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과거로 회귀하다.
탕!
지혁은 실내 테니스장에서 땀범벅을 한 채로 서브 연습을 하고 있었다.
공을 올리는 토스부터 라켓이 휘둘러져 임팩트하기 까지.
마치 교과서에 나올 것 같이 좋은 자세다.
하지만 멋진 자세와 달리 반대편 코트에 꽂히는 공의 위력은 영 별로였다.
잘해봐야 150km?
주니어 대회에서도 안 먹힐 형편없는 구속이다.
그 이질적인 모습에 구경하고 있던 사람들이 수근 거렸다.
“이지혁도 이제 끝났네.”
“ATP(세계 랭킹) 50위권 선수가 여기까지 떨어질 줄이야.”
“올해로 재활 기간이 3년이지? 아무리 탑 랭커라도 이 정도면 가망 없는 거 아니야?”
지혁의 뒷담화를 하고 있는 그들의 얼굴은 어째서인지 조금 들떠 보였다.
닿을 수 없는 위치에 있던 별이 바닥까지 추락한 것에 희열을 느낀 것이다.
연습하고 있던 지혁은 주변이 소란스럽자 눈을 힐끗 돌렸다.
그리고 자신을 험담하고 있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저 놈들은?’
분명 안면이 있는 실업팀의 선수들이다.
대충 ATP 랭킹 1,000위권 밖의 선수들로 기억한다.
3년 전만 해도 굽신거리며 코칭 한 번 해달라고 부탁하던 녀석들이었는데.
그런 놈들이 이제 와서 자신을 농담거리로 삼고 있다.
꽈아악.
지혁은 참기 힘든 모멸감에 라켓을 꽉 쥐었다.
예전 같으면 바로 달려가서 욕을 퍼부었을 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허탈감이 분노를 가라앉혔다.
가망 없다는 그들의 말이 폐부를 찔러서였다.
‘이제 은퇴해야 되는 건가···.’
지혁은 별 볼일 없는 선수들까지 자신을 비아냥대는 게 지금의 위치를 말해주는 것 같았다.
게다가 작년부터 기업 후원이 끊겼으니 남은 재산을 더 깎아 먹기 싫으면 이제 다른 일을 찾아 봐야한다.
사실 3년도 많이 버틴 것이다.
선수 복귀가 불가능 하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단지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했을 뿐.
지금 당장 은퇴해도 지난 커리어가 있으니 어디 가서 굶지는 않을 거다.
오히려 수입이 없는 지금보다 훨씬 낫겠지.
턱! 턱!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자꾸 폴트가 나왔다.
예전 같으면 눈을 감고도 성공시켰을 텐데.
팔이 고장 나서인지 서브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후···.”
결국 마음이 심란해진 지혁은 라켓을 가방에 넣었다.
이런 상태로 연습해봤자 아무런 소용이 없었기 때문이다.
테니스 코트 밖으로 나가는 그의 등이 오늘따라 작아 보였다.
***
띠띠띠띠- 띠로릭-
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다.
썰렁한 방이 보이자 왠지 착잡한 기분이 든다.
술이라도 한 잔하고 싶었지만 냉장고에 술은 없었다.
재활 중에 술을 마실 수 없어서 집에 들여 놓지 않아서였다.
지이잉- 지이잉-
짐을 내려놓고 옷을 벗고 있을 때 식탁에 올려 둔 휴대폰이 진동했다.
‘연락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재활을 하면서 주변과 연락을 끊은 지도 오래다.
휴대폰을 집어 들어 확인해보자 액정에는 '악마'라고 적혀있다.
“이런 이름은 저장해 둔 적이 없는데.”
뭔가 이상한 장난이라도 치나 싶어 짜증이 확 났다.
남의 휴대폰까지 건드리다니.
지혁은 신경적인 손짓으로 통화를 연결했다.
“전화 받았습니다. 누구세요?”
-···지지지직.
당장 따지려고 했지만 연결이 잘 안되는지 노이즈만 들린다.
“장난치는···.”
-···지지직. 아아. 연결됐나?
“이봐요. 대체 누구 길래 이런 장난을 하는 겁니까?”
