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5화 〉십칠장[十七章], 성하유랑[星下流浪] 2
당소소의 도발에 원저의 녹아내린 얼굴이 구겨졌다. 밑부분이 드러난 원저의 눈알은이리저리 움직이며 주변을 훑었다. 활용할 수 있는 변수와 설치해둔 함정. 모든 요소가 그의 머리에새겨졌다.
“꽤 자신이 있나 보군, 발칙한 계집.”
원저는 당소소를 바라봤다. 당소소는 그 눈빛을 피하지 않았다.
“너지?”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는 모르겠다만, 뭐….”
원저는 허리춤에서 철사를 뽑으며 대답했다.
“반항하는 자들을 몇 죽이긴 했지.”
“그냥 죽인 게 아니잖아.”
당소소는 으르렁거리며 원저를 쏘아봤다. 풀린 동공을 통해 보이는 감정. 당소소는 한걸음 나아갔다.
“고문하고, 사지를 자르며놀 듯이 죽였잖아. 그리고, 그들의 죽음마저 이용해 독을….”
“당가의 애송이가 본좌에게 그런 말을 할 줄이야!”
원저는 껄껄 웃었다.
“독각혈가보다 더한 짓거리를 하던 것이 너희 당가 아니더냐?”
“…….”
“푸흣, 당가의 애송이가 이런 말을 하고 다닐 줄이야. 세월이 많이 흐르긴 흐른 모양이야.”
원저는 웃음을 멈추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는 당소소에게 말했다.
“이곳은 놀이터가 아니다, 어리석은 계집아. 목적을 위해 사람을 죽이고자 했다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 것.”
콰르릉!
원저의 뒤편의 건물이 무너지며 그 모습을 가렸다. 연기와 불똥이 피어나며 그의 모습을 가렸다.
“그게 전쟁이다.”
원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연기가 가신 그곳에 원저는 없었다. 충동적으로 앞으로 달려나가려던 당소소를 백서희가 막아선다.
“진정해.”
“…저 아가리를 찢어버리겠어.”
“네가 무슨 수로. 자리를 지키고만 있으면 독무후님께서….”
당소소는 백서희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내 말을 따라.”
“뭐?”
당소소는 원저가 사라진 곳에서 오른쪽을 바라봤다.
“원저는 철저한 계획을 세우고, 자신을 과신하며 움직이는새끼야. 일정한 형식을 벗어나지 않는쉬운 악역이지.”
“…악역?”
당소소는 백서희의 의문에도 말을 정정하지 않았다. 그 대신, 자신이 보던 방향을 가리키며 말했다. 무너지기 시작한 건물에서 풍기는 열기가 무척 뜨거웠다.
“원저는 저기 있어.”
“말도 안 되는 소리. 저긴 불길 속이야.”
“저자의 무공은 응천순행술[應天順行術]. 주변의 기운과 동화하고 그 기운을 빌려 함정을 설치하거나 몸을 숨기고 암습을 날리는 놈이야.”
백서희는 당소소의 말에 그녀를 돌아봤다. 풀린 동공에선 이미 자제력이라곤 한 톨 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 이 흐름은 숨어서 함정 하나를 깔아두고, 독공을 펼칠 준비를 하고있을 것이 분명해. 아마 철사를 뽑는 것을 보아 올가미 덫일 확률이 높지. 나포천지[拿捕天地]라는 함정이야.”
“소소.”
“발끝으로 땅을 디뎌 나포천지를피하고 나아간다면, 독을 쓸 거야. 백련지독이라는 독인데….”
백서희는 어깨를 붙잡은 당소소의 손을 털어내며 그녀를 빤히 바라봤다. 격앙된 숨결이 그녀의 시선에 부딪혔다.
“진정해.”
“내 잘못이니까, 내가 바로 잡을게. 내가 움직여서 저놈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였고, 앞으로도 고통스럽게 만들 거야. 틀어진 평화는 내가 바로 잡을 수밖에 없어. 내가 해야 해.”
“네 탓이 아니라고 하잖아, 소소.”
백서희는차분히 말하며 당소소를 달랬다. 그러나 당소소의 분노와 자책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가, 함부로 행동해서 이런 결과가 나온 거야. 내가 바로 잡을게. 저 빌어먹을 자식의 사지를 찢어버리자. 그리고 내가 다시,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면….”
