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부산 오픈 : 챌런저 대회
지혁은 편안하게 주말을 보내고 학교에 등교했다.
신발장을 열자 분홍색 편지봉투가 보였다.
이번이 벌써 3번째다.
‘이걸 좋아해야 하는 건가···.’
외모가 C-등급으로 상승하고 난 후 부터 금화고 여학생들에게 관심을 부쩍 받기 시작했다.
예전보다 친절해 졌다던가.
친하지도 않은데 말을 걸어오거나.
지혁은 과거와 전혀 다른 학교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일반적인 고등학생이라면 좋아해야 할 상황이지만 별로 달갑지 않다.
17살 밖에 안 되는 꼬맹이들의 관심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지혁은 편지봉투를 주머니에 넣었다.
‘이번엔 무슨 말로 거절해야할까.’
고백을 받아 본 적이 없어서 이럴 때마다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모르겠다.
앞에 있던 두 번의 고백은 평소처럼 냉정히 말하다가 결국 울리고 말았다.
그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자 벌써부터 머리가 아팠다.
‘여자 친구라도 만들어야 하나.’
여자 친구가 생기면 적어도 고백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내 지혁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더 귀찮을 것 같네.’
드르륵-
지혁은 교실의 뒷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친근한 목소리가 그를 반겼다.
같은 반의 이소영이다.
“지혁아, 좋은 아침.”
“어. 안녕.”
“주말 잘 보냈어?”
“똑같지 뭐.”
그렇게 잠깐 소영과 얘기를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훔쳐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휙 돌리자 후다닥 소리가 들리며 여학생들이 딴청을 피우는 게 보였다.
‘이게 잘생긴 남자의 삶이구나···.’
남자만 예쁜 여자를 훔쳐보는 줄 알았는데 그건 편견이었나 보다.
“이번 주 토요일에 큰 대회에 출전한다고 했지?”
“맞아. 누구한테 들었어?”
“테니스 동아리 얘들이 말해주던데. 나도 응원하러 가도 돼?”
“부산에서 열리는 대회인데? 그리고 테니스를 모르면 별로 재미없을 거야.”
보통 경기 시간이 1시간은 가볍게 넘어가기 때문에 테니스에 관심이 없으면 많이 지루할 것이다.
“나도 이제 경기 규칙 정도는 알아. 인터넷으로 찾아보면 다 나오는 걸. 그런데 대회가 부산에서 열린다고? 그럼 너무 멀어서 못가겠네···.”
소영은 아쉬운 표정으로 말했다.
아무리 주말이라지만 서울에 사는 학생이 부산에서 열리는 대회를 보러오는 건 힘들 것이다.
대중교통을 사용해서 오는 이상 분명히 숙박을 해야 하는데 미성년자가 그 일정을 소화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있다.
“혹시 서울에서 대회는 없어?”
“음···. 아마 10월에 2개 정도 있을 거야.”
“10월? 그럼 그때는 꼭 응원하러 갈게.”
“그래. 말만이라도 고맙네.”
“아이 참. 그때는 진짜 갈 거야.”
지혁은 소영의 재잘대는 목소리를 들으며 아침 조회시간을 보내다가 교실을 나갔다.
그렇게 테니스장에 도착하자 부원들이 반갑게 맞아 줬다.
퓨처스를 우승하기 전과 다른 대우였다.
역사가 깊은 금화고 테니스부에서도 지혁처럼 역대급 유망주를 가져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다.
2달이 넘게 같이 훈련을 했음에도 부원들은 질리지도 않는지 테니스 자세나 훈련 방법에 대해 물어왔다.
그렇게 한동안 부원들과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구석에서 박 감독이 지혁에게 손짓을 했다.
원래 훈련 중에 잘 부르지 않는데 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지혁아, 아직 스폰서는 결정 못했니?”
“네. 아버지하고 얘기를 해봤는데 조건이 만족스럽지 않아서요.”
“응? 뭐가 마음에 안 드는데? 분명 기업 측에서 상당히 배려를 해줬는데.”
“제안들이 전부 실업팀에 입단해야 하고 국내 대회 참가가 필수적으로 붙어있더라고요. ATP 포인트도 없는 구색 맞추기 경기에 나가기 싫어요.”
