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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화 〉이막[二幕] 일장[一章], 시우해빙[始雨解氷] 1 (123/130)



〈 123화 〉이막[二幕] 일장[一章], 시우해빙[始雨解氷] 1

추적추적 올해의 첫 비가 내린다.

얼음이 녹고, 봄이 온다.

바야흐로, 새학기의 시작이다.

*


호란검[虎蘭劍] 신유는 정천무관[正天武關]의 교관 중  명이었다. 호북성에서 나름 이름 좀 날리는 검객인 그였지만, 작은 문파출신이 발목을 잡아 이렇다 할 명성과 자리를얻진 못한 채 낭인을 전전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 제의를 받게 된 정천무관의 교관자리는 그의 인생을 꽤 극적으로 바꿔주었다.


“쯧, 오늘은 난이  비실거리는걸.”

신유는 혀를 차며 난을 치던 붓을 놓았다. 고급스런 벼루와 붓이 눈에 들어왔다. 원목 탁자는 볕이 잘 드는창가를 등에 지고 있었고, 오른쪽 벽면에는 푸른 난초 여러 개가 화분에 심어져 있었다. 길거리에서 건량이나 씹던 예전의 삶에 비하면, 정천무관의 교관으로서 사는 것은 썩 만족스러운 삶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난이 그리던 종이를 구겨 탁자 옆에 비치된 통에 넣은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런 날은  무슨 일이 있단 말이지.”

신유는 왼쪽 벽에 걸어둔 검을 쥐고 방 안을 나서려고 했다. 그 순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똑.

“교관님, 공의입니다.”

다소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유는 쥐었던 검을 다시 제자리에 놓은 후, 깊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항상 만족하며 지내는 정천무관이었지만, 모든 것이 좋을 수는 없는법이었다. 신유가 가장 싫어하는 순간이 찾아왔다. 신유는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게.”


신유가 자리에 돌아가 앉자, 문을 열고 멀끔한 차림의 남성이 들어왔다. 백색 무복은 마치 서생의 옷차림처럼 하얬고, 허리춤에  목도 위로 붉은색 매듭 두 개가 묶여 있었다. 신유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그를 맞으며 말했다.


“잠룡추천전형[潛龍推薦銓衡]에 대해서 건의를 하고자 온 것이겠지?”

“예. 이번 시험관은 신유 교관님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래. 어디 한번 줘보게.”

공의가 가져온 두루마리를 신유의 탁자에 내려놓았다. 신유는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살폈다.


“사천성 청랑검문의 파랑검객 정유라…. 처음 듣는 별호인데.”

“무공은 이미 일류를 넘어섰고, 특히 검술에 있어서 일가견이 있는 친구입니다. 신유 교관님께서 꽤 관심이 있을 듯하여.”

“풍랑천식검이라. 헌데, 직접 만나보았는가?”

신유의 물음에 공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심성도 올곧은 친구입니다. 의협심도 꽤 투철한 것으로 보아, 저희 생도회[生徒會]의 임원으로 추천하기에 알맞은 듯해 고른 친구입니다.”

“이 정보만 놓고 본다면 갑 반으로 배정받을 친구로군. 검술에,중소문파 출신이라….”

신유는 두루마리를 덮으며 말했다.

“뭐, 난 불만 없네. 생도회장인 자네가 이 친구를 추천한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지.”

“감사합니….”

“계신가요?”

청랑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을 두드리는 소리. 공의의 표정이 굳어지며 신유와 시선을 마주쳤다. 신유 또한 난감한 기색을 표했다.

“이런, 어째 오늘 왠지 난이 안쳐지더라니.”

“계시냐고요!”


쾅쾅쾅!

문을 부술 듯이 두드리는 소리에, 신유는 어쩔  없이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들어오게.”

“빨리 좀 말하지.”