백서희는 잠시 검을 쥔 자신의 손을바라보며 당소소의 말을 곱씹었다. 그리고 당소소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뒤돌아섰다.
파앗!
그런 둘을 노리고 날아드는 비수. 백서희는 검을 올려치며 비수를 튕겨냈다.
“네가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어?”
“이미 죽은 이는 돌아오지 않고, 불타버린 건물은 복구되지 않아. 더 슬퍼할 사람은 나고, 더 분노할 사람도 나야.”
백서희는 울컥 솟아오르는 감정에 미간을 찡그렸다.
“…호들갑 떨지 마. 우리가 할 일은 네 스승님을 기다리는 거고, 저자가 어떤 짓을 해도 우리가 할 일은 바뀌지 않아.”
“그치만 내가, 내가 잘못한 거잖아.”
“네가 뭘 잘못했는데?”
백서희는 순간 돌아보며 당소소를 바라봤다.
“내가, 함부로 행동해서….”
“무엇을? 네가 무엇을 함부로 행동했는데?”
“그건….”
“연회에 와달라 요청한 것은 백능상단이야. 넌 그저 백능상단의 요청을 받아 이곳으로 왔을 뿐이고. 그런 우릴 습격한 것은 마교야. 여기서 네 탓이 어디 있는데?”
“넌 말해봤자 몰라.”
“야.”
억누른 감정의 편린이 뒤엉켜 백서희의 입에선 다소 상기된 목소리가 나왔다. 당소소는 체념하듯 대꾸했다. 그 대답을 들은 백서희는 당소소의 멱살을 쥐고, 약하게 끌어당겼다.
“그럼 나는. 나는화나지 않은 것 같아?”
“…….”
“나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단 말이야. 네가 그러면 난 어떻게 되겠어?”
백서희는 그렇게 말하며 당소소의 멱살을 놓았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혼동하지 마, 소소.”
백서희는 그렇게 말하며 비수가 날아온 쪽으로 검을 겨눴다. 그들을 지켜보던 원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계집들의 소꿉놀이가 꽤나 격렬하군,크흐흐.”
“허장성세를 부리긴.”
백서희가 원저의 말에 대꾸했다.
“널 제외하고 아무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은, 아마 이 화재로 수하들을 잃었기 때문이겠지.”
“우둔한 발상이군. 너희 둘 따위는 내 손으로 찢어 죽일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하지 않는 거지? 독무후께서 자리를 비우기만을 기다렸다가 우리를 습격한 주제에.”
“크흐.”
원저는 백서희의 말에 웃음을 흘렸다. 백서희는 자세를 낮추고, 검을 끌어올려 기수식을 취했다.
“내공을 회복 중이구나.”
“…….”
“얼굴에 큰 화상을 입은 것도, 머리털이 모두 불타버린 것도. 불길에 휘말려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다가 생긴 흔적이겠지.”
백서희는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탁한 공기가 그녀의 폐부를가득 메웠다. 하지만 그만큼 거대한 열기가 그 안에 있었다. 아미의 심법, 불혼패엽공이 탁기속에서도 찬연히 빛났다.
“네 말대로 넌 우리 둘을 손쉽게 죽일 수 있겠지.”
검끝을 하늘에 겨눴다.지지하던 힘이 스러진다. 내공이 스러진다. 그리고, 뻗어 나갈 투로를 따른다.
복호검법 제 이 식, 풍종적멸.
우우웅!
내리깔리는 기압이 불꽃의 벽을 짓눌렀다. 가려진 불의 장막을 들추고, 내공을 운기 중이던 원저의 모습을 드러냈다. 검은 마침내 아래로 떨어진다. 한 아름 이는 바람과 함께, 검기에 실린 분노가 원저를 향해 쏘아졌다.
“이런…!”
원저는 서둘러 운기를 끝맺고 앞에 놓인 나무판자를 밟았다. 독액이 흩뿌려지며 검기와 마주했다.
피시식!
무언가가 부식되는 소리가 들려오며 원저를 향해 나아가던 검기가 자취를 감췄다. 백서희의 한쪽 눈이 움찔거렸다. 다시금 검을 겨누며, 원저의 다음 행동을 주시했다.
“철혜검봉이라고했었나.”
