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7화 〉이막[二幕] 일장[一章] 시우해빙[始雨解氷] 5
이막[二幕] 일장[一章] 시우해빙[始雨解氷] 5
“잠깐 괜찮겠지?”
독고륭이 당소소의 맞은편에 앉았다. 다리를 꼬고 턱을 치켜드는 여유있는 태도는 마치 독봉당의 주인은 자신인 양 느껴졌다. 그는 탁자를 세 차례 두드려 미묘한 표정으로 넋을 놓고 있던 당소소의 정신을 환기시켰다.
“대화를했으면 상대를 봐야지. 예의 없는 행동이잖으냐.”
“…….”
당소소의 시선이 독고륭으로 향했다. 묘한 불쾌감이 당소소의 집중을 방해했다.
‘당청, 당혁의 모습이 남아있어서 그런 건가.’
“무슨 일이신가요.”
“인사부터 하지 않고.”
훈계하는 듯한 목소리에 당소소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잠시간의 고민. 상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그를 존중해야 하는지, 아니면 적으로 대해야 하는지. 당소소는 천천히 일어나 고개를 까딱였다.
“가주의 여식 당소소가 장로님을 뵙니다.”
독고륭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앉거라. 그리 탓할 생각은 없었다.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내가 감안했어야 했거늘.”
“네.”
당소소가 자리에 앉았다. 독고륭은 깍지 낀 손을 무릎에 놓으며 당소소를 노려봤다.
“그래. 요즘 잘 지내느냐?”
“…뭐, 네.”
“내가 들은 것과는 다른데.”
“사건 이후 반년이 지났으니까요.”
그녀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조심스런 태도로 답했다. 독고륭의 시선이 주변을 훑었다.
“예술품 하나 없는 객실의 상태를 보아하니 잘 지내는 건 아닌 듯하구나. 기품도 없고, 질박하니…. 쯧. 객실의 모습은 곧 주인의 모습이다. 손님들이 이곳에 들를 때 마다 무슨 생각을 하겠느냐?”
“어, 별 생각 안하던데….”
“무지한 소리구나. 그런 태도로 명가의 일원을 자칭할 수 있겠느냐?”
독고륭의 꾸짖음에 당소소는 고개를 숙이며 사죄했다.
“죄송합니다. 꾸미는 것엔 별 생각이 없어서.”
“우리가 비싼 물품으로 치장하는 것은 꾸미는 것이아니다. 상대를 대하는 예의지. 아무리 기억을 잃었어도, 명가의 자녀로서 갖춰야 할 예의까지 잊어선 안 된다.”
“아, 그런 건가요.”
독고륭은시큰둥한 당소소의 태도를 무시하며 말했다.
“우선 객실부터 고쳐놓도록 하자. 곧 당문상단에서 유명화백의 병풍과 도자기, 비단으로짜낸 휘장을 가져다 줄 것이다. 시녀들을 시켜 단장하도록 하여라.”
“감사하지만, 전 별로 생각이 없어요.”
“손님께 예의를차리지 않을 생각이냐?”
“그건 아니지만….”
“그렇다면 받도록 하거라. 달리 금전을 지불하라 하지 않을 터이니.”
당소소는 독고륭의 강압적인 태도에 하릴없이 제안을 받아드릴 수밖에 없었다. 독고륭은 불만스러운 콧김을 한차례 뿜었다.
“그래, 불편한 점은 더 없느냐?”
‘너요, 너. 씨발아.’
“…딱히없어요.”
당소소는 목까지 치민 욕을 꾹 눌러 삼키며 대답했다. 그럼에도 독고륭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금전적으로 불편하다는 말은 들은바 있다. 거기에 주로 찾는 객잔도 있다지?”
“으음, 저는 잘….”
“애월루라고 하던가. 화검공자를 자주 만나던 곳이라고 들었다. 거기에 금전을 꽤 쓴다고 하던데….”
