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십칠장[十七章], 성하유랑[星下流浪] 5
기진맥진한 걸음으로 저잣거리를 걸어 나가는 단혼사. 옅은 화상 자국과 많은 실혈로 창백해진 안색이었다. 그가 지나간 거리엔 미약한 탄내가 묻어있었다. 누적된 피로와 몸에 새겨진 상흔에 무뚝뚝한 얼굴엔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늙음이란….”
단혼사는 자조하며 텅 빈 거리 구석에 있는 의자에 걸터앉았다. 바닥을 드러낸 단전에서 느껴지는 상실감이 싸늘했다. 단혼사는 입술을 꾹 다문 뒤 배에 박혀있는 나무토막을 잡았다.
“으음…!”
아릿한 고통에 단혼사는 잠시 손길을 멈췄다.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다시 당기려고 하는 순간.
“도움이 필요하오?”
맥을 끊는 한마디가 단혼사의 손길을 멈췄다. 단혼사는 얼굴에 묻어있던 피로를 쓸어내며 낯선 한마디를 경계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늘어뜨렸던 손을 움켜쥐었다. 핏물이 주먹을 타고 바닥을 적셨다.
“…….”
“그분이 돌아가시고 이십오 년만 아니오?”
삿갓을 쓴 사내가 단혼사의 앞에 섰다. 단혼사의 눈이 가늘어졌다.
“검랑[劍狼].”
“흐흣, 케케묵은 이름을. 당신도 지금 권랑[拳狼]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진 않잖소?”
삿갓사내의 말에 단혼사는 지친 기색으로 그의 별호를 뱉었다.
“그래, 묵객이었지.”
“오랜만이오, 단혼사. 아니, 당가의 호법님이라 불러야 옳은가?”
묵객은 삿갓의 끈을 풀며 자신의 얼굴을 보인다. 오른눈을 가로지르며 입을 찢어놓은 흉터가 인상 깊었다. 무뚝뚝한 둘은 한동안 말없이 서로를바라봤다. 먼저 입을 연 것은 단혼사였다.
“…자네의 고용주는 어디에 두고, 길을 잃고 어슬렁거리고 있는 게지?”
“백능상단주의 어린 아들에겐 시인이 가 있소. 난 따로 부여받은 일이 있어서.”
“궁랑[弓狼].”
단혼사는 시인의 옛 별호를 입에 담았다. 묵객은 자신의 흉터를 왼손으로 긁으며 말했다.
“…옛이야기는 미주[美酒]와 진미[珍味]의 앞에서 해야 옳은 것 아니겠소?”
단혼사의 발언을 은근히 지적하는 묵객. 단혼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경고를 수용했다.
“용건만 간단히.”
“고용주가 일은 잘 풀렸는지 물어보고 오라고 하더군.”
묵객의 설명에 단혼사는 경계심으로 움켜쥐었던 주먹을 풀었다. 그리고 고개를끄덕이며 물음에 긍정했다.
“백진오의 요청은 확실히 수행했….으음.”
긴장이 풀리자 박혀있는 나무토막에선 고통이 올라왔다. 단혼사는 다시 자리에 앉으며 상처 부위를 감싸고 몸을 웅크렸다. 묵객은 소리죽여 그 모습을 바라봤다.
“요청받은 대로 백능상단 본가의 폭약을 터뜨려 마교의 졸개들을 몰아내고, 독룡대주를 고립시켰다. 피난민들은 무사히 대피했고. 진작 협력을 요청했다면 더 큰 손해를 막을 수 있었을 터인데….”
“뭐, 누가 독룡대의 배후에 다른 이들이 있을 거라는 걸 예상할 수 있겠소. 그건 그렇다 치고, 독룡대의 대장이라면 적어도 머리 한 덩이에 같은 무게의 금이라도 주었을 터인데. 영, 일을 하는데 수지가 맞질 않으니.”
묵객의 상처가 꿈틀거린다. 단혼사는 거친 숨을 들이쉬며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돈 밝히는 것은 여전하군.”
“언제나 그렇듯 낭인이 돈을 밝히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소?”
묵객은 그렇게 말하며 단혼사의 옆에 앉았다.단혼사는 길게 숨을 뱉어 고통을 뱉어냈다.
“한데, 대형은 좀 변한 것 같구려.”
“…무엇이?”
