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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4화 〉이막[二幕] 일장[一章], 시우해빙[始雨解氷] 2 (124/130)



〈 124화 〉이막[二幕] 일장[一章], 시우해빙[始雨解氷] 2

감각이 느껴졌다. 흠씬 두들겨 맞은 듯한 몸은 나른하고, 아팠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흐린 시야를 밝혔다. 당소소의 눈에는 익숙한 독봉당의 천장이 보였다.

“으으윽.”

그녀는 앓는 소리를 내며 몸을 일으켰다. 헝클어진 머리로 주변을 둘러보며 길게 하품을 했다.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자 살짝 감도는 초봄의 한기가 제법 차가웠다. 몸을 일으켜 탁자에 앉자, 엉망진창으로 꿰맨 자수가 눈에 들어왔다.


“산류수 사 성이 자수 놓기라니, 웃기지도 않아.”

당소소는 실소를 지으며 하도 바늘에 찔려 부어오른 자신의 왼손을 바라봤다. 산류수 사 성을 수련한 지도 어느덧 반년이었다. 하지만 영 진전이 없었다. 타고나기를 절망적인 몸치로 타고났으면서도,  속에는 세세한 일과는 담을 쌓았었던 남성의 속내가 있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나저나 반년인가….’


당소소는 도강언 사건이 끝난 직후를 떠올렸다. 자신과 곧바로 제약당으로 실려 갔고, 독마를 패퇴시킨 스승님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순직자는 총  명이었다. 녹풍 육호와 칠호, 그리고 십삼호. 호법인 단혼사도 실종상태였다가, 한 달이 지나서 묵객과 함께 돌아왔다고.


‘그리곤 호법에서 물러나셨지.’


백발이 더욱 무성해진 단혼사는 호법의 자리를 녹풍 이호에게 물려주고 자리에서 물러났다. 묵객은 추후에 다시오겠다며 방랑길을 떠났고, 당가에선 녹풍대와 희생자를 추모하는 조촐한 장례식이 열렸었다.

“킁.”

당소소는 코를 훌쩍이며 그때의 기억을 흩어냈다. 녹풍 십삼호의 죽음은 그녀에게 있어선 화인처럼 지울  없는 것이었다. 스승의 요양도, 단혼사의 백발도. 다른 이들의 죽음도 결국은 자신의 행동에 의해 비롯되었다 생각하고 있었다.

‘감정은 죄가 아니야. 이용해야 하는 것….’

그녀는 자수를 만지작거리며 독무후의가르침을 떠올렸다. 여태까진 그저 휘둘리기만 하던 인생이었다. 하지만 당혁을 만나며 생각 없이 휘둘리는 것이 정답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진정 자신이 어떤 방법을 택해야 하는 지도, 어렴풋이 깨달았다.

‘당소소로 빙의를 하게 된 것은 어찌 보면 잘 된 일일지도.’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역할, 누구도 기대하지 않는 재능을 가진 그녀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라도 사용할 수 있는 독이 있었고, 암기가 있었다. 이를사용해 적의 선택지를 제할  있다면. 적의수준을 내 수준까지 끌어내릴  있다면.


‘유효한 전략이야. 적이 무엇을  수 있는지 알고 있는 내겐 특히.’


이제야 방향성이 잡히는 듯 했다. 문제는, 방향성이 잡혔어도 사정은 여의치 않아졌다는 것이었다. 당혁의 발차기로 기껏 복구시킨 단전이 으스러지고 뇌린은루의 독기가 혈맥 곳곳에 스며들어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혈맥에 씌워둔 백금이 흩어진 뇌기를 붙들어 독기가  안으로 침식하고 있지 않다는 정도였다.

“이래서야 내공수련은 무리고….”

이 증세를 해결해  스승은 아직까지 제약당에 누워있었다. 그녀의 죄책감이  사무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당소소는 한숨을  쉬며 목청을 가다듬었다. 아침식사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리고, 문 밖에서 그녀의 기상을 기다리는 시비들의 기다림 또한 다가오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당소소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렸다는 듯 열리는 문으로 시비들이 들어왔다. 그녀들을 이끄는 것은 하연. 하연은 고개를 숙이며 당소소에게 인사를 건넸다.


“기침하셨습니까, 아가씨.”

“시녀장이 되더니 좀 딱딱해졌어.”

“칭찬으로 듣겠습니다.”

하연은 빙긋 웃더니 시녀들에게 침구류 정리를 지시했다. 그리고 그녀 자신은 화장대에서 빗을 꺼내들어 당소소의 헝클어진 머리를 빗질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낯간지러웠고 어색했던 호의였지만, 반년이 넘는 시간동안 받으니 이젠 그러려니 하는 수준이 되었다.


“그런데, 시녀장이면서 나에게 시간을 써도 괜찮은 거야?”

“가주님의 지시이기도 하고, 가주님께서도 전임 시녀장이 직접 관리하시는 것을 선호하시니까요.”

