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화 〉이막[二幕] 일장[一章] 시우해빙[始雨解氷] 4
월궁의 항아[月宮姮娥].
중국의 신화의 신화에 나오는 달의 여신이다. 달리는 태음성군[太陰星君]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달의 궁전에 사는 항아의 미모는 견줄 이가 없다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리고 달리 유명한 일화로는 항아분월[姮娥奔月].
하늘에는 열 개의 태양이 떠 있었고, 이들은 각기 천제[天帝]의 아들들이었다. 태양이 열 개가 있으니, 인간계가 말라비틀어지는 것은 당연지사. 선녀 항아의 남편인 궁신[弓神] 후예[后羿]는 열 태양 중 아홉 태양을 쏘아죽이고, 지상을 구제하고 그 아내와 같이 인간으로 추락한다.
그 둘은 다시 신으로 돌아가기 위해 여정을 떠나, 마침내 곤륜산의 봉신대[封神臺]에 도착했다. 그리고 봉신대에는 천신들의 어머니라 칭해지는 서왕모[西王母]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고난은 어떠하였느냐?
-항아가 있기에 올 수 있었습니다. -후예가 있기에 올 수 있었습니다.
서왕모는 그들의 대답에 흡족해하며 죽은 나무에 손을 뻗었다. 메마른 세월을 젖히고 푸른 잎이 돋았다. 복숭아향이 코를 간질이며 하나의 과실이 그녀의 손에 쥐어졌다.
-천도[天桃]란다. 하나를 둘이 먹으면 지상에서 영생할 것이요, 하나를 하나가 먹으면 신이 될 것이다.
항아의 손 위로 신기가 얽힌 복숭아가 올려졌다.
-어찌하겠느냐?
-저는, 이 사람과 평생을 함께할 것을 약조하겠습니다.
항아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못했다. 후예는 어떤 사건에 휘말려 죽어버렸고, 항아만이 눈물과 함께 천도를 삼켰다. 그리고 천제는 그런 항아를 배신했다 여기고 달의 궁전에 영원토록 유배시켰다.
이것이 쌍검무쌍에서 알려주던 항아분월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약속으로 비유되는 항아지약.
-나 홀로 이곳에 남아있지만, 영원토록 당신을 마음에두고 그리워할 테니. 이 약조는 영원할 것이에요.
영원토록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으며 임을 갈망하는 항아같이. 그것이 항아지약이라는 무공의요체였다. 다른 무공들과는 달리 낭인왕이 사용하던 항아지약은 독특한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항아지약은 심혼의 무공.’
연정화기, 검기상인, 연기화신 등등. 수많은 종류의 무공들이 난무하는 쌍검무쌍에서도 등장이 드물었던 무공인 심혼의 무공. 항아지약은 마음의 갈망을 단련시켰다. 항아지약으로 단련된 갈망은 곧 체정기신심 모두를 단련시켜 신화 속 항아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한다는 것이 그요체였다.
‘그게낭인왕이 무적자라 불리던 이유였지.’
월하지존[月下至尊], 낭인왕[浪人王], 천하제일도[天下第一刀]. 수많은 별호가 있었지만, 그는 결국 무적자[無敵者]라는 광오한 별호로 칭해졌다. 체정기신심. 그의 모든 것이 단 하나만을 갈망하여 죽여도 죽여도 죽질 않았으니, 어찌 적수가 있으랴.
“네가 그분의 도법을 가질 수도 없을거고. 그분이 사용하는 체술이나 보법, 내공심법 역시 가질 수 없을 것이다. 다만,항아지약은 다르지. 그것은 무공이라 불리기엔 꽤 이질적인 것이니까. 다만. 한 가지 걸리는 점은 말이다.”
단혼사의 예리한 시선은 아직도 당소소를 노려보고 있었다.
“네가 그분의 무공을 어찌 아냐는 것이다.”
“그건….”
“항아지약은 오직 측근들에게만 알려진 독문무공같은 것인데. 네가 어찌 알고 있느냐?”
“내가 알려줬네.”
단혼사의 추궁을 끊으며 흰 두루마리를 입은 학사가 들어왔다. 천으로 칭칭 감은 막대기를 손에 쥔 학사는, 탁자로 다가와 막대기를올려놓으며 단혼사를바라봤다.
“다시금 무너진 단전으로 꽤 고민하는 듯하여,내 알려줬네. 혹여 문제라도 있는가?”
“도올학사님의 말이라면….”
단혼사는 추궁을 거두고 바짝 세운 눈길을 거뒀다. 그리고 머리를 짚으며 말했다.
“미안하다. 사건들이 연달아 터지다 보니, 자제력을 잃었구나.”
“저라도 의심했을 거예요. 단혼사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나.”
단혼사는 피로 섞인 눈길을 들어 당소소를 바라봤다. 꽤 지쳐보이는 기색은 무성해진 흰 머리와와 맞물려 더욱 도드라졌다. 당소소는 걱정스런 말투로 입을 열었다.