문이 벌컥 열리며 턱을 치켜든 여성이들어왔다. 양 갈래 머리를 아래로 내리고, 백의에 목검을  행색. 공의와 비슷한 의복이었으나, 그녀의 매듭은 붉은색이 아닌 금색이었다. 표독스런 눈가 밑에 은근히 깔린 멸시의 시선은 공의와 신유를 훑었다. 그녀는 마치 무언가 묻을 것 같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탁자에 다가왔다.


“여기요.”

“…잠룡추천전형인가?”

“네. 몇  적어봤는데, 긍정적으로 고려해줬으면 좋겠네요.”

두루마리를 내려놓고 멀찌감치 떨어진 능소약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전 그저 장래가 유망한 이를 추천한 것뿐이랍니다, 교관님?”

능청스런 말과 함께 위협적인 시선이 날아든다.

“개방[丐幇]의 정보를 받아서.”

“알겠네. 장래가 유망한 이들….”


신유는 개방을 뒷배에 지고 위협하는 능소약의 말을 곱씹으며 두루마리를 펼쳤다.


“용문[龍門]의 섬예검[閃銳劍] 염기, 무상창[無狀槍] 기유, 구겸협[鉤鎌俠] 구기영….”

“마음에 들지 않으신가요? 전년도 잠룡추천전형에서도 청성의 유운협이 들어왔던 것으로 아는데…. 이젠 개방이 이끄는 용문의 차례가 되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능소약은 샐쭉 웃으며 신유를 노려봤다. 이른바 관례라는 것이다. 신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하지만, 서로의 출신이 달랐던지라 그녀의 무례를 무어라 지적할 여유가 나질 않았다.

정천무관은 변변찮은 출신의 인물들이 출세하기 좋은 곳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구파일방과 오대세가같은 거대문파의 심기를 거스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결국 황실의 주관으로 설치된 이 정천무관이라는 기관도무림의 일부분이었으니까.


“긍정적으로 고려하지. 하지만, 잠룡추천전형은 한 명밖에 뽑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두도록 하게. 만약 떨어지더라도 유력가문전형으로도 입학할 수 있으니, 문주께는 그리 괘념치 말라고 전해드리고.”

“명심하지요.”

신유가 두루마리를 덮으며 고개를 끄덕이자, 능소약은 자신을 노려보는 공의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어머, 있었네요.”

“…….”

공의는 말없이 능소약을 바라봤다. 그녀는 입가를 가리며, 상체를 슬쩍 돌렸다.

“생도회에서 여긴 어쩐 일로?”

“백봉[白鳳] 여협과 같은 주제가 아닐는지.”

째릿한 시선이 부딪힌다. 신유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후우. 용건들은 잘 알겠으니, 이만 물러가보도록 하….”


똑똑.


“남궁란입니다.”

 다른 불청객의 목소리에 모두의 목소리가 그쳤다. 신유는 오른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말했다.

“들어오도록.”

“실례하겠습니다.”

앞선 둘과 같은 백의에, 길게 쏟아지는 흑색의 머리칼을 가진 여인이었다. 곧게 잘라낸 앞머리 아래로 차분히 빛나는 안광은, 마치검과 같았다. 그렇기에 그런 남궁란에게 붙여진 별호.


“검희[劍姬] 여협. 여기서 뵙네요.”

“강녕하셨나요, 백봉 여협. 아까 용봉지회에서 뵀었지요.”

슬쩍 웃으며 친근한 티를 내는 능소약.남궁란 또한 그녀를 웃음으로 응대하며 신유에게 걸어갔다. 신유는 눈을 비비던 손을 내리고 말했다.


“자네도 잠룡추천전형 때문에 온 건가?”

“…그럴까도 생각해봤습니다만, 올해엔 유력한 인물이 보여서.”

남궁란은 그렇게 말하며 공의를 바라봤다. 공의는 그녀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전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교관님.”

“그래. 살펴가시게.”

공의가 포권을 하며 신유의 방에서 물러났다. 공의가 빠져나가자, 남궁란도 자신이 들고 있던 두루마리를 내려놓았다.