그 말에 당소소는 불편한 기색을 보였다.
‘내가 간 게 아니라당소소가 간 건데. 그런데 또 뭐라 말하려고….’
“뭐, 네 일탈까지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지. 슬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도록 하마.”
“예.”
“곧 당가대회의가 열릴 거라는 것은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
“제독전주님이 요양 중이셔서 미루어졌다는 걸로 들었습니다만.”
독고륭은 고개를 저었다.
“곧 열릴 것이다. 내외부적으로 꽤 많은 일들이 있었고, 이제 더는 서로의 불만을 쌓아둘 수 없으니 말이다. 내가 본가에 온 이유기도 하고.”
“그렇군요. 헌데, 저는 왜 보러 오셨나요?”
“당가대회의의 의제 때문이란다.”
“의제가 무엇이기에 저를?”
독고륭은 무릎에 올려둔 손을 탁자위에올렸다. 그는 상체를 살짝 기울인 뒤, 당소소에게 말했다.
“후계자 추대.”
“소가주라면 회 오, 크흠. 회 오라버니가….”
“아니지. 아니야. 잘 생각해보거라 소소야.”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독고륭의 목소리에 당소소는 어깨가 멋대로 떨렸다. 소름이 돋아서인지, 공포가 스멀스멀 마음을 향해 기어왔다.
“네가 네 아버지께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소리는 들었다. 가문의 하인들이 널 무시하고 있다는 것도.”
“음….”
당소소의 눈이 가늘어졌다.
‘누군가 내 일거수일투족을…. 아니, 당소소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했나보네. 애월루부터 시작해서 잡다한 일화들까지.’
당소소는 무릎에 손을 올렸다. 눈동자를 바닥으로 떨구며 치미는 감정을 진정시켰다. 손가락이 무릎을 두드렸다. 그녀는 주어진 정보로 이면을 훑기 시작했다.
‘당청과 당혁의 외조부. 그렇다면 보고자는 뻔하지. 어느 정도까지 보고했을까. 태연하게 날 찾아왔을 정도면 실험체로 썼다는 내용 정도는 누락했을 확률이 높아. 그럼 이제 내게 찾아와서 들러붙는 이유인데. 소가주는 당회가 아니다. 그럼, 다른 이를 추대하려고 하는 건가? 내가 아는 한, 후보군은 없는데.’
얼추 상대의 저의를 살펴본그녀는 다시 눈동자를 들어 올려 독고륭을 바라봤다. 독고륭은 그런 그녀의 태도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청이…. 당청이 보고했던 모습과는 꽤 색다른 모습을 하고있구나.”
“어떤 모습이라고 했나요?”
“풍류를 즐길 줄 아는 예쁘장한 동생이라고 말을 했었지.”
당소소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얼굴만 예쁜 놈팽이 망나니라고 말했겠지.’
“그럼, 그 둘이 제게 해왔던 행동들도 보고를 받으셨겠네요.”
“그래서 내가 찾아왔다. 수아는 당가를 떠났고 둘은 지은 죄로인해 이 세상을 떠났으니, 내가 대신 사죄하러 오는 것이 이치에 맞는 행동인 것 같아서 말이다.”
독고륭의 말에 당소소는 눈을 찡그리며 혐오감을 감추지 않았다. 마치자신이 선생인 듯 훈계를 하면 훈계를 하고 있지, 사죄를 하러 온 이의 태도는 절대 아니었기에. 독고륭은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말을 이어갔다.
“그래서 장로회에선 널 소가주의 후보로 추대하는 데에 중지를 모았다.”
“누구 마음대로 그런 짓을….”
“멸시받아왔던 하인들에게서는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널 무시하던 당회를 강제로 부려먹을 수도 있을 것이고, 당청과 당혁이 해왔던 만행들을 철저하게 조사할 수도 있겠지.”