“쉬세요. 단혼사님.”
축 젖은 눈망울로 자신을 바라보는 당소소를 유심히 바라보던 단혼사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영악하다, 영악하다 생각은 했었는데.”
“네?”
단혼사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당소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조차 넘어갈 줄은 몰랐구나. 더 성장하면 위험하겠어.”
“무슨 소린지 잘….”
“출발은 묵객이 도착할 때 하도록 하자꾸나. 천산에서 사천성 성도까지의 거리가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훌쩍 넘을 것이니, 그동안 단단히 준비해놓도록 하고.”
“예, 그러도록 할게요.”
단혼사는 손을 거두고 도올학사에게 목례를 했다.
“당가를 도와주셔서 항상 감사드립니다, 학사님.”
“내가 무얼 했다고, 흘흘….”
단혼사는 그 말을 남기고 객실을 떠났다. 도올학사는 닫힌 문을 보고 한숨을 쉬며 당소소를 바라봤다.
“그래서, 오늘은 또 어떤 사고를 친 건가?”
“낭인왕의 항아지약을 언급했어요.”
“…앞으로도 내 핑계를 대게.”
도올학사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네.”
당소소는 도올학사의 말에 대답했다. 그리고 그가 보따리에 싸 온 막대기를 보며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다시 수업을 재개한 것도 석 달이 지났더군.”
“그렇네요, 스승님.”
“…스승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했잖나. 그냥 학사님이라고 부르도록.”
도올학사는 불편한 듯 당소소의 발언을 지적했다. 당소소는 잠시 주저하다 이내 납득한 뒤,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학사님.”
“무튼, 수업을 재개한 바로 첫날에 자네가 느닷없이 사흉을 알고 있다고 해서, 어찌나 당혹스러웠는지 몰라.”
“하하….”
당소소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그때를 회상했다. 도강언사건이 끝나고 돌아오는 길. 자신의 무력함을 절실하게 느꼈고, 또한 자신의 행동이 어떤 위험을내포하고 있는지도 뼈저리게 느꼈었다.
‘여태 잘 얼버무려왔지만, 순천단을 기점으로 이젠 한계에 봉착했었지.’
네가 왜 그것을 알고 있느냐,네가 어떻게 그것을 알고 있느냐, 네가 어떻게 이런 것을 알고 있느냐. 임기응변으로 둘러대던 것도 한계가 왔었다. 그녀의 스승이 순천단을 만든 것에 대해 눈감아 주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끔찍했다.
그렇기에 적의 기연을 탈취하기로 한 이상, 자신의 지식을 활용하기로 한 이상 자신이 그 지식을 알게 된 합당한 이유가 필요했다. 도올학사라는 가장 완벽한 답이 그녀의 주변에 있었다.
‘도올학사이기에 무림지식에 빠삭하고, 내 가정교사이기에 나에게 그런 것들을 알려줘도 무방하다. 그리고 원작의 당소소가 쓰러지기 이전엔 그다지 접점도 없었으니, 핑계거리론 이만한 것이 없었지.’
도올학사는 그런 당소소의 생각을 읽으며 품속에서 책을 꺼내 올려두었다.
“사흉혈맥의 후계들을 알고 있으니,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내 무림지식의 핑계가 되어주어라…. 썩 괜찮은 제안이었네.”
“이제와서 묻기는 그렇지만, 제안을 수락하지 않으실 수도 있었잖아요? 혼돈일맥과 도철일맥은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는 대략 알고 계실 거고.”
“내가 도올학사임을 어떻게 알았는지 추궁도 하고, 그런 무림지식들은 어디서 얻었는지 캐묻고는 싶었다만….”
도올학사는 고개를 슬쩍 돌려 경계하는 듯한 모양새로 수염을 쓰다듬었다.
“학자로서는 흥미가 있었네. 궁기의 후예가 어떤 모습인지도 궁금했고.”
“궁기의 후예….”
당소소의 머릿속엔 머지않아 조우할 주인공의 묘사와 서술들이 떠올랐다. 도올학사의 말이 그녀를 생각 속에서 끄집어냈다.
“그래서, 오늘 말한다던 제자의 목적에 대해서 들어보도록 할까. 혹시 내 수염을 노린다던가….”
“정천무관이에요.”
“정천무관. 음.”
도올학사의 눈이 이리저리 굴러가며 당소소에 관한 것들을 재단하기 시작했다. 무너진 단전, 구멍이 숭숭 뚫려있는 허술한 무림 지식, 무공을 되찾는다 해도 아직 이류에 불과한 경지와 가문의 후광.
“힘들겠군.”
“힘들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서 오늘 말씀드리려고 한 거예요.”
“무엇을?”
당소소의 말에 도올학사의 시선이 돌아갔다.
“궁기의 후예는 일 년 뒤, 정천무관에 입학할 거예요. 도철일맥도 아마 그곳에 모일 거고…. 도올학사님께서 그곳에 가신다면, 자연스럽게 혼돈일맥의 의원 또한 정천무관으로 모이겠죠.”
