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화 〉십칠장[十七章], 성하유랑[星下流浪] 7
검보라색으로 물들어 있는 강은 축축한 물기 대신 불쾌한 독기를 흩뿌리고 있었다. 앞서나가는 독무후의 어깨 너머론 멀리 있는 제방이 보였다. 여러 갈래로 찢어놓은 강줄기옆의 논밭은 불길로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을 바라본 당소소는, 파리한 얼굴로 걸어가는 백서희에게 눈을돌렸다.
백서희는 잠시 당소소와 눈을 맞추더니, 다시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
비틀거리는 백서희는 장검을 짚으며 멈췄다. 깜빡이는 눈에선 수많은 말들이 물결쳤다. 하지만, 내뱉어야 할 말은 하나였다.
“다 끝나고. 모두 다 끝나고 이야기 하자.”
“응.”
“…아직 백능상가에서 다 못 봤던 장도 봐야 하잖아?”
“하하….”
어설픈 익살로 당장의 비애를 덮었다. 검집이 잘그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백서희의 걸음은 앞으로 향했다. 당소소도 힘겹게 그려놓은 웃음을 털어내며 뒤를 따랐다.
걸음은 이어지고, 요란한 물소리는 잦아드는 대신 더 깊어졌다.
강의 수위를 다스리기 위해 여러 갈래로 찢어놓았던 지류들이 점차 한 줄기로 합쳐지고, 마침내 도달한 제방의 광경이 그녀들을 맞이했다.
신비로운 안개가 흐르며, 자연과 인위가 한데 엮여 조화를 이루던 제방을 이루는 다리와 산수. 안개에선 신비대신 독물의 악취가, 산수는 재가 되어 거뭇한 혼란을 자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제방으로 이어지는 모든 다리를 끊어, 제방은 인위로 덧씌운 세상과 단절된 듯 했다.
오로지, 제방 앞의 삼각주로 향하는 다리 단 하나.
“낭만있구나.”
독무후는 앳된 웃음을 지으며 다리 앞에서 멈춰 섰다.
“낭만을 찾는 아해들은 대게 끝이 좋지 않은데 말이야.”
다리 아래로 독물들이 꿈틀거리고, 물뱀들이 물줄기를 타고 흐르고 있었다. 아래를 내려다본 당소소는 눈살을 찌푸리며 생각했다.
‘대체 이 많은 독물을 어디서 준비한 거지? 배후는….’
제아무리 마교라지만, 그 먼 거리에서 이만큼의 물자를 수송할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도출되는 답안은 그들 뒤에 있는 배후. 당소소의 기억 속에서도 당장 짐작되는 이들이 없었다. 중원의 여러 성을 아우르는 소설이었기에 그에 맞는악역들도 많았고, 흑막도 많았기에.
호북성의 성도,무한[武漢]에서 암약하는 폐주편복회[廢州蝙蝠會]. 섬서성의 유명한 암시장, 월화원을 운영하는 월광선[月光船] 등등. 사천성은 얼마 전 멸문한 흑림총련의 두 흉수 천괴와 학귀가 있었다.
그녀의 미간이 좁아졌다. 독무후의 가르침이 머리를 훑는다. 하나의 사건에서 사건 전체를 유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가르침.
‘…아는 게 너무 많아도 문제란 말이지. 떠올려나 볼까.’
지금은 이야기의 초반부. 주인공은 예향과의 일을 끝마치고 호북성을 떠나, 호남성의 그 유명한 동정호[洞庭湖]에서 객잔들의 전쟁과 함께 유람을 즐기고 있을 것이다. 그 전쟁에서 예향에게 쏘아낸 독이 발린 암기를 막아내고, 예향과 함께 사천으로 향하기까지가 이 권까지의 이야기였다.
초반부이기에 드러나지 않은 세력들도 많았고, 접근할 수 없는 인물들도 많았다. 거기에 작가가 즐겨 쓰던 사실은 더 나쁜 놈이 있었다는 흑막의 흑막 또한 등장하지 않았다. 사천성의 흑림총련이 그저 마교의 끄나풀에 불과했다던 사실은, 작중 최후반부에나 등장하는 이야기였으니.