“잠룡추천전형이 아니라면, 유력가문전형이겠군.”

“예. 웬만한 가문의 자제들은 거의 신청을 한 듯하나, 누락된 곳이 있는  하여.”

“좋네. 읽어보지.”

신유는 남궁란의 두루마리를 펼쳤다. 그리고 미간을 찌푸리며   한 자 읽어나갔다.

“사천당가, 당혁?”

“천하제일 독술사라 칭해지는독무후님과 무림맹에서 독에 관해 자문을 주고 계시는 독천 대협께서 있는 곳이지요.”

“독천 대협의 활약으로사천당가가 최근에 오대세가라 불린다는 것은 들었네만….”

“개인적인 흥미가 들기도 할뿐더러, 워낙 폐쇄적인 가문이라 따로 연락을 취할 방도가 없더군요. 독천께선 최근 무림맹을 떠나셨고, 아버님께 여쭤 봐도 부정적인 반응만 나왔던지라.”


신유는 사천당가라는 글자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다시 말해당가에 유력가문전형의 안내장을 보내 달라,  말이군.”

“예. 부디 고려를.”

“뭐, 알겠네. 그쯤이야 쉽지.”

신유가 두루마리를 덮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순간, 능소약이 남궁란에게말했다.


“요즘 세가 쪽이 많이 힘드신가 봐요. 독과 암기를 사용하는 답지도 않은 자들을 오대세가라 부르는 것도 모자라, 그들의 손을 찾으시는 걸 보면.”

“제법 힘이 들긴 하지요.”

남궁란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말을 받았다.


“걸인들의 동냥밥 위에 세워둔 문파가 원체 강건한지라.”

“이, 이익…!”

남궁란의 말에 능소약은 성이 가득 찬 목소리를 내며그녀를 바라봤다. 남궁란은 그 노기어린 시선에 무심한 눈길을 던질 뿐이었다.


“할 말은  끝나셨는지, 백봉 여협?”

“…용봉지회에서 뵙죠.”

능소약은 다분히 화가 나있는 걸음걸이로 방을 나선 뒤,  소리가 나게 문을 닫았다. 그 충격에 난이 담긴 화분 하나가 바닥에 떨어지며 깨졌다. 신유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남궁란이 눈을 감으며 말했다.

“…제가 대신 사죄드리지요.  화분으로 가져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초롱이….”

“예?”

“아, 아닐세. 그래서  하고자하는 말이라도 있나?”


남궁란이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은 두루마리에가있었다.

“조금 더 봐주시지요.”

“두루마리를 말인가?”


신유는 당혁의 이름 아래에 적힌 다른 글자를 소리 내어 읽었다.

“독화, 당소소. 그런데 이 처자는 아직 입학하기까지 일 년이 남았잖는가?”

“안내장을 보내시는 김에, 독화 여협도 같이 불러주셨으면 합니다.”


남궁란의 요청에 신유는 난색을 보였다.


“음, 자네도 알다시피 정천무관은….”

“제아무리 지체 높은 가문의 사람이더라도 관내에 외부인을 들일 수 없지요.”

“그걸 그리 잘 알면서 그런 요청을 하나?”

남궁란은 깨진 화분에 시선을 던지며 말했다.


“설린란[舌麟蘭]이라는 난을 아시는지요?”

“기린의 혀를 닮았다고 해서 붙여진 난 아닌가?  크기만큼의 금보다 더 가치 있다는….”

“가문의 어르신 중 교관님과 마찬가지로 난을 돌보는 분이 계셔서 말씀드려봤습니다. 자신이 감당하기 버거운 난이라며 양도할 분을 찾고 계시던데….”

“…….”


신유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흔들렸다. 정말로 달콤한 제안이었다.  눈 딱 감고 초대장 한 장을 허락해 준다면, 모두가 행복해질 수 있었다. 신유는 콧대를 긁적이며 고심에 잠겼다.


