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9화 〉십육장[十六章] ,혈용독란[血涌毒亂] 1
파용운란[波涌雲亂].
파도가 용솟음치고, 구름이 어지러이 흩어진다.
수라장을 은유적으로 이르는 말이었다.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주위를 둘러본다.
피가 용솟음 치고,독무가 이곳저곳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촉한의 곡창이, 혼란을 추수하고 있었다.
*
“…이건 위기인가.”
백진오는 결제도장을 내려놓았다. 바깥엔 소란도,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백진오는 다리를 꼰 뒤, 팔짱을 꼈다. 그의 앞으로 독룡대의 차림을 한 무인이 걸어온다. 백진오는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말했다.
“거래를 하고 싶거든 먼저 접견신청을 하셨어야지, 영 예의가 없으시군.”
“…….”
“그래서, 물건은?”
백진오는 독룡대원을 바라보며 능글스럽게 묻는다. 독룡대원은 손목부근의 아대를 만지작거렸다. 끝이 기울어진 독특한 형태의 비도가 튀어나와 그의 손에 잡힌다. 백진오가 가소롭다는 듯 말했다.
“영 부실해 보이는 물건이군.”
“피안의 하늘 아래로 가거라.”
독룡대원은 허리춤의 가죽주머니를 움켜쥐고, 비도로 그 주머니를 찢었다. 독분이 바닥으로 쏟아지며 분진을 토해낸다. 백진오는 밀폐된 집무실을 메워가는 독분을 바라보며 다만 웃을 뿐이었다.
“노리는 것은 곡물을 저장하는 저장고와 백능상단의 상업지구. 그리고 비단을 생산하는 곳인가?”
“답은 삼도천의 뱃사공이 해줄 것이다.”
백진오가 팔짱을 풀었다. 독룡대원의 눈이 찌푸려진다. 분진이 더 뻗어나가지 못하고 책상 앞에서 멈춰있었다. 그 앞에서, 뒷짐을 지고 있는 한 무사가 무심한 눈길로 그를 바라본다. 자그마한 삿갓아래의 눈은 무정히 빛났다.
“독이군.”
허리춤의 검이 잘그락거린다. 턱끈이 풀린 삿갓은 책상위에 올려놓는다. 그리고 뒷짐을 푼 뒤, 검손잡이에 손을 올린다.
“수당은 두 배로 받도록 하지.”
그가 검병에 손을 올리자, 제 몸집을 불려가던 분진이 뒤로 밀려난다. 독룡대원은 손에 들고있던 독주머니를 떨어뜨리고, 비도를 고쳐 쥐었다.
“낭인회의 묵객인가.”
백진오는 고개를 끄덕이며 손으로 탁자를 두드렸다.
“이 쪽의 거래물품은 이 정도라네. 그럼, 삯을 받아볼까.”
“죽어라!”
독룡대원이 비도를 던지며 달려든다. 묵객은 그 비도를 보며 천천히 검을 뽑았다. 마찰음조차 들리지 않는, 고요하고 격조 있는 발검. 그 고요한 영역에, 비도가 침범한다.
쉬이익!
“…….”
파열음조차 들리지 않았다. 묵객은 조용히 납도를 한다. 비도는 땅을 나뒹굴고 있었다. 분진도 멎었으며, 그리고 한 사람의 목숨도 독분 위를 나뒹굴었다. 묵객은 풀어놓은 삿갓을 걸치고 턱끈을 멨다.
“장소는?”
백진오는 책상서랍을 열었다. 부채하나가 그의 손에 쥐여진다. 백진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로 바닥을 적시는 독룡대원을 바라본다.
“자네라면 어디로 향하겠나?”
“…난 행하는 자일뿐. 생각을 하는 일은 당신들이 할 일이지.”
“과연, 낭인회의 우수무사 다운 생각이야.”
백진오는 독룡대원을 지나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호위대의 피가 돌바닥을 적시고 있었고, 화단은 독에 범벅이 되어 시들어있었다. 곳곳엔 불길의 연기가 하늘을 더럽히고있었다.
“나머지 호위대는?”
“시인이 지휘하고 있다.”
“그렇다면 곧 진정되겠군.”
피냄새와 독향이 뒤섞인 불쾌한 비린내가 훅 끼쳐왔다. 백진오는 키득거리며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렸다.
모든 것이 그의 예상대로였다.
