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첫 대결
박철웅 감독은 신입생들의 실력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스카웃을 하기도 했고 중학생 시절의 입상 경력과 주니어 랭킹만 봐도 뻔했기 때문이다.
냉정하게 그들의 순위를 평가해보면 이신우, 이지혁, 최재영, 김수민 순이다.
큰 변수가 없다면 승패도 이 순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먼저 게임할 사람?”
“감독님! 제가 먼저 할게요!”
“그래. 재영이부터 하자.”
박 감독이 허락하자 최재영과 김수민은 코트 위로 올라갔다.
그리고 게임을 곧바로 시작하지 않고 가볍게 몸을 풀었다.
부상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10분 정도 지나자 두 사람 다 준비가 되었다.
“준비 됐어요.”
“그래. 서브 순서는 동전으로 정하자. 앞면은 재영이 뒷면은 수민이다.”
팅.
박 감독은 동전의 앞면과 뒷면을 차례로 보여주더니 허공에 튕기었다.
정식 시합에도 쓰는 방법이라서 불만을 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예쓰!”
바닥에 떨어진 동전이 앞면을 향하자 재영이 기쁨의 소리를 내질렀다.
박 감독은 체어 엠파이어 자리로 옮겨 경기의 심판을 맡았다.
“시작하자. 서브 최재영.”
박 감독의 지시에 곧바로 두 사람은 각자의 코트 위에 섰다.
“으어엇!”
탕!
“피프틴 러브.”
최재영의 퍼스트 서브가 정확히 반대편 서비스 코트에 떨어졌다.
160km가 넘어 보이는 플랫 서브다.
김수민은 빠르게 날아오는 서브에 라켓을 제대로 가져다 대지 못했다.
프로 선수급은 아니지만 나이를 생각하면 제법 괜찮은 서브다.
탕! 탕! 탕!
그렇게 최재영의 다음 서브가 시작되었다.
방금 전의 설욕을 하려 했는지 김수민은 강한 리턴을 보냈다.
그리고 랠리가 길게 이어졌다.
서로의 실력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턱!
그러다 김수민이 백핸드로 친 공이 네트에 걸렸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그렇듯이 그도 백핸드가 약점인 것 같다.
“서티 러브”
30:0.
테니스는 15-30-40-60, 이렇게 총 4개의 점수를 얻으면 한 게임이 끝난다.
‘첫 게임은 최재영이 이기겠네.’
“게임 최재영. 6:0”
지혁의 예상대로 서비스 게임은 최재영이 가져갔다.
이제야 진지한 눈빛이 된 김수민은 게임을 지속했다.
···.
“세트 최재영. 6:4 경기 종료. 둘 다 수고했다.”
게임의 승자가 가려지자 경기를 하던 최재영과 김수민은 네트 앞으로 다가와 서로 악수했다.
두 사람이 친해서 그런 게 아니라 테니스의 기본예절이라서 그렇다.
“이제 지혁이, 신우 차례다. 바로 코트로 들어가.”
지혁과 신우는 앞의 경기가 있는 동안 미리 몸을 풀어 두었다.
박 감독도 그걸 알고 있기에 바로 동전을 튕겼다.
팅.
“서브는 지혁이네.”
‘과연 얼마나 받아낼 수 있을까?’
지혁은 상대가 자신의 공을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기대됐다.
이 당시 이신우의 실력은 자신보다 더 좋았던 걸로 기억한다.
후에 프로가 되면서 뒤집혔지만 중, 고등부 대회에서 신우의 포스는 장난이 아니었다.
퉁.퉁.퉁.퉁
지혁은 공을 몇 번 바닥에 튕겨보고 서브를 준비했다.
휘리릭-
지혁은 아치처럼 휘어진 몸을 회전시키면서 라켓을 휘둘렀다.
“으어엇!”
탕!!
동시에 강력한 서브가 T존에 떨어졌다.
절묘하게 떨어지는 코스에 이신우는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했다.
“······피프틴 러브.”
탕!!
지혁의 두 번째 서브도 방금과 같은 T존에 떨어졌다.
‘오늘 서브가 잘 들어가는데?’
훈련을 하느라 시끄럽던 테니스장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관심 없는 척 하면서도 신입생들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탕!! 탕!!
“게임 이지혁.”
결국 지혁은 4개의 서브 에이스로 첫 서비스 게임을 가져왔다.
이신우는 단 한 번도 라켓에 공을 맞춰보지 못했다.
“후··· 흐엇!”
서브권을 얻은 이신우는 강한 서브를 날렸다.
탕!
“러브 피프틴.”
하지만 지혁은 가볍게 백핸드 리턴을 보내서 점수를 얻었다.