“친인척을 부를  사용할 수 있는 일 년에  한 번 쓰는 초청장이거늘. 으음….”

“가족분들과는 개봉의 현월루[弦月樓]에서 모시면 되지 않겠나요?”


남궁란이 싱긋 웃었다. 하루 숙박비만 해도 기본 은자 한 냥인, 개봉 최고의 누각인 현월루의 숙박비를 전액 부담하겠다는 말이었다. 신유는 당소소라는글자를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생각했다.

‘이 규수가 그렇게 중요한 인물인가? 하긴. 오대세가의 개편이 얼마 되지 않았는데, 내부적으로단결을 꾀할 필요가 있겠지. 더군다나 배타적인 성향의 사천당가이니만큼, 하루라도 빨리 그들의 저의를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은 이해가 간다.’

신유의 손가락이 멈췄다.

‘그렇지만 구파일방과 오대세가 간의 알력다툼에 한 손을 거드는 꼴이 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군.’

잠시간의 망설임 끝에, 두루마리가 덮어졌다.


“…알겠네. 조만간 인편을 통해 초청장을 보내도록 하지.”

“감사합니다. 그럼, 검술 교습시간에 뵙도록 하겠습니다. 부디, 강녕하시길.”

남궁란이 포권을 하며 문을 나섰다. 그녀가 떠나자, 신유는 깨진 화분을 치우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문득, 당소소의 옆에 적힌 글자들이 마음에 켕겼다.

“어디 보자….”


다시 자리에 앉아 남궁란의 두루마리를 펼쳤다. 당소소라는 이름 옆에는, 최근 그녀가 겪어왔던 일화들이 낱낱이 적혀있었다.


“…천괴와 학귀 격살?”


*

새것으로 갈아 끼운 기와에도 눈은 쌓였다. 정갈하게 다듬은 추레했던 정원 위에도, 눈은 쌓였다. 무언가 단어가 적힌 현판에도, 눈이 쌓여 글씨가 보이질 않았다. 그렇게 소복하게 쌓인 눈 위로, 추적추적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안쪽의 객실에서,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내가  이런걸….”


침소의 탁자 앞, 등불 앞에 앉아 고개 숙여 자수를 놓는 그녀. 영락없는 규중처녀의 모습이었다. 색색의 실은 하얀 천 위에 얽혀 무엇인지 모를 괴악한 것을 그려내고 있었다. 볼살을 꿈틀거리며 자수를 놓던 그녀는, 별안간 들려오는 문소리에 그만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버렸다.

“앗 따가, 씨발.”

“…아무리 따가워도 말은 좀 가려서 하지 그러느냐.”

반백발의 노인이 침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수놓던 자수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부른 연유가 무엇이냐.”

“무적자[無敵者]라는 별호, 혹시 아시나요?”


피로에 찌들어있던 노인의 표정이 별안간 딱딱하게 굳었다.

“…알고 있다.”

“그는 낭인왕[浪人王]이라 불리며 휘하에 세 수하를 부리던 자였죠.”

“그래, 내가 그 세 수하 중 권랑[拳狼]이라 불리던 자였단다. 하지만 달리 말해줄 것은 없다. 이미 죽은  주군일 뿐, 지금의 나는 단혼사고, 그 단혼사가 섬기는 것은 네 아비뿐이니까.”

“그분의 무덤에 절 데려가 주세요.”

“너….”


단혼사는 인상을 찌푸리며 그녀를 노려봤다. 그녀는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곧 마교에서 그분의 무덤을 파헤치려  거에요.”

“뭐…? 네가 그걸 어떻게 아느냐?”


그녀는 말없이 웃었다.

봄비는 쌓인 눈을 녹였다. 기와를, 정원을, 그리고,

독봉당이라 적힌 현판의 눈마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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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하유랑편의 당소소 팬아트입니다. 류테님과류테님 동생에게 무한한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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