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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4화 〉십칠장[十七章], 성하유랑[星下流浪] 10 (114/130)



〈 114화 〉십칠장[十七章], 성하유랑[星下流浪] 10

습기있는 땅에 당소소의 당혜[唐鞋]가 조금 파고들었다. 한걸음더 앞으로 딛자 단단한 돌바닥이 반겼다. 돌길을 따라 당도한 곳의 전각엔 이빙각이라는 현판이 걸려있었다. 굳게 닫힌 문으로 호기롭게 다가가는 당소소를, 녹풍  호가 막아섰다.

“아가씨, 잠시 물러나계시지요.”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녹풍 이 호가 문 옆에 붙어 손짓을 하자, 녹풍대원들이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조심스런 손길로 이빙각의 문을 살짝 열고, 날이 시퍼런 비수를 꺼냈다. 파리한 검날에 빛을 반사시켜 안을 훑었다. 녹풍 이 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벌컥 열고 안으로 진입했다.


“이건…. 꽤 난감하군.”

“무슨 일인가요?”

녹풍 이 호의 난감한 음색. 당소소는 서둘러 이변에 대해 물었다.

“독연이 일 층 응접실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들어오지 않으시는 편이….”

“소소, 옆에 있으라니까.”


백서희의 다그침과 함께 옆에 자리한 당소소. 녹풍 이 호는 이미 곁으로 다가와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보고 말을 끊었다. 잠시 굳어있던 그는, 품에서 입가와 코를 가리는 복면을 꺼내 당소소에게 입혔다.

“…좋았겠지만. 들어오셨으니, 이 복면을 착용해주시지요.”

“이빙각의 꼴이 말이 아니네….”

“우선 나보단 서희먼저. 그리고, 독연을 가라앉히고 갈 수 있는방법은 없나?”

당소소가 복면을 백서희에게 건넨 뒤, 다시 복면을 받으며 물었다. 녹풍 이 호는 비수를 만지작거리며 고심했다.

“독을 중화하는 제독분을 뿌려보았으나 듣질 않습니다. 그렇다면 검기로 이 넓은 응접실을 헤집어 놓아야 하는데,  녹풍대 인원만으로는  어렵습니다. 독의 성분이라도 알면 제독분의 조합식을 바꿔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독각혈가의 독인가.”

“예.”

녹풍 이 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소소는 뜨끔거리는 아랫배를 잠시 쓰다듬더니,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성분을 알면 해독할  있다고 하셨죠?”

“예. 그렇습니다만…. 아가씨?”


당소소는 확답을 듣자 복면을 풀고 크게 숨을 들이켰다. 녹풍 이 호가 그 행동에 깜짝 놀라 황급히 그녀를 만류하고 복면을 다시 착용시켰다.

“이게 무슨 짓이십니까!”

“당소소!”

“윽, 흐으….”


격하게 반응하는 단전. 얼굴이 후끈거리며 혈맥을 바늘로 쿡쿡 찔러대는 느낌이 전신으로 퍼졌다. 신경을 마비시키고, 그 틈을 노려 혈액의 이동을 정지시키는 독. 맡는 순간 사람이 죽은 듯이 잠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피안향…. 백련지독이 아니라 피안향이네…. 화행, 신경독과 혈액독이에요.”

“…….”


당소소는 고통을 억누르며 독무후에게 배웠던 독공의 이론으로 독을 구분했다. 녹풍 이 호는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기껏 고생한 당소소의 희생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막내.”

“예.”

“그릇.”

백서희가 무릎 위에 당소소를 눕히자, 막내라 불리는 녹풍대원은 그 앞에사기그릇을 내려놓았다. 녹풍 이 호는 서둘러 해독제들이 담긴 죽통을 꺼내 당소소가 일러준 구분대로해독제를 조합했다.

“아가씨. 해독제입니다.”

녹풍  호가 그릇에 담긴 해독제를 당소소의 입가로 흘려 넣었다. 당소소의 목이 움찔거리며 해독제를 삼켰다. 녹풍  호는 그 광경을 바라보다, 그릇을 한번 털고 입을 열었다.