-오. 이지혁군 장난이라니 오해일세. 나는 좋은 제안을 하려고 이렇게 수고를 들여 연락한 걸세.
“그게 뭔 소립니까? 대체 누구신데요? 그리고 번호가 등록되어 있던데 제 휴대폰은 왜 만진 겁니까?”
-그건 인사였을 뿐이네.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함세.
지혁은 예상보다 나이가 지긋한 목소리에 격렬하게 화를 낼 수 없었다.
목소리를 들으면 최소 60살은 넘어 보이는데 왜 이런 짓을 하는 걸까.
“후···. 그래서 무슨 용건이신데요?”
-자네가 내 도움이 필요한 것 같아서 말이네.
“할아버지 도움은 됐어요. 그러니까 다음에는 이런 장난하지마세요. 또 이러시면 신고합니다.”
-끌끌끌. 내 말을 믿지 못하는 모양이구만.
“끊습니다.”
-자네 테니스를 다시 하고 싶지 않나?
멈칫.
전화를 끊으려던 지혁의 몸이 굳었다.
악질적인 장난이다.
부상으로 3년 동안 빌빌대는 선수에게 이런 짓이라니.
당장 욕설을 퍼붓고 전화를 끊어야 하지만 지혁은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나, 혹시나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상적인 상태라면 이런 말에 콧방귀도 뀌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궁지에 몰릴 대로 몰린 지혁의 의지는 매우 약해져 있었다.
“···하고 싶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다시 하고 싶나?
“팔이 나아서 다시 테니스를 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어요. 제게 테니스는 전부예요.”
-진심으로 영혼까지 팔 수 있다고?
“그렇다고요! 혹시 무슨 방법이라도 있는 거예요?”
-흐흐흐. 있지. 있고말고. 그것보다 방금 한 말 잊지 마라.”
팍!
갑자기 천장에 달린 형광등이 폭발했다.
“뭐··· 뭐야.”
스멀스멀
지혁은 몸을 움츠린 상태로 주위를 조심히 둘러봤다.
그러자 어두워진 거실의 중간에서 어떤 형체가 보였다.
“사람? ···아니 악마인가?”
그건 움츠려 있는 거대한 악마였다.
산양 뿔을 가진 노인 형상의 악마는 천천히 기지개를 하듯 몸을 일으켰다.
-하아. 반갑구나.
“······.”
-아직 생각이 변하지 않았겠지? 다시 테니스를 하고 싶다는 생각 말이다.
초현실적인 상황이 닥치자 지혁은 머리가 백지가 되었다.
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날 줄 몰랐기 때문이다.
하지만 멍한 상황에서도 테니스라는 말을 듣자 정신이 번쩍 뜨였다.
‘다시 테니스를 할 수 있다고?’
“···생각은 변하지 않았어요.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어요.”
파라라락.
-좋군. 좋아. 그럼 여기에 서명해라.
지혁이 생각이 바뀌지 않았다고 말하자 악마는 음산하게 웃으며 양피지를 내밀었다.
이때까지 말한 내용이 적힌 계약서였다.
내용을 한 번 살펴본 지혁은 주먹을 한 번 꽉 쥐고 악마가 건네준 펜으로 사인했다.
두려움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어차피 이 세상에 남은 가족도 없다.
일이 잘못 되서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더라도 지금 보다 떨어질 바닥은 없다.
-크크크크. 계약은 성립됐다. 이제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거다.
지혁은 악마의 웃음소리와 함께 정신을 잃었다.
얼마 후 테니스 천재라고 불리던 이지혁의 사망 소식이 세상에 알려졌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과거 US 오픈 8강이라는 좋은 성적을 얻으면서 천재라고 불리던 선수의 죽음에 테니스계는 떠들썩해졌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금세 조용해졌다.
한물간 퇴물 선수에 대한 관심은 딱 그 정도였던 것이다.
***
“허억!”
지혁은 거친 숨을 내뱉으며 급히 몸을 일으켰다.
몸에 식은땀이 가득한 채로 주위를 둘러보자 낯선 방이 보인다.
“여긴 어디야? 아! 그보다 계약을 했었는데.”
방 안을 살피던 지혁은 갑자기 악마와 계약한 것이 떠올랐다.