독고륭은 상체를 기울여 당소소와의 거리를 좁혔다.
“솔직히, 심리적으로 거부감이 든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생각해봐라. 여태 널 고생만 시켰던 네 아버지도, 네가 소가주가 되는 순간 널 돌아볼 수밖에 없겠지.”
“…….”
“네가 우리와 뜻을 함께한다면, 원하는 모든 것을 주도록 하마. 평생토록 애월루를 이용하게 해주고, 당연히 네가 평생 써도 모자랄 금전 또한 덤으로 주마. 화검공자같은 이들을 좋아한다 했으니, 그와 비슷한 공자들도 당문상단의 재력이라면 소개시켜줄 수 있다.”
당소소는 오른손을 올려 눈을 비볐다. 영락없이 고민하는 모양새였다. 독고륭은 그녀의 태도를 보며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널 못살게 굴었던 이들의 혈육이라 믿지 못한다는 것쯤은 알고 있단다. 하지만 우리의 손을 잡으면, 네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으니까.”
“장로회에서 원하는 것은 제가 소가주 자리에 입후보하는 것뿐인가요?”
“입후보하고그저 우리의지시에 따라 얌전히 앉아있기만 하면 된단다. 어려울 것 없다. 넌 그저 가만히 앉아만 있다, 네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으면 된다.”
당소소는 실눈을 떴다. 가려진 손가락 틈 사이로 자색의 시선이 섬찟했다.
“…연락은언제까지 드리면 될까요?”
“늦어도 삼 일 안에는 연락을 줘야한다. 장로회에서도 의견이 많이 갈리고 있으니.”
“좋아요. 삼 일 안에 연락을 드릴게요.”
당소소는 다시 눈을 감으며 길게 숨을 뱉었다. 원하는 바를 모두 말한 독고륭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네게는 나쁘지 않은 제안일거다. 긍정적인 대답 기대하고 있으마.”
“…살펴가세요.”
당소소는 자리에 앉은 채 독고륭을 보냈다. 그 자세가 못마땅한 듯 흘겨보던 독고륭이었지만, 이내 객실의 문을 열고 떠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당소소는 의자에 깊숙이 몸을 뉘이며 팔걸이에 손을 놓았다.
‘지친다.’
힘들지 않은 일들은 없었다. 암기를 쉬이 다루게 하는 무공인 산류수를 단련하는 것도, 도올학사에게 간단한 학문을 배우는 것도. 하루도 빠짐없이 보법과 암기투척을 연습하는 것 또한. 하지만, 당소소에게는 그것보다 더 힘든 일은 타인과 말을 섞으며 감정을 소모하는 것이었다.
‘평생을 혼자살아오니까, 다른 사람이랑 설전을 벌이고 신경전을 벌이는 게 너무 힘드네.’
당소소는 축 늘어져서 객실의 창문을 바라봤다. 내리는 비에 회색으로 젖은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습기가 축축하게 올라오니,몸도 마음도 더 늘어지는 듯 했다. 당소소는 슬그머니 눈을 감으며 때 이른 낮잠을 청했다.
“으음….”
“아가씨, 진명이 뵙길 청합니다. 들어오라고 할까요?”
점점 단잠에 빠져드는 당소소의 정신을 건져 올리는 낭랑한 음성. 그녀는 천천히 눈을 뜨며 멍하니 객실의 문을 바라봤다. 낭랑한 음성은 당소소가 제정신을 차리는 것을 기다리지 않았다.
“아가씨?”
“들어오라고…, 해요….”
당소소는 반개한 눈을 비비며 늘어졌던 몸을 천천히 세웠다. 객실 문이 열리고, 진명이 들어오며 그 광경을 목격했다.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
그녀는 새초롬한 눈으로 진명을 노려봤다.진명은 멋쩍은 표정으로 뒷목을 긁적였다.
“뭐, 그럼. 수련은 잠시 뒤에 하도록 할까요?”
