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부산 오픈 : 챌런저 대회
토요일이 되자 지혁은 훈련을 하기 위해 아침 일찍 아카데미로 이동했다.
원래 주말에도 테니스부에 출석하는 게 원칙이지만 얼마 전부터 자율 훈련을 허락받았기 때문이다.
모두 퓨처스 2회 우승이라는 큰 성과가 있어서다.
“따로 설득 할 필요가 없어서 다행이네.”
솔직히 박 감독과 최 코치가 꽤 열정적으로 코칭을 해줬지만 별로 도움이 되지 않았다.
지혁의 테니스에 대한 이해도가 두 사람보다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다.
기술 코칭을 기대할 수 없다면 피지컬 트레이닝이라도 도움을 받아야하지만 안타깝게도 그건 두 사람의 전문분야가 아니었다.
“비전문가의 손에 맡길 바엔 차라리 혼자 하는 게 훨씬 낫지.”
괜히 어설픈 코칭를 받으면 밸런스만 망가진다.
그럴 바엔 과거에 했던 훈련을 반복하는 게 더 낫다.
버스를 타고 아카데미에 도착한 지혁은 항상 훈련하는 장소로 이동했다.
“지혁아 훈련 하려고?”
“체력 단련 좀 하려고요. 방해되지 않게 할게요.”
실내 테니스장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레슨을 하고 있는 여자 코치가 말을 걸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행히 2개의 코트 중 하나가 비어 있었다.
레슨을 받고 있는 사람을 보니 아카데미에서 몇 번 본 여학생이 있었다.
아마 중학생 선수였던 걸로 기억한다.
“코치님 설마 저 사람이 그 이지혁이에요?”
“퓨처스 최연소 우승자를 말하는 거면 맞아.”
“며칠 전에 창원 퓨처스에서도 우승했다고 하던데 대체 테니스를 얼마나 잘 치는 거예요?”
“음··· 정확하게 말하기 힘든데. 아마 네가 이때까지 본 프로 선수들 중에 가장 잘 칠 걸?”
“실업팀 언니들 보다요?”
“아무래도 그렇겠지.”
지연은 자신의 우상인 실업팀 언니들보다 지혁이 테니스를 더 잘 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 받은 얼굴을 했다.
하지만 코치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현재 지혁의 세계 랭킹이 790위, 국내 랭킹 14위였지만 아직 2개의 대회밖에 나가지 않은 걸 고려하면 국내 선수 중에서 적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고 볼 수 있었다.
일반적인 프로 테니스 선수들은 1년에 20개가 넘는 대회에 출전한다.
일정을 빡빡하게 잡는 선수는 30개 가까이 참가할 때도 있다.
만약 지혁이 1년 동안 대회에 참가한다면 국내 랭킹 4~5위 정도는 아주 쉽게 달성할 것이다.
“······말도 안 돼.”
“응? 뭐라고?”
“으응. 아니에요.”
“싱겁기는. 그럼 다시 레슨 시작하자.”
코치의 말을 부정하던 지연은 이내 정신을 차렸다.
어차피 믿지 않는다고 해도 지혁이 퓨처스에서 우승한 결과는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다시 레슨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돈을 받고 하는 수업이다 보니 계속 농땡이를 피우면 나중에 말이 나올 수 있어서다.
지혁은 옆 코트에서 자신의 얘기를 하는 것도 모르고 열심히 준비 운동을 했다.
2시간 후.
“후우···.”
코어 훈련을 마친 지혁은 미리 깔아둔 매트에 누웠다.
전신의 힘을 다 써서 움직일 힘이 없었다.
그렇게 멍하니 눈을 감고 있을 때 갑자기 머리 위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지혁은 거친 호흡을 가다듬으며 거꾸로 보이는 얼굴의 정체를 파악했다.
‘아까 걔잖아?’
“전 구지연이예요. 저희 아카데미에서 가끔 마주 쳤었죠?”
지연은 지혁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해맑게 웃었다.
천진해 보이는 그 모습이 그늘이라고는 전혀 모를 것 같은 느낌이다.
“난 이지혁···.”
“오빠 이름은 알고 있어요. 요즘에 되게 유명하시잖아요?”
“······?”
“그런데 테니스를 그렇게 잘 친다면서요? 훈련할 상대도 없는 것 같은데 저랑 게임 한 번 해볼래요?”
지혁은 곰곰이 생각해보다가 지연의 제안을 승낙했다.
마침 스트로크 상대가 없어서 곤란하던 참이었다.
만족할 만한 훈련 상대는 못되겠지만 없는 것 보다는 나을 것이다.
“힘드신 것 같으니까 우리 딱 1세트만 해요.”
경기를 허락받은 지연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즐거워 보이는 얼굴에서 강한 자신감이 느껴진다.
그녀는 고등부 언니들도 참가하는 대회에서 우승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녹초가 된 지혁의 상태를 보고 지금이라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 언제 시작할까요? 30분 정도 쉬면되겠죠?”
“아니. 5분이면 충분해.”
지혁은 5분 동안 호흡을 가다듬고 지연과 코트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잠시 기다리자 반대편 코트에서 150km 후반의 서브가 날아왔다.
‘오랜만에 느린 서브를 받네.’
최근 퓨처스에서 200km가 넘는 공을 일상처럼 받다 보니 이런 공은 장난처럼 느껴진다.
여유롭게 바운드 지점으로 따라간 지혁은 포핸드로 공을 넘겼다.
물론 주 무기인 리버스 포핸드는 사용하진 않았다.
지연이 전력을 다한 탑스핀 스트로크를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아서였다.
어중간한 프로도 받지 못하는 공을 그녀가 받을 수 있을 리가 없다.