영혼을 대가로 테니스를 다시 하게 해준다는 계약.
분명 자신은 그 계약을 받아들인 직후에 정신을 잃었다.
“···그럼 팔이 고쳐진 건가!?
지혁은 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오른팔을 시험해봤다.
강하게 움직여도 고통이 없다.
분명 낮에 연습할 때만 해도 통증이 느껴졌는데.
“진짜 나았잖아····.”
한참 동안 오른팔을 움직이던 지혁은 갑자기 움직임을 멈췄다.
이제야 팔이 나았다는 걸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러자 지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쏟아졌다.
그토록 원하는 일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자 지난 3년간의 서러움이 한 번에 밀려와서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빨리, 빨리 테니스를 쳐보자.”
지금 당장 테니스를 쳐보고 싶었다.
실력이 얼마나 돌아왔을지 시험해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직 이곳이 어딘지 모르지만 이젠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가장 중요한 건 팔의 상태다.
달칵
그렇게 방을 나가려고 마음먹었을 때 갑자기 밖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얼굴의 중년인이 보였다.
까무잡잡 얼굴에 탄탄한 체격의 남자.
지혁의 아버지, 이성민이다.
“어···어···”
‘어떻게··· 돌아가신지 5년이 넘었는데.’
지혁은 아버지의 얼굴을 보며 입을 벌렸다.
장례까지 치렀던 성민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말을 더듬어? 새벽 운동 나가야지. 빨리 준비해.”
“······.”
지혁이 대답도 하지 않고 계속 멍하니 서있자 성민은 그를 살폈다.
그리고 눈물 자국이 있는 걸 발견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지혁아, 어디 아프니?”
“아니요···.”
“그럼 무슨 일 있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왜 그러는 거야?”
지혁은 성민과 대화를 하면서 다시 방 안을 눈에 담았다.
낯선 곳이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눈에 익은 곳이다.
침대 옆의 작은 책상과 나무 책장에 꽂힌 테니스 관련 서적들, 그리고 구석에 정리되어 있는 테니스 라켓까지.
처음에 눈치 채지 못한 게 이상할 정도로 전부 친숙한 물건들이다.
‘····여긴 어릴 때 살던 집이야. 난 과거로 돌아왔어.’
“아버지, 올해가 몇 년도에요?”
“응? 2009년이잖아. 얘가 잠이 덜 깼나?”
“····악몽을 꿔서 그런 것 같아요. 지독한 악몽이요.”
“안 아프면 됐다. 오늘 컨디션이 안 좋은 거 같은데 하루 쉴래?”
“아뇨. 부지런히 해야죠. 옷 갈아입을 게요.”
“그래. 준비되면 말해라.”
지혁은 트레이닝 복으로 갈아입고 성민을 따라 집 밖으로 나갔다.
가까운 공원까지 걸어서 도착한 두 사람은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조깅을 시작했다.
그렇게 5km 정도 달리자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는다.
“후우. 후우. 이제 올라가서 아침 먹자.”
“헉. 헉. 헉. 네.”
새벽 운동을 마친 두 사람은 집으로 돌아가 아침을 먹었다.
그러자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지혁은 방으로 돌아와 휴대폰을 찾았다.
정확한 날짜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여기 있네.”
구식 슬라이드 폰을 집어든 지혁은 휴대폰을 켰다.
2009년 2월 14일
“고등학교를 입학하기 직전에 돌아왔구나···.”
띠링
그때 갑자기 휴대폰에서 문자 알림음이 들렸다.
“누구지?”
10년도 전의 일이라 이 때 누구랑 친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중에 시간이 지나면서 연락이 모두 끊겼기 때문이다.
지혁은 휴대폰을 들어 메세지를 확인해봤다.
[계약은 만족스럽나? 대가가 충분해서 다른 서비스도 조금 해줬다네. 그럼 지옥에서 다시 만나길 기대하지.]
악마가 보낸 문자를 전부 읽자 갑자기 휴대폰에서 어플이 강제로 켜지면서 화면이 바뀌었다.
[이지혁]
근력: 49 민첩: 62 체력: 55
서브(C+), 포핸드(A+), 백핸드(B), 풋워크(B+), 외모(D)
“····이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