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화 〉종장[終章], 괄목혈봉[刮目血鳳] 2
우렛소리가 허공을 울렸다. 탄내를 풍기며 바닥에 누워있는 환요대의 무인들 위로 짙은 독무가 깔려있었다. 흑색의 독무,그리고 녹색의 독무가 서로 얽히며 서로의 영역을 부딪쳤다. 흑색 독무의 중심엔 류시형이, 녹색 독무의 중심엔 독무후가 서있었다.
“답지 않게 꽤 구질구질하군!”
류시형의 손짓에 흑색의 독무가 더 짙어졌다. 독각혈가의 독문무공, 만음천독공[萬陰天毒功]이 단전을 벗어나 혈맥을 휘돌았다. 장기에 깃든 독기를 쥐어짜며 기맥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스스로의 몸을 강시로 만들어 독기를 품게 하는 독각천시의 공능이 발현됐다. 내기는 곧 독기와 동화되고, 독기는 곧 흑색의 독무가 되어 류시형의 피부 바깥으로 솟아났다.
그것이 독마 류시형의 성명절기, 독각혈사연.
독룡대의 수하들과 당혁이 흉내 낸 것과는 차원이 다른, 지독한 독기가 자신의영역을 착실하게 오염시키고 있었다.
“쯧.”
독무후 또한 죽통을 움켜쥐고 뇌기를 발현하려 정신을 집중했다. 그러나 전조도 없이 상아색의 불꽃이 그녀의 발치에서 솟아났다. 장포가 흩날리며 독무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독각혈사연은 순조롭게 독무후의 공백을 타고 녹색의 영역을 짓밟았다. 바닥에 착지한 독무후의 시선은 서둘러 전황을 훑었다.
‘요마의 잡졸들은 소모전 끝에 내공을 쥐어짜 어찌저찌 눕혀놓았건만….’
팟!
생각을 할 틈도 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긴 류시형의 철침. 철침은 곧장 독무후의 미간을 노리고 쏘아졌다. 독무후는 고개를 슬쩍 젖혀 철침을 피하고, 가슴부근에 일어나는 불꽃에 방전을쏘아 흩어냈다. 펼쳐놓은 녹색의 영역은 시시각각으로 줄어들고 있었다.
‘독마는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는위협이지만, 도통 이 잡귀놈의 흔적을 잡지 못하겠단 말이지.’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오른쪽 손가락으로 허공을 훑었다. 빠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변이 방전했다. 불꽃도 더는 독무후를 위협하지 못했고, 지척으로 다가온 흑색의 독각혈사연도 벼락에 증발해공백상태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던져지는 죽통.
화악!
녹색의 영역이 번져가며 다시금 독무후의 영역을 구축했다. 독무후는 호흡을 길게 뱉으며 뇌람신공을 한차례 휘돌렸다. 빈 하단전이 쓰렸다. 심장부근이 뻐근했고, 머리는 지끈거렸다. 내공이 고갈되어간다는 뜻이었다.
‘영역을 구축하기 위해 사용하는 녹효지[綠曉池]는 구체성을 띄기 위해 화행과 목행을 섞고, 산을 이용해 만든 독. 온갖 것을 섞어 넣은 독각혈사연과 정면으로 맞부딪히는 것은 미련한 짓이다.’
독무후도 자신이 하는 행동이 비효율적이라는 것쯤은 인지하고 있었다. 내공은 바닥을 보이고, 마교 쪽에서 걸어온 무식한 소모전으로 대부분의 암기와 독이 고갈상태였다. 남은 것은 몇 자루의 철침과 촌철 열 자루, 쌍살호접인 하나. 그리고 독전[毒戰]을 이어갈 수 있는 죽통 몇 개.
‘뇌기로 독을 합성해 독공에서 우위를 점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다만….’
파즈즉!
공기를 집어삼키는 소리가 들려오며 독무후의 뺨 옆으로 불길이 일었다. 약간의 그을음이 조그마한 뺨에 얹혀졌다. 독무후는 눈가를 꿈틀거리며 뇌기를 긁어모아 불꽃을 지웠다.
‘어디에 숨어있는지 모르는 요마를 잡아야한다. 꼬리를 잡아야 하거늘, 저번의일화로 꼬리를 내놓지 않고 있구나.’
