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20화 〉종장[終章], 괄목혈봉[刮目血鳳] 1 (120/130)



〈 120화 〉종장[終章], 괄목혈봉[刮目血鳳] 1

상아색 장포를 벗어던지는 사내가 푸른 눈을 빛내며 제방으로 향하는 발길을 옮겼다. 곁에 있던 달라붙는 회색 옷을 입은 여인이 그에게 말했다.


“소교주님.”

“말해라, 요재.”

“인기척입니다.”


요재의 시선이 향한 곳으로 사마문의 눈이 따라갔다. 상처투성이의 얼굴을 한 사내가 노인 하나를 들쳐 업고 강가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저 자는….”

“이번 환란을 위해 고용한 낭인  하나인 묵객일겁니다. 듣기로는 부교주 장패군 쪽의 인물이라고.”

“그런 자가  전장에 있지 않고,  곳에 모습을 보이고 있지?”

“가서 자초지종을 추궁해보겠습니다.”

요재가 묵객에게 가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그 앞을 웃는 상의 청년이 막아섰다. 봉두난발의 머리칼과그와는 상반되는 단정한 옷차림이 괴리감을 자아냈다. 요재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광귀. 요즘 너 답지 않게 꽤 적극적인데.”

“간단한 일이잖아?”

광귀의 능청에 요재는 한마디 쏘아붙이려다가도 사마문의 시선을 의식했다. 탐탁찮은 헛기침을 한 후, 사마문에게 말했다.

“그럼 이 곳은 광귀에게 맡기고, 소교주님께선 먼저 저 전각으로 향하시는 것이 옳은 듯합니다.”

“삐진 거야?”

“…….”

째릿한 시선이 광귀에게 꽂혔다. 광귀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 시선을 흘리고, 묵객에게로 향할 뿐이었다. 사마문은 그들의 행동을 지켜보다, 심드렁한 말투로 발길을 재촉했다.


“가지.”

“…예.”


사마문과 요재가 이빙각 쪽으로 멀어지자, 광귀는 웃음을 지우고 묵객에게로 다가갔다.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하고 있는 묵객은 인기척을 느끼고 자리에 섰다.

“…어느 귀인이시오?”

“단혼사는 살아있나?”

묵객의 앞에 선 광귀는 대뜸 물음을 던졌다. 묵객은 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뒤로 물러서며 그를 경계했다. 단정한 옷과, 그렇지 못한 머리카락이 기이한 위기감을 자아냈다.

“살아 있소. 곧 죽겠지만.”

“…….”

광귀가 알  없는 눈빛을 하며 축 늘어진 단혼사를 바라봤다. 묵객은 경계를 늦추지 않고 그에게 물었다.


“이유를 묻지 않으시오?”

“무엇을?”

“왜 적을 살려서 끌고 왔는지 말이오.”

광귀는 검은색의 손톱으로 턱을 긁적이며 고개를 기울였다.


“생각중이야.”

“기왕이면, 좋은 쪽으로 결론이 났으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안 될 것 같군.”

묵객은 단혼사를 내려놓고 검을 뽑았다. 광귀는고개를 저으며 더 가까이 다가갔다.


“생각 중이라고 했잖아.”

“……!”

그저 한 걸음을 걸었을 뿐인데 광귀는 묵객의 지척에 서있었다. 뒤늦게 그의 접근에 반응한 묵객은 반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소리없는 검격이 광귀의 목을 향해 튀어나갔다.

콰득!

철이 우그러지는 소리와 함께 광귀의 손아귀에 묵객의 검이 잡혔다. 광귀는 혀를 차며 검을빼앗아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쯧, 죽일 가치조차 느껴지질 않는군.”

“…그거 다행이구려.”

“그를이리 내놔라. 살려주도록 하지.”


묵객의 경계가더 짙어진다. 광귀는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죽여 버리기 전에, 말을 듣는 것이 좋을 거야.”

“대체  당신이 적에게 그런 수고를 하는것이오?”

“일단….”


광귀는 옆으로 비켜선 묵객을 지나치며 단혼사를 들쳐 업었다.

“흥미가 가는 장난감이라고 해두지.”


*

이빙각의 전황은 급속도로 바뀌었다. 마교도들이 믿는 구석이었던 당혁이 쓰러지고, 묵객이 자리를 비웠다. 시인이 전투에 합류했다곤 하나, 백서희를 몰아세우는 것이 고작이었다. 모든 녹풍대원들까지 막아서는 것은 무리였다.