다운 더 라인에 떨어지는 절묘한 리턴 에이스.
상대의 서브에 전혀 부담을 느끼지 않는 퍼포먼스다.
“게임 이지혁.”
2:0.
그렇게 두 번째 게임도 지혁이 손쉽게 승리했다.
이번에도 한 점도 내주지 않은 러브 게임이었다.
“와··· 저 신입생 장난 아닌데?”
“이지혁이라고 했지? 쟤 유학파야?”
“아닐걸? 두 사람 다 중등부에서 실력 좋기로 유명했어.”
“이신우, 쟤도 유명했다고? 별로 잘해 보이지 않는데?”
“상대가 너무 강해서 그래. 내가 알기로 이신우가 중등부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었을 걸?”
2, 3학년은 지혁의 실력에 술렁거렸다.
서브면 서브, 스트로크면 스트로크.
모두 예사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트 이지혁. 6:0”
“와···.”
“베이글 세트야.”
지혁은 더블 폴트로 실점을 1번 했지만 게임은 한 번도 내주지 않고 경기를 끝냈다.
압도적인 실력 차가 있어야 나오는 결과였다.
‘···너무 했나?”
지혁은 반대편에서 이신우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걸 발견했다.
오랜만에 경기를 해서 너무 기분을 냈나 보다.
아마 동갑인 선수에게 완패를 당했으니 충격이 클 거다.
더구나 이신우는 중학생 때 수위에 꼽히는 실력이었으니 말이다.
지혁은 미안한 표정으로 네트로 걸어갔다.
그러자 이신우도 고개를 숙인채로 다가왔다.
꽈악-
‘이 녀석 봐라?’
지혁은 악수를 하던 중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웃음이 나왔다.
이신우가 악수를 하면서 힘을 줬기 때문이다.
눈을 쳐다보니 이글이글 불타고 있다.
마치 잡아먹을 것 같은 기세다.
승부욕이 가득 담긴 신우의 눈에 지혁은 씨익 웃었다.
상태를 보니 걱정할 필요는 없었나 보다.
하긴 이걸로 무너질 정도면 프로가 되지 못했겠지.
프로가 되면 패배는 일상과도 같다.
고작 한 번 졌다고 좌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선수라면 저런 승부욕이 있어야 한다.
“지혁이는 나 좀 보자.”
신입생들의 경기가 모두 끝나자 박 감독은 지혁을 따로 호출했다.
무언가 할 말이 생긴 것 같았다.
박 감독은 테니스장 구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몇 달 전보다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해외 아카데미라도 다녀온 거냐?”
“아뇨. 그냥 꾸준히 훈련하다 보니 실력이 는 것 같아요.”
“피는 못 속인다고 프로 시절의 성민이를 보는 것 같더구나.”
“감사합니다. 그래도 아직 아버지의 실력을 따라가기에는 멀었죠.”
지혁은 박 감독의 질문에 형식적인 내용으로 답했다.
실력 상승의 원인을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래에서 돌아왔다고 할 순 없잖아.’
28살에서 17살로 회귀한 게 진짜 비결이다.
하지만 이걸 사실대로 말할 수 있을 리 없다.
“아니, 고등부 선수들과 비교해도 괜찮은 실력이야. 지혁이, 너도 이번 3월에 있는 전국종별대회에 나가 볼래?”
“기회를 주시면 저야 좋죠.”
지혁은 감독의 제의를 고민하지 않고 단숨에 승낙했다.
실전 경험은 많을수록 좋기 때문이다.
비록 전국종별대회가 고등부 대회였지만 한국에서 테니스를 제일 잘하는 고등학생 256명이 참가한다.
4월에 열리는 퓨처스 대회에 참가하기 전에 딱 좋다.
프로 데뷔 전의 에피타이저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럼 참가 신청을 해 놓으마. 3월 21일부터 3월 27일까지니 아버지한테 미리 말씀드려라.”
“네. 오늘 바로 말씀 드릴게요.”
“그래. 져도 되니까 크게 부담 갖지 말고. 아직 1학년이니까 시간은 많아.”
박 감독은 그 말을 끝으로 신입생들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지혁과 동기들은 힘든 훈련을 시작했다.
아카데미에서 하던 것 보다 못했지만 꽤 체계적인 운동들이었다.
지혁은 학교에서 오후 훈련을 마치고 아카데미로 이동해 마지막 훈련 스케줄을 소화헀다.
그렇게 녹초가 되서 집으로 돌아오니 저녁 9시다.
“이 시기에 참 열심히 살았구나.”
지혁은 침대에 축 늘어졌다.
바쁘게 움직이다보니 딴 짓 할 여유가 전혀 없었다.
