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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화 〉십칠장[十七章], 성하유랑[星下流浪] 13 (117/130)



〈 117화 〉십칠장[十七章], 성하유랑[星下流浪] 13

나른한 정신이 또렷해졌다. 배에 박힌 나무토막은 여전히 쓰렸다. 그 위에 더해진 자상은 더욱 쓰라렸다. 흐릿한 정신은 상처들의 고통으로 점차 선명해졌다. 그는, 자신이단혼사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을 생각해낼 수 있었다.


‘여긴 어디지. 뭘 하는 중이지.’


전신을 긁어대는 고통에 익숙해졌다. 고개를 들어 핏빛 시야로 주변을 훑었다. 독각혈가의 옷을 입은 당혁이 당소소에게 다가가고 있었다. 눈동자를 조금 돌리자 산발이 된 머리칼에가려진 비단옷의 사내가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자신이 기억하는 바가 맞다면, 저 생김새의 사내는 백진오일 것이다.


“…아.”

짧은 탄성. 의식과 기억이 밀려왔다. 의원으로 향한다며 자신에게 칼을 찔러넣은 묵객과 그 칼을 맞고 기진맥진해 별다른저항도 하지 못한 채 무너졌음을 깨달았다. 손가락이 꿈틀거렸다. 당장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나 독각혈가의 옷을 입은 당혁과 묵객의 머리통을 부수고 싶었다.

‘…급할 필요는 없지. 이미 늦었으니.’

입안에 고인 핏물을 삼키고 상황을 정리했다. 도주했던 당혁이 이곳에 있고, 그 곁에 묵객과 시인이 서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소소와 녹풍대를 겨누고 있었다. 이내 단혼사는 묵객이 말하던 계약자가 눈앞의 백진오가 아닌, 저 먼 천산의 천마라는 사실을 어렵잖게 짐작해낼 수 있었다.

‘모두  주군의 죽음에서 벗어난  알았더니만.’


그들과 얽혔던 과거를 떠올렸다. 천외십강이라 불리며 천하를 주유하던 낭인왕과, 그들을 따르던 무리들. 그리고  중, 왕하삼랑[王下三狼]이라 불리던  사람. 모인 곳은 같았으나, 흩어진 곳은 같지 않았다. 그래도 서로를 동료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젠 의미 없는 과거. 고려할 가치는 없다.’


단혼사는 조심스레 적의 동태를 살폈다. 묵객은 전장 전체를 관망하고 있었고, 시인은 녹풍 삼호에게 모든 정신을 쏟고 있었다. 당혁 또한, 당소소와 녹풍 이호에게 온 정신을 집중하고 있는 것은 마찬가지. 단혼사는 앞을 보며 낮게 뇌까렸다.


“살아있는 것 같군.”

“…….”

“아니, 어깨에 박힌 비수를 보아하니 곧 죽을 사람인가.”

“손익을…. 계산하고 있었을 뿐이오.”

백진오가 움찔거렸다. 작은 목소리가 단혼사의 물음에 답을 전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며 웃었다.

“이거, 서로의 꼴이 말이 아니구려.”

“그래서,  손해는 어찌 메울생각인가?”

백진오는 피에 젖은 머리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손해, 손해라…. 뭐, 일단은 손해라고 하지요. 그래서, 의뢰했던 일은 완수되었습니까?”

단혼사는 백진오의 말에 그의 의뢰를 떠올렸다. 백능상단을 방위하는 무사들이 자취를 감추거나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는 말. 평소 섭섭잖게 배에 금을 발라줬던 관리들이 응답하지 않는 것. 백진오는 일련의 사건에서 곧장 이변을 느끼고 도강언 안에서 대기하고 있던 자신을 찾았다.

-이상한 곳에서 보자고 했군.

-변수가 생겼습니다. 당가의 손을 빌려야겠군요.

-예로부터 당가는 지독한 고리대금업체로 유명한데. 괜찮겠나?

-그만큼 믿을 만한 곳이라는 말로 알아듣겠습니다.

백진오는 농담에 웃음으로 답할 수 없었다.

-백능상단의 무사들이 싸우기도 전에 모습을 감췄고, 사천의 수원지를 침략당해 곧장 달려와야 할 관군도 소식이 없습니다. 제가 예측할  있는 변수 이상의 것이 나왔으니, 저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용건은?