당소소는 동공을 좁히고 마지막으로 떠올린 생각의 꼬리를 잡았다.
‘흑막의 흑막.’
간단한 유추였다. 저 먼 곳에서 회족들과 영역다툼을 하던 마교가 이정도 물자를 운용할 수 있을 리 없었고, 십계십마의 둘. 그것도 가문의 수장을 맡은 자들이 직접 움직였으니. 흑림총련의 흑막은 마교였고, 마교의 도강언 습격을 돕는 흑막이 있을 거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당소소의 기억에서 그들은 누구인가. 사천성은 온전히 마교의 손아귀 아래에 떨어졌었다. 마교는 후반부 모든 세력을 위협하는 최종악역으로 몸집을 불린다. 사파는 휘하로, 정파는 세뇌로. 그리고 황실은 암투로.
생각에 빠져있던 당소소의 눈이 점점 초점을 찾아갔다.
“스승님.”
“왜 그러느냐.”
“분명 관의 흔적이 있다고 하셨죠?”
“화약은 황실에서 엄히 규제하는 품목이다. 관이 아니면, 우리 당가에서나 복잡한 허가를 받아 쓸 수 있을 정도야.”
당소소를 돌아보는 독무후. 시선이 맞는다.
“천자께선 지금 자신의 숙부 때문에 곤욕을 치르고 있죠?”
“제법 황실의 이야기를 아는구나. 맞단다. 번왕들이 골치를 썩이고 있지. 그중에서도 유별나게….”
“번왕[藩王], 연군[燕君].”
“…그래. 그 놈이 꽤 골치란다.”
쌍검무쌍의 배경은 명나라 초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물론 온전히 역사를 떼어다가 붙이진 않았다. 명[明]이라는 나라이름은 요[曜] 나라로 바뀌었으며, 왕족의 성씨 또한 달랐고 문화 또한 명나라와 청나라가 혼재해있었다.
그렇지만 뿌리가 명나라이기에, 필연적으로 일어날 사건 하나가 있었다.
‘만리장성 북쪽으로 몰아낸 망국의 잔당들을 일선에서 막던 연왕. 그가 황태자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실패해, 반역을 일으킨다.’
역사 속에선 정난의 변이라고 알려져 있는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쌍검무쌍 속에서도 예외는 없었다. 다른 점은 소설 속 황제는 본래의 역사처럼 본격적으로 번왕을 홀대하지 않았다는 점. 그로 파생되는 일은.
“연군은 군부를 장악하고 있고, 호시탐탐 황좌를 노리고 있지 않나요?”
“…오호라.”
당소소의 발언에 독무후의 눈이 휘어졌다.
시대가 평온하면 검은 녹슨다. 대신 벼루가 젖는다. 군인들은 중심과 멀어져 홀대를 받게 되고, 학자들은 점점 중심으로 다가가 시대의 주역이 된다. 연군은 그 군인들의 마음을 잡았고, 사실상 지방의 군부는 모두 그의 계파라고 칭할 수 있었다.
휘어진 눈으로 보는 다리 건너편엔 일단의 무인들이 도열해있었다.
“끄나풀의 끄나풀이 등장했구나.”
“당가의 무인들은 이리와 흑림총련의 원을 받아가거라!”
어깨에 붕대를 감고 산발이 된 머리를 휘날리며 서있는 사내. 넝마가 된 옷에선 그의 말대로 원망이 땟국물이 되어 흐르는 것 같았다. 흑림총련주의 등장이었다. 도열한 무인들도 비슷한 행색인 것을 보아, 멸문한 흑림총련의 잔당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독무후는 피식 웃었다.
“어쩐지 저 미꾸라지 하나를 못 찾았다고 하더니…. 마교의 손에 들어가 있었군.”
독무후가 제방으로 향하는 다리를 걸어갔다. 당소소가 그 뒤를 따랐고, 백서희가 나란히 걸었다. 그리고 녹풍대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흑림총련주의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자신들을 당가의 그림자라 칭하던 회색 옷의 무인들이 떠오르며 오금이 저려왔다.