“아가씨. 앞서 직접 말씀하셨지만 당신은 가주님의 대리자입니다. 이렇게 섣불리 행동해서는 당가의 위신이….”

“전, 약해요.”

당소소는 고개를 돌려 녹풍  호를 바라봤다.

“제 비수는 적에게 닿지 않고, 그렇다고 상황을 타개할 정도로 똑똑하지도 않아요.”

고통에 젖은 눈을 감으며, 탄식하듯 뱉었다.


“그러니 할 수 있는 것을 모든 것을 해야 해.”

그녀를 둘러싼 녹풍대들은 고통에 떨고 있는 당소소의 모습을 바라봤다. 만감이 교차하는 눈빛들. 그리고, 그들의 눈빛은 그 만감을 담고 다시 서로 교차했다.

자신들이 지켜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이, 오히려 자신들을 돕고 쓰러져있었다. 여태까지 차분하기만 하던 그들의 눈에선 비릿한 독향이 묻어났다.

백서희는 떨고 있는 당소소의 손을 잡아주며 그들을 바라봤다.


‘바짝 독이 올랐네.’


다시 시선을 돌려 당소소를 바라본다. 사천교류회 이후로 항상 느끼는 점이었지만, 그녀는 상당히 기묘한 소녀였다. 위기를 앞에 두고선 평상시에 보여주는 소심함이라곤 눈꼽만큼도 보이지않는 과감함과 무모함. 그리고, 그 행동으로 인해 고양되는 사람들.

흡사 노리고라도 하는 듯한 행동이었다. 연유를 찾으라면, 딱히 대기 힘들었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  같았다.

언제나 확고히 정론만을 바라보던 그녀의 이성마저도, 당소소의 그런 행동에 경도[傾倒]되어 버렸으니까.

“…이빙각의 구조는 제가 잘 압니다.”


묘한 열기가 담긴 백서희의 입술이 열렸다. 독기에 젖은 시선들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당소소를 땅에 눕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장검이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호를.”

쉬이익.

간결한 검명. 그녀의 심상을 표현해주는 모든 것이었다. 왼손으로 쥐고 있는 검집을 바라봤다. 애착있는 자신의 고향을, 친애하는 자신의 친우를 달랠 때까지 돌아갈 일이 없는 곳이었다. 검집은 땅바닥을 나뒹굴었다.

타당, 탕탕!

검집이 요란하게 땅을 울리는 소리가 울리고,녹풍 이 호는 막내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상처는 어떠하지?”

“…일선에 서는 것은 무리입니다.”


그의 가슴에 감긴 붕대가 피에 흥건했다. 녹풍 이 호는 당소소를 바라봤다.

“모셔라.”

“예. 목숨을 다해서.”

녹풍  호는 요대에 손을가져가 가죽주머니 하나와 죽통 하나를 쥐었다. 주머니의 주둥이가 아래로 보라색의 제독분을 쏟아내고, 죽통에선 맑은 색의 액체가 또르르 흘렀다. 그러자 바닥에 떨어진 제독분은 폭발적으로 몸집을 불리며 온몸으로 피안향의 독연을 젖혔다. 그는 다 쓴 죽통을 신경질적으로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은은 두 배로, 원은  배로가 이번 가주님께서 제창하신 가훈 중 하나였지.”


데구르르 굴러가는 죽통소리가 그들의 마지막 인내심을 끊어버렸다.

“좀 과거로 돌아갈 필요가 있겠어.”


그들은 강제로 밀려나가는 독연을 향해 걸었다. 이 층으로 향하는 넓은 계단이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계단을 따라 점차이빙각의 위로 향하고 있었다. 계단에서 긴장하던 두 마교도가 녹색의 모습으로 투영된 분노들을 보며 황급히 검을 겨눴다.

“저 독연을 어떻게…?”

“분명 그 놈이 넘어오지 못할 거라고 했는데?”

카아앙!

길게 뿜어지는 철 울리는 소리. 반개한 백서희의 눈이 그들을 훑었다. 평소엔 무심한 태도로 세상을 바라보던 그 눈에선, 경도된 이성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아미파의 가르침이 그들의 귀에 울렸다.