이런 생활을 8살부터 성인까지 쭉 해왔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테니스를 진심으로 좋아하지 않았다면 분명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벌써 10시가 다 됐네.”
옷만 갈아입고 잠시 쉬었는데 벌써 잘 시간이다.
지혁은 자기 전에 스트레칭을 한 번 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다.
잠자는 시간조차 스케줄로 짜여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키가 좀 더 컸으면 좋겠는데.”
저번 생에서는 178cm라는 테니스 선수치고 단신의 키를 가지고 있었다.
나름 노력을 했지만 그걸로는 부족했던 것이다.
“180cm만 넘겨도 정말 좋을텐데.”
대부분의 스포츠는 키가 클수록 유리하다.
테니스도 마찬가지여서 적어도 183cm는 넘는 게 좋았다.
실제로 지혁이 세계 대회를 나갔을 때 그의 키는 100명 중에 90등 밑이었다.
상위 랭킹의 선수들이 대부분 장신이었기 때문이다.
“다시 기회가 생겼으니 할 수 있는 건 전부 해봐야지.”
지혁은 운동, 식단, 수면 3박자를 최선의 상태로 맞추기로 마음먹었다.
이렇게 노력하면 키가 1cm라도 더 클 것이다.
“하암.”
갑자기 졸음이 확 몰려온다.
그 고생을 했으니 당연한 일이다.
내일 등교하기 전에 새벽 조깅을 하려면 지금 자야한다.
일찍 자두지 않으면 훈련 일정을 따라가기 힘들 것이다.
잠시 몸을 뒤척거리던 지혁은 이내 잠이 들었다.
***
일주일 후.
지혁이 금화고에 입학한지도 벌써 일주일이 되었다.
오늘은 테니스의 일반 부원들이 들어오는 날이다.
비록 선수반이 아닌 취미반이지만 새로운 부원이 들어온다는 소리에 기존 부원들의 눈은 초롱초롱해졌다.
“여자 부원들 좀 많이 왔으면 좋겠다.”
“그래. 내가 테니스 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여자애들도 반하지 않을까?”
“코트 자리만 부족해지잖아. 아무도 안 오는 게 나아.”
최재영, 김수민, 이신우가 순서대로 말했다.
각자의 성격을 잘 말해주는 대화다.
재영과 수민은 17살에 맞게 여자에 관심이 많아 보였고 이신우는 테니스 외에는 관심이 없어 보인다.
“저기 온다.”
동아리 활동 시간이 되자 1, 2학년 학생들이 걸어오는 게 보인다.
대부분 남학생들이다.
“남자 밖에 없잖아.”
“진짜네···. 왜 아무도 없지?”
재영과 수민은 이해가 안 되는 표정이었다.
하지만 이건 예정된 일이었다.
어떤 여학생이 햇볕이 쨍쨍 내려쬐는 코트에서 운동을 하고 싶겠나.
선수반 학생들의 시꺼먼 얼굴을 보면 왔다가도 도망갈 것이다.
“크크큭. 그러니까 기대하지 말랬잖아.”
“아, 선배 작년에도 이랬어요?”
“똑같지. 어차피 일주일에 한 번하는 동아리인데 별로 기대하지 마.”
재영과 수민은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적잖이 기대했던 모양이다.
잠시 후 1, 2학년이 테니스장에 모두 도착했다.
그러자 박철웅 감독과 최기석 코치가 간단하게 부 활동을 설명했다.
“그럼 다치지 않게 놀아라. 궁금한 거 있으면 선수반 애들이 도와줄 거야.”
“"네."”
감독의 설명이 끝나자 학생들은 친한 친구들끼리 코트로 흩어졌다.
비록 학교 비품인 라켓이 많이 낡았지만 그들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신입 부원들의 이동에 선수반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구석으로 밀려났다.
“저기 여학생도 있어.”
“어디?”
구석에서 취미반을 구경하고 있던 재영은 여학생 3명을 발견했다.
스무 명이 넘는 취미반 중에 여자는 저 애들이 전부였다.
“와. 예쁜 애도 있네.”
“말 걸어 볼까?”
재영과 수민은 여학생들한테 말을 걸어 보려고 했다.
하지만 용기가 나지 않는지 계속 망설였다.
지혁은 풋풋한 동기들의 모습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저런 마음으로 테니스를 하면 프로가 됐을 건데 말이야.’
학창시절 운동할 때 여자 친구가 있으면 무조건 마이너스다.
운동에 쏟아야하는 열정이 분산되기 때문이다.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하자.’
지혁은 학생들로 가득 차 있는 코트를 보고 탄력 밴드를 하나 챙겼다.
멍하니 있는 것 보다 조금이라도 단련을 하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