“일 년 후라.”
“제가 감히 말씀드리긴 좀 그렇지만….”
탁!
당소소의 말에 도올학사는 막대기를 살짝 들어 탁자를 내리쳤다. 둔탁한 소리가 들리며 당소소의 말을 끊었다.
“겸손은 미덕이지만 지나치면 무례다.”
“예?”
“네 말에는 충분한 근거와 힘이 있으니, 자신을 믿어도 된다는 이야기네. 임시이긴 하지만, 자네는 내 제자였지 않았나?”
도올학사는 그렇게 말하며 말을 이어가라는 눈짓을 보냈다. 당소소는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사님께선 후학양성에 뜻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옳다. 사천성에 눌러앉아 당청과 널 가르쳤던 이유이기도 하니까.”
“그렇다면 정천무관에 가시는 게 뜻을 이루기에도 좋으실 거예요.”
당소소는 눈을 감았다. 주인공을 비롯한 수많은 고수가 그녀의 눈꺼풀 위로 그려진다. 정천무관의 교관들이 일컫기를, 그 누구를 뽑아도 재능덩어리인 괴물들이 즐비한 학년이라고. 실상은 주인공의 입학에 맞춰 이야기를 전개하기 위해 깔아둔 설정이겠지만.
“일년 뒤면 궁기일맥 뿐만이 아니라 원하시는 후기지수들이 엄청나게 들어올 테니까요.”
“또 수수께끼의 지식인가.”
“…네.”
도올학사는 실소를 지으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재밌겠군. 허나, 내가 진정 원하는 후학은 그런 자들이 아니네.”
“그럼…?”
“그 지식으로는 알 수 없는 건가?”
도올학사가 짓궂게 당소소를 놀려먹었다. 당소소는 알쏭달쏭한 그 말에 긴 고심에 잠긴다. 그 모습을 보던 도올학사는 힘없는 웃음을 터뜨리며 천에 싸인 막대기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흘흘, 말하는 것으로 보아 오늘이 마지막 교습인 듯하군.”
“무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아쉽지만…. 그래도 정천무관으로 향하시면 저보다 더 오성이 높은 이들이 즐비할 거예요.”
“그럼 모든 수업을 마친 기념으로 제자에게 선물을 주도록 함세.”
“이건 설마.”
당소소는 그 막대기를 쥐었다. 묵직한 무게가 그녀의 팔에 걸린다. 도올일맥이 내미는, 묵직한 무게의 막대기. 이 물체가 무엇인지 어렵잖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무궁검을 왜 저에게?”
“내가 가지고 있어 봐야 쓸 일도 없고, 당분간 도철에게도 갈 일이 없을 테니. 내가 받아왔네.”
도올학사는 그렇게 답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소소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날 영원히 안 볼 생각인가?”
“그렇지는….”
“그럼 정천무관에서 돌려주도록 하게. 나보단 자네에게 더 쓸모가 있을 듯하니까.”
도올학사는 문을 열었다. 그리고 바깥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심술궂은 외모의 노인을 확인했다.
“…….”
“청이의 글자 스승이셨던 분이군요.”
원숙한 외모와는 어울리지 않는 경어. 도올학사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제자에게 한마디를 던졌다.
“제자야.”
“예?”
“믿지 말도록.”
도올학사의 뜬금없는 말에 당소소의 미간이 좁아졌다.
‘믿지 말라?’
“섭섭하군요.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믿지 말라는 그런 심한 말씀을.”
“이만 가보도록 하지.”
도올학사는 말을 걸어오는 그를 무시하며 객실을 떠났다. 경어를 사용하던 사내는 탐탁잖은 콧바람을 뿜은 뒤, 다가오는 시녀들에게 경고했다.
“가족 간에 긴히 할 이야기가 있으니, 바깥에서 기다리도록.”
그렇게 말하며 그는 객실의 문을 닫았다. 틀어올린 머리는 검었고, 얕은 주름이 파여있는 얼굴은 미중년에 가까운 모습이었다. 도강언으로 출발하기 전, 가주전에서 봤었던 그 사람이었다. 왠지 모를 불쾌감이 당소소의 가슴을 긁어댔다.
‘뭐지? 이 감각.’
“그 때 이후로 반년인가? 오랜만이구나.”
“누구시죠?”
“아, 참 기억을 잃었다고 했었지.”
그는 잠시 턱을 쓰다듬더니, 수많은역할 중 그녀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답을 골랐다.
“난 일 장로, 독고륭이다. 당가대회의도 곧 시작되겠다, 당가의 금지옥엽들에게 인사라도 건네려고 찾아왔지.”
당소소는 그의 소개에서 기시감의 원인을 유추할 수 있었다.
‘독고수아….’
독고라는 성씨는, 그녀가 증오하던 어떤 이들의 모친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