도강언의 전역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은 오만. 그렇기에 이 축복받은 땅에서의 계가[計家]가 시작된다. 어떤 품목이 이득이고 사라져도 무방한 것들은 무엇인지. 셀 수 있는 집과, 살아남지 못한 돌을 구분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것이었다.
“독각혈가는 오늘, 가주를 잃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
“어디로 향해야 하지?”
“제방[堤防].”
묵객의 물음에 백진오가 답했다. 묵객은 움직이지 않고 또 다시 물었다.
“독마를 죽인다면….”
“열 배를 주도록 하지.”
묵객의 발이 움직였다. 백진오는 부채를 접고 난장판이 된 장원을 지나갔다.
방향은, 도강언의 젖줄인 민강의 제방이었다.
*
‘단순히 비수를 들이밀어서 이길 순 없다.’
당소소의 시선엔 뒤집힌 산봉우리들이 긁혀왔다. 아찔한 부유감을 느끼며 생각은 가속했다. 어떻게 이 나약한 몸뚱아리로 초절정의 고수를 상대할 수 있을지. 파훼법은 또 어떤 식으로 따라야 할지. 그리고, 그가 보여준 환영은 정말 사실인지.
당소소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이미 알고 있어. 주인공이 선시요화안에서 어떤 일을 겪었는지. 분명해. 저건 사실이 아니야.’
그러나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음에도, 환영은 당소소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있었다. 또렷한 생각을 방해하고 있었다. 당소소의 눈이 찌푸려진다.
‘운령은….’
운령은 최후의 최후까지 죽지 않았다.쌍검신협의 옆을 지키던 청홍검봉은, 수많은 악적을 물리치며 마지막엔 청성검후[青城劍后]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하지만.
‘내가 그녀의 운명을 바꿔버렸다면.’
모든 것이 의심되기 시작했다.이야기의 암류에 손을 댄 자신이 결국엔 정사의 인물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게 된 것은 아닌지. 당소소는 입술을 깨물고 아래를 바라봤다. 추락의 때가 다가오고 있었다. 자신의 몸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은 떠오르지 않았다.
대신, 다른 것이 떠올랐다.
‘스승님…!’
요선지화에 불타고 있던 독무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성은 분명 그녀가죽지 않는다는 것을 명확하게 예측하고 있었다. 하지만 감정은 그러지 못했다. 불안하고, 무섭고, 걱정되고, 불길했다.
혹여, 자신의 개입으로 무언가가 바뀌었다면ㅡ.
으적!
“아, 아아아아…!”
당소소가 머리를 쥐며 주저앉았다. 의식을 끊어내는 데에 실패했다. 머리가 으깨지고, 전신의 뼈가 으스러지는 고통이 정신을 비틀어 이성을 짜냈다. 몸을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쉬어지지 않는 숨을 꺽꺽거리며 서서히 무너졌다.
“서로 의미 없이 시간을 허비하진 말도록 하지. 내 손을 잡으면 넌 편해질 수 있다. 이 차안의 선지자로 추앙받으며 살 수 있다고.”
“허억, 허억….”
“어떻게 본좌의 선시요화안에 대해 알고 있는 진 모르겠으나, 잘알고 있다면내 말을 이해할 수 있겠지.”
장패군은 차마 들지 못하고 있는 당소소의 머리를 움켜쥐고, 그대로 들어올렸다.
“내 한 푼의 힘이 이 이상 더해진다면, 네 정신을 갈가리 찢어버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아.”
당소소의 날카로운 시선이 장패군을 노려본다. 장패군은 그 가소로운 눈초리에 웃었다.
“땅을 기는 미물에게 그런 시선을 받아보는 것도 오랜만이군.”
당소소의 머리가 으깨진다. 그리고, 다시 쥐어진다. 당소소의눈이 고통으로 여울진다. 주체할 수 없는 고통이 눈물로 쏟아진다.
“으흑, 으윽…! 머리가, 머리가…!”
“그럼, 시간이 걸리겠지만 다른 방식으로 데려가는 수밖에.”
장패군은 팔을 끌어당겨 당소소의 얼굴을 가까이 끌고 왔다. 당소소의 발끝이 속절없이 땅에 끌리며 장패군에게 끌려갔다.
“난 지금부터 널 찰나의 시간조차 낭비하지 않고 계속해서 죽일 것이다. 정신을 붕괴시켜놓는다면 더이상반항도, 명을 따르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존재하지 않겠지.”