“적은 고작 여덟이다! 숫자로 밀어서 죽여 버리면 그만이야!”


지휘자가 발악하며 소리쳤지만, 녹풍대는 강했다. 모든 암기를 한 곳에 몰아주고, 모든 독을 도강언의 안정화를위해 사용했지만 그들은 강했다. 하나하나가 일류고수의 반열에  그들은, 맨손으로 마교도의 사지를 비틀어재끼며 삼 층으로의 접근을 불허하고 있었다.

“팔, 팔이…!”

“이건 개죽음이야. 물러나야….”

“씨발, 도망갈 거야! 비키라고!”


반 시진이 지나도록  층은커녕 그 바로 앞의 계단에 발을 디딘 이는 없었다. 대신 사지가 부러진 이들만 속출할 뿐. 그렇기에, 그들 머리에 얕게 걸어두었던 요마의 암시가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시인. 무기를 버려.”

“…….”

백서희가 거친 숨을 내쉬며 시인에게 검을 겨눴다. 각궁을 움켜쥔 시인은 전황을 살폈다. 마교도들의 기세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가 참전해서 때마다 시의적절한 화살을 꽂아준다면, 녹풍대를 뚫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앞에 있는 전 계약자가 허가를 내어주지 않고 있었다.

“네 계획이 무엇이든, 이미 끝났어. 귀찮게 굴지 말고 어서 항복해.”

“계획이라. 정말 계획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아가씨?”


시인은 각궁에 화살을 걸고 잡아당겼다. 백서희는 서둘러 신망금광보를 펼쳐 시인에게로 날아갔다.

땅!

화살이 천장에 박히고, 검이 사납게 울었다. 백서희는 신음을 삼키며 보법을 거뒀다.

“크읏….”

“제게 삶을 주신 은인이 있습니다. 그 은인이 수많은 중상모략을 뒤집어쓰고, 모든 것을 짊어진  숨을 거뒀죠.”

화살이 걸리고, 시위가 당겨졌다.

“전 계획을 한 적이 없습니다. 오직 복수를 위해서 지성 없이 움직이고 있는 것일 뿐. 복수를 이룰 수 있다면, 마신에게 귀의하는 것 정도야.”

“우리는 그럼 무슨 죄가 있기에, 이런 식으로 복수를 행하는거야….”

“말했잖습니까? 지성 없이 움직이고 있다고.”

피슛!

바람을 찢는 소리가 들렸다. 백서희는 모든 힘을 긁어모아 검을 올려쳤다. 철판을 때리는 소리가 들리며, 그녀의 손아귀가 터졌다. 백서희는 눈을 질끈 감으며 검을 놓았다. 피투성이가 된 손바닥이 무척이나 쓰라렸다.


“으윽.”

“그럼….”


시인이 다시 화살을 매겼다. 늘어나는 시위. 모든 힘을 쏟아 움직일 수가 없는 백서희를 겨눴다. 그는 시위를 놓았다.

팅!

살을 찢는 소리 대신, 줄이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활시위의 가운데가 끊어지며 시인의 뺨을 길게 찢었다. 화끈한 통증에 시인은 뺨을 가리고 뒤를 돌아봤다.

“어딜, 가려고….”

녹풍 삼호가 화살을 부러뜨리며 비수를 겨누고 있었다. 시인은 시위가 끊어진 활로 시선을 옮겼다.


“…아쉽군.”

시인은 활을 바닥에 내려놓으며 뇌까렸다. 그리고 순간적으로 몸을 천장으로 날렸다. 비수가 그의 뒤를 바로 쫓아왔다. 시인은 손으로 천장을 짚은 뒤, 그대로 밀어내며 난간으로 쏘아졌다. 녹풍 삼호가 재빨리 그의 동선으로 비수를 던졌으나 상처 입은 몸으로 던지는 비수는 그의 겉옷만을 스칠 뿐이었다.

묵객이 단혼사를 벤 난간에 시인은, 약간의 핏방울을 바라보며 웃었다.


“살아있군, 영감.”

“거기섯!”


백서희가 떨림이 가시지 않은 손으로 검을 부여잡고 뛰어오고 있었다. 시인은 난간을 밟고 그 위에 서며 말했다.