-독무후를 죽이는 것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하지만요마의 편에 서서 사천교류회의 습격을 실패한 자신은,
-당소소를 포획하거나, 백서희를 죽여라.
어떠한 선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면 네 놈을 살려주도록 하마.
“흑림총련의 동지들아!”
흑림총련주가 쉰 목소리로 소리쳤다. 무인들이 갖가지 병기를 뽑으며 고함을 질렀다.
“악랄한 당가에게 우리의 원한을 돌려주거라!”
그는 손에 든 창으로 땅을 한 차례 찍었다. 무인들은 그 진동에 발맞춰 앞으로 걸어나갔다. 걸음은 달음박질로, 달음박질은 이내 보법으로 뒤바뀌며 독무후와 당소소를 향해 쏘아졌다.
“막내가 해볼 테냐?”
녹풍 이 호가 피에 젖은 붕대를 감고 있는 녹풍대원을 보며 물었다. 그는 대답 대신 최후열에서 걸어 나가 독무후의 앞에 섰다. 크게 들이쉬는 숨결에 당가의 독문심공, 만류귀원신공이 움직였다.
“아직 녹색 바람이 불거늘 어찌 당가에 다가오느냐!”
노호성과 함께 녹풍대원이 그들을 마주쳐갔다. 분명 많은 숫자였다. 독도 모두 소비하였고, 암기 또한 모조리 동났다. 그러나, 당가의 무서움은 독과 암기에서 비롯됨이 아니었으니.
“잡아라…! 읏?”
창을 찔러오던 선두의 무인의 창이 녹풍대원의 왼손에 잡혔다. 확 잡아당겨 그를 끌어왔다. 오른손의 주먹은 그대로 다가오는 선두의 콧등을 뭉개주었다.
“컥!”
“난간을 밟고 적을 노려!”
내공을 휘돌려 보법으로 난간을 밟으며뛰어오는 무인들. 양쪽을 점거하며 동시에 검을 찔러갔다. 녹풍대원은 내밀었던 오른주먹을 접어, 팔꿈치로 오른쪽의 검을 아래로 쳐냈다. 왼쪽의 검은 빼앗은 창을 놀려 옆구리에 바짝 붙여 교착시켰다.
“아아아악!”
접혔던 오른팔은 곧장 펼쳐지며 오른쪽의 무인을 허공으로 띄워버렸고, 비명에 당황한 왼쪽의 무인의 다리엔 창이 박혀 독기의 강 아래로 떨어졌다.
그를 기점으로 물밀 듯이 밀려오는 무인들. 그러나 그들은 사파의 패잔병이었고, 기껏해야 이류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는 잡졸들이었다. 당가의 정예 중의 정예인 녹풍대원을 넘어서기란 요원한 일이었다.
다섯이 강으로 떨어지고, 셋의 얼굴이 으깨져 다리에 길게 누운 시점. 독무후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어지는 흑림총련주를 보고 있었다.
“녹풍대.”
“옛!”
“소소와백능상단의 규수를 잘 돌보고 있거라.”
“명 받들겠습니다.”
독무후는 가볍게 뛰어 전장을 넘고, 흑림총련주의 뒤를 쫓아갔다. 녹풍 이 호는 당소소의 앞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아가씨, 제 뒤에 서시지요.”
“…예.”
호위를 받는 것이 영 어색했지만,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 걸음뒤로 물러섰다. 밀려오는 흑림총련의 잔당들은 점점 뒤로 물러서고 있었다. 녹풍 이 호는 전방에서 적을 격퇴하고 있던 녹풍대원에게 말했다.
“막내야.”
“예.”
“쉬어라.”
녹풍 이 호의 말에 가타부타 따르는 사족은 없었다. 막내라 불린 녹풍대원은 내공을 거두고 뒤로 물러섰고, 그 앞을 다른 녹풍대원들이 채웠다. 흑림총련의 잔당들은 그 삼엄함에 감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련주님이…?”
“이 육시럴 새끼!”
설상가상, 흑림총련주의 도주 또한 확인된 상태였다. 사기가 눈에 띄게 바닥을 때렸다. 녹풍 이 호는 허리춤에서 암기를 움켜쥐며 당소소를 흘겨봤다.