단혼사는 그 대화를 곱씹으며 실소를 지었다.


“자네도 참 과격하군. 백능상단의 본가에 화약을 매장해놓다니.”

“완수되었나 보군요.”

백진오는힘 빠진 웃음을 지으며 손을 떨었다. 그는 비록 대국을 보진 못했으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가 아니었다. 서둘러 단혼사에게 접촉해 가주실의 비밀통로를 알려줘 피난을 유도하게 하고, 백능상단의 본가를 통째로 불살라버려 적의 수탈을 막고, 침략의 요충지가 되는 것을 막았다.

“…처음부터 손을 잡지 않은  어리석다고 생각하십니까?”

“어차피 선택의 책임은 자네의 것이네. 그리고…. 돌아가는 꼴을 보아하니 처음부터 당가와 협력했어도 그리 좋은 상황으로 흘러갔을 것 같진 않군.”

단혼사의 아닌 듯한 위로에 백진오는 고개를 떨궜다.


“그렇기에 이 사건은 제 손에서 끝내는 겁니다. 이 정도 선에서 끊는다면. 당장의 손해는 미래의 이득으로 돌아오겠지요.”

“이득?”

“예.”

그는 어깨를 들썩였다. 건조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바둑은  둘 줄 아십니까?”

“갑자기?”

“대마불사[大馬不死]. 여러 돌이 뭉쳐 거대한 덩어리가된 대마는 그 활로가 무궁해 쉬이 죽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한데, 역으로 생각해보십시오.”

백진오가 말했다.


“대마가 죽으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백능상단이 대마라는 이야기를 하려는 게군.”

“촉금을 취급하던상단의 멸문, 수많은 인원을 먹여 살리던 집단의 공백. 금품을 받고 시치미를 떼는 관리의 부정들이 수면 위로 올라오겠지요. 백능상단이 무너지면 사천성은 혼란에 빠질겁니다.”

“그렇기에 자네들을 죽일  없다….”

“설령 죽더라도, 곧 비단길로 원정을 나섰던 상단주와 간부들이 돌아올 겁니다. 손해로 말미암아 더 큰 배상을 청구할 것이고, 백능상단은 더 큰 권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단혼사는 한숨을 쉬었다.

“그럼 자네는?”

“제 목숨값과 얻게 될 권리를 저울질한다면, 사천성을 전전하던 백능상단이 전국구로 진출하는 것이 더 큰….”

“목숨은 재화와 저울질할  없네. 한번 데이고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단혼사는 끓어오르는 피가래를 뱉으며 말을 이어갔다.


“쿨럭, 독이 슬슬 도는군.”

“그륵….”


백진오 또한 몸의 이변을 느끼며 피를 삼켰다.

“잘 듣게. 우리가 잡혀있는 한,  상황을 타개할 수가 없네.”

“동의, 합니다….”


단혼사는 부들거리는 손으로 비수를 움켜쥐며 말했다.

“다행스럽게도 당혁은 독각혈가의 독이 아닌, 당문의 독을 사용했네. 그리고 그 덕에 난 이 독이 무엇인지 알고 있지.”

“그렇다는 말씀은….”

푸슉.

짧은 피륙음이 들려왔다. 단혼사는 어깨에 박힌 비수를 뽑아 오른손에 움켜쥐고, 그 손으로 책상을 짚었다. 백진오의 시선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단혼사에게 닿는다.


“해독제는 자네의 것이네.”

“…예?”

단혼사가 비틀거리자, 묵객의 시선이 곧바로 따라 들어왔다. 단혼사는 자신을 바라보는 묵객에게 웃어줬다.


“간단한 문제였어. 둘 중 하나가 살아야한다면, 누가 살아야 득이 되는지.”

“…….”

“답은 자네도 알고 있지 않은가?”

백진오는 그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고문의 흔적이 역력한 얼굴을 들어 단혼사의 모습을 지켜볼 뿐. 그의 옆으로 묵객이 지나친다. 책상을 넘어, 단혼사의 옆에 섰다.

“영감, 앉아있으시오.”

“검랑.”

“내가 묵객이라고 부르라하지 않았소?”

스릉.