독무후는 엉겨 붙은 머리칼을 신경질적으로 털었다. 벼락이 가볍게 터져 나오며 그녀의 심기를 드러냈다. 그녀가 뇌기로 불꽃을 덜어낼 동안, 독각혈사연은 어느새 녹효지의 독성을 삼키고 점점 영역을 잠식해가고 있었다.
이젠,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지루한 공방은 그만 끝내도록 하자꾸나.”
독무후는 입고 있던 장포를 벗어던졌다. 촌철 열 자루가 땅에 박히고, 몇 자루의 철침이 그 뒤를 따라 박혔다. 죽통은 허공을 유영하며 떠다녔다. 독무후의 행동에 반사적으로 일렁이는 불꽃은 장포가막아섰다. 그리고, 그 지점을 뛰어넘어 다시 독무후의 얼굴을 노렸다.
콰르륵!
상아색의 불꽃이 그대로 얼굴을 강타했다. 요선지화, 요마의 독문무공이었다. 그 불꽃 사이로, 더 찬연히 일렁이는 갈색의 눈동자가 불타고 있는 장포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에 붙었던 불길이 가라앉았다. 그을음이 남은 손바닥이 그녀의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화상이 남은 손을 움켜쥐었다. 탈력감이 온 몸을 짓누른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감각인지, 차마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서그녀는 실소를 머금었다. 또한 얼마 만에 느껴보는 책임감인지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오독문을 이끌어 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각을 했던가. 사천당가를 어엿한 사천의 무림문파로 인정받게 하기 위해 또 얼마나 많은 일을 해왔던가. 그렇게 일구어낸 형부와 언니의 사천당가를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방랑을 했던가.
그 사천당가의 결실들은, 이제 자신의 제자들이 되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나니.
“내 제자가 기다리고 있느니라.”
갈색의 눈동자가 호박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바닥에 박힌 촌철 열 자루가 주군의 의지에 따라 거병을 시작했다. 그녀를 해하려는 검은색의 독기를 향해, 촌철들이 도열했다. 모든 것은 아래로 떨어진다는 같잖은 법칙이나, 이치를 무너뜨리는 독기 같은 것들은 이미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독무후는 오른 쪽의 검지를 좌에서 우로 그었다.
츠츳!
그녀의 손길이 향하는 곳으로, 촌철은 벼락으로 벼린 검을 뽑았다. 촌철의 뭉툭한 검신을 따라 뇌인[雷刃]이 번뜩였다.
“어리석은 년, 실책이구나!”
독각혈사연이 거칠게 밀고 들어오며 자신의 거체를 들이밀었다. 독무후의 손가락이 움직인다. 그리고, 독각혈사연의 중심을 가리켰다.
-가라.
주군의 명을 받든 촌철이 내쏘아졌다. 독각혈사연의 전방을 꿰뚫으며 류시형의 본신을 노리고 뇌인을 휘둘러왔다. 뇌인은 어렵지 않게 류시형의 어깨를 짓눌렀다. 하지만 꿰뚫고 지나가진 못했다.
“그까짓 공격으로 본좌의 독각천시를 꿰뚫을 수 있을 줄 알았더냐!”
류시형은 촌철을 튕겨내며 독무후에게로 몸을 날렸다. 그에 호응하듯, 독각혈사연도 그녀를 향해 몰아쳤다. 그녀는 녹효지를 포기하고 내공을 끌어올려 독전을 ‘싸움’으로 변화시킨 대가를 치러야 했다.
독각혈사연은 순식간에 독무후를 감쌌고, 곳곳에서 철침과 암기가 쏘아졌다. 자욱한 독무는 위치를 차마 짐작할 수조차 없게 했다. 독각혈사연은, 류시형의 수족과도 같이 변질되어 있었으니까. 시종일관 그녀를 덮치기 위해 밀려오는 독기의 파도는 마치 망망대해에 떠있는 자그마한 섬을 떠올리는 듯 했다.
“천하제일독술사라 불리는 독무후의 꼴이 제법 우스워.”
독무후는 굳이 그의 도발에 대꾸해주지 않았다. 손을 움직여 촌철에게 명을 내릴 뿐이었다. 촌철은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검날을 휘둘렀다. 검으로 물을 베는 것이 의미가 없듯, 의미 없고 소모적인 칼질이 이어졌다.
“이게 네 놈들이 그리금칠해대는 협의의 말로인가? 정말 꼴사납지 않나?”