“아, 아파….”
당소소의 지친 눈이 장패군을 바라봤다. 장패군의 분노한 눈초리가 당소소를 꿰뚫었다. 명백한 적의가 가슴을 찢어놓는 듯 했다. 그 적의에, 당소소의 오기가 고개를 치켜든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구원을 가장한 그 얼굴에 어떤 것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고 있기에, 무너지더라도 따를 수 없었다. 이 세계는, 이 땅은 그녀에게 가장 소중한 것이었으니까.
“…그래. 알겠어.”
당소소의 입이 달싹거린다. 장패군은 입꼬리를 올리며 당소소의 머리를 짓누르던 악력을 느슨하게 풀었다.
“크흣, 무섭나보지?”
“맞아, 난, 무서워.”
당소소는 그렇게 답하며 장패군의 두터운 손목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을 알려줄까?”
장패군은 당소소의 말에 어디 지껄여보라는 듯, 턱을 까딱였다. 당소소는 웃었다.
“넌 영원히 죽지 않을 거야.”
“영악한 계집이군.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기 위해 헛소리를 하다니.”
뜬금없는 당소소의말에 장패군은 코웃음을 치며 풀었던 손아귀를 다시 조였다. 머리에 가해지는 압력이 무척이나 고통스러웠다. 그 고통 속에서,당소소는 기어코 그의 최후를입에 담았다.
“너, 넌, 죽지 못한 채로 영원히 환상 속에서 살게 될 거야.”
“무슨 헛소리지?”
“공백만이 존재하는 한 폭의 그림 속에, 너 혼자 영생을 누리게 될 거야. 아무 것도 이루지 못하고, 아무 것도 지배하지 못하고, 아무 것도 없는 곳에서 영원을 살게 되겠지.”
“핫핫, 이제야 정신이 나가기 시작했나보군.”
장패군은 당소소의 목을 부러뜨렸다. 축늘어진 당소소는 다시 장패군의 앞에 섰다. 당소소는 목을 움켜쥐며 물었다.
“거짓말 같아?”
“조금만 더 손본다면, 마귀의 입맛에 맞는 장난감이 되겠어.”
장패군이 손을 움켜쥐자, 그 안에 검이 생겨났다. 당소소의 가슴이 길게 찢긴다. 불타는 듯한 격통이 당소소의 등골을 확 덥혔다.
“으윽…!”
“시간이 남았으니,막간을 이용해 말버릇부터 바로잡도록 하지.”
“내가, 널 이기려면, 무슨 짓을 해야 할까.”
격통에 뚝뚝 끊어지는 어절 속에서, 당소소의 분노가 묻어나왔다. 장패군은 콧방귀를 뀌며 당소소의 배에 칼을 꽂았다. 고통의 불길이 온 몸의 감각을 뗄감 삼아 격렬히 타올랐다. 당소소는 곧바로 감각을 끊어냈다.
“마교엔 여섯 곳의 가문과 네 곳의 교파, 세 명의 교주 후보와 한 명의 교주가 있지.”
그늘을 드리운 창백한 얼굴이 웃었다.
“환유요가는 멸문해.”
“요사스러운 입을 찢어놓도록 하지.”
“당신도 그렇게 생각하잖, 아…?”
당소소의 고개가 푹 떨어진다. 그리고, 다시 일어나 장패군을 바라봤다.
“점점 교단에서 힘을 잃어가는 자신의 가문. 기반도, 명분도, 심지어 지지하고 있는 후보는 뜻대로 움직이지도 않아.”
“흥…, 계집이 고통을 유예하기 위해 마구 지껄이는구나. 본좌를 속이러드느냐?”
장패군은 태연한 척 발을 굴렀다. 봉우리의 끝부분이 뚝 끊어지며 당소소가 아래로 추락한다. 떨어지는 그녀의 얼굴은, 확신이라는 단어가 그려져 있었다.
“…대체 무엇을 하는 계집이기에 본 가문의 상황을 꿰뚫고 있는게지?”
장패군은 당소소가떨어진 절벽아래를 내려다봤다. 본래라면 생각의 고삐를 풀어줄 새도 없이 계속해서 죽였어야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이, 사람을 현혹하는 장패군을 거꾸로 현혹했다. 그 감정을 감추기 위해 그녀를 아래로 떨어뜨렸다.
“허나경거망동할 필요는 없다.”
