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도약
등교를 시작하고 일주일 후. 금화 고등학교는 1학기 기말고사 기간에 들어갔다.
그러자 지혁에게 열광하던 학생들의 반응도 잠잠해졌다.
각자 시험을 준비하느라 바빠졌기 때문이다.
보통의 학생에게 시험은 짜증나고 힘든 일이다.
미래와 대학을 생각하면 내신을 잘 받아야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없는 지혁은 평소보다 빨리 마칠 수 있어서 시험을 치는 날이 오히려 좋았다.
“모처럼 일찍 마쳤으니 새로운 훈련장이나 가볼까.”
원래 테니스 특기생들은 시험 기간에도 학교에 남아서 훈련을 해야 한다.
방학에도 등교를 할 정도였으니 고작 기말고사 정도로 자유 시간을 줄 리가 없는 것이다.
하지만 특별대우를 받고 있던 지혁은 그런 제약에서 완전히 자유로웠다.
박 감독과 최 코치가 그를 지도하는데 반쯤 손을 놓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고등학교 감독이 프로 대회에서도 날아다니는 국내 정상급 선수에게 알맞은 코칭을 할 수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박 감독은 괜히 능력도 없이 의욕을 가지는 것보다 이렇게 풀어주는 게 낫다고 생각해 지혁에게는 따로 터치를 하지 않았다.
“오늘은 어떤 샷을 연습할까.”
시험을 모두 치른 지혁은 교문을 지나치면서 즐거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오늘은 웨이트 트레이닝을 쉬는 날이라 트레이너 대신 코치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는 택시를 타고 목적지로 이동했다.
거리가 멀지 않았던 만큼 시간은 그리 많이 소요되지 않았다.
끼익-
지혁이 멈춰선 택시에서 내리자 거대한 부지에 지어져있는 건물이 보였다.
S증권 실업팀의 훈련장이었다.
원래 이 장소는 실업팀 소속의 선수가 아니면 사용할 수 없는 공간이다.
하지만 S증권의 유일한 후원 계약자인 지혁은 얼마 전 출입을 허락 받을 수 있었다.
이번 윔블던 주니어에서 우승하고 잠재력을 인정받아 필요한 지원은 웬만하면 모두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시 봐도 시설이 정말 좋단 말이야.”
지혁은 훈련장 입구에서 세련되어 보이는 건물을 보고 감탄했다.
그도 서울에서 나름 이름 있는 아카데미에 다녔지만 이곳과 비교하면 부끄러울 수준이다.
확실히 국내에서 제일 큰 대기업이라 그런지 가장 중요한 훈련장에 투자를 많이 하는 것 같았다.
“이런 곳이 2014년에 없어진다니···.”
원래의 역사대로라면 S증권 실업팀은 2014년 2월에 해체 된다.
이유는 소속 실업팀 선수들의 성적 부진이었다.
“하긴 심하긴 했지.”
한국에서 스포츠팀을 만드는 것은 홍보보다 사회 환원의 목적이 크다.
S증권도 처음에는 테니스 실업팀을 그런 목적으로 투자를 했었다.
하지만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투자한 금액에 비해 제대로 된 투어 선수를 한 명도 배출하지 못 하자 결국에는 그들도 버티지 못하고 실업팀을 폐쇄했다.
테니스 실업팀에서 아무런 긍적적인 효과도 기대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S증권의 행보가 너무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지혁은 실업팀 해체의 원인이 기업보다 선수들의 실책이 더 크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테니스를 가장 잘하는 선수들을 1억에 가까운 연봉을 주면서 모아놨는데 그렇게 오랜 기간 성과가 없다는 것은 투어에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훈련장 부지 안으로 들어가자 입구에서 손 코치가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택시를 타기 전에 미리 연락을 해두어서 마중을 나온 것 같았다.
“안녕하세요. 코치님.”
“그래. 어서 와라.”
탕! 탕!