류시형은 독각혈사연 안에 숨어 독무후의 주변을 빙빙 돌며 독무후의 신경을 긁어댔다.
“네 귀여운 제자에겐, 그녀를 고문하던 당가의 둘째가 가있을 것이다.”
철침이 날아와 독무후의 미간을 노렸다. 촌철이 재빨리 움직여 철침을 쳐냈다. 촌철의 빈자리를 독각혈사연의 독기가 창궐했다. 촌철의 도열을 무너뜨려 그 창궐을 막아낼 순 있었다. 그러나 도열을 무너뜨리는 순간, 독전을 포기하고 무공을 손에 쥔 의미가 사라지게 된다.
“큿!”
그래서 받아냈다. 독각혈사연이 몸을 강타하며 독무후를 주저앉혔다.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불길은 일어났다. 촌철이 몸을 퉁기며 불길을 꿰뚫었다. 그런 촌철의 빈자리로 결국 류시형의 손길이 찾아들었다. 뇌기의 검들을 헤치고 들어온 류시형의 팔에는 그 어떤 생채기도 나지 않았다.
“허명이 제법 그럴싸하더구나, 독무후.”
“그러는 네 놈은 그런 허명이 제법 부러웠나 보구나.”
“하늘 아래 가장 높은 경지의 독술을 가졌다는 그 명칭이 탐나지 않는다면, 독술사라 할 수 있겠느냐?”
독무후의 멱살을 움켜쥔 류시형의 손은 그녀를 점점아래로 짓눌렀다. 촌철과 함께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어느덧 땅에 맞닿은 뺨에는 더러운 진흙이 묻어있었다.
“이제 이 류시형이 천하제일이니라. 독각혈가는 당혁의 지식을 빨아들여 독의 종가가 되겠지.”
“좋으냐?”
“애써 태연한척 하지 마라. 네년은 이제 낡아빠진 고물이니까.”
“흘흘, 좋다면 좋다고 솔직하게 답하면 될 것을….”
기어오는 독각혈사연은 독무후의 몸을 짓눌러 점점 독기의 늪으로 가라앉혔다. 독무후는 이 위기에 다만 길게 한숨을 쉬며 눈 감을 뿐이었다.
“지치는군.”
피로에젖은 목소리에 류시형은 고개를 저었다.
“넌 죽어서도 쉬지 못할 것이다. 내 친히 네 몸을 강시로 개조시켜주마. 비록 살아서는 신교에 반기를 들었으나, 죽어서는 신실하게 대업을 따르도록 만들어주마.”
“제법 악독하구나.”
“아니, 이것은 구원이다. 마신께서 인도할 세계 너머의 세계에 갈 네 년을 위해, 내 친히 네 육체를 부려 영혼의 업을 씻겨주는 행위라는 것이다.”
독무후의 눈이 슬며시 뜨이며 류시형을 바라봤다.
“이 늙은이는 요즘 젊은이들이 쓰는 복잡한 말 같은 건 모르는데.”
“알 필요 없다. 이제 곧 죽어서 깨닫게 될 테니까.”
“그렇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제자들에게 치근덕거릴걸 그랬어.”
류시형은 손톱을 세웠다. 끈적한 독기가 묻어나는 손톱은 요사스럽게 빛났다.
부욱!
비단을 찢는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살점이 찢기는 소리. 류시형은 일그러진 미소를 지으며 죽음이 드리워진 소녀의 시체를 내려다봤다.
“핫, 하하…. 이제야 모든 일이 순리대로 맞아떨어지는구나.”
류시형은 키득거리며 독무후의 머리채를 잡고 끌어올렸다. 곤히 잠든 듯, 눈꺼풀을 내리고 있는 그 모습이 제법 처량했다.
“네 년을 독강시로 만든다면…. 독각혈가의 교단 내 입지는 교주인 천마 다음으로 쌓이겠지. 그렇다면 다음 교주의 자리도…!”
“날 독강시로 만들려면 꽤 힘들 텐데. 괜찮겠느냐?”
“……!”
죽은 듯 눈을 감은 독무후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경고에, 그는 머리채를 놓고 독무후의 시체를 내동댕이쳤다. 류시형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의 손톱이 뽑히고, 뼈가 보일 만큼 손가락이 꺾여있었다. 당한 이조차 시간이 지나서야 인지할 법한 절정의 금나수였다.