원저의가슴팍에서 피가 울컥 솟아 나왔다. 원저는 그 피를 바라보며 껄껄 웃었다.
“그 통찰과 무력. 과연, 허명은아니로다.”
원저가 백서희를 칭송했다. 그러나 그녀는 피가 튐에도 안색하나 바뀌지 않는 그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원저는 품을 뒤져 단약 하나를 꺼내 입에 집어넣었다. 백서희의 발이 움찔거렸지만, 당소소가 알려줬던 응천순행술이 마음에 밟혔다. 저자의 주위로 어떤 함정과 독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애송이답지 않게 차분하고.”
키득거리며 꿈틀거리는 상처를 따라, 독액이 솟아 나온다. 열기에 그 독액이 증발해, 한 무리의 구름을 형성했다. 원저의 모습은 이내 그 독구름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원저가 보이는 무공을, 백서희는 단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당혁이 보였던 무공.’
구름이 점차 가라앉았다. 원저의 모습이 보였다. 그의 가슴팍은 이미 창백한 새살이 올라와 있었다. 원저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설마 애송이 따위에게 독각천시와 독각혈사연을 사용하게 될 줄이야.”
원저는 비수로 자신의 뺨을 길게 그었다. 쇠를 긁는 소리가 나며 어떠한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녹아내렸던 뺨은, 이미 제 모습을 찾은 후였다. 백서희는 한층 더 긴장하며 검을 들었다. 그 모습을 가소롭게 보던 원저는, 한 손을 들어백서희를 향해 뻗었다.
“이리 오거라.”
스스슥!
땅바닥을 긁는 소리가 귀를 따갑게 했다. 백서희는 서둘러 그 소리의 발원지를 찾았다.
‘나포천지…!’
응천순행술, 나포천지. 어느새 백서희를 둘러싼거대한 철올가미가 그녀의 숨통을 조여왔다. 실낱같이 가는 검기는 그녀를 반토막내리라는 의지가 엿보였다.
옥죄어오는 철사를 바라보던 백서희의 발끝이 비틀리고, 일어났다. 그리고, 땅을 짓밟았다.
파아앗!
장원을 메우고 있던 열기가 꿰뚫리고, 검을 들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표홀하게 내쏘아진다. 모습 그 자체가 쏘아지는 그 광경은, 정중동[靜中動]의 극치. 천신의 칼날 같은 금빛이 내쏘아진다는 아미파의 보법, 신망금광보[神芒金光步]가 펼쳐졌다.
“흥, 어리광을 부리긴.”
원저는 코웃음을 치며 주먹을 쥐었다. 독주머니가 불길 속에서 튀어나오며 백서희의 동선에 내리깔렸다.
팍, 파악!
가죽주머니가 찢겨나가며 독분을 어지러이 깔아둔다. 백서희의 모습은 곧장 방향을 비틀며 독이 깔린 영역을 회피했다. 하지만 원저의 성채는 이미 완공된 후였다. 백서희는 숨을 뱉으며 원포의 주위를 감싼 독연[毒煙]을 바라봤다.
‘부식은 없다. 무색도 아니야. 혈액독이거나 융해독일 확률이 높아.’
백서희는 그 주위를 빙 돌며 독무후에게서 배운 지식과 대조하며 독연을 분석했다. 뛰어난 기량의 그녀였지만, 아직 경험이 많지 않았기에 독공의 고수를 상대하는 법에 대해선 무지했다. 보이는 독은 거슬렸지만, 보이지 않는 독은 공포였다. 백서희는 서둘러 소매로코와 입을 가렸다.
“공성은 성을 차지하고자 하는 쪽이 급한 법이거늘. 발걸음이 무겁구나!”
원저의 말과 함께 뒤편에서 화살이 날아왔다. 백서희는 발걸음을 옮겨 간신히 화살을 피하고, 계속해서 내공을 휘돌리며 몸을 침범해올 독을 경계했다. 다행스럽게도 독은 아직 몸을 탐하진 않고 있었으나,대신독연으로 이루어진 성벽이 점차 백서희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대론 천천히 죽어갈 뿐이야.’
판단을 내린 백서희는 검을 들었다. 형태가 없는 독연은 오직 검기로만 벨 수 있었으니, 백서희의검엔 금빛의 검기가 어렸다. 그리고 그 검기는 자신을 향해 천천히 창궐하는 독연을 향해 나아갔다.