당소소는 머리를 빗는 하연의 손길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옆머리와 뒷머리를 반 정도 움켜쥔 뒤, 비녀를 꽂아준다.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주고, 얼굴엔 무슨 티가 나지 않았는지 유심히 살펴준다. 처음엔 이렇게 귀찮은 일이 없었으나, 이 역시 이젠 익숙했다. 오히려 편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년 안에 일류고수의 경지에 올라야 유력가문전형으로 입학할 수 있어.’


안주하고 싶은 마음은 하루에도 몇 십 번씩 들곤 했다. 이대로 당가에 눌러 앉아 마교의 발호든, 타인의 행복이든 모두 무시하고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 같은 것들은 언제고 찾아와 당소소의 의지를 흔들었다.

“다 됐어요, 아가씨. 식사하러 가실 거죠?”


당소소는 하연의 목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하연이 당소소의 어깨에 경장을 걸쳐주며 뒤로 물러섰다. 당소소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항상 고마워.”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걸요. 이런 일로 감사를 표하는 게 오히려 더 품위를 떨어뜨리는 일이니, 당연하게 받아주시는 게 저희에겐 더 감사한 일이지요.”

“그래도.”

당소소는 경장을 여미며 침소를 나섰다.

“아직은 어색해.”

하연은 그런 당소소의 뒷모습을 안쓰럽게 바라봤다. 지금 멀어지고 있는 당소소는, 병상에서 일어난 직후 단 하루도 쉰 적이 없었다. 아침식사가 끝나면 초청한학사에게서 글을 배우고, 저녁에는 무공 수련을, 돌아와서는 산류수를 터득하겠다며 자수를 연습한다. 자신을 혹사하는 그 모습은 지켜보는 이가 더 불안했다.

“부디 여유를 가지셨으면.”


하연은 작게 읊조렸다.


*

당가의 아침식사는 조촐했다. 당소소는 이 말을 긍정할 수 없었다. 죽을 먹더라도 구하기 어려운 해산물을 구해와 같은 무게의 은자보다 더 비싼 죽을 먹였고, 지금 눈앞에 차려진식탁이 보이지 않는 차림새는 농담으로도 긍정할  없는 것이었다.


“오늘은 좀 조촐하군요, 아버지.”


거기에 그녀를 더 분통터지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옆에 앉아 태연한 태도로 고봉밥을 들고 있는 당회였다. 어느 순간부터 가족 식사에 참가하게  그는 말 그대로 산더미 같은 밥을 해치우고 돌아갔다. 그 덕에 자연스럽게 식탁에 올라가는 반찬의 가짓수와 양도 많아지고, 그러다보니 원하지 않는 상황이 자주 발생했다.

“소소야, 어째 먹는 것이 시원찮구나.”

“아, 예….”

“이것 좀 먹어보거라. 튀긴 가지에 어향 양념을 얹은 것인데, 꽤 먹을 만 하단다.”


당진천은 넉살좋게 웃으며 당소소의 그릇 위로 가지를 얹어주었다. 그렇게 얹어준 반찬만 해도  끼를 채울 수 있을 지경이었으니, 가뜩이나 여성의 몸이 되어 식사량이 적어진 당소소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먹으면….’

“싫으냐…?”

“…….”

당소소가 잠시 젓가락질을 쉬자, 당진천이 풀죽은 표정으로 당소소를 바라보고 있다.

‘난 저렇게 되지 말아야지….’


당소소는 고개를 저으며 양념한가지를 베어 물었다. 확 끼쳐오는 자극적인 매운맛, 그러면서도 고급스런 감칠맛이 가지의 식감과 어우러졌다. 잘게 썬 야채들이 풍미를 더하니, 과연 당진천이 얹어줄 법한 음식이긴 했다.


“전 이제 괜찮아요.”

당소소가 그렇게 말하며 젓가락을 놓자, 시녀들이 다가와 입가를 닦을 손수건을 건넸다. 아쉬운 표정으로 입맛을 다시는 당진천이었지만, 자기가 그만 먹겠다는데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회는 은근슬쩍 한마디를 거들었다.

“…그거 먹고 힘이나 쓸 수 있겠어?”

“…….”


언젠가부터 슬쩍슬쩍 친해지려는 신호를 보내는 당회. 이성적으로 따지고 보면 별 생각은 없었으나, 감정은 그를 밀어내고싶어 했다. 당소소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자, 당회는 헛기침을 하며 당진천에게 말했다.

“저도 이만 연철전 업무가 바빠서….”

“잠시 있거라.”

당진천은 그렇게 말하며 음식을 치우게 하고 시녀들을 물렸다. 꽉 찼던 식탁은 한 순간에  비었고 세 사람 만이 서로 마주보게 되었다. 당진천은 당회를 바라보며 말했다.

“연철전을 물려줄 이는 물색해보았느냐?”

“아버지, 전….”

“또 소가주를 하지 않겠다는 소리를 하고 싶으냐?”

“…예.”


당진천은 두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말을 이어갔다.


“지금당가대회의가 한  연기되었다는 건 알고 있겠지?”