“내가 누군지 아직 잘모르나보구나.”
“독공의 종주를 자칭하는, 허풍선이 아니더냐!”
“독무후가 그저 독공만을 통달했기에 붙은 이름인 줄 알고 있더냐?”
류시형은 그제야 수상한 낌새를 느꼈다. 허공에 던져놓은 죽통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저 바닥에 박아 넣은 철침들과 주인을 따라 누워있던 촌철 뿐. 어느새 구축된 독무후의 영역은 독각혈사연을 밀어내고 있었다. 독무후는 그가 부여잡아 헝클어진 머리를 손으로 정돈하며 웃었다.
“독[毒]도, 무[武]도 존중할 만한 이[后]이기에 난 독무후라는 별호로 불렸다.”
독무후는 손을 튕기며 머리칼을 털었다. 뇌기가 퍼져나왔다. 아릿한 두통이 머리를 압박해온다. 호박색의 눈은 아까부터 류시형을 보고 있지 않았다. 장포를 꿰뚫고, 그 궤적을 따라 불꽃을 번지게 한 그 궤도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꽤 영악했구나, 쥐새끼야.”
그녀의오른손은 검지와 중지를 겹쳐 내민 검결지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검결지는, 천천히 위로 솟았다. 류시형은 황급히 뒤로 튕겨나가듯 물러섰다.
츠즉.
뇌기는 독무후의 의지가 담긴 전류가 되어 철침들을 훑었다. 땅을 짓누르던 독각혈사연의 독무가 들끓었다.
벼락은 하늘에서 대지로 내리쬐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래야 하는 것이고, 그래왔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녀에겐 그렇지 않았다.
철침이 명멸했다. 전류가 꿈틀거렸다. 더운 열풍이 류시형의 몸뚱이를 훑었다. 짜릿한 위기감이 그를 감전시켰다.
‘막아야한다.’
무슨 짓을 벌일지도 알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날 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반드시 막아야 한다는 것은 곤두선 전신의 모든 감각의 비명으로 알 수 있었다.
류시형은 곧장 뇌를 두드려 상단전을 일깨웠다. 백회혈까지 뻗어나간 내기는 곧장 연기화신을 시도했다. 독무는 그의 사상을 따라 한곳으로 응축됐다. 형태는 한 마리의 용. 그리고 또 한 번 응축된다. 이제는 한 자루의 검.
독각혈사연 오의, 용검향[龍劍香].
상승무공을 사용함에 있어서 반드시 동반되는 기압[氣壓]. 고농도로 농축된 내기의움직임에, 주변의 자연지기가 그 움직임을 따라 일정한 움직임을 취하는 현상이었다. 독각혈사연은 그것에 주목했다.
독공의 본질은 중독이었고, 독무의 본질은 독을 허공에 퍼뜨려두는 것이었다. 기압의 본질은 자연지기를 뜻대로 움직여 적의 행동을 강제하는 것이었으니. 용의 형상으로 응축된 독기는 자연지기를 끌어당기고, 그 자연지기를 독으로 오염시켜 기압을 다스리고 검의 형태로 재차 응축해 적에게 내미는 것이 바로 용검향의 요체였다.
류시형은 용검향의 손잡이를 잡고 내밀었다. 당장이라도 적을 잡아당길 듯한 인력이 느껴졌다. 손목을 슬쩍 비틀었다. 그러자 모든 것을 으깨고 밀어낼 듯한 척력이 뿜어져 나왔다. 기압이라는 천리[天理]의 현상이, 인리[人理]에 복속되어 그의 손에 쥐어졌다.
“무엇을 준비하든, 허사다. 이제 네 시대는 끝이니!”
응축된 독기의 검이 휘둘러졌다. 그 검엔 형태가 없었다. 마치 향의 연기처럼 흩어져,제멋대로 날을 세우며 적을 끌어당기고 적의 공격을 밀어냈다. 그리고, 그 형태없는 검신[劍身]은 벼락이 깔린 위를 지났다.
“요마는 애초부터 없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이리도 어려웠을 줄이야. 칭찬 정돈 해두도록 하마.”
검결지가 더욱 위로 치켜 올라갔다.
벼락은 하늘을 따라 대지를 울리고자 하나, 전류는 대지를 찢고 하늘을 거스르고 싶어 했다.