“그런데 지금 코트를 사용하는 사람은 누구에요? 이번 주에 실업팀 대회가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
지혁은 실내 코트가 있는 건물에서 경기를 하는 소리가 들리자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실업팀 선수라면 필수적으로 참가해야하는 대회가 이번 주에 있어서 며칠 간 훈련장에서 다른 선수들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로 입단한 고졸 선수야.”
“이 시기에요? ATP 랭킹은 몇 위인데요?”
“얼마 전에 753위를 찍었어. 권동현이라고 제법 유명한 선수야.”
753위면 실업팀에 소속 된 선수 중에서도 상위 20% 안에 드는 순위다.
‘권동현이라면 내가 아는 선수인데?’
지혁이 기억하기로 동현은 5~6년 뒤에 전성기를 맞이해서 한국 테니스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선수다.
나이대가 비슷하고 랭킹도 150~200위 근처여서 잊지 않고 있었다.
과거에 국내 대회에서 이 선수와 정말 많이 대결하기도 했다.
준결승에 진출하는 4명의 선수들은 항상 비슷비슷했기 때문이다.
“경기하는 거 잠깐 구경해도 되죠?”
“안에 들어가면 다 보이는데 상관없지.”
지혁은 손 코치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막 실업팀에 입단한 동현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해 보고 싶었다.
탕! 탕!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코트에서는 며칠 전에 인사를 했던 실업팀 코치와 동현이 랠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법인데?’
과연 동현은 가장 연봉이 높은 S증권 실업팀에 어린 나이로 입단할만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아직 전성기를 맞이하지도 않았지만 피지컬, 테크닉 모두 남자 실업팀 선수들 중 발군이다.
그렇게 십 분 정도 랠리를 구경하던 지혁은 이내 몸을 돌렸다.
그 정도 시간이면 실력을 파악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계속 훈련을 하는 이상 앞으로도 계속 마주칠 텐데 굳이 집요하게 탐색할 필요가 없다.
게다가 출전하는 대회의 급도 다르니 당분간은 경기 상대로 마주치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이제 됐어요. 훈련하러 가죠.”
지혁은 빈 코트에 짐을 풀고 손 코치와 훈련을 시작했다.
‘확실히 코치가 있으니까 편하네.’
스트로크를 연습하려면 테니스를 전문적으로 배운 사람이 필요하다.
아마추어의 느릿한 공으로는 전혀 훈련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코치가 없을 때는 매번 도와줄 사람을 찾는데 적잖은 수고를 들였었다.
물론 이제는 걱정할 필요 없는 일이 됐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 타임이 지나고 지혁은 코트 옆에 있는 의자에 앉아 휴식을 가졌다.
“난 이번에 실업팀에 들어온 권동현이야. 이거 먹을래?”
“···?”
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쉬고 있던 지혁은 동현이 건네주는 스포츠 음료를 받았다.
“윔블던 잘 봤어. 너 정말 테니스 잘 치더라.”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시간 남으면 나랑 경기 한 번 해보지 않을래? 마침 연습 상대도 없는 것 같은데.”
동현은 웃는 얼굴을 하며 경기를 제안했다.
자신감이 가득 찬 얼굴을 보니 자신이 쉽게 질 거라고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저 나이 때는 나도 하늘 높을 줄 몰랐지.’
지혁은 상대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덤벼드는 동현의 모습이 예전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냉정하게 전력을 비교해보면 처음부터 상대가 안 되는 싸움이다.
아마 테니스를 모르는 사람도 승자를 쉽게 예측할 수 있겠지.
하지만 지혁은 오랜만에 옛날 기억을 되살리고 싶어서 경기 요청을 수락했다.
“얼마든지요.”
“정말? 그럼 코치님한테 말하고 올게 여기서 잠깐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대결이 성사되자 두 사람은 3세트 경기를 하기로 합의했다.
최대한 프로 대회와 비슷한 조건을 적용하기로 한 것이다.
“서브권은 어떻게 할까?”
“먼저 하세요.”
잠시 후 경기는 동현의 서비스게임으로 시작했다.
탕!!
‘역시 피지컬이 좋아서 서브가 좋네.”
강서브가 T존 근처로 떨어졌지만 지혁은 편안한 표정으로 리턴했다.