서늘한 소리와 스산한 예기가 단혼사의 목을 겨눴다. 단혼사는 거무죽죽한 피를 뱉은 뒤 고개를 저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이제 와서 낭인에게 어떤 인정이나 정의를 바랄 생각은 없다.”

“영감을 살려준 것도 나름 인정을 베푼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저벅.

단혼사의 걸음은 검날을 피해 다시  번 뒤로 물러섰다. 바짝 다가오는 검. 그는 검날을 피해 턱을 들어올렸다.


“나도 이 이상 영감을 궁지에 몰기 싫소. 그저 앉아있기만 하시오.”

“이 사람아.”


단혼사는 치켜든 고개로 묵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금전을 챙기려거든 금전을 챙기고, 복수를 원하거든 복수를 행하게.”

“…앉으라 했소.”

“언제까지 그런 애매한 태도를 견지할 생각인가.”

묵객은 단혼사의 말에 더욱 검날을 가까이 댔다. 단혼사는 하릴없이 뒤로 한 번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그의 허리에 큰 창가의 난간이 걸렸다. 뒤를 돌아보니, 아래엔 끝을 알 수 없는 깊은 물길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자네는 옛 주군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했지. 아마 마교의 돈을 받은 이유도 궁랑의 제안이었을 것이고.”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오?”

“알고 싶지 않은가? 진짜 이야기를.”

단혼사는 손을 들어 귀를 가까이 대라는 손짓을 했다. 묵객의 눈썹이 움찔거린다. 하지만, 이내 점점 다가온다. 암습을 고려하더라도, 그는 더 이상 전투를 할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묵객의 고개가 다가왔다. 단혼사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

“…….”


말을 던지자 눈빛이 되돌아온다. 눈빛을 받은 이는 담담했고, 말을 받은 이는 동요했다. 단혼사는 비수를 쥐지 않은 손을 들어올렸다. 검지와 약지를 펼친 뒤, 묵객 너머에 있는 녹풍 이 호를 바라봤다.

팟!

피가 묻어있던 비수가 단혼사의 손을 떠났다. 비수는 철판을 때리는 소리를 내며 당혁의 등에 튕기고 바닥을 나뒹굴었다. 당혁의 시선, 그와 상대하는 녹풍이호의 시선. 거기에 망연자실한 얼굴로 녹풍 십삼호의 주검을 끌어안고 있던 당소소의 시선까지 모두 단혼사에게 집중되었다.

“그럼, 나중에 봄세. 검랑.”

단혼사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검광은 단혼사를 사선으로 길게 찢었다.

“안 돼.”


말라비틀어진 당소소의 목소리가 들렸다. 약간의 피가 묵객의 상처투성이인 얼굴을 덮었다. 단혼사의 몸은 균형을 잃고 난간으로 기울어졌다. 미치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그럼에도 아쉬움으로, 안타까움으로, 절망으로헛된 손을 내밀었다.

“안 돼….”

옷자락이 쓸리는 소리와 함께, 피투성이의 단혼사는 바깥으로 떨어졌다. 그의 몸은, 게걸스러운 격류가 먹어치워 자취조차 찾을  없었다. 묵객은 잠시 아래를 바라보더니, 검을 내리쳐 피를 털어내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일련의 과정은 마치, 마땅히 그래야 한다는 듯 너무나도도식적이었다.

“…….”


당소소의 손이 떨어졌다. 녹풍 이호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당혁은 더욱 거리를 좁혀왔다. 이젠 지척에 있는웃음소리가 그녀의 몸, 마음, 감정, 정신, 뼈, 근육, 핏줄을 긁어댔다.

“크흐흐. 해독제는 철혜검봉의 손으로 돌아갔구나, 소소야.”

“아, 아….”

“어찌보면 네 손으로 죽이지 않아도 됐으니, 다행 아니냐!”

“으, 우으….”


그 말에 대꾸라도 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나오는것은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언어마저 짓눌러놓은 비명 같은 무언가였다.

“그리 고통스러워하지 말거라.  오라비가 예전부터 약속은  지키지 않았느냐? 네가 독을 먹는다면, 다른 이들은 살려준다고 했었고. 그러한 약조를 한 번이라도 어긴 적이 있더냐?”