천리보다 더 선명한 인리가 그 곳에 있었다.
-내 제자가 기다리고 있느니라.
쿠릉.
벼락이 솟는다.
쿠릉….
의지가 솟는다.
쿠릉…!
마침내 인리는, 하늘을 거스른다.
한 줄기, 두 줄기. 쏟아지는 천리의 폭우를 받아내며 전류는 자라난다. 그리하여 뻗어나가는 벼락은, 역천만뢰[逆天萬雷]라는 초식이었으니.
철침은 역류한다. 군세를 역류하는 기마병과같이, 땅에 박혀있던 몸을 털고 허공을 가르고 뻗어나갔다. 그것들에게서 비롯된 전류는 그릇된 독기를 불사르고, 감히 자신을 거스르고 천리를 복속시키려 드는 그의 의지를 꺾었다.
까득거리는 소리와 함께 류시형은 오른 눈을 부여잡았다.
“으음…!”
수없이 많은 벼락이 한 곳으로 응축되어 공간의 그늘을 비집고 후벼 팠다. 장포를 불사르고 독무후의 얼굴에 불길을 뿌리던 그 궤도였다. 빈 허공을 꿰뚫고 지나간 그 곳엔, 녹아내린 청동거울이 실에 걸려있었다. 솟아올랐던 벼락은 하늘에 스미지 않고, 다시 궤도를 비틀어 아래로 내리꽂혔다. 더 이상 천리를 거스르지 않는 인리는, 뇌우[雷雨]가 되어 류시형의 몸에 내리꽂혔다.
미친 듯이 쏟아지는 우렛소리가 도강언에 고여 있는 환란의 기운을 걷어냈다. 종전의 봉화를 알리듯, 피어나는 연기. 독무후는 그 흙먼지 속으로 걸어갔다. 검게 그을어있는 류시형의 앞에 서서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쉽게도 아직 네 시대는 아닌 것 같구나.”
“…쿨럭.”
류시형이 독액을 뱉었다. 피부는 열기로 지글거렸고, 피부 아래를 휘돌던 독기는 말라붙어있었다. 독무후의 내부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은, 류시형는 독각천시라는 마공을 연성한 살아있는 강시라는 점. 얼마 지나지 않아 진탕이 난 내부는 회복단계에 들어갈 것이고, 외부에 입은 화상 또한 말끔하게 회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에 반해 비교적 평범한 육체를 지닌 독무후는, 모든 내공을 사용해 몰려오는 상실감을 느끼며 절로 주저앉았다.
“피차 끝을 봐야할 것 같은데. 그렇지?”
“…….”
독무후는 경련하는 손을 품에넣은 뒤, 술잔 하나를 내려놓았다. 해독제를 조제하기 위해 준비해 독술사들이 상비해두는 종지그릇이었다. 그리고 그 그릇은 독술사들에겐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일합[一合].”
“네 놈은 내 명성이 탐이 나고….”
류시형이 천천히 앉아 그릇을 쥐었다. 바둑에서 하수가 흑돌을 집듯, 독공을 겨룸에 있어서도 하수가 선[先]. 끈적거리는 검은빛 독액이 잔을 채웠다.
“난 끝을 내야 할 책무가 있으니까.”
독무후는 류시형이 다시 내미는 잔을 받았다. 검은색의 색깔로 보아, 독각혈사연에 기초한 독은 틀림없을것이다. 가슴에 에는 서늘한 감각은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것을 경고하고 있었고. 그녀는 잔을 슬쩍 비틀며 웃었다.
“벌써 당혁이 발설한 정보를 체득한 건가.”
“녹흑진액[綠黑津液]….”
독각혈사연에 기초를 뒀다. 그러나 오롯이 그것만으론 천하를 논하기엔 부족함이 있었다. 그렇기에 당가의 지식을 섞어 좀 더 지독한 독을, 좀 더 치명적인 독을 연구해냈다. 시간만 더 남아있었다면, 독마 류시형은 틀림없이 천하를 논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당가의 독과 네 가문의 독을 섞어놓은 게로군.”
독무후는 그렇게 말하며 녹흑진액을 단숨에 삼켰다. 잠시간의 정적. 독무후는 말없이 잔을 털고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순천단을 잔에풀어 넣으려던 순간, 손이 멈췄다. 뻗은 손을 거뒀다. 순천단을 풀어 넣는 대신,허리춤에 차고 있던 죽통 하나의 마개를 따고 잔에 부었다. 투명한 액체가 찰랑거리며 잔을 채웠다.