속도가 빨라도 코스가 너무 뻔했기 때문이다.
지혁은 본 실력을 발휘하면 단숨에 경기를 끝내버릴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 하지 않았다.
현역 프로 선수에게 최근 변화한 테니스 기술을 시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백핸드, 트릭샷을 시험해보기 딱 좋은 상대야.’
이미 일주일 동안 훈련을 하면서 대강의 위력은 파악하고 있었지만 실전만큼 더 정확한 시험대는 없었다.
지혁은 가장 위력적인 무기인 리버스 포핸드를 봉인하고 백핸드만으로 경기를 이어나갔다.
이 정도 핸디캡을 가지니 경기는 제법 비등비등하게 흘러갔다.
1-1, 1-2, 1-3, 2-4.
그래도 기량의 차이는 어쩔 수 없는지 점수는 지혁이 점점 더 우세해졌다.
‘백핸드는 실전에서도 아무런 문제가 없네. 안정성과 속도 모두 예전과 비교해서 훨씬 나아졌어.’
지혁은 만족할 만큼 백핸드의 정보를 얻어내자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시험해보지 못한 샷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번엔 트릭샷이다.’
트릭샷을 치기로 결정하자 윔블던 결승전에서 알렉산더에게 시도했던 것 보다 훨씬 쉽게 기회를 잡을 수 있었다.
불과 몇 주 전이지만 그때보다 신체 능력과 숙련도가 크게 상승한 게 그 이유였다.
‘받아치기 딱 좋은 속도네.’
잠시 후 왼쪽 베이스라인으로 공이 떨어지자 지혁은 라켓을 등 뒤로 돌려서 공을 쳤다.
그 기괴한 공격에 허를 찔리자 동현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나라도 이런 샷에 당하면 어이가 없었겠지.’
차라리 강력한 스트로크에 실점을 했다면 충격이 크지 않았을 것이다.
운이나 피지컬 차이라 생각하면 되니까.
하지만 이런 묘기 같은 샷은 상대 선수가 나랑 격이 다른 선수라고 생각하기 쉬웠다.
재능을 타고나지 않으면 이런 공격은 실전에서 시도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현이 트릭샷을 기점으로 실시간으로 자신감을 급격히 잃어가는 모습을 보였지만 지혁은 경기의 밸런스를 조절해가면서 끝까지 경기를 이끌어 나갔다.
이 시기에 이 정도 수준의 랠리 상대를 구하기 쉽지 않아서다.
이번 경기가 끝나고 또 상대를 해줄지도 모르고 말이다.
‘아마 높은 확률로 피해다니 게 되겠지.’
약 1시간 후 테니스공이 바닥에 튕기는 소리와 함께 경기가 끝이 났다.
경기의 결과는 모두가 예상했던 것처럼 지혁의 2-0 승리였다.
“······.”
코트 위에 서 있는 동현은 처음에 자신감이 가득 차 있던 모습은 전부 사라지고 충격 받은 얼굴만 남아있었다.
이때까지 해왔던 노력이 부정되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질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만 이 정도로 차이가 날 줄은 몰랐을 것이다.
게다가 지혁이 주무기인 리버스 포핸드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생각하면 방금 경기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다.
진짜 실력은 지금보다 훨씬 더 강력하다는 뜻이다.
앞으로 국내에서 테니스를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수많은 경기에서 지혁과 마주치게 될 것이다.
아시안 게임, 데이비스 컵, 올림픽, 한국 선수권 대회, 전국 체전 등 테니스 선수가 필수적으로 참가해야하는 대회가 아주 많았기 때문이다.
그 생각에 미치자 동혁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동현아, 아직 훈련이 남았으니까 이쪽으로 와.”
경기가 끝나고 동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코트 옆에서 구경하고 있던 실업팀의 코치가 동현을 호출했다.
혹시라도 모를 불상사를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지혁의 가치가 동혁과 비교할 수 없이 큰 만큼 괜히 다치기라도 하면 실업팀에 피바람이 불어 닥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코치는 그런 일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훈련을 명목으로 급하게 두 사람을 떨어트려 놨다.