“원랜 좀스러울 정도로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싸우셨잖소.”
“허허….”
단혼사는 묵객의 말에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묵객은 그를 바라보며 넌지시 물었다.
“강산이 두 번 하고도 반절정도 바뀔 시간이긴 하지만, 낭인이라는 족속의 성향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지. 당가의 주문이오?”
“…….”
단혼사는 묵객의 말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나에게 옛이야기를 하지 말라던 이는 어디 먼 곳으로 떠났나 보군.”
“아, 참. 그랬었구려.”
“묵객이라는 이름이 그렇게 부자연스러울 수 있는가?”
“하핫. 늙은이는 옛 추억을 곱씹을 수밖에요.”
묵객은 단혼사의 핀잔에 옅은 웃음을 지었다. 상처가 가른 근육이 움직여지질 않아 꽤 기괴한 웃음이었다. 단혼사는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몸 안을 가득 메우던 고통을 덜어내니, 그 빈 곳에 추억이 들이찼다.
그저 말썽꾸러기에 불과했던 망나니 딸이, 구주십이천을 구워삶는 정도의 영악함을 갖췄다고 생각했던 그때. 핏줄은 속일 수 없다며, 지독하다는 생각을 했던 그때.
그리고 영악하다고 생각했던 망나니가 원저에게 뺨을 맞았을 때. 멍청할 정도로 자신의 몸을 태우며 빛나던 별에, 먹구름이 드리워졌을 때.
“아무래도 나도 홀린 모양이야.”
그는 항상 철저하고 합리적으로 싸움을 벌였었다.애초부터 맨손으로 날붙이를 상대한다는 것부터가 합리에서 현저하게 벗어났기에, 그이외의 부분에서 합리를 챙겨야 했다. 그리하여 적을 지독하게 몰아가 정신을 무너뜨린다는 의미의 별호, 단혼사[斷魂士].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별호는 사천의 제일가는 주먹이라 불렸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이가 포기한 합리. 묵객은 상처를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군.”
“그런 거네.”
묵객은 삿갓을 쥔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멀지 않은 곳에 의원 하나가 있소.”
“그렇군.”
“일어나시오. 안내해드리지.”
“자네에게 줄 안내비는 없는데.”
묵객은 그 말에 웃었다.
“천금보다 무거운 것이 당가의 보은 아니었소?”
“…허허.”
단혼사는 헛웃음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묵객은 삿갓의 끈을 맸다. 둘의 발걸음이 길을 따라 흘렀다.
*
소녀 둘을 들쳐멘 채 지붕을 뛰어다니는 독무후. 그녀의 발은 질풍처럼 복잡하게 얽힌 건물들 사이로 흘렀고, 시야 또한 사방에 미치며 전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막내가 일을 마쳤나 보군.”
격렬하던 백능상단쪽의 반응이 고요해졌다. 그것이 촉발이었다. 거주구역의 독연이 잦아들었고, 산 중턱에서 뿜어대던 굵은 연기가 가늘어졌다. 고함과 비명이 들리던 저장고는 뜨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곳. 제방은 여전히 불길을 흘려대고 있었다.
“녹풍이 호, 완수했습니다.”
녹색의 그림자가 독무후의 옆으로 드리워졌다. 녹색의 무복엔 약간의 생채기만 났을 뿐, 그의 몸엔 어떤 흉도 나 있지 않았다. 독무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귀환을 반겼다.
“잔량은?”
“혈액독 세 통, 융해독 한 통. 비수 셋과 철침 여섯 자루입니다.”
“애매하다.”
“후열로 향해야 합니까?”
이 호의 물음. 독무후는 기왓장을 밟으며 물었다.
“손은 좀 쓰느냐?”
“녹풍대의 평균정도 입니다.”
녹풍대를 이끄는 것은 호법, 사천제일권 단혼사였다. 곁에 서라는 말은 필요 없었다. 독무후는 고개를 들어 눈앞을 막은 큰 누각을 바라봤다.
파앗!
크게 뛰어 앞을 막고 있던 누각을 넘은 독무후와 이 호. 그 누각의 지붕 위에서 두 녹풍대원이 독무후를 맞았다.
“삼 호와 사 호, 제작공방을 점령한 셋을 격살했습니다.”
“잔량은?”
“전량 소비되었습니다.”