“이건 뭐지?”
“하람[夏濫].”
여름이 넘실거린다는 이름. 그 이름을 들어선 쉬이 예측할 수 없는 독이었다. 독무후의 눈치를 살피던 독마는 잔을 한 번에 들이킨다. 그리고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이건…?”
눈썹의 일그러짐은 미간으로, 그리고 얼굴로 번져갔다.
“술이잖아.”
그 말에 독무후는 키득거리며 피를 토했다.
“쿨럭…. 후후.”
“무슨 속내지? 날 능욕하는 것인가?”
독무후는 흐려지는 눈빛으로 독마를 바라보며 말했다.
“축하주란다.”
“…뭐?”
독무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천당가의 마사지기를 죽이고. 녹풍 육호와 칠호를 죽였고, 당가의 비술마저 훔쳤더구나.”
독기가 치솟아 두 눈을 찔렀다. 피눈물이 흘렀고, 그녀가 웃었다.
독예[毒藝], 수절[手絶], 암화[暗花], 투봉[鬪鳳].
오독문주[五毒門主]이며, 사천당가의 전 호법.
한 때는 천하제일[天下第一] 독술사[毒術士]라불리기도 했었다.
그 모든 위명이 일컫기를,
독무후[毒武后] 단예.
그녀가 선포했다.
“내 적이 된 것을 축하한다, 독마 류시형.”
독마 류시형, 그는 독무후가 인정한 적이 되었다.
“……!”
“곧 있으면 독천이라는 못난이 제자가 잔뜩 성이 나서 달려올 텐데, 어서 피해야 하지 않겠느냐?”
그 말에 독마가 뒤로 물러섰다. 그녀가 말하지 않았어도, 점점 돌아오는 감각은 독마의 뒤통수를 쿡쿡 찔러댔다. 이곳으로 향하고 있는 은은한 분노가 독천이 곧 제방에 도착할 것이라는 것을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빌어먹을.”
독마의 입에선 걸맞지 않은 욕설이 튀어나왔다. 요마와 함께하지 않더라도, 쉽게 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중간부터 요마를보내고, 그의 특수한 무공만을 남겨놔 독무후라는 거대한 먹잇감을 독식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독무후라는 존재는 온전히 삼키기에는 너무 거대한 존재였다. 계획은 전부 어긋났고, 자신은 실질적으로 패배한 상태였다. 불행 중 다행인 점은 이틀을 걸쳐 유도한 소모전 끝에 독무후의 모든 힘을 소진시켰다는 점뿐이었다.
‘독공을 겨루는 일합에서 왜…?’
의문은 있었다. 하지만, 길게 이어가진 못했다. 이미 지척으로 다가온 죽음을 피해야했다. 류시형은 역천만뢰에 박살이 난 몸을 절뚝거리며 독무후에게서 멀어져갔다.
“…쿨럭.”
독무후가 주저앉았다. 내공이 고갈된 몸은 그녀의 자리를 넘보던 독마의 독을 버티기엔 벅찼다. 온몸이 사시나무 떨 듯 떨려오고,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가 스며나왔다. 의식이 흐려져 뒤로 넘어지는 독무후를 누군가 받아든다.
“조금만 더 늦게 오지 그랬느냐. 제 잘난 줄 알던 쥐새끼의 버릇을 고칠 수도 있었거늘.”
“여전히 허풍이 심하십니다, 스승님.”
항상 우습기만 하던 제자가 그녀를안아들었다. 독무후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디 한 번 제자의 솜씨를 구경 좀 해볼까.”
“예.”
제자는 장포에서 호리병을 꺼내 스승의 입에 약을 흘려 넣었다. 피가 섞인 기침소리가 잦아들고, 독기에 의해 무너져가던 내상도 잠시 그쳤다. 어디까지나 미봉책. 서둘러 끝을 보아야 독무후를 치료할 수가 있을 것이다.
“…….”
당진천은 눈을 돌려 진정되기 시작하는 도강언을 바라봤다. 피를 흘리며 싸웠던 식솔들에게, 그 어떠한 위해도 없어야 하는 것.
그것이 가족을 이끄는 가주의 책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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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화님께서 제작해주신 삽화움짤입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