“벽사파마.”

“이, 이 년! 감히 신교의 행사를 방해…!”

“그 업, 피하지 말지어다.”

불길에 그을린 비단옷에 더운 피가 끼얹어졌다. 그녀는 왼손을 들어 뺨에 튄 피를 닦았다. 넋을 놓고 있는 맞은편의 마교도에게 눈을 돌렸다. 그저 소녀로 보이는 백서희에게 당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같잖은 계집이 어디서 잔재주를!”


그는 검을 쥔 손에 힘을 줬다. 내공이 그의 생각, 그의 호흡을 따라 피를 휘돈다. 근육이 그 내공을 그러모아 더욱 단단하고 질겨진다. 오른팔을 왼편으로 완전히 젖히고, 한 발짝 내딛으며 횡으로 길게 베었다. 군더더기 없이 말끔한 검술이었다. 그는 반으로갈라진 백서희의 시신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컥?”

고개가 들리지 않았다. 검기를 담아 위에서 아래로 그어 내린 검격이 그를 사선으로 갈라버리고, 바닥에 널브러뜨린 탓이었다. 백서희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깜빡였다.

누군가를 적극적으로 해하고픈 감정을 가져본 적 없었다. 그러나 지금, 머리는 달궈진 철과 같았고,  광경을 바라보는 감정은 한없이 차가운 눈송이와 같았다. 그의 목을 겨눴던 칼이 점차 옆으로 흘러내려가 그의 팔을 향해 있었다.


“컥, 하, 지마…!”

“하지 말라…. 그렇다면 너희는 왜 죄 없는 이들을 그토록 잔인하게 대했지? 너희는 되고, 나는  되는 건가?”

“제발….”

마교도는 피를 토하며 애원했다. 백서희가 겨눈 것은 비단 팔 뿐이 아니라 그녀가 그어둔 선이었다. 백서희는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다. 검을 내리긋는 순간. 그녀가 걷던 검을 향한 길은 이전과는 다른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는 것을. 그것을 인지하고도,그녀의 팔이 움직였다.

“크르륵….”

“흣…!”

“이런 잡졸에게 쏟을 시간이 없다.”


녹풍 이 호는 마교도의 숨통에 비수를 찔러 넣고, 몸을 일으켜 백서희를 바라봤다. 백서희는 그 눈길에 흠칫 놀라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녹풍대는 피에 젖은 계단을딛고 이 층에 올라섰다. 녹풍  호는 멍하니 자신의 검끝을 바라보던 백서희를 불렀다.


“철혜검봉.”

“…예?”

“안내를 하도록.”


백서희는 그의 부름에 정신을 차리고 그들을 돌아봤다. 그들의 눈엔 다른 길 따위는 없었다. 당가의 혈족을 해한 자들에게, 마땅한 그들의 대답을 들려주겠다는 생각 뿐. 그리고 자신을 위해, 자신의 제안을 받아 이곳으로 향해준 당소소가 그들의 품에 안겨있었다.

백서희는 검을 고쳐 쥐었다. 그의  대로였다. 그녀는 다른 곳으로 향할 시간이 없었다. 그녀가 앞으로 가는 길이  그들의 길이고,그들이 원하는 것이 곧 그녀의 길이었으니까. 백서희는 이 층의 복도에 들어섰다. 둥그렇게 기둥을 둘러싼 회랑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아래엔 독액을 품은 물결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백서희는 손가락을들어 기둥의 위쪽을 가리켰다.


“이 층은 제방을 보수하기 위한 기자재들을 보관하는 창고입니다. 제방의 수문을 개방하는 장치는 이 기둥 끝, 삼 층에 있어요.”

“그렇군. 가지.”

그들은 다시 발걸음을 뗐다. 허나, 곧 멈출 수밖에 없었다.  층의 입구에서 있었던 작은 소란이, 대기 중이던 마교도들을 불러 모은 탓이었다. 백서희는 앞, 뒤, 계단의 아래에서부터 밀고 들어오는 그들에게 검을 겨누며 녹풍대와 등을 맞댔다.


“계단은 앞으로 쭉 나아가면 도착할거에요.”