그들의 몸에는 생채기와 함께 보랏빛으로 중독 증세가 보였다. 그 낌새를 확인한 독무후가 물었다.
“정말 둘이었느냐?”
“독룡대는 둘 뿐이었습니다.”
“요마의 사술[邪術]로 심혼이 지배당한 마교의 잡졸들이 있었으나, 크게 방해하진 않았습니다.”
독무후는 보고를 들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부상이 좀 있는 모양새구나.”
“후열로 가야 합니까?”
삼 호가 물었다. 사 호도 눈빛을 보내며 독무후의 대답을 요구했다. 독무후가 물었다.
“어느 정도 돌려줬느냐?”
사 호가 말했다.
“아직 아홉이 남았습니다.”
“그럼 가지.”
둘의 시선은 독무후를 넘고, 저 멀리에 있는 제방에 있었다. 독무후는 그들의 시선을 따라 몸을 날렸다.
콰앗!
한걸음에 저 멀리 흐르던 강이 가까워졌다. 물내음이 독무후의 코끝에 묻어났다. 그리고, 그 물에 뒤섞인 독기 또한. 그 옆을 녹풍대가 함께했다. 어느덧 중천을 넘어선 해는 그들을 내리쬐고 있었다. 독무후는 건물들이 드리운 그림자로 시선을 돌렸다. 녹색의 그림자 셋이 그 아래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잔량은?”
독무후는 그렇게 물으며 건물들 사이로 떨어졌다. 눈앞의 그림자들은 이곳저곳이 심하게 베여 피를 흘리고 있었다. 흐린 동공과 그렇지 않은 눈가의 열기. 비교적 멀쩡한 그림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전량 소비됐습니다.”
“…죄송합니다.”
가슴팍에긴 상흔이 나 있는 녹풍대원이 독무후에게 사죄했다. 독무후는 눈썹을 들어 올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신입인가?”
“예. 본가가 소란하여 가주님께서 직접….”
독무후는 옆으로 시선을 돌려 비교적 멀쩡해보이는 녹풍대원을 바라봤다. 그의 눈길은 앞으로 나선 이와 마찬가지로 열기투성이였다.
“무엇이 있었지?”
“자신을 환요대주[幻妖隊主]라 일컬었습니다. 막내가 당한 것도 그자의 사술에 의해서였습니다.”
“환요대주라…. 내 시대의 인물은 아니구나.”
“요마…. 요마의 부하예요.”
가느다란 당소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녹풍대원들의 시선이 당소소에게 쏠렸다. 당소소는 작은 스승님의 어깨에 들려있다는것이 부끄러운지, 허우적거리며 말했다.
“일단, 그, 내려주세요. 스승님….”
“시끄럽다. 아직 해독도 되지 않았을 것 아니냐.”
“하지만 저도 체면이 있는데….”
“…….”
잠시 침묵이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를 내려주며 말했다.
“네가 체면도생각할 줄 아는 아이인 것을 방금 알았구나.”
“…….”
당소소는 스승의 발견을 외면했다. 남자였던 가닥이 아직 남아있는지, 어린 소녀같이 생긴 스승에게 업혀있는 것은 영 모양 빠지는 그림이라고 생각되었다. 둘만 행동하면 상관이 없겠으나, 많은 이의 시선이 몰려있는 탓도 있었고.
“자아, 그럼 어떻게 한다….”
독무후는 나머지 어깨에 짊어진 백서희를 바라봤다. 백련지독에 잠시 노출된 상태로 입은 내상 때문인지, 몸이 불덩이였다. 그녀는 이 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목행, 혈액독과 융해독의 혼합. 마땅한 것을 가지고 있느냐?”
“상비하는 해독제를 뒤섞으면 될 듯도 싶습니다.”
“이리 내거라.”
독무후의 손짓에 두 병의 해독제가 그녀의 손에 잡혔다. 과감하게 한 병에 다른 한 병의 내용물을 부어버린 뒤, 내기를 일으켜 그 병 안에 불어넣었다.
파직!
목행이기에 억제를 하기 위해선 살려야 할 것은 금행. 혈액이 쉬이 응고되기에 융해독의 성질을 살려 응고점을 부순다. 아직 융해독으로 번질 정도는 아니었으니, 해독의 요소는 이것으로 충분했다.