휘이잉!
검기가 이끄는 바람과 함께 독연의 영역이 꿰뚫렸다. 백서희는 서둘러 그 허물어진 성벽을 향해 돌진했다.
팅!
“흡!”
난데없이 날아든 비수가그녀의 숨결을 앗아갔다. 함정이었다. 걸음이 멈추자, 길 또한 끊어진다. 성벽은 다시 수복되고, 영역은 점차 그녀를 향해 조여오고 있었다. 숨을 참고 있는 백서희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영락없이 올가미에 걸린 모양새였다.
“너무 그런 표정을 짓진 말도록. 해독제는 줄 생각이니.”
원저는 웃었다.
“물론 그 과묵하던 하인들과는 다른 대답을 해야 하겠지만.”
그녀의 위로 원저의 비웃음이 덮였다. 독연이 덮였다. 원저는 재차 철사를 움켜쥔 뒤, 나포천지의 수법으로 백서희를 낚아채 위로 들어 올렸다.
“…….”
하지만 철올가미는 또다시 빈 허공을 움켜쥐었다. 원저의 표정이 굳었다. 독연의 한가운데에서 꼼지락거리는 움직임이 포착되었다.
“당가의 애송이구나!”
노호성과 함께 독이 발린 철침들이 독연을 후비며 안으로 침투했다.
팟!
미미하게 들린 소리. 원저의얼굴엔 웃음이 지어졌다. 발걸음을 옮겨 독연의 안으로 직접 걸어갔다. 성벽의 안, 홀로 서 있는 당소소가 그를 맞이했다.
“네 친구는 어찌했느냐?”
“…….”
“아하. 섬망독[閃忘毒]이 제법 짜릿한 느낌일 테지. 어떠하지? 독각혈가의 특수한마비독은.”
당소소의 등에는 원저가 던졌던 철침이 박혀있었다. 당소소의 얼굴이 꿈틀거렸다. 그녀의 몸은 점차 아래로 가라앉았다. 원저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독각혈가의 홍복이구나. 당혁을 거두고, 네년을 인질로 삼아 독무후를 겁박해 당문의 독공을 가진다면. 천하제일의 독문은 바로 독각혈가의 차지가 분명할 터.”
“하, 하….”
“치기 어린 걸음 덕에 신교의 대업이 한층가까워졌구나.”
원저는 당소소의 뺨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마주한 그녀의 눈은, 분노와 웃음이었다. 원저는 그 눈길에 담긴 의미를 이미 깨닫고 있었다.그는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모두, 나의 손안이다.”
파아아아!
독연이 걷혔다. 장대한 기압[氣壓]이 눈발처럼 휘날렸다. 내리긋는 수차례의 검격 끝에 웅크려있던, 백서희의 모습이 내쏘아졌다.
신망금광보.
땅을 겨눈 검은 흉흉한 검기를 담고 있었다.그 모습을, 원저는 이미 바라보고 있었다.
“백능상단의 맥을 여기서 끊어주도록 하지.”
그가 손을 들어 내공을 움직였다. 응천순행술이 발동되었다. 설치한 함정들에 심어둔 내공들이 격발한다. 원저는 미소와 함께 손을 움켜쥐었다.
“……?”
“네, 모래, 성들을 좀…. 망가, 망가뜨려 봤어.”
당소소는 둔해진 혀를 놀리며 말했다. 원저의 시선은 백서희가 아닌 당소소에게 향했다.
“네 년! 어찌 본좌의 함정을…?”
“놀이터, 없어져서…. 어떻게 하냐?”
백서희의 검이 움직인다. 웅크린 검은 세상을 올려치며 마침내 하늘로 뻗는다.눈보라가 가득한 난세, 시야를 어지럽히는 구름마저 꿰뚫나니.
“소소!”
백서희의 외침과 함께 검기가 내쏘아진다. 당소소는 당황한 원저의 손아귀를 뿌리치며 옆으로 몸을 날렸다.
복호검법 제 삼 식, 표설운천[飄雪雲穿].
매서운 기압을 젖히며 도달한 금색의 검기.
그것은 가로막는 모든 것을 꿰뚫고 원저의 몸을 덮으며하늘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