“됐어.”
당소소는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진명은 객실을 살피며 물었다.
“누가 왔었습니까?”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아가씨는 대인관계가 지극히 좁으시니, 객실에 누구 하나를 들여도 티가 나잖습니까.”
진명의 시선은 뒤로 쭉 빼놓고 아무렇게나 널브러뜨린 의자를 바라봤다. 누군가의 시중을 받는 이의 습관이 도드라졌다. 진명은 그 의자를 다시 제자리에 배치했다. 당소소는 그런 진명을 유심히 바라보다, 그의 팔에 주먹을 날렸다.
“어휴, 왜 이러실까.”
“나 친구 많거든, 씨발아?”
“백서희 소저 한 분밖에 없잖습니까. 뭐, 더 계십니까?”
“운령도 친구…. 아니, 친구인가? 원수 같기도 하고….”
진명은 피식 웃으며 고심하는 당소소를 뒤로 하고 객실을 나섰다.
“야, 한 살 차이도 친구 맞…?”
진명의 인정을 받으려던 당소소 앞엔 텅 빈 객실만이 맞이할 뿐이었다. 그녀는코웃음을 터뜨리며 진명의 멱살을 휘어잡기 위해 성큼성큼 밖으로 나섰다.
“진명 이 씹….”
“독화 당소소 소저 본인 맞으신지요.”
“어….”
그러나 그녀를 반기는 것은 진명이 아닌, 말끔한 정복을 차려입은 중년 사내 한명이었다. 엄숙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는그의 표정엔, 숨길 수 없는 당혹이 섞여있었다. 당소소는 서둘러 헛기침을 해 분위기를 환기시킨 후, 민망스런 몸짓으로 포권을 했다.
“사천당문의 여식, 당소소라고 합니다.”
“정천무관의 무사, 지후라고 합니다. 명성이 자자한 독화 소저를 뵈게 되어 영광입니다.”
“네….”
지후의 진중한 말에 당소소는 포권을 풀며 고개를 푹 숙였다. 지후는 부끄러움에 몸 둘 바를 모르는 당소소를 앞에 두고서도, 태연스럽게 품 안에서 서신 하나를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정천무관에서 소저께 보낸 서신입니다.”
“정천무관에서, 저를…?”
“예. 받으시지요.”
지후의 말에 당소소는 서신을 받아들고 겉면을 유심히 살폈다.
‘이런 건 원작에 없었는데….’
“열어보시고 내용을 확인하시면, 그 내용에 대해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뭐, 네.”
당소소는 미심쩍은 눈치로 서신을 펼쳐들었다. 서신의 서문엔, 미려한 글씨로 초청장이라는 단어가 써져있었다.
“초청장?”
“남궁란 소저께서 당소소 소저를 용봉지회의 만찬에 초대하고 싶다고 하십니다. 부디 시간이 되시면, 모쪼록 귀하신 발걸음을 청하고자 합니다.”
“용봉지회면….”
“예, 유력문파전형으로 정천무관에 입관한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의 자녀들이 모인 곳이지요. 아마 남궁란 소저께선 오대세가의 수장인 남궁세가의 자녀로서 소저께 관심이 있으신 듯합니다.”
지후는 당소소를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수락하시겠습니까?”
그의 물음에 당소소는 서신을 접어, 자신의 소매에 집어넣었다.
“기꺼이.”
철퍽!
봄비에 녹아내린 눈더미가 기와에서 떨어졌다. 정원의 진흙에 푹 빠진 눈더미는, 이윽고 녹아내려 한 톨의 새싹을 드러냈다. 겨울은 가고, 봄이 왔다. 올해의 첫 비는 혹한을 몰아내고, 새 이야기를 몰고왔다.
수 많은 이야기의 새싹이, 움트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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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막[二幕] 정천하재[正天下在], 일장[一章] - 시우해빙[始雨解氷]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