“적이 많군.”


녹풍  호가 나지막이 말했다. 녹풍대원들은  말을 듣고 웃음을 보였다. 그는 나지막이 말하며 죽통을 던졌다.

“입을 막아라.”

카득!

죽통에 비수가 꽂혔다. 부글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며 독액이 균열 밖으로뛰쳐나왔다. 독액은 곧바로 자연지기와 반응해 그 몸집을 폭발적으로 불려나갔다. 녹풍대에게 내밀어진 마교도들의 검과 그들 사이에 거대한 영역이 깔렸다.

“한 다경 정도 지속될 것이다. 꿰뚫도록.”

백서희는 지체없이 검을 들어올렸다. 금색의 검기가, 바람이, 그녀의 열망을 휘감고 검 위에 내려앉았다.

쿠우우!

풍종적멸의 검격이 거칠게 내리꽂혔다. 전방의 포위진이 손으로 짓누른 듯, 풍종적멸의 검격에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리고녹풍대가 물안개처럼 번져나가는 독무 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백서희도 신망금광보의 움직임을 취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이 괘씸한 년!”


자신에게로 뻗어오는 백서희를 향해 내리찍는 두터운 도. 그는 득의가 번들거리는 미소를 지으며 더욱 힘을 주어 도를 아래로 그었다.

으득!

독무에서 튀어나온 손이 도를 내리치는 마교도의 눈을 찔렀다. 피를 쏟아내는 눈. 백서희는 가볍게 참격을 피하며 그를 베어 넘겼다. 그리고 그녀를 중심으로 독무는 영역을 넓혀나가기 시작했다. 녹풍대는 그 독무 안에서 몸을 숨겼다.

“으아악!”

“헉, 헉!”

“팔을 잡히지 마라!”

천천히 나아가며 적을 독무 안으로 끌어당겼다.  모습이 마치, 늪에 몸을 담군 이들이 다른 이들을 끌어당기는 모습같기에 붙여진 이름.

당문진법[唐門陣法], 독소나포진[毒沼拿捕陣].

뚜둑!

마교도들이 독무 안에 잠기자, 비명과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악, 으악! 팔, 내 팔!”

“살, 살려…!”

“쿨럭, 쿨럭!”


검기상인의 경지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은, 그저 삼켜질 뿐이었다. 백서희는 그 광경을 보며 바닥을 박차고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인파의 물결 속, 상아색 옷을 입고 마교도들을 지휘 중인 인물을 발견했다.

“끝이야!”

그녀는 그렇게 소리치며 몸을휘돌리며 착지했다. 형형하게 일어나는 금색의 검기에, 그 누구도 감히 그녀를 제지하려들지 않았다. 구부린 몸을 천천히 일으키며, 검을 위협적으로 한번 내리긋는다.

스륵.

비단을 쓸어내리는 듯한 부드러운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결과는 부드럽지 않았다. 바닥을 두부처럼 잘라내고 난간을 무너뜨리며 네 명의 마교도가 물 아래로 떨어졌다. 인파가 공포에 의해 갈라지고, 지휘자와 그녀 사이는 이제 아무것도 없었다.

그 사이를, 백서희의 발걸음이 좁혀갔다.

“너는….”


상아색의 옷을 입은 마교도가 백서희를 발견하고 웃었다. 그리고 손을 튕겨 소리를 냈다. 그러자, 마교도 둘이 백능상단의 옷을 입고 있는 사내를 끌고 나와 무릎을 꿇렸다. 백서희의 걸음이 멈췄다.

“…시인, 당신이 왜 여기에 있죠?”

“면목없습니다.”


시인이라 불린 사내는 고개를 푹 숙여 백서희에게서 엉망이 된 얼굴을 가렸다. 백서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백능상가의 안위를, 도강언의 방위를 책임져야할 당신이….”

“임무를 다하지 못한 점, 정말 죄송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강함은 제 능력 밖이었습니다.”

시인은 분한  어깨를 들썩였다. 지휘자는 그의 목에 검을 드리웠다.


“살리고자한다면, 검기를 거둬라.”

“…….”