“예. 도강언의 변고로 인해 제독전주께서 병상에 있으시니,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이 공백 기간에 방계에 흔들리지 않게가문을 정비해야한다. 적법한 후계자가 없는 현 상황…. 어떤 곳에서 어떤 딴지를 걸어와도 이상하지 않아.”

“그냥 소소에게 시키면 되지 않습니까?”

당회는 당소소를 돌아보며 말했다. 바라보는 보라색의눈동자엔 예전 같은 혐오감은 없었다. 하지만, 던지는 내용은 그리 달갑지만은 않은 것이었다. 당소소는 눈을 감고 한숨을 쉬었다. 영 마음이 켕기는 대화였다.

‘지금 여자의 몸을 하고 있는 내가 소가주를 하는 것도 우습지만, 설령 된다고 치면 내 운신의 폭이 너무 줄어들게 된다. 정천무관에 가지 못할 수도 있고, 이야기 뒤에서 일어나는 비극을 막지 못할 수도 있어.’


당소소는 그렇게 생각하며 당진천을 바라봤다. 다행스럽게도  또한 같은 생각인  했다.


“진심으로 하는 소리는 아닐 거라 믿는다. 소소의 몸도 그리 튼튼한 편은 아니라는 것, 너도 알고 있잖느냐?”

“으음….”


당회는 침을 삼키며 당소소의 눈을 피했다. 자신도 당청과 당혁의 피해자였지만, 실험을 빙자한 각종 실험과 칠혼독을 먹게  당소소에 비하면 조족지혈이었다. 내막을 몰랐을 땐 그저 미운 누이일 뿐이었으나, 알게  이후론 예전과 같은 태도를 견지할 수 없었다.


“예….”

“소가주가 된다고 하더라도, 가주가 된다고 하더라도 연철전의 업무를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나만해도 제독전주와 연철전주의 자리를 둘 다 임명하지 못해  업무를 동시에 봤으니 말이다.”

당진천은 대수롭지 않은  툭 던진 말이지만, 그가 얼마나 유능한 존재였는지 증명하는 말이기도했다. 그 모든 업무를 떠맡고도 당진천은 멸시받던 사천당가를 오대세가의 반열에 올려둔 입지전승적인 인물이었으니. 그것은 당회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전 아버지가 아닙니다. 전 제 주제를 잘 알고 있어요. 연철전주에나 어울리는 그릇입니다. 시야가 좁고, 편협하지요.”

마치 고해성사를 하듯 뱉는 자기혐오는 당소소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녀 자신도 영원히 안고  마음이었기에,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공감은 공감이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그렇지만 이 녀석이 소가주가 되지 못한다면….’


당소소는 당회가 계속 소가주직을 거절했을 때의 미래를 떠올려봤다. 장로회가 후계자 선정에 개입을 하게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야말로 개판의 시작이었다. 개판이  당가는 그렇지 않을 때보다 더 많은 힘을 필요로 할 것이고, 이는 당소소 자신에게도 자유롭지못할 것이다.

‘당회가 꼽든, 꼽지 않든. 난 얘를 소가주로 만들어야해. 그래야 어젯밤 단혼사님과 협의한 일을 처리하러  수 있으니까.’

자유롭지 못하게 된다면, 당장 어젯밤 단혼사를 설득해 알아낸  기연쟁탈전 장소인 낭인왕의 묘지에 갈 수 없게 될 확률이 높았다. 당소소는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버지.”

“왜 그러느냐, 소소야?”


당회를 채근하던 당진천은 푸근한 미소를 던지며 당소소를 돌아봤다. 당소소는 내심 헛웃음을 지으면서도, 표정관리를 하며 말했다.

“제가 이야기를 해볼게요.”

“…네가?”


당진천은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가문에 둔감하던 그였지만, 당소소와 당회가 서로앙숙에 가까운 관계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해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도록 해봤지만, 영 진전이 없었다. 그러던 와중 당소소가 기특하게도 먼저 손을 내밀어 온 것 이었다.

“그래, 어디 한번 해보도록 하거라.”

“네.”

당소소는 당황한 표정의 당회와 눈이 마주쳤다. 당소소는 생글거리며 말했다.

“따라 나와.”

“어? 어….”

  없는 박력에 자리에서 일어나 당회는 당소소를따라갔다.

*

“그래서, 할 이야기가 뭔데?”

식당을 나서서 정원에 나란히 선 두 사람. 당회는 짐짓 퉁명스런 어조로 물어왔다. 당소소는 그가 어떤 성향을 가지고 있는지, 무엇에 환장을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도철일맥의 병기들, 무엇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

“…….”

“알려줄게.”

“너….”


그리고 그 환장하는 것이 어디에 있는 지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 대신 내가 정천무관에  수 있게 좀 도와줘야해.”

“정천무관?”

“유력가문전형으로 가기 위해선, 도움이 필요하거든.”

당회가 되묻자, 당소소는 웃으며 답했다.

당가의 가훈, 실용.

몸소 실천할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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