독무후의 손이 한차례 흔들렸다. 내용물 또한 한차례 뒤섞였다. 방전이튀었다.
파직!
목행이기에 죽여야 할 것은 수행, 아직융해독이 아니기에 융해를 막아설 응고는 필요치 않았다. 거기에 내상. 체질에 부담을 줄 각종 독소를 해독제로부터 유리시켰다. 그리고, 백서희를 눕힌 뒤 그녀의 입으로 완성된 해독제를 흘려 넣었다.
“쿨럭, 쿨럭!”
해독제가 들어가자 백서희가 기침을 뿜었다. 독무후는 환요대주에 대해 언급한 녹풍대원을 손가락질로 다가오라 지시했다. 녹풍대원이 다가왔다.
“명하실 것이 있습니까?”
“제방으로 향한 둘은 아마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예.”
서로 감정은 보이지 않았다. 단지, 적들에게 징수할 금액을 다시 작성할 뿐.
“표면적으론 사천의 젖줄인 도언강의 제방을 오염시켜 백능상단은 물론 사천성 전체의 환란을 유도하는 것으로 보이나….”
“이면이 있다는 말씀입니까?”
“마교의 십계십마 중 둘이 왔다. 오히려 이면이 없다는 것이 더 설득력이없지 않겠느냐?”
“마교의 지부를 세우기 위함이라면?”
“이런 소란스러운 일을 저지른 후 말이냐?”
독무후의 핀잔. 녹풍대원은 그 핀잔에도 혹여 있을 가정을 이어갔다.
“마교의 무력이 건재함을 과시하고,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구매대상은 누구로 생각하느냐?”
“관의 흔적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사천성주 쪽이다?”
독무후의 말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독무후는 팔짱을 낀 뒤 고심에 잠겼다.
“일리는 있다만, 비약이 심하다.”
“전반적인 상황을 알지 못하니…. 호법께서 백진오와 담판을 지으러 간다며 저희를 모두 도언강의 바깥에 대기시키셨습니다. 이 이상의 정보는 알지 못합니다.”
“…우선 백진오라는 녀석이 관에게 여지를 줄 정도로 융통성이 없는 아이더냐? 아마 그렇진 않을 터인데.”
독무후의 말에 녹풍대원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잇지 못했다. 그는 다소 어린 나이지만, 서방 비단길로 원정을 떠난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해 백능상단의 활로를 중원반대편 복건성까지 뻗은 인물이었다.
“당장 이 주변 현령의 배를 갈라보면 내장 대신 백능상단의 돈이 튀어나오겠지.”
“그점이 이상합니다. 당장 군사를 일으켜 진압을 하면 했지, 방관은 말이 되지 않습니다.”
“인원을 나눠야겠다.”
“예.”
녹풍대원들이 독무후의 앞에 도열했다. 이호와 삼호를 가리켰다.
“동행한다.”
두고개가 끄덕여졌다. 사 호에 손가락이 옮겨진다.
“호법이 돌아오기 전까지 당소소와 백서희를 보호하거라.”
“예.”
사 호가 고개를 숙였다. 비틀거리는 당소소가 그를 지나쳐 독무후에게 다가갔다.
“스승님.”
“여기 있거라.”
“아니, 그것이 아니라.”
“그럼?”
독무후가 물었다. 당소소의 머릿속엔 몇 년 후의 사천이 있었다.본격적으로 마교가 침공하기 전까진 어떤 전쟁도 없었고, 어떤 잡음도, 만독불침지체와 관련된 일화를 제외하면 어떤 분량도 없었다. 물론, 사망하는 이들도 없었다. 당소소가 기억하는 것은오로지 한가지.
“관의 흔적이 있다면…. 연유는 모르지만, 관과 어떤 연관이 있고 그들이 마교의 편의를 봐줬다면….”
어떤 전쟁도, 어떤 잡음도 없던 사천성은.
“예상보다 더 많은 인원이 사천성에 흘러들어올 수 있잖아요.”
가장 먼저 마교의 영역이 되는 성이었다.
“…….”
찰그락, 찰그락!
기왓장을 밟는 소리, 목조건물을 밟는 소리. 흙을 밟는 소리.
그리고, 활대를 당기는 소리.
쫘아아악!
독무후의 입가가 비틀렸다. 그와 동시에, 무수한 살기가 그들에게 드리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