에 몸도 정신도 지쳤다. 자신은 고작 일용직을 전전하던 사람일 뿐이었다. 이야기의 암류니, 사람의 행복이니. 그런 거창한것을 논하던 사람이 아니었다.


‘그냥 도망가고 싶어.’

익숙하지 않은 여인의 몸도, 자신의 입장에선 짐일 뿐이었다. 사천당가의 규수라는 자리도, 자신의 입장에선 의미 없는 감투일 뿐이었다. 쌍검무쌍의 모든 전개를 알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모든 일에서 도망갈  있다는 뜻이기도 했으니.

“그만할까.”


당소소는 탄식하듯 말했다. 백서희는 잠시 놀란다. 익숙한 얼굴을 한 당소소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힘들어?”

“…….”


기억을 잃고 난 뒤, 처음 만났던 미풍객잔의  얼굴.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그 이후에 당소소가 어떤 일들을 해왔는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백서희는 머리를 안은 손에 힘을 꼭 주며 말했다.


“…쉬어도 돼. 아니, 오히려 쉬어야 해.”

“하지만, 내가 하지 않으면….”

“네가 하지 않으면 내가 하겠지. 내가 하지 못하면, 네 스승님이 하실 거야. 사람은 강철이 아니야. 자야 할 때는 자야하고, 먹어야  때는 먹어야 해. 해야  때는 해야 하겠지만, 또 쉬어야 할 때는 쉬어야 하겠지.”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지만,  십 번을 보았던 말이 들려온다. 궁기의 후예를 자청하며 모든 일을 홀로 감당하려고 하던 주인공에게,백서희가 했던 말이었다.


‘네가 하지 못하면, 내가 할 수 있어.’


무뚝뚝하기만 하던 백서희의 염려가 썩 인상 깊은 장면이기도 했다. 당소소는 실소를 짓는다.

‘그 말을 해버리면….’


당소소는 고개를 들어 얼굴을 붉힌 채 시선을 피하는 백서희를 바라봤다.

어찌 포기할 수 있을까?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이야기를.

어찌   있을까?

그녀에게 손을 내미는,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인물들을 앞에 두고.


‘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잖아.’


그녀는 포기할 수도 없었다. 울 수도 없었다. 그러니, 웃을 수밖에. 당소소가 백서희에게 말했다.

“…그 말 잊지 말고  기억하고 있어.”

“무, 무슨 낯부끄러운 소리를 하고 있어.”

“조만간 다시  날이  거야.”

“뭐래, 갑자기.”


백서희는 끌어안고 있는 당소소의 머리를 가볍게 흔들며 실없는 소리를 하는 당소소를 책망했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이 부끄러운 듯, 말을 더듬는 백서희.

“…….”

“…….”

어색한 침묵이 찾아왔다. 백서희는 누군가를 위로하는 말을 꺼낸 것이 부끄러웠고, 당소소는.

‘생각해보니까 처음으로 여자한테 안겼잖아….’


매우 부끄러웠다. 당소소는 목을 가다듬으며 감정을 추스른다. 우울했다가 부끄러웠다가. 오락가락하는 감정이  수줍었다.

“그….”

“왜?  힘들어?”

“머리….”

“머리? 아.”

백서희는 당소소가부끄러워하는 연유를 깨닫고 그녀의 머리를 놔주었다. 그리고 멋쩍은 듯, 한줄기로 땋은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당소소는 당소소대로 백서희의 시선을 피하며 자신의 머리를 정돈했다.


“그래서, 이제 좀 진정됐어?”

“조금.”

“무슨 일을 겪었는지는 말할 수 없는 거야?”

백서희의 물음에, 당소소는 생채기가  자신의 오른팔을 바라본다. 그리고 소매로 팔을 덮으며 말했다.

“아직은.”


당소소는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녀의 시선은 삼 층으로 올라오는 한 사내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백서희의 시선도 당소소를 따라 움직였다.

“누구지?”

“…장패군.”


당소소의 입이 달싹거렸다. 백서희는 이름을 들었음에도 정체를 짐작하지 못했다.당소소는 비틀거리며 그에게 걸어간다. 백서희는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장패군이 누군데.왜 네가 움직이는 거야?”