당혁은 품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내 묵객에게 던졌다. 묵객은  호리병을 받아들고 백진오에게 먹였다. 당혁은 그 모습을 보며 조소를 머금었다. 애초부터 당혁은 백진오를 죽일 생각이 없었으니까. 백진오에게서 백능상단의 금고를 손에 넣었어야 했으니까. 당혁은 멍한 당소소의 눈길에 딱딱한 웃음을 던져주며 말했다.


“이렇게 운명이었다. 넌 애초부터 나의 소중한 장난감일 뿐이었다. 난 당가의 미래고, 독공의 신기원을 개척한 종주란 말이다. 독천? 정파의 오대세가? 그런 덜떨어진 명예에 집착해서….”

슈슛!

녹풍 이호가 철사로 당혁의 목을휘감았다. 철사로 만든 올가미가 단단히 걸리자 그대로 잡아당겼다.그러나 철사가 잔뜩 긴장하며 팽팽한 제 몸을 떨어댔지만, 그의 목에는 생채기 하나 나질 않았다. 팅, 하는 소리와 함께 철사가 끊어지고 녹풍 이호의 균형이 잠시 틀어졌다. 당혁은 그 모습을 보며 웃었다.

“이렇게 진보가 없는 것이다.”

“컥!”

녹풍 이호의 배에 주먹이 틀어박혔다. 독으로 정련한 강시의 몸은 인간의 피륙으로 버티기엔 너무 굳센 것이었다. 팔을 비틀어내려  주먹을 막았다. 살점이 터져나가고 뼈가 으깨지는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팔을 내주고 몸을 짓뭉개는 선에서도 모자라, 녹풍 이호의 몸이 벽으로 날아들어 처박혔다.


“소소야.”


당혁은 녹풍 이호를 날려 보낸 팔을  차례  뒤, 그 손으로 당소소의 턱을 잡아 끌어올렸다. 풀린 동공과 범벅이 된 감정으로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얼굴이 보였다. 당혁은 그 표정에 가슴을 찌릿하게 하는 감정을 느꼈다. 예나지금이나 한 점의 유리처럼 고귀해보이고, 파괴욕구를 자극하는 얼굴이었다.


“예전처럼  오라비를 따르거라.  주제는 바로 그것이야.”


끈적한 시선이 그녀를 훑었다.


“내공이있다고 하였느냐?”

턱을 움켜쥔 손은 이내 그녀의 뺨을훑었다.

“더욱 좋다. 너로 말미암아, 천대받던 독공은  누구도 무시하지 못하고 보지도 못하는 천하의 보검이 될 것이다. 허울뿐인 명예로  몸을 치장하던 당가는 진실로 강해질 것이다.”

“…….”

“네 운명이 그런 것이다.  동생아.  무공을 익혀도, 학식을 쌓아도 결국 그 어떤 이도 뛰어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잖느냐?”


당혁은 당소소의 뺨을 움켜쥐던 손을 놓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당소소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길게. 아주,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하아….”


언제나 함께해오던 무기력은 익숙한 움직임으로 당소소의 몸을 휘감았다.

저항할 없어. 받아들이는 편이 편해. 다른 사람들을 죽일 거야?

패배에 익숙한 감정은 서둘러 이성을 눕혔다.보듬고, 쓰다듬었다.  그래왔으니까, 라고 속삭이며.

당소소는 웃었다.

“그러니까 오빠라고 불러야 하나요, 아니면, 오라버니라고 불러야하나요.”

“기억을 잃기 전, 넌 나를 당혁 오라버니라불렀었지.”

당혁도 웃었다.


“당혁 오라버니.”


자신의 입으로 담는 오라버니라는 단어는 소름이 돋았다. 그 소름이, 눈을 감아가던 이성을 일깨웠다. 당소소는 웃는 낯을들어 당혁을 바라봤다. 증오스럽고, 똑바로 처다볼 수 조차 없는 얼굴이 당소소의 정신에 인두질을 하는 것 같았다. 그렇기에 선을 그었다. 스승이 알려준 대로, 감정이 자신에게서 뛰쳐나가지 못하게 넓고 길게 선을 그었다.

“뭐든지 할 게요.”

그렇기에 당소소는 웃고 있음에도 웃지 않았다.

“살려주세요.”

당소소는 울고 있었다.

당혁은 그 눈물에 더욱 활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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