“인정하지. 이런 오합지졸들로 너와 당가의 정예를 막을  없다. 요마님이 시술하고 가신 천요만악행이 아니었다면, 이미 통제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니.”


백서희는 그의 말에 시인을 붙잡고 있는  마교도의 눈을 바라봤다. 이완된 동공은 그의 넋이 정상이 아님을 알려주고 있었다. 지휘자는 검을 조금 당겨 시인의 목에 생채기를 냈다.

“하지만  요마님은 당가의 독무후를 척살하고, 사천에서의 대업을 완성시키신다. 그때까지만 침묵해줬으면 좋겠어.”

“네 뜻대로 하게 둘 성 싶으냐?”


백서희가 발작적으로 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검은 좀 더 깊이 파고들었다. 지휘자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살짝 돌려 그녀를 흘겨봤다.


“아미파의 공명정대한 후기지수라더니, 인명을 그리 파리처럼여겨서야 쓰겠나. 그렇다면 자네들이 마교라 일컫는 우리와 무엇이 다른가?”

“…칫.”


발걸음을  내밀 순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검기를 거둘 수도 없었다. 이 교착상태를 유지하는 것도 안 된다. 되도록 빨리 수문을 열어야   피해를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차마 서로 움직이지 못하고 눈빛을 쏘아내는 동안, 독무는 점점 그들에게 가까워져갔다.

*

“으음….”

“일어나셨군요, 아가씨. 다행입니다.”


당소소는 인상을 찌푸리며 눈을 떴다. 자신의 입에 씌워진 복면이 답답했다. 몸은 흠씬 두들긴 듯, 찌뿌둥하기 그지없었다. 현기증으로 흐릿한 시야사이로 막내라 불리던 녹풍대원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는 피에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팔을 바라보다, 자신이 녹풍대원의손에 안겨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녀의 정신으론 버틸 수 없는 일이었다.

“저기, 혹시 내려주시면….”

우드득! 털썩!

독무 안에서 피를 토하던 마교도가 목이 꺾이고, 그녀의 앞에 늘어졌다. 당소소는 그 시신을 바라봤다. 녹풍대원은 당소소에게 물었다.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아니에요.”


극한 상황이었다. 얌전히 보호받는 것이 그들에게 더 도움되는 행위일 것이었다. 당소소는 전생에 쌓아뒀던 성별의 존엄을 포기하고, 전황을 살폈다. 흐릿한 독무였으나, 녹풍대원이 당소소의 행동을 눈치 채고 시야 맑은 곳으로 인도해줬다.

천요만악행의 최면에 젖어 녹풍대를 막아서는 마교도들과, 그 최면술을 지휘하고 있는 상아색 옷을 입은 환유요가의 환요대원. 그리고 그들과 대치하고 있는 백서희. 그리고 그녀가 바라보는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

그들의 목소리가 전장을 지나당소소의 귓가에 들렸다.

“…시인, 당신이 왜 여기 있죠?”

“면목없습니다.”


당소소는 그들의 이야기에 잠시 당황해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슬며시 웃었다.


“아하.”


한 사건이 찾아왔다. 그리고, 한 소녀가 그 사건을 깨우쳤다. 일말의 침묵 끝에, 당소소가 입을 열었다.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녹풍 십 삼호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녹풍 십 삼호.”

“예.”

“우선 절 내려놓으세요.”

녹풍 십 삼호는 당소소를 내려놓았다. 당소소의 시선은 시인을 인질로 잡은 환요대원의 시선에서 떠나질 않았다. 녹풍 십 삼호가물었다.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연유가 무엇입니까?”

“적에게 암기를 던져주세요.”


당소소의 명령에 녹풍  삼호는 그녀의 시선이 위치한 곳을 훑었다.

“지휘자를 노려 혼선을 주려고 하시는 겁니까?”

“아니요.”

당소소는 그의 말을 부정했다.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을 떠올렸다. 하나의 사건에서 전체를, 이면을  수 있는 시야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말.

“목표는.”


당소소는 지휘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천천히그 손가락을 사선으로 떨어뜨렸다.

“시인.”


드디어, 당소소에게 이 의혹투성이 뿐인 사건의 전말이 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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