“안녕히 가시길.”

“서라고!”


시인이 작별인사를 건네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가 사라지자, 백서희는 검을 떨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아쉽지만, 그래도 끝났어. 이제 수문을 개방하면 끝이야.’

안심하며 숨을 고르던 그녀는 문득, 시인이 던졌던 말을 떠올렸다.

‘안녕히, 가시길…?’


그 의문을 비집고 나오는 음성이 그녀의 등골을 훑었다.


“쯧, 이 덜 떨어진 머저리가.”

“헉….”

등골을 타고 흐르는 소름에 백서희는 차마 고개를  수가 없었다. 하지만, 위기를 제대로 인지하기 위해선 고개를 들어야 했다. 그녀의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돼있는 목소리였으니까.

올라가는 시선을 따라 목소리의 주인이 보였다. 상아색의 장포자락이 바닥에 쓸렸다. 약간 묻어있는 물기로 보아, 창문을 통해 들어온 듯 했다. 검을 쥔 한 손과, 허전해진 다른 소매가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변주객잔의 혈사를 지휘했던 그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요마….”

“천요만악행의 암시가 풀어지기에 와봤더니, 잘도 저질러놨군.”

요마, 장패군이었다. 그는 검의 끝으로 당혁을 쿡쿡 찌르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겁을 집어먹은 백서희에게 말했다.

“움직이지 마라.”

“힉….”


마치 언령과도 같은 엄포에 백서희는 숨을 삼켰다. 구주십이천 급 고수의 살기에 적나라하게 노출되자, 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장패군은 고개를 돌린 뒤, 칼끝을 돌려 쓰러진 당소소에게 겨눴다.

“본래라면 살려서 마귀의 고삐로써 쓰기로 하였지만….”

검이 점점 위로 올라갔다. 살기에 짓눌린 백서희는 작은 목소리로 부정하는 것 밖에 할  있는 것이 없었다.


“안 돼….”

“위험한 계집이군. 여기서 끊어주도록 하마.”

쉬익!

요마의 어깨 위로 솟은 검은, 그대로 당소소의 목을 향해 쏘아졌다. 건들거리는 음성이 들려왔다.


“오랜만이군. 부교주.”

“소교주님.”

“날 신교에 보내놓고, 꽤 발칙한일을 저지르려고 한 모양인데.”

검은  목소리에 가로막힌 듯, 당소소의 코앞에서 멈췄다. 요재를 거느리고 나타난 사내는, 천마신교의 소교주 사마문이었다. 그리고, 백서희가 잘 알고 있는 인물이기도했다.

“운류….”

“…….”

사마문이 고개를 돌려 백서희를 바라봤다. 장패군의 살기에 짓눌려있던 백서희는 호흡조차 하지 못해 서서히 쓰러지고있었다. 사마문은 검지를 입술에 가져갔다. 살기가 걷히고, 백서희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사마문은 손을 거두고장패군에게 다가가며 요재에게 명했다.


“녹풍대를 막아라.”

“예.”

요재가 녹풍대에게 향하자, 사마문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장패군을 바라봤다. 장패군은 조용히 그 눈을 바라보며 사마문이 내뱉을 말을 기다렸다.

‘항명이라며  죽일 생각인가? 뭐, 그럴 가능성도 없지 않겠지.’

절그럭소리를 내며 장패군이 쥔 검이 살짝 움직였다.

‘난 쉽게 죽어주지도 않을 뿐 더러, 설령 내가 죽는다고 한들 놈은 교내의 입지를 잃는다.’


움직임은 멎었다. 그가 판단하기에, 그리 큰 반향이 일어날 것 같진 않았다. 사마문은툴툴 웃으며 장패군에게 다가갔다.

“부교주.”

“예.”

“아니, 환유요가주.”

“…예.”

어느덧 사마문은 장패군의 앞에 섰다. 사마문은 잠시 상체를 숙여 손등으로 당소소의 뺨을 훑곤, 장패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왜이랬지?”

“교의 지시입니다.”

“그래? 독화를 죽이라는 것도?”

“…그것은제 개인적인 판단입니다. 후환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했기에.”