탕! 탕!
그렇게 두 사람의 스트로크가 제법 오래 이어졌다.
마치 서로 연습을 하는 것 같은 모습이다.
하지만 지연의 눈썹은 위로 치솟아 있었다.
‘어느 쪽으로 공을 치더라도 돌아오잖아.’
마치 벽에다 공을 치는 것 같았다.
어떤 방법을 써도 점수를 낼 수 없을 것 같은 느낌.
지연이 처음 겪어보는 감각이었다.
턱!
결국 지연은 압박감을 견디지 못하고 먼저 백핸드 에러를 저질렀다.
지혁이 꽤 사정을 봐주면서 공을 쳤지만 수준 차이가 너무 나서 어쩔 수 없었다.
20분 후.
경기의 승리는 당연히 지혁이 가져갔다.
스코어는 6-0이었다.
‘기본기가 괜찮은데? 조금만 더 가다듬으면 주니어 대회를 휩쓸겠어.’
지혁은 예상보다 뛰어난 지연의 실력에 놀랐다.
비록 경기에서 한 점도 따내지 못하고 패배했지만 그건 지혁이 규격 외라서 그렇다.
고등부 선수들을 기준으로 해도 그녀의 실력은 충분히 상위권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기본기가 엄청 탄탄한 게 어려서부터 테니스를 배운 티가 팍팍 났다.
“······.”
지연은 경기에서 패배하자 침울한 얼굴을 했다.
1살 차이의 선수에게 이렇게 처참하게 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혁은 방금 훈련을 마쳐서 녹초가 다 됐는데도 이런 결과가 나왔다.
스포츠만큼 재능의 영역이 큰 분야도 없다지만 지연도 항상 영재 소리를 들으며 테니스를 쳐왔다.
하지만 그녀가 경험한 지혁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천재라는 게 진짜 있구나···.”
지연은 천재라는 수식어가 이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다.
처음으로 재능의 벽을 마주한 그녀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실내 코트를 나갔다.
인사조차 하지 않고 나가는 게 머리가 많이 복잡해 보였다.
***
일주일 후.
“지혁 오빠!”
지혁은 귀에 익은 목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이제 막 아카데미에 도착한 것인지 커다란 가방을 등에 맨 구지연의 모습이 보였다.
벌써 5일 째다.
‘또 왔네.’
한 번 경기를 한 후로 이렇게 졸졸 따라다니게 되었다.
원래 레슨 시간이 달라서 아주 가끔씩 마주쳤는데 아카데미에 방문하는 시간을 바꿨는지 요즘 들어 매일 마주친다.
“또 체력 훈련하고 있었어요?”
지연은 바닥에 흩어져 있는 기구들을 보고 놀란 기색으로 말했다.
“오빠 진짜 부지런하네요. 힘들지 않아요?”
매번 볼 때마다 혼자 기본기 훈련을 하는 게 신기한 모양이다.
그녀의 경험상 재미없고 지루하기만 한 기초 훈련은 전담 트레이너가 없으면 정말 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제 익숙해져서 괜찮아.”
“으··· 전 기본기 훈련이 제일 싫어요. 그런데 훈련은 다 끝났어요?”
“어.”
“정말요? 그럼 저랑 게임 한 판 해요!”
지혁은 고개를 끄덕여 지연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그녀는 오늘도 같이 테니스를 칠 수 있다는 생각에 환하게 웃었다.
자기보다 훨씬 뛰어난 실력자와 게임을 하면 배울 점이 정말 많기 때문이다.
‘정말 테니스를 좋아하나보네.’
아무리 얻을 게 있다고 해도 비슷한 나이의 선수에게 계속 지는 것이 좋지 만은 않을 것이다.
지연도 테니스 선수인 이상 승부욕이라는 게 있을 것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5일 전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지혁을 만나러 왔다.
그걸 보면 그녀의 테니스에 대한 열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1시간 후.
지혁은 라켓을 가방에 넣어두고 마무리 운동을 했다.
지친 상태에서 아무것도 하기 귀찮았지만 뭉친 근육을 제때 풀어주지 않으면 근육통이 올 수 있다.
그의 옆에는 똑같은 자세로 스트레칭을 하는 지연이 있었다.
몰래 자세를 훔쳐보며 따라하는 게 꽤 귀여워 보인다.
“내일은 아카데미에 안 오는 날이죠?”
“음···? 어떻게 알았어?”
“저번 주에 안 왔잖아요.”
“맞아. 내일은 훈련을 쉬는 날이야.”
매일매일 고강도 훈련을 하는 게 피지컬 상승에 유리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근육은 운동할 때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휴식 할 때 자라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혁은 일주일에 두 번 씩 휴식 일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완전히 쉬는 건 아니고 기본적인 유산소 운동은 했지만 말이다.
“그럼 이틀 뒤에 보겠네요.”
지연은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이틀 동안 지혁을 보지 못하는 게 많이 아쉬운 것 같았다.
그 모습에 지혁은 웃음이 나왔다.
“나도 가끔은 쉬어야지. 너도 휴식일이 있을 거 아니야.”
“네. 저도 목요일, 일요일은 쉬어요.”
“나랑 비슷한 날이네?”
쉬는 날이 비슷하다는 말에 지연이 뭔가 기대하는 얼굴로 지혁을 쳐다봤다.
뭔가 간절히 원하는 눈빛이다.
하지만 지혁은 마지막 스트레칭 동작을 하고 말했다.
“읏차. 그럼 이틀 뒤에 보자.”
“네···.”
그렇게 마무리 운동을 마친 지혁은 왠지 기운 없어 보이는 지연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아카데미를 나왔다.
이제 집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