“명령을.”
“저, 저요?”
“…그럼 누구겠니.”
백서희의 가벼운 핀잔. 당소소는 당황을 덜어내고 목을 가다듬었다.
“녹풍대.”
“옛!”
“씹창을 내버려.”
“…예?”
녹풍대원들은 당소소의 입에서 나온 말에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모든 시선이 당소소에게로 향했다. 당소소는 눈을 끔뻑인다. 그리고,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정정했다.
“그냥 조져버려.”
“…….”
“…없애버려.”
“예.”
당소소의 명을 받아 녹풍대가 움직였다. 당가의 정예를 맞아 적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호흡을 멈추고 도망가는 것뿐이었다.
*
제방의 축을 담당하는 기둥이 보였다. 민강의 수위를 조절하는 거대한 벽이 있었다. 삼각지의 끝이었다. 그 기둥을 바라보던 흑림총련주는 슬쩍 웃음을 보였다. 하지만 서둘러 그 웃음을 지우고, 뒤돌아서서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악! 오지마, 오지마!”
“시간이 없으니, 한 번에 끝내자꾸나.”
뇌전을 두른 촌철이 그의 미간으로 날아들었다.
“마침내 최종국면이군. 알면서도 걸어오는 그 광오함은 과연 신교의 무인과 비견될 만 하다.”
멈췄다.
허공에 멈춘 촌철을 기준으로, 공간이 젖혀지며 상아색의 비단옷이 물결쳤다. 독무후는 요대를 풀어 땅에 내던졌다.
“손도 없는 놈이 잘도 잡는구나.”
“어린 몸으로 이곳까지 오느라 꽤 고생이 많았을 듯한데.”
요마는 움켜쥐고 있던 촌철을 다시 독무후에게 던졌다. 상아색의 불꽃, 요선지화가 발려있는 촌철이 독무후에게 날아갔다. 독무후는 그 촌철을 가볍게 받아내며 한 차례 털었다. 요선지화가 마치 물방울이 털려나가듯 흩어졌다.
“사천투봉. 아쉽게 되었어.”
“무엇이 아쉽게 되었다는 게냐? 너희가 번왕의 의뢰를 받고 서군도독부의 지원을 받은 것?”
독무후의 주위로 상아색 무복의 마교도들이 모여들었다. 독무후가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사천에 환란을 일으켜 정반대쪽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리고 정 반대편에 위치한 번왕 연군은 세력을 확장하겠지.”
요마는 웃으며 독무후의 말을 대신 이어갔다. 독무후는 얼굴을 굳힌 채 그의 말을 받았다.
“연군씩이나 되는 황실의 핏줄인데, 너희 정도 위치의 인물들이 움직이지 않는다면 어울리려고 하지 않겠지.”
“과연, 노강호. 척하면 척이라니까.”
독마의 음성. 독무후는 위를 바라봤다. 제방에 독기를 뿌리고 있던 독마가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천하십강, 독무후. 달리, 독공의 종주라는 독종[毒宗]이라 불리는 이여.”
오염된 강물에서 뿜어지던 독기가 그의주위에 둘러진다. 완연한 실체로 구현되는 독구름. 진정한 모습으로 펼쳐지는 독각혈사연의모습이었다. 그가 제방의 아래로 추락한다. 마치 그을음인양 그의 움직임을 따라 독연이 길게 늘어진다.
“이제 그 칭호는 이 독마가 가져가마.”
강철과도 같은 그의 육체가 땅에 닿았다. 긴 충돌음이 들렸다. 독연이 그녀의 앞에 피어났다.
“…흐흣.”
독무후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요마는 모습을 감추며 말했다.
“웃을 시간이 있을까?”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울렸다.
“이곳에 와놓고, 분명한 사실을 하나 잊고 있구나.”
“무엇이지?”
“네 제자의 목숨이 경각에 달했다는 것을.”
“…….”
독무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와 동시에 상아색의 무인들이 독무후를 향해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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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에 피는 하얀 꽃 작가님, 발미아드 님께서 그려주신 당소소 팬아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