사마문은 장패군의 어깨에올린 손을 천천히 토닥인다. 기실, 둘의 관계는 상하관계가 아니었다. 엄밀히 따지자면, 소교주는 그저 교주의 후보일 뿐이었고부교주는 실질적인 천마신교의  종파를 담당하는 간부이자, 마도육가 중 환유요가의 수장이었으니 실질적으론 부교주가 더 큰 권한을 가지고 있는 셈이었다.


“내가 소교주의 자리를 포기하는 것을 원하나?”

“그렇진 않지요.”

“그런데 왜 날 자꾸 자극하지? 내가 환유요가와 척을 진다고 했었나?”

“아닙니다.”

그럼에도 장패군은 사마문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내 명을 어기면, 자신의 가문도 포기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알고 있는 자가. 항명을 했다….”

“충성이 너무 과했나봅니다.”

장패군은 쓰게 웃으며 검을 놓았다. 그가 교주가 되어야, 쇠락직전인 환유요가를 살릴 수 있었다. 그렇기에 다소 과한 행동을 했고, 교의 명을 더욱 적극적인 태도로 따랐다. 사마문은 어깨를 두드리던 손으로 그의 멱살을 쥐었다. 서로 덤덤한 태도로 시선을 맞췄다.

“마지막이야.”

“…….”

“다음 항명은 죽음이라는 것을 부디알아뒀으면 좋겠군.”

“계집에 집착하시는군요.”

사마문은 장패군의대꾸에 키득거렸다.

“너희가 명예에 집착하는데, 나라고 여인에 집착하지 않을 이유가 무엇이 있지?”

“그저 세상에 널리고 널린 계집일 뿐입니다. 교의 입지와는….”

“네 생각을 나에게 강요하는 건가?”

그 말에 장패군의 인상이 팍 일그러졌다. 여전히 제멋대로인 성격이었다.


‘그냥 내 말을 듣고 더 쉬운 길을 걸으면 될 것을…!’

“당장이라도 항명죄를 물어 널 죽이고 싶은데.”


사마문은 멱살을 놓았다.

“일단 보류하지. 네 놈을 죽이면 요재 또한 죽여야 할 테니까.”

“…감사합니다.”


사마문은 처량하게 누워있는 당소소를 바라보며 물었다.

“독마는 어디있지?”

“독무후와 일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장패군은 말을 끊고 사마문의 귀에 속삭였다.

“…완수했습니다.”

“그런가.”

사마문은 고개를 돌려 요재를 불렀다.


“요재.”

“예.”


요재는 자신에게 들러붙는 녹풍대를 뿌리치고 사마문의 곁으로 다가왔다. 사마문은 잠시 당소소를 내려다 본 뒤, 요재에게 말했다.


“본교로 돌아간다.”

“예, 소교주님.”

“그럼, 먼저 가서 마차를 준비해두겠습니다.”

장패군이 뒤로 한발을 디뎠다.그의 모습이 공간에 삼켜지듯 사라졌다. 사마문은 그 모습을 보며 실소를 지었다.

“도망가는 것 하난 귀신같군. 그래서 잡귀라 불리는 것인가. 그럼….”


사마문은 입맛을 다시며 당소소를 내려다봤다.

“잠시 이별이군.”

“…….”

“큭큭, 부디 예쁘게 컸으면 좋겠는걸.”

“소교주님.”


요재가 채근했다. 사마문은 당소소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교도들에게명한다. 철수하도록.”

“…….”

사마문이 낮게 뇌까렸다. 그러자 미친 듯이 몰려들던 마교도들이 서서히 물러서기 시작했다. 녹풍대의 시선이 사마문에게 향했다. 혹여라도 당소소에게 무슨 해를 끼칠까, 날이 선 살기를 뿌려왔다.

“너무 긴장하지 마. 죽이고 싶어지잖아.”

“…놈.”

“농담이야. 또 보자고.”

사마문은 요재와 함께 이빙각을 떠났다. 녹풍대는 서둘러 당소소에게 달려갔다. 그녀의 곁에 당혁의 시체는 없었다. 구석에서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던 백진오가 다가와 백서희의 곁에 섰다.

“…녹풍대.”

당소소를 추스르던 녹풍대의 시선이 모아졌다. 백진오는 한숨을쉬며 말했다.


“염치없지만, 제방의 수문을 개방해주십시오. 끝을 맺을 때가 온 것 같으니.”


그의 간청과 함께, 이빙각의 전투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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