“설마 국내 대회라는 게 연맹전이나 실업 마스터즈를 말하는 거냐?”
“맞아요.”
“허···.”
박 감독은 이해가 가지 않는 표정이다.
다른 선수들은 실업팀에 들어가지 못해서 안달이다.
대학 선수까지 활동하고도 높은 문턱을 넘지 못해서 일반 코치로 진로를 정하는 경우도 많다.
한국에서 약 50명밖에 없는 실업선수가 될 기회를 거부하다니.
그의 관점으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결정이다.
“지혁아, 잘 생각해봐라 한국에서 선수 생활을 하려면 실업팀에 입단해야 돼. 네가 말한 조건을 제시하는 기업은 없을 거라고.”
“제가 이번 부산 오픈에서 우승한다고 해도요?”
“······응?”
부산 오픈에서 우승한다는 지혁의 말에 박 감독은 어이없는 얼굴을 했다.
“······그건 불가능해. 네가 아직 경험이 없어서 그렇지 챌린저 대회는 퓨처스랑 차원이 달라.”
박 감독의 말대로 챌린저급 대회는 랭킹 100등~300위의 선수들이 무더기로 참가한다.
본선에 참가한 선수들 한 명 한 명이 퓨처스 우승자들보다 실력이 뛰어나다는 것이다.
“그래도 자신 있어요. 그리고 만약 우승하지 못해도 손해는 없는 거잖아요. 스폰서 제안을 2주만 딜레이 시키면 돼요.”
“······알았다.”
결국 박 감독은 지혁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당사자가 싫다고 하는데 후원을 억지로 받게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혁의 아버지랑 모르는 사이도 아닌데 마냥 강요할 수도 없다.
‘성민이랑 직접 이야기를 해봐야겠구나.’
박 감독은 지혁이 아직 세상물정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결국 계약서에 사인을 하는 건 보호자니 성민을 설득하면 될 것이다.
***
5월 9일, 토요일.
지혁은 부산 오픈이 열린 금정체육공원 4번 테니스장에서 경기를 준비하고 있었다.
상대 선수는 대학팀 소속의 김재영이었다.
“많이 긴장했나보네.”
지혁은 코트 반대편에서 굳어있는 재영을 보고 웃음이 나왔다.
대진표를 보고 미리 조사해본 결과.
상대는 ATP 포인트가 1점밖에 없는 선수였다.
말 그대로 최소한의 참가 자격만 가진 선수라는 것이다.
나이와 랭킹을 보면 아마 이번이 챌린저 대회 첫 출전일 확률이 높다.
“예선전은 금방 통과하겠네.”
2, 3라운드에서 만나는 선수들의 랭킹도 낮은 걸 생각하면 예선전은 별로 어렵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게 김재영과 연습 랠리를 조금 주고받고 있자 심판이 경기 시작을 알렸다.
[예선전 1라운드, 퍼스트 세트. 이지혁 서브.]
탕!!
[피트티 러브.]
처음부터 강력한 플랫서브를 날린 지혁은 에이스로 경기를 시작했다.
상대편 선수는 많이 긴장한 탓인지 받을 수 있는 공임에도 반응하지 못했다.
[게임 이지혁. 1-0]
[게임 이지혁······.]
[게임 세트! 매치 이지혁! 6-0, 6-0.]
결국 지혁의 예상대로 김재영은 허무하게 경기에서 패배했다.
애초에 정신을 차려도 승산이 없었는데 긴장한 상태로 경기에 임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허망한 얼굴로 코트를 벗어나는 모습이 아마 한동안 슬럼프를 겪을 것 같았다.
***
지혁은 3일에 걸쳐 예선전을 모두 통과했다.
예상했던 대로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쯧. 1라운드부터 290위라니 역시 본선은 만만하지 않네.”
본선 대진표를 보던 지혁은 혀를 찼다.
출전자들의 랭킹이 퓨처스보다 월등히 높았기 때문이다.
지혁의 본선 첫 상대는 슬로바키아 국적의 카마일 라코였다.
‘관중들이 꽤 많네.’
확실히 대회의 등급이 높아지니 관중들의 숫자도 많이 늘어났다.
대충 봐도 80명은 넘어 보인다.
메인 코트에서 열리는 경기도 아닌데 상당히 많은 숫자다.