장패군은 검을 든 손을 털었다. 검은 송곳으로, 톱으로, 갖가지 흉측한 고문도구로 변해갔다.
“차차 알아내면 되는 일이니.”
장패군이 아래로 쏘아내는 시선을, 당소소는 피하지 않고 마주보고 있었다. 선시요화안에서 그는 섭리였다. 그의 말 한마디에 죽음은 찾아오고 땅은 무너진다. 그렇다면, 그를 이기기 위해서 그녀는 무엇을 해야 할까.
-무[武]란 무엇일까, 소소야.
그는섭리였다. 천리였고, 자연이었다.
-어렵게 생각하지 않아도 된단다. 태초의 사람이 맨 몸으로 호랑이를 상대할 수 있었느냐?
당소소는 손을 장패군에게 뻗는다.
-사람이 야수를 이기기 위해 가장 먼저 했던 행동이 무엇일까?
그녀의 손에는 익숙한 형태의 검이 쥐어졌다. 뭉툭하고 투박하고 둔탁하기까지 한, 검이라 부를 수 없는검.
미약한 내공이 당소소의 의지와 핏줄에 새겨진 가르침을 따라 흘렀다.
-수많은 무의 흐름은.
으득!
당소소가 다시 봉우리 위에 섰다. 그녀의 손엔 검이 쥐어져 있었다. 장패군은 그 낡아빠진 검을 비웃었다.
-이 한 행동으로부터 유래되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그것으로 본좌를 베어보기라도 할 셈이냐?”
“아니.”
“얼마나 죽어야 예절이 바로 설 텐지, 궁금하구나!”
당소소의 목이 떨어졌다. 검은 쥔 채였다. 당소소의 가슴이 꿰뚫렸다. 검은 쥔 채였다.
당소소의 전신이 찢겨나갔다.
검은 쥔 채였다.
-이것이 당문의 내공심법인 만류귀원신공의 이치.
장패군의 손이 멈췄다. 무언가 이변이 느껴졌다. 측량할 수 없는, 그의 섭리를 벗어난 움직임이 그의 앞에 당도했다.
“네 년, 무엇을…!”
장패군은 윽박을 지르며검을 아래로 휘둘렀다. 바람과 구름이 쏟아지며 당소소를 짓뭉갰다. 그럼에도, 그것은 그 앞에 있었다.
“도철일맥[饕餮一脈], 상전벽해[桑田碧海] 무궁검[無窮劍].”
수없는 절규와 고통, 슬픔과 처절한 구애. 그 끝에.
마침내, 검이 울었다.
지이잉!
본래는 일어날 수 없는 한 줄기의 물결이 검 끝에 맺힌다. 투박한 검신은 제 몸을 흔들며 한 줄기의 물결을 두 줄기로, 두 줄기의 물결을 열 줄기로, 열 줄기의 물결을 기어코 한 아름의 흐름으로 만들어낸다.
“…하, 고작 검기였나?”
장패군은 그 행동을 비웃으며 손을 뻗었다. 바위가 비틀리며 그녀의 하체를 무너뜨리고, 바람이 덮쳐와 자세를 무너뜨렸다.
그럼에도, 당소소는 검을 들었다.
지양, 보폭은 넓고 그 축을 비틀어 힘을 끌어온다.
불안한 대지를 디뎠다.
인양, 허리는 곧게 펴힘을 전달한다.
고통으로 비틀린 허리를 폈다.
천양, 손끝과 정신을 목표로.
겨눈 검이 위로 올라서고, 겨눈 손은 장패군의 눈을 향해있었다.
“이게 내 예법이야.”
당소소를 바라보던 장패군은 본능적으로공포를 느꼈다. 검결지를 쥐고, 자신의 눈을 가리며 본신의 힘을 당겨온다. 무궁검을 바라보는 장패군의 얼굴이 당혹으로 범벅이 되었다.
‘이건, 위험하다. 계집은 별 것 아니나, 저 검. 저 검이 문제다. 대관절 정체가 무엇이기에…!’
“축지…!”
말은이어지지 않았다.
삼양귀원의 이치로 쏘아진 무궁검이, 검결지를 잘라내고 그 너머의 눈을 꿰뚫었다.
“큿, 크아아앗! 이, 빌어먹을 년이…!”
장패군이 고통에 몸부림치며 아래로 추락한다. 산맥이 무너진다. 농담이 흘러내리고, 하늘이 찢어진다.
선유요화안이,꿰뚫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