“마교의 네 부교주 중 한명이야.”


사내의 상아색의 장포엔 전설속의 환수들이 수놓아져있었고, 흐리멍텅한 시선은 어느 곳을 바라보는지 알 수 없었다.


“요마[妖魔] 장패군.”

당소소의 말을 들은 듯, 그의 흐릿한 시선에 초점이 잡힌다. 좁아진 동공은 당소소의 얼굴을 포착했다. 고개가 살짝 기울어진다.

“네가 소천마를 홀린 독화라는 계집이군.”

목소리가 들렸다. 당소소는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본다. 직전까지 계단의 근처에서 서성이던 장패군이 당소소의 뒤에 서있었다. 눈동자가 떨려왔다. 필사적으로 부정해오던 사실이 머리에 떠오른다.


‘…진짜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는데.’

당소소는 뒷걸음질을 친다. 하지만 뒤는 낭떠러지였다. 무심코 옆을 둘러본다. 자신을 달래주던 백서희도, 당혁을 제압하고 정보를 알아내던 독무후도, 객잔을 나뒹굴던 마교의 무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오로지 요마 장패군과 당소소만이 마주하고 있는 기암절벽의 조그마한 산봉우리였다.

당소소는 이 무공이 어떤 것인지  알고 있었다.


‘선시요화안[仙諡妖畵眼].’

“호오. 그리 놀라지 않는 눈치군. 소천마에게 귀띔을 받았나?”

“요즘 이런 급격한 상황변화를 받아들일 일이 너무 많아서.”

장패군이 천천히그녀에게 다가갔다. 당소소는 뒤를 돌아봤다. 물러설 곳은없었다. 다시 앞을 바라본다. 그리고, 앞으로 걸어간다. 서로의 걸음이 멈추고, 시선이 맞는다. 거구의 장패군은 시선을 아래로, 당소소는 시선을 위로.

“어떻게 그 마귀를 홀린 거지?”

“지만 아는 좆만한 새끼가  말해줬겠어?”

장패군의 얼굴이 굳었다. 과거의 기억이 어지럽게 엎질러진 당소소의 머릿속은, 쌍검무쌍의 내용을 떠올리며 차분해져갔다.

축지성촌[縮地成寸], 요접탈각[妖蝶脫殼], 요선지화[妖仙之火], 천요만악행[千妖萬惡行] 등등. 쌍검무쌍 속에서 사용하던 수많은 사람을 해하던 무공들  그는 굳이 선시요화안이라는 살상능력이 없는 무공을 사용했다.

이 자는 지금 자신을 죽일 생각이 없었으니.

“왜, 꼴렸데?”

“…독특한 계집이군.”

선시요화안은 도술, 사술로 분류되는 기환[奇幻]에 걸쳐있는 무공이었다. 그렇기에 제아무리 천하십강의 고수라도곧장 감지할  없는 영역이었다. 하지만 이런 위기에도, 당소소는 울상을 짓는 대신 웃음 지었다.

‘넌 마도공자를 통제할 방법을 찾고 있을 거야. 작중에선 결국 주인공의 기연을 빼앗아 성공했을 테지만, 그건 몇  후의 이야기지.’

그 웃음을 바라보던 장패군의 웃음 또한 짙어졌다. 당소소가 자신의 목적을 꿰뚫어봤다는 것을 눈치  것이었다.

“상당히 영특하군.”

“사내새끼가 좀 차였다고 지 보호자한테 꼰지르기나 하고.  사실 여자 아니야?”

“…크흐흐.”


관건은 독무후가 이변을 감지할 때까지 장패군의 상대를 하는 것. 그녀의 장기를 발휘해야 할 때였다.


“그래서, 나한테 무엇을 원해서 이렇게 접근한 거지?”

“본좌에게 무례한 언사는, 수업을 통해 고치면 되겠군.”

“뭐?”


장패군은 당소소의 멱살을 움켜쥐며 들어올렸다. 바둥거리는 당소소. 장패군이 말했다.


“살고 싶다면 천마의 비가 되라.”

당소소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좆까.”


단호한 대답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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