“이지혁 힘내라!”
“잘 생겼다!”
그때 관중석에서 응원하는 소리가 들렸다.
지혁은 응원이 들리는 쪽으로 몸을 돌려 손을 흔들었다.
얼마 되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알아봐준다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서브 이지혁.]
그렇게 경기는 지혁의 서비스 게임으로 시작했다.
“하앗!”
탕!
빠르게 날아간 공은 T존 근처에 떨어졌지만 카마일은 안정적인 백핸드로 받아냈다.
‘역시 랭킹 300위 안의 선수들한테는 서브가 전혀 안 통하네.’
지혁은 자신의 서브가 너무 쉽게 리턴 되자 인상을 찌푸렸다.
분명 코스는 괜찮았다.
하지만 170km라는 느린 속도가 계속 발목을 잡는다.
탕!!
지혁은 빨랫줄처럼 날아오는 스트로크를 빠르게 움직여 받아쳤다.
‘힘이 진짜 쌔네.’
가장 위력이 강한 포핸드로 받아쳤는데도 공이 묵직하게 느껴진다.
상대 선수의 근력이 얼마나 강한지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서브도 더럽게 빠르겠구나.’
아직 서브를 보지 못했지만 체구와 스트로크 속도를 보면 어느 정도 예상이 된다.
분명 190km이상의 강서브를 칠 수 있을 것이다.
‘서비스 게임을 확실히 지켜야겠네.’
지혁은 대구 퓨처스 결승전에서 루카스 월리엄을 상대했던 작전을 사용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중간한 실력이면 플랜 없이 경기를 하겠지만 스트로크를 몇 번 받아보니 얕잡아볼 실력이 아닌 것 같다.
“흐읍!”
탕!
지혁의 라켓에 맞은 공이 급격한 포물선을 그리며 상대의 베이스라인 끝으로 떨어졌다.
“억!”
[피프틴 러브.]
카마일은 보통의 탑스핀 스트로크와 다르게 얼굴까지 튀어 오르는 공에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 났다.
그리고 당황한 얼굴로 뭐라 중얼중얼 거렸는데 아마 욕인 듯하다.
지혁은 상대가 진정할 시간을 주지 않고 곧바로 서비스 게임을 빠르게 진행했다.
[게임 이지혁. 3-1.]
받아보지 못한 생소한 구질에 카마일은 허무하게 첫 번째 서비스를 브레이크 당했다.
하지만 두 번째 서비스부터는 조금 적응을 한 것인지 게임을 아슬아슬하게 지켜냈다.
‘브레이크를 당한 시점에서 이미 끝났어.’
지혁은 게임을 아깝게 내줬지만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제 자신의 서비스만 신경 쓰면 됐기 때문이다.
탕!
[세트 이지혁. 6-3.]
결국 플랜대로 첫 번째 세트는 지혁이 가져갔다.
왠지 카마일에게서 날카로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신경 쓰지 않고 무시했다.
[세컨드 세트. 서브 카마일 라코.]
120초의 휴식이 끝나자 다시 경기가 시작됐다.
카마일은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지 처음부터 전력을 다한 플랫서브를 쳤다.
쾅!!
[폴트.]
쾅!!
[더블 폴트. 러브 피프티.]
하지만 서브의 빠른 속도와는 다르게 컨트롤은 부족한 건지 카마일은 연달아 폴트를 저질렀다.
‘흥분했구나.’
이럴 때는 아주 약간만 밀어줘도 알아서 자멸하는 경우가 많다.
지혁은 마지막 쐐기를 박기 위해 경기 스타일을 공격적으로 바꾸었다.
저렇게 흔들리고 있을 때가 점수를 낼 기회였기 때문이다.
[게임 세트. 매치 이지혁. 6-3, 6-2]
퍽!
결국 경기가 지혁의 승리 돌아가자 카마일은 분을 참지 못하겠는지 라켓을 바닥에 내려쳤다.
한참 동안 코트 위에서 씩씩 거리던 그는 진행 요원들이 다가오자 그제야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경기장을 떠났다.
‘성질 한 번 더럽네.’
경기가 마음에 안 든다고 저렇게 행동하는 건 상대 선수에 대한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관중들의 생각도 비슷한 것인지 카마일을 욕하는 목소리가 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