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8화 〉야사[野史], 마도공녀[魔道公女]
흑색의 장포를 걸친 여인이 협곡을 걷고 있었다. 절뚝거리는 걸음새와 오른쪽 눈을 가린 안대는 그녀가 범상치 않은 자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태양이 중천에 있음에도 살을 에는 한기는 그녀의 얼굴을 거칠게 훑었다.
“…….”
그녀의 발걸음이 멈췄다. 퍼석거리는 긴 머리칼이 흩날렸다. 외눈은 협곡의 끝에 있는 안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안개를 경계로 세워진 비석에 놓여있었다. 마곡환림[魔谷幻林]이라는 글자가 음각되어있었다. 해가 기울고, 그녀는 안개의 바로 앞에서 우두커니 서있었다.
“네가 그 유명한 소교주의 비[妃]인가?”
“…….”
그녀는 안개를 헤치고 걸어 나오는 노인을 바라봤다. 자글거리는 수염과 굽은 등허리, 볼품없이 깎아놓은 지팡이. 산발인 머리와 제멋대로 기른 수염은 추레하다는 단어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았다.그는 지팡이를 짚으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눈을 보아하니 확실하군. 소교주가 적출했다지?”
“…명부마도[冥府魔道].”
그녀는 그 말과 함께장포를 벗어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 무게가 무거웠던지,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다. 명부마도라 불린 노인은 그녀에게 다가와 지팡이로 왼다리를 툭툭 쳤다.
“이건?”
“요재, 그 씨발년.”
“쯧쯧. 보아하니 치료조차 제대로 받지 못해 아예 비틀려버렸군.”
“사마문의 흥미가 사라진 결과야.”
그녀는 명부마도에게 다리를 드러냈다. 멍투성이의 다리가 이상한 각도로 비틀려있었다. 그는 다리를 보며 키득대더니, 지팡이를 후려쳐 그녀를 주저앉혔다.
“으, 윽….”
“그래서, 날 어떻게 찾은 게냐? 그런 몸으로 사조곡[死照谷]을 넘어온 것도 신기하다만.”
그녀는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 던져놓은 장포에 눈짓을 할 뿐. 명부마도는 지팡이로 흑색의 장포를 들췄다. 수많은 무기가 쇳소리를 내며 그를 반겼다.
“…천추비와마령도, 백환검. 적혈추. 하나를 발견해도 피바람이 불 기연들이 한자리에 있으니, 걸어다니는 보고라고 해도 믿겠구나.”
“난 당신이 무엇을 찾고 있는지 조차 알고 있어. 이런 것들도, 이것 보다 더한 것들도. 얼마든지 찾아줄 수 있어.”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지.”
명부마도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먼저 물은 것은 본좌가 아니더냐?”
“후.”
그녀는 짧게 숨을 뱉으며 격앙된 마음을 진정시켰다. 실없는 웃음이 입가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이내 주체할 수 없이 쏟아지는 웃음 속에서, 그녀는 욕을 뱉었다.
“미래를 안다고 까불고 찧던 결과가 이건가. 씨발.”
“…미래?”
“난 사마문이라는 빌어먹을 새끼에게 납치됐었을 때, 고문을 버티는 쪽 보다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활용해 상황을 타개해나가는 게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어.”
그녀는 팔을 걷었다. 드문드문 보이는 화상자국과 피멍자국, 채 지우지 못한 칼자국들이 자욱했다.
“웃으래서 웃었더니 인두를 지져대고,울래서 울었더니 발길질을 하고, 화를 내래서 화를 냈더니 날 베더라고.”
“그래서 교는 그를 마귀라 부르지. 영 불편한 성격이야.반골이라니까.”
“식사도 주질 않고, 치료도 해주질 않고, 부하들은 날 더 고문하고…. 큭, 큭큭! 씨팔놈들, 돈 떼먹는 새끼들도 공구리질을 시킬 때 라면은 줬어.”
그녀는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뱉어대며 땅을 움켜쥐었다.
“난 너희가 어떻게 될지 알고 있어.”
“어떻게?”
“말하면, 날 죽일거잖아?”
“그야….”
명부마도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으며 지팡이를 비틀었다. 철컥거리는 쇳소리가 적나라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그 쇳소리에 목을 뒤로 젖히며 웃었다.
“하, 하하…!”
“죽음을 앞두니, 두렵나?”
“그래, 싫다.”
떨리는 눈꺼풀은 원망을 토해냈다.
“아픈 게 싫다. 불편한 게 싫다. 죽는 게 싫다. 어째서 난, 이렇게 불행해야 하는 거지. 불행의 끝에 도달한 이 곳에서조차, 왜 난 불행해야 하지?”
“그래서, 본좌를 찾아온 것이 널 살려달라고 청하려는 것이었나?”
어깨의 흐느낌이 잦아든다. 훌쩍임이 멎었다. 잔뜩 쉰 목소리가 들려왔다.
“명부마도. 전대 천마의 호법이며, 십계십마 중 명마[冥魔]의 스승. 천산혈로의 사건으로 폐위된 전대 교주를 보좌하는 중이지.”
“……!”
차캉!
지팡이에서 검날이 뽑히며 그녀의 목줄기를 훑었다. 옅은 혈선이 생기며 몇 방울 피를 흘리게 했다.
“심락귀혼검. 주변 자연지기를 동화시켜, 마기를 뿌리고 반경 삼 장의 모든 공간에서 참격을 뻗을 수 있지. 멀리서 화살을 쏘거나, 같이 자연지기로 맞불을 붙여도 파훼가 될뿐더러 더 높은 경지의 인물에겐 써먹질 못한다.”
“흥, 사마문이 널 흠씬 두들긴 뒤 내쫓아 고육지계라도 써보려는 모양인데….”
“날 소교주로 만들어라.”
그녀는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꼴이 우스워도, 초라해도. 상관은 없었다. 이제 더는 불행이 싫었으니까.
“네가 꿈꾸는 전대 교주의 복권, 그 교주가 꿈꾸는 천마신교의 국교성립. 그리고 휘하의 졸개들이 원하는 마도천하[魔道天下]의 꿈…. 내가 모두 이루어 줄 테니까. 전부, 이뤄줄 테니까.”
명부마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당가의 망나니 규수가 알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교에 대해 무관심을 견지하는 사마문이 알 법한 내용 또한 아니었다. 모든 가능성이 없으니, 결국 그녀가 말했던 ‘알고 있다.’는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이 당소소를 행복하게 만들어라, 명부마도.”
사회에서 버림받은, 이야기에게 버림받은, 사마문에게 버림받은 그녀.